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을 꿇다
김 상 립
내가 2021년 7월부터 항암제를 먹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잃은 게 입맛이다. 평소 좋아하는 음식도 소 닭 보듯 하게 되었고, 몸에 좋다는 것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어도 모래알 씹는 격이다.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드니 아예 그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먹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큰 비중인데? 사는 의미 중 큰거 하나를 잃은 것 같다. 못 먹으니 대신 배라도 고파 주면 좋으련만, 도통 배고픈 증상도 없으니 딱한 일이었다.
그런데 작년(2022년) 늦가을부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보통 새벽 네 시면 잠을 깨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 느닷없는 허기가 일어난다. 그렇다고 이른 새벽에 뭘 챙겨 먹을 수도 없고 난감하여 물 한 잔으로 달래보지만, 허기는 진정되지 않고 되려 잠만 달아난다. 하 답답하여 액체로 된 환자용 간식을 마시며 크래커 몇 조각을 입에 넣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허기는 마치 바닥 모를 깊은 동굴에서 솟아오르는 어스스한 기운처럼 내 몸을 감싼다. 나는 꾹 참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 책을 보거나, 마루에서 얼쩡거린다. 날이 밝아지면 얼른 식사 준비하고 먹으러 달려든다. 그럴 때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허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밥을 보아도 식욕은 저만치 가있다.
마치 내 몸 구석구석에 허기란 놈들이 꽁꽁 숨어있다가 새벽만 되면 뱀처럼 섬찟한 혀를 날름대며 나를 괴롭히니 진짜 환장할 노릇이다. 매일같이 나를 공격하는 이런 허기가 먹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보면, 생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쪽과 더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고령자인 내 처지에서 보면 달리 출세 길을 꿈꾸어 몸살을 내거나, 돈을 더 벌지 못해 안달할 입장은 아니다. 또 뒤늦게 명예를 얻지 못해 서운하다거나 숨겨진 부채나 여자문제로 초조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머리에 떠 오르는 미진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재화를 다루는 능력도 신통찮고 성격마저 불 같은 내가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잘 지내온 것을 보면, 내가 세상을 향해 베푼 것보다는 부지불식간에 받은 게 더 많은 운 좋은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늘 미안했다. 이런 판단 때문이라도 현직에서 물러나면 우선 작은 것부터라도 시작하여 뭐라도 갚음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퇴직하기 전부터 무거운 난치병을 얻어 여태 앓고 있고, 그 사람을 간호하던 나도 이제는 환자가 되어 스스로를 구완하기도 벅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세상에 진 빚을 조금씩 갚아가기는커녕 지난 십 수년을 두고 되려 빚을 늘려가며 살았다는 안타까움에서 생긴 허기 같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또 평소 늙어가며 건강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마음은 먹었어도, 당장은 심각하지 않으니 하고 싶은 짓을 달리 통제하지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참지 못했고, 게으름마저 피운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딱 팔순에 들어서고 나니 몸 여기저기에서 고장이 나기 시작하여, 끝내는 중병까지 얻어 예까지 와 있다. 오랜 세월 내 멋대로 살아온 벌을 이제야 톡톡히 받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간 잘 못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살아있는 날까지는 주변에 빚이라도 갚으며 조용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건강 때문에 실행이 난감해졌으니 달리 변명할 길도 없다. 이런 저런 사정이 엎치고 덮쳐서 생긴 허기가 나를 짓누르는 게 아닌가 싶다.
세상에 진 빚을 갚는 일에는 때가 없다는 것을 일찍 깨우쳐야 했다. 살기가 좀 나아지면, 시간여유가 생기면, 적당한 기회가 찾아오면 행동으로 옮기자는 맹세는 죄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가 상 노인이 되니 스승이나 선배님들은 거의가 세상 떠나버렸고, 그 외에도 신세 졌던 이들 중에 연락 닿지 않는 분이 대부분이니 인생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내가 얼마나 경우 없이 살았는지 심히 부끄럽다. 지난날 내 존재를 남에게 알리기에 애쓰는 대신 나를 아는 일에 더 노력하고, 내가 힘을 얻어 떵떵거리려고 벼르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일에 투자를 늘렸더라면 지금의 허기는 훨씬 가벼워졌을 것이다.
날마다 나를 찾아오는 새벽 허기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지만, 억울해하지 말고 온 몸으로 받아 들여야겠다. 하기야 여기서 더 고프고, 더 아파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다만 깊은 참회를 통해 징후가 조금이라도 숙지기만 해주어도 감사하겠다는 생각뿐이다. 안 되겠다. 새벽 기도라도 시작하자. 늙어서 예상외로 부딪히는 모든 곤란한 일들은 대부분이 지난 날의 잘못된 삶의 결과라 믿고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는다. 나 좋자고 어영부영 적당히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 마음을 다 바쳐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지금의 내 나이나 건강 상태를 감안하면, 참회할 기회마저 그리 길지 않지 싶어 걱정이다.
이제야 겨우 깨닫는다. 그 동안 행운처럼 찾아온 공짜나 내 힘으로 이루어 내었다 믿었던 작은 성공까지도, 모두가 주변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심지어 혼자 힘으로, 나의 능력으로 썼다고 여겼던 수필작품들도, 결국은 지인들과 함께 어울려 만들었던 글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결국은 마음의 빚으로 남아, 긴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기는커녕 허기로라도 찾아와 끝내 내 무릎을 꿇리고 마는 삶의 이치가 몸 서리 나게 무섭다. 아, 빚이나 갚고 먼 길 떠나야 할 터인데. (2023년 3월)
첫댓글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저 자신을 성찰 해봅니다.
육신과 영혼의 허기로 방황하면서 잠 못 이룬 밤이 많았습니다.
'허기' 단어를 생각하면 '멍'이 떠오릅니다. 저는 멍 할 때가 많았어요.
허기를 채우러 저도 기도를 시작합니다.
저도 허기가 자주 찾아옵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지요. 허기는 밥으로 채우는 게 아니었군요.
배가 고파 허기질 때는 예전에 친정 엄마가 찰밥을 해주시더라고요. ㅎ
아니면 인절미. ㅎ
영혼의 허기는?
새벽에 찾아오는 허기가 그런것이었군요.
선생님께 또 한 수 배웁니다.
건강하시고 좋은글 많이 보여주시와요~^^
히딩크가 배가 고프다고 했든가요. 욕심이 많은 양반이었죠.
저도 늘 배가 고픕니다. 먹어도 먹어도......식탐이 도를 넘습니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했습니다.
영혼이 충족되지 못했으니 그 모자람이 부족함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환갑 진갑 다 지났다고 거들먹 거리는 제가 너무 우습고 해서 선생님께 늘 부끄럽습니다.
허기의 승화! 제 무릎이 더 낮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