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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선전씨 강릉지구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
번호 | 성 함 | 호 | 자 | 내용 | 비고 |
師席 | 崔應賢 (최응현) | 睡軒 | 寶臣 | 文 參判 江陵人 | 문과급제자 |
01 | 崔玉淵 (최옥연) | 北堂 | 澄源 | 生進兩試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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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沈家甫 (심가보) | 門巖 | 世臣 | 文 縣監 三陟人 | 문과급제자 |
03 | 金爾兼 (김이겸) | 門巖 | 世玧 | 生員 江陵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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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 全長孫 (전장손) | 祖谷 | 孟胤 | 通德郞 旌善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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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 金墀 (김지) | 崛山 | 子升 | 訓導 江陵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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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金臺 (김대) | 淸渠 | 登可 | 文 獻納 江陵人 | 문과급제자 |
07 | 崔自霑 (최자점) | 槐軒 | 子洽 | 文 校理 江華人 | 문과급제자 |
08 | 朴永楨 (박영정) | 梨亭 | 幹父 | 訓導 江陵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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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崔濂 (최렴) | 竹齋 | 希聖 | 生員 全州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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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全彝 (전이) | 龜軒 | 伯倫 | 生員 旌善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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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金晉錫 (김진석) | 圓巖 | 安國 | 文 府使 江陵人 | 문과급제자 |
12 | 崔汝霖 (최여림) | 松軒 | 景說 | 訓導 全州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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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朴文華 (박문화) | 鼎村 | 子英 | 生員 江陵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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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崔洙 (최수) | 春軒 | 道源 | 文 縣監 全州人 | 문과급제자 |
15 | 金潤身 (김윤신) | 槐堂 | 德叟 | 文 舍人 江陵人 | 문과급제자 |
16 | 朴始文 (박시문) |
| 子昭 | 文 郡守 江陵人 | 문과급제자 |
“同人, 先号咷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或出或処, 或黙或語. 二人同心, 其利断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출처] 주역 계사상전
◎ 최응현[ 崔應賢 ]
본관 강릉(江陵). 자 보신(寶臣). 호 수재(睡齋). 1448년(세종 30) 사마시(司馬試), 1454년(단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노모 봉양을 위해 강릉훈도(江陵訓導)를 자원하였다.
그후 저작(著作)·전적(典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1463년 고성(高城)·영월(寧越) 군수를 지냈다. 1483년(성종 14) 집의(執義)가 되었고, 1484년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1487년 이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88년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91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등을 지내고, 1495년(연산군 1) 대사헌, 1499년 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 1502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형조·공조·병조의 참판을 지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응현 [崔應賢] (두산백과)
◎ 심가보[ 沈家甫 ]
심가보는 1453년(단종 1)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음관으로 훈도를 지냈다. 1468년(세조 14) 문과에 급제하여 박사를 거쳐 양구(楊口), 흡곡(歙谷)의 현령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직강(直講)에 올랐다.
1466년(세조 12)에 최옥연, 최수, 김윤신 등과 더불어 금란회(金蘭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가보 [沈家甫]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김대[ 金臺 ]
본관은 강릉이며 자는 등가(登可), 호는 반곡(盤谷)이다. 부정(副正) 김경생(金慶生)의 증손이며 김필양(金匹陽)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생원시, 1477년(성종 8)에는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병조정랑(兵曹正郞), 영천(永川)・담양(潭陽)・공주(公州) 읍장(邑掌), 예원판결사(隷院判決事),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등을 역임하였고,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강릉시 내곡동 신복탑동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대 [金臺] (두산백과)
◎ 최자점[ 崔自霑 ]
1465년(세조 11)에 진사와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다.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으로 있었으나 간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고성군수로 나갔다. 이 때 강원도 감사 박원종(朴元宗)이 간신들이 사주를 받아 최자점을 파직시키기 위해 최자점의 재산을 조사하였다. 재산이 겨우 서책 몇 권뿐이었음을 알고서, 이에 탄복한 박원종이 최자점을 찾아가 사죄하였다고 한다.
최자점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자점 [崔自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진석[ 金晉錫 ]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안국(安國)이다. 김근(金墐)의 아들로 할아버지는 김을후(金乙侯)이다. 1465년(세조1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472년(성종3)에 춘당대시(春塘臺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여 교서정자(校書正字)로 벼슬에 올랐다. 영안북도평사(永安北道評事),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교동에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진석 [金晉錫] (두산백과)
◎ 최수[ 崔洙 ]
가계
본관은 강릉. 강릉 12향현 중 한 사람이다. 최입지(崔立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교수(敎授) 최여남(崔汝南)이고, 어머니는 정선전씨 생원 전무(全務)의 딸이다.
생애
1468년(세조 14)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1472년(성종 3)에 진잠현감(鎭岑縣監)으로 부임하였으나 병을 얻어 31세에 세상을 떠났다.
활동사항
1466년(세조 12) 세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동 일대를 순시할 때 오대산 어림대(御臨臺)에서 별시를 개최하였다. 이때 세조는 숭불문(崇佛門)과 벽불문(闢佛門)을 설치하고 무사(武士)로 하여금 벽불문을 지키게 하였다. 모두 숭불문을 통과하였는데, 최수 혼자 벽불문을 통과하려 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가 철추로 내리치려 하였다. 왕이 최수의 기개에 감복하여 의사(義士)라고 칭하였다.
1470년(성종1)에는 성변(星變)으로 인한 왕의 구언(求言)에 상소하기를, “…신이 생각컨대 병자년(1456)의 원혼(怨魂, 단종 복위운동으로 죽은 사육신 등의 혼)들이 그들의 해골이 제대로 거두어지지 않고 있음을 원통하게 여기고 의지할 곳 없이 떠다니면서 요란을 떠는 것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큰 은혜를 내리십시오. 그리고 강원도 감사로 하여금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해골을 수습하여 다시 장사를 지내게 하고, 영월군수로 하여금 해마다 제사를 올리게 하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입니다.”라 하면서 단종의 복위를 간하였다.
또한 승려의 횡포에 대해 상소하기를 “강릉 염양사(艶陽寺)의 중은 영남에서 면포(綿布)를 사다가 비싼 값으로 백성에게 강매(强賣)하였는데, 백성이 이에 불응하면 결부(結卜)의 수를 헤아려 강제로 나누어 주었다가 추수 때가 되면 성화같이 값 독촉을 하여 백성이 죽을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를 시정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상소에 대한 왕의 비답(批答)은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수 [崔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김윤신[ 金潤身 ]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덕수(德叟), 호는 괴당(槐堂). 할아버지는 김중상(金仲祥)이며, 아버지는 사정(司正) 김여명(金汝明)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76년(성종 7)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90년에 통선대부로서 지평(持平)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도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곧 전직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는 안변부사가 되어 정사를 잘하였다. 강릉의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윤신 [金潤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시문[ 朴始文 ]
생애
1486년(성종 17)에 문과에 합격하여 전적(典籍), 평해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칭송이 자자하였고, 모두 효성스러웠다. 만년에 낙향하여 금란반월회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시문 [朴始文]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금란반월회[ 金蘭半月會 ]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출처
디지털강릉문화대전-금란반월회
정의
조선시대 강릉 지역 유학자들의 계회(契會).
개설
조선 초기의 재지사족들은 중앙의 숭유억불 정책에 힘입어 성리학을 수용하여 정착시키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강릉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리학을 수용한 재지사족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을 교양으로 하여 입신출사를 지향하였으며, 나아가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추구하였다. 강릉 지역 금란반월회의 성향도 이와 같았다.
한편, 조선 초기에 강릉의 상원사(上院寺)가 고려 왕씨 일족의 명복을 빌어주는 불사(佛事)인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거행하는 사찰로 지정되면서 계속적인 왕실의 비호 속에서 사세(寺勢)를 크게 확장해 갔다. 사원세력의 확대는 향촌사회의 사상적, 경제적 측면에서 강릉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원사의 사세확장에 의한 제반사업은 금란반월회 회원들의 유학이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요인이었으며, 또한 재지적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던 이들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1471년(성종 2)에 유학적 이념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확립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반포되고, 유학의 실천강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소학(小學)』과 『삼강행실(三綱行實)』이 간행되는 등, 중앙에서부터 성리학적 사회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강릉에서도 서서히 성리학이 우세해졌고, 이에 따라 금란반월회의 활동도 더욱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설립목적
강릉 지역의 향촌사회를 유학적 이념으로 개혁하기 위해 1466년(세조 12) 음력 9월 9일에 강릉 지방의 젊은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활동사항
금란반월회의 결성은 당시 호불군주였던 세조의 비호를 받아 득세하고 있었던 상원사 및 불교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강릉의 주자학 정착과정에서 금란반월회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금란반월회는 1453년(단종 1)에서 1477년(성종 8) 사이에 12명의 생원과 진사시 과거합격자를 내었다. 구체적으로 1453년에 심가보(沈家甫), 1456년에 김이렴(金爾廉), 1465년(세조 11)에 최옥연(崔玉淵), 김대(金臺), 최자점(崔自霑), 최렴(崔濂), 김진석(金晋錫), 1468년에 김이(金彛), 김윤신(金潤身), 박시문(朴始文), 1477년(성종 8)에 박문화(朴文華), 최수(崔洙) 등의 문과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금란반월회가 당시 강릉에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 하는 유학의 정신을 보급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금란반월회에서는 ‘맹약오장(盟約五章)’이라는 회칙을 마련하여 유학을 향촌사회에 보편화시키는 데 힘썼다. 맹약오장은 길흉경조(吉凶慶弔)·양진강호(良辰講好)·과오면책(過惡面責)·오령속금(忤令贖金)·고행삭적(故行削籍)으로 되어 있다. 맹약오장은 이후에 금란반월회의 일원이었던 김윤신(金潤身)이 정덕연간(正德年間: 1506~1521)에 ‘향령(鄕令)’을 만들어 강릉에서 시행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조직
모두 1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의의와 평가
금란반월회는 1482년에 김대(金臺)가 성종에게 유향소 복립을 건의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앙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맞춰 강릉 지방에 주자학을 보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강릉시사(江陵市史)』(강릉문화원, 1996)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금란반월회 [金蘭半月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同人, 先号咷而後笑.” 子曰, “君子之道, 或出或処, 或黙或語. 二人同心, 其利断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동인이 먼저는 부르짖어 울고 뒤에는 웃는다."하니, 공자가 말씀하시되 "군자의 도가 혹 나가기도 하고 혹 처하기도 하고 혹 침묵하고 혹 말 하기도 하나, 두 사람의 마음이 같으니 그 날카로움이 쇠를 끊도다. 같은 마음의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도다."
[출처] 주역 계사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