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집에 있는 게 편해!”
요즘 들어 내가 아무리 호출을 해도 부쩍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이런저런 핑계로 두문불출하고 있는 동료의 반응이다. 젊었을 때를 함께 보냈던 동료로서 난 그의 이 변화된 상황이 얼른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시절 그는 세상을 호령했었다. 정말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자기 존재 의의를 다른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찾는 듯했다. 어울리기만 했다면 이상하진 않을 것이지만 그는 이를 넘어 그 많은 지인들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는 것은 물론 어떤 모임이든 리더를 스스로 자처해 시간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빈틈없는 계획과 실현으로 우리 모두를 감탄하게 했다.
동료이지만 우리보단 형님 같은 이미지로 든든했던 그는 멘토로서도 상담사가 되어주는 한편, 우등생의 이미지의 얼굴에 공부도 잘 해서 다른 부모님들도 그와 함께 있다고 하면 믿고 자녀들의 귀가를 재촉하지 않았으며, 또 각종 스포츠에도 능통해 친구들을 규합하고 주장과 감독으로 운동장을 진두지휘를 했었다. 팔방미인인 그는 모두의 이상이었기에, 그래서 그의 주위엔 사람들이 항상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할 정도로 북적였다.
그런 그가 얼마 전 발쪽에 무슨 말초신경 질환으로 수술을 받았었다. 병문안을 간 내가 본 그의 모습은 꼿꼿하게 앉아 평소처럼 잘 웃으면서 오히려 병문안자인 날 안심시켰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넘어 누가 보면 일명 ‘나이롱 환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고나 할까.
내 기억에 한 번도 병원에 가 본적이 없는 그에게 입원은 병의 경중을 떠나 스스로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터이다. 모기에 크게 물리면 나 같으면 며칠 동안을 얼음찜질해야 하는 수고를 들일 것을, 그가 찬물로 물린 자리를 한번 쓱 씻어냈을 때 그대로 사라지는 마술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을 정도로 건강은 자신했고, 그런 자신으로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을 거론하며 뿌듯해하던 표정을 기억한다.
그의 평소 지론대로 보면, 경사는 못가도 조사나 애사에는 꼭 참여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일장연설을 하던 때를 떠올려보면 다른 사람들 병문안이나 장례식장 조문에 친구들을 모두 이끌고 다니던 그였기에 더 그렇게 생각이 든다.
하기야 지인 중에 학창시절부터 사회생활까지 단 한 번의 탈락이나 재시험 없이 한 번 만에 덜컥 합격하고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있다. 그런 그가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에서 한 번 떨어진 후론 재시험도 마다하고 여태껏 뚜벅이로 살고 있다.
자존심인가? 그렇게 그려온, 또는 남이 만들어 준 허상 같은 것을 스스로의 모습으로 여기며 자신의 어떤 모범적 ‘틀’이란 것을 만들고 급기야는 되레 자신에게 그것을 들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원래 자신은 이 병원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면서 내적으로 현실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중일 지도 모른다.
물어봐도 답은 안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고백을 하는 순간, 그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낼 용기가 없을 것일 테니까.
간혹 “내가 말이야, 왕년에...”로 시작하는 꼰대스런 발상을 내뱉는 사람들을 본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군대에서 간첩 안 잡아 본 사람 없듯이 왕년에 잘 안 나가던 사람도 하나 없을 것이다. 한국 남자들의 허풍은 어찌 보면 남과 비교 당하기 싫어하는 자존감 지키기라는 일종의 방어기제일지도 모르겠다.
그 왕년에 사로잡혀 있을 그를 병문안 때 화장실에 부축해 들여놓고 와서 침상을 정리하다가 이제 막 검색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의 휴대폰 액정 화면에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둥둥 떠 있는 걸 본 게 이제야 생각이 난다. 그렇다면 더 확실해 진 것 같다. 가면우울증에 걸린 것이 확실하다.
돌아 온 그에게 다음 주에 놀라 갈 곳 좀 추천해 달라고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그러고 싶은 그의 마음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 차원이었다. 눈이 반짝반짝 달라져선 강원도까지 가는 동선을 따라 그림을 그리며 장황하게 설명하는 그는 예전에 본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휴게소는 맛이 없으니까 이 주변 여기 맛집으로 가고, 여기 해수욕장 주변은 비수기엔 일찍 닫으니까 미리 예약하고, 또 돌아오는 길은 여기서부터 막히니까 여기서부터는 국도로 빠져서 여길 타고 오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야 제 맛일 터. 일행들과 함께 뉴질랜드 여행을 처음 갔을 때를 떠올려주며 이 칙칙한 감옥 같은 병실에 훈풍을 넣어주고 싶었다. 우리 모두 처음이었는데도 그는 몇 번 다녀오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나라 어디 읍내 여행 예획 짜듯 동선을 짜고 일행들에게 역할을 부여했으며, 여행사 가이드 마냥 스케줄 표를 만들어 배포까지 했을 뿐만 아니라 여행 일 주일 전부터는 “여행은 준비하는 순간부터 여행의 시작인거야!”라며 들뜬 마음을 준비시켰었지.
그런데 뉴질랜드 공항에서 렌트카를 수령하는 데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다시 거기서 차를 받자마자 우리 중 운전 임무를 맡은 사람을 뒷자리로 보내놓곤, ‘여긴 운전석이 오른쪽이니까’ 자기가 기필코 운전 연습이라도 이 참에 해야겠다며 한사코 여행 내내 운전대를 놓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지.
그것도 얼마나 드넓은 나라인지, 내비게이션에서 "430킬로미터 앞 우회전!"이라는 음성 명령어가 나왔음에도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우회전하기 까지 그 지루한 직선도로를 흥얼거리며 달려주었던 그다.
현실은 병실이지만 마음은 계속 뉴질랜드에서 여행하라고 화두만 던져놓고 나오면서 그의 페르소나의 안녕을 빌어주었다. 한편으론 그럴 때도 되었다는 연민도 함께 일었다. 모두 다 감당하느라 애를 썼던 청춘의 훈장들을 이제 벽에 걸어놓고 가끔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걸로도 충분한 나이가 된 것이다. 편한 집에 좀 더 오래 머무르기를 기원했다.
럭비공 같은 모양의 인생.
좁은 세계에서 점점 드넓게 부풀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팽창기부터는 차츰 다시 처음의 꼭지점으로 수렴하게 되는 모양의 삶의 행로.
그래, 토닥토닥, 그간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밖으로만 팽창했던 당신의 페르소나를 달래주렴.
그 또한 당신 자신이니까.
첫댓글 그가 평생 이타정신으로 살아오는 과정에서 피곤하고 신산한 세월도 많았겠지요.
이제 아픈 몸 핑계로편안한 페르소나를 앞세울 만도 합니다.
나는 장차 어떤 페르소나를 장착할까? 문득 생각해봅니다~
언제쯤 우린 가면을 벗고 살까예 ㅎㅎ
흐린 날, 잔잔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속설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더군요.
병을 얻고서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나고
타인의 눈빛과 가슴을 읽는 눈도 뜨이고
그분도 사회적 가면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신을 만나고 있는 줄도 모르겠네요.
공감합니다. 건강을 잃음으로써 오히려 지금 선생님과 작품을 논하게 된 지금 제 상황이 그렇습니다~^^
나도 집이 왜 편한지 모르겠어요.
요즘 마음은 매일 도망치고 싶은데 발길이 떨어지지는 않더군요.
그래도 집이 편한가 봐요.
발행인님. 저도 그래요. 사정은 저와 다르시지만 저도 집이 가장 편하고 좋아요~^^
그의 마음을 읽고 다독여주는 훌륭한 심리 상담자입니다.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구가 있는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때론 저도 제 맘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