빌고 비나이다 / 어머님의 기도
1928년 4월 20일 아버지 어머니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두 부모님이 정혼하신 대로 결혼하셨다.
양가의 격(格)이 달랐다. 아버님은 가난한 집 둘째 아들이고 어머님은 부자 집 막내 딸이셨다.
그래서 어머님은 시집 오셔서 그간 해보지 않은 온갖 일 하셨고, 19세부터 아기를 6 남매나 낳으셨는데
그 중 4 남매는 두 살을 넘기지 못하고 잃으셨다.
먼 훗날 어머님이 7년 간 치매로 고생하실 때 잠깐 정신이 돌아오시면,
내 형제 4 남매 보낼 때 내 정신 다 나가서 그러신다 하셨다.
가난을 이기려고 고생하신 이야기는 단 한번도 말씀이 없었지만, 자식을 잃은 이야기는 입버릇처럼
도 뇌이셨다.
그만 큼 어머니에게는 큰 아픔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남은 두 남매 누나와 나를 잃지 않으시기 위하여 어머님이 쏟으신 지성과 기도를 잊을 수 없어
이 글을 남기려 한다.
첫 번째로 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님은 나를 수양 어머니(점쟁이)에게 맡긴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려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때였고 쌀 한 말만 있어도 1년을 버틴다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니 먹는 것으로 쌀밥은 참으로 먹기 어려운 때였는데 그렇게 귀한 쌀밥을 지으실 때 (쌀과 다른 곡식
의 비율이 10:90 이었을 것이다) 쌀 한 줌씩을 따로 떼어 옹기 그릇에 담아두셨다.
그렇게 모은 쌀 하고 아끼고 아낀 쌀 한 말이 되면 어머님은 나를 집에서 20 리나 되는 곳까지 데리고 가
수양 어머니가 꾸미신 법당(法堂)에 엎드려 절을 하게 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님도 ‘부처 님, 제 자식을
무탈하게 자라게 해주십시오.’ 하시면서 수십 번 절을 하고 손을 비비시며 기도하셨다.
그런 수양 어머니와의 관계는 내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어졌고 대학에 입학 서울로 올라오면서
멈췄다. 즉 나의 어린 삶은 부처님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또한 어머님은 마당 귀퉁이에 있는
장독대 옆에 정화 수를 올리는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북두칠성 님께 빌고 비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무리 추워도 목욕 재개하시고 지성으로 비시던 나의 어머니. 칠성 님도 감동하셔
나를 지켜주신 것 같다. 그럴 때 일로 녹아내린 어머님의 거친 손이 비는 소리에 사각사각 하던 소리는
지금도 나의 귓전에 맴돌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물가에 가지 말라, 높은 나무에 오르지 마라는 말씀에 쫓아 나는 수영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들이 하도 놀려서 학교에서 하교 하는 중에 대추멀이라는 곳에 있는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다 미숙한 탓으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정신은 있는데 밖으로 나오려 애쓰는 데도, 나는 더 깊은
곳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그때 황 호택 이란 친구가 와서 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바람에 살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하지도 안 했고 그로 인해 나는 영영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다. 1953년 내가 집에서 80 리나 되는 곳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 이다.
6.25 전쟁이 진행되던 때인데 육군에서 후생 사업(厚生 事業) 한다고 하루에 한 번 지 엠 씨(GMC) 군용
차량을 지원하여 시골인 나의 마을 근처까지 다닌 적이 있다. 시간이 맞지 않아 평일에는 탈 수가 없는데
그날은 우연히 시간이 맞아 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차량에는 시골 어른들이 군산에서 여러 물건들
을 사서 귀가하던 중이었다.
모처럼 차를 타고 가는 즐거움도 잠시 걸어서 가면 세 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가는
도중에 구암동 쯤 왔을 때 차가 발랑 뒤집혀 보리밭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수라장이 되었고 많은 사람
이 다치기도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보리밭에 오뚝 서 있지 않은가? 삽시간에 이루어진 일이었고
결코 내가 어떤 대처를 한 일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로 정녕 어머님의 기도 덕분이었다고 밖에 달리 생각이 들지 않고 기적적인 천운(天運)
이었다고 생각된다.
네 번째 이야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중학교 3 년 간 하루에 왕복 80 리를 다닐 때다.
시간을 치면 5.6시간이 걸리는 고된 삶이었다. 버스는 하루에 한 번 왕복 했지만 주민을 상대하는 시간에
다녔기 때문에 학생인 나는 이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어쩌다 지나가는 트럭이라도 얻어 타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었다. 그래서 꾀를 내어 군산 공설운동장을 차가 돌 때 얼른 올라 타면 태워다 주는 기사 분도
있었지만 차를 세우고 내리게 하는 기사 분도 있었다. 그날은 다행히 기사 분이 허락하셔 차를 타고 거의
동네까지 올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좋아했는데, 창오초등학교 앞을 내려오는 길이 20도 정도 되는 내리
막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바퀴가 빠져 50 여 미터 날아가면서 차는 급정거를 하였다. 내리막 길에 앞
바퀴가 날아갔는데 차가 멈추며 무사했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기적이다. 그렇게 또 한 목숨이 살아났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칠성 님의 은덕이 아닌가 싶다.
다섯 번째 이야기다. 그날도 학교를 가려고 덜컥 다리라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오는 차량이
GPS를 통해 어디쯤 왔는가 알려주는 시대이지만 당시는 어디 꿈이나 꿀 일인가!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데
창오초등학교 쯤 오는 큰 트럭이 좌우로 흔들리기에 이상하다 싶어 눈 여겨보다가 피하는 순간 차가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지나가지 않는가? 만약 피하지 안 했으면 그 큰 차에 깔렸을 뻔했다. 그래서 지나간 차를
뒤쫓아 살피고 있는데 200 여 미터 가더니 논으로 곤두박질하고 쓰러졌다. 졸음 운전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적을 무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머님의 기도였다.
여섯 번째 이야기다. 1959년 무작정 상경하여 천운으로 가정교사 자리를 얻게 되어 꿈에도 그리던 대학을
다닐 때의 이야기다.
3학년 때였다. 이미 4년의 가정교사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되었다. 오죽하면 심리학 시험에서
‘’ Frustration’에 대해 논하라는 시험지에 ‘잠이나 실컷 자보고 싶다’고 썼겠는가. 그만큼 지쳐가고 있었다.
토요일 집에 와서 전화를 하다 쿵 하고 쓰러져서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주인 할머님이 오셔서 나를 깨우시며 집안이 소란이 벌어졌다.
이웃 방에 계신 할머님이쿵 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오셨다는 것이었다. 할머님 아니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느님의 도움이었나? 부처님의 은덕이었나? 칠성 님이 도우셨나? 어머님의 기도였다.
일곱 번째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 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이야기이다. 내가 군대를 마치고 귀가해서
1년을 쉴 때의 이야기다.
그때 내 나이 29세였다. 초등학교에 늦게 들어가 중학, 대학 입학 때 가정 형편으로 1 년씩 쉬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해 4년이나 늦었을 때였다. 1967년 1월 15일 제대를 하였으니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집 옆에 있는 대 밭에서 대나무 하나 베다가 자구로 잘못하여 발을 다쳤다. 피가 흘러 하얀 고무신에
피가 고인 것을 보고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때 다른 일로 부모님께 큰 죄를 짓고 있을 때였기에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때였다.
대소동이 났다. 29세의 나이에 처 자식마저 거느린 내가 죽었다가 깨어났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
셨을까?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이 그간 참고 참으셨던 울분이 터지신 날이다.
깨어난 자식을 보고 ‘에라 이놈의 새끼 뒈져버려라’ 하시며 벌벌 떠시었다.
어떻게 키워온 자식인데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시던 아들인데 이렇게 부모님에게 천추의 한을 안기는
자식이 되니 그간 참아온 한이 한꺼번에 뱉으신 말씀이셨다.
하나 남았던 나는 온갖 시름 다 잊으시고 키웠던 자식이었는데 결국 부모님께 그 많은 불효만 안겨드린
불효자다.
주자(朱子) 후회 10 훈에 이런 말이 있다.
“불효부모 사 후회(不孝父母 死後悔)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
영국 시인 랑 구랄 은 또 이렇게 말했다.
“천칭의 한쪽 편에 세계를 실어 놓고
다른 편에 나의 어머니를 실어 놓는다면
세계의 편이 훨씬 가벼울 것이다“
나를 낳으시고 길러주신 두 분의 부모님!
아버님은 1980년에 아버님 7년 치매 고생하실 때 지극 정성 헌신하시며 돌봐 드린 어머니를 잊지 못하여
정신이 하나도 없으셨던 아버지가 어머님 생일 다음날 소천 하셨고, 나의 어머님은 아침도 같이 드셨는데
하나밖에 없는 손자 결혼 소식을 듣고 살아 생전 그처럼 잃은 자식 생각에 마음 아파 하시더니 58년 전
막내 아들 경영(景永)이가 떠난 12월 6일에 아들 임종 받으시더니 2004년에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은 어머님 칠성 님께 가까이 가셨으니 이웃 집 드나들 듯 칠성 님께 가셔서 내 아들 오늘까지 살게 도와
주시니 감사하다고 손잡으시고 백 배 천 배 조아리시는 것 같다.
어머님 아버님 참으로 보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모두가 "풍수지탄(風樹之嘆)아옵니다.
끝으로 내가 평상시 어머님이 그리울 때면 한 번씩 외워보는 시 한 수를 여기 옮기며 마치려 한다.
“엄마도 사람이다”
<시민 공모 작에 당선된 강 윤영 시인의 글입니다>
먹다 남은 밥 엄마 앞으로 밀지 마라.
엄마도 따뜻한 밥 먹을 자격 있다.
맛있는 부분 다 도려내고 남은 사과 속 엄마 것 아니다.
엄마도 예쁘게 깎은 사과 한 쪽이 더 맛있다.
유행하는 예쁜 옷 화려한 액세서리
우리 엄마 취향 아니라고 생각 마라.
엄마도 여자다.
자식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엄마라면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 마라
엄마도 누군가 의 금쪽 같은 자식이다.
온갖 짜증 세상 모든 화
다 받아줄 거라고 착각하지 마라.
엄마도 사람이다.
오늘 못해드린 거
내일 해드리면 된다고 위안 하지 마라.
엄마의 남은 세월은 나보다 짧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