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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우리네 정치판마냥 요동을 칩니다. 주말 벚꽃 축제를 열기로 한 지방에서는 이 주말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 됩니다. 과연 피었을까요? 반이라도 얼굴을 내밀기 바랍니다. 관계자들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3월에 들어설 때만도 날씨가 이 지경이 될지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기야 3월 초 이미 꽃망울을 보았습니다. 넉넉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보름 이상을 지나가더군요. 세상에 이럴 수가! 결국 하순까지 그냥 밀고 왔습니다. 이제 좀 따뜻해지나 보다 싶은데 얼마나 서둘러줄지 모르겠습니다. ㅋㅋ 관계기관의 축제는 지나도 시민들의 축제는 이어질 텐데 뭐 어떠랴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투자한 돈이 얼마이겠습니까. 결국 다 우리 돈인데 말입니다.
며칠 전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큰 탈 없으니 한숨 놓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환자들 많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환자처럼 보입니다. 검사 몇 번 하면 몇 만원 날아가는데 너무 쉬운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가능하면 오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요. 불안하면 미리 알아보아야 합니다. 나이가 있으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잘 먹고 운동하고 잘 자고, 뭐 걱정할 거 있나 싶어도 이 몸 구석구석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릅니다. 건강하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때가 좋았지요. 다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언젠가부터 모두 수동으로 바뀐 것입니다. 진작 조심할 걸, 이미 시간 다 지났습니다. 거참!
아무튼 이제 따뜻해집니다. 정말 꽃도 피어나겠지요. 좋은 때입니다. 건강해야 좋은 때지요. ㅋㅋ 건강하게 멋진 주말 지내시기 바랍니다. ^)^
2024년 3월 23일 김종우 목사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언 24 : 19 - 20)
<사운드 오브 프리덤>
아이들이 둘러앉아 손뼉을 치며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로 들리는가? ‘자유의 소리’지. 얼마나 시간이 오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설령 길지 않다 하더라도 저들이 어떤 상황에서 지내다 풀려났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가족에게서 분리되어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끌려가 이렇게 저렇게 노리개로 굴러다녔습니다. 그리고 천만다행히 풀려난 것입니다. 이제 곧 집으로 찾아가겠지요. 말 그대로 지옥에서 돌아온 셈입니다. 그 어린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집을 그리면서, 가족을 그리면서. 어른들이 보기에도 즐거운 장면이지요. 내 자식처럼 보이니까 말입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많이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외국 관광객들이 놀라는 것들 중 하나가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혼자서 등하교를 하는 것과 해가 이미 지고 나서도 밤거리를 책가방 메고 혼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싶은 것이지요. 자기네 나라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반드시 부모가 등하교를 시켜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동학대로 붙잡혀 들어간답니다. 자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방기한다는 것이지요. 영화가 시작되면 그런 장면들이 소개(?)됩니다. 길에서 마치 물건 주워가듯 어린이를 붙잡아갑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그냥 집어 태우고 쏜살같이 내뺍니다. 어쩌지도 못합니다. 자동차를 대기시켜 놓고는 지나가는 아이를 붙잡아 태웁니다. 그리고는 어디인지 모르게 데려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자막으로 나오는 설명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던 일을 돌아보면 믿을 수 없지만 믿어야 하는 사실입니다. 매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납치되어 노예생활을 한다니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수백만이 어린아이들이랍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성노예가 되어 노리개로 사용된다는 설명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헷갈립니다. 설명 중 등장한 여성은 6살부터 시작하여 어느 새 스물다섯이랍니다.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여섯 살 아이를 어떻게 성적인 노리개로 쓴다는 이야기인지, 이게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사람인지, 짐승도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날 이름 있는 한 여성이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의 노래에 끌려 방문합니다. 그리고 그 아비에게 딸을 연예인으로 키우라고 조언해줍니다. 그리고 오디션에 참여하라고 안내해줍니다. 옆에 있던 어린 아들까지 동반하여 데리고 오라 합니다. 다음 날 희망을 듬뿍 안고는 아비를 따라 두 남매가 약속한 오디션 장으로 갑니다. 저녁에 아이들을 데려가라고 하고는 맡겨두랍니다. 그곳에는 다른 아이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저녁에 아이들을 데리러 갑니다. 그런데 그 방은 비어 있습니다. 아침에 있던 시설들도 모두 사라지고 빈 방입니다. 놀랄 일이지요. 덜컥 겁이 났을 것입니다. 속았구나 싶지요. 아무리 소리소리 질러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연예인의 꿈을 꾸며 여성을 따랐을 것입니다. 화장도 해주고 음식도 주고 아무 의심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 웬 남성들이 들이닥쳐서는 밖으로 내보내며 차에 타라고 합니다. 그 때부터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리로, 다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돈이 오가지요. 물건 주고받듯이 말입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목적지(?)에 당도하면 인형만도 못한 물건이 되어 한 미치광이의 노리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집단으로 넘어가서 유흥업소에서 일(?)하게 되겠지요. 갑자기 자기 자식들을 잃어버린 아비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요? 자식의 빈 침대를 보고 잠이 오겠습니까?
아동성매매업주를 추적하여 체포합니다. 그것이 ‘팀 발라드’의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실적을 올립니다. 어느 날 동료가 묻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어디 있지요? 범죄자는 잡아 구금하였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 피해자들의 부모 가족은 어떤 형편에서 살고 있을까요? 범죄자만 잡으면 일이 끝나는 것입니까?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누구를 위한 범죄자 소탕작업입니까? 사회의 안녕과 시민의 안전을 위한 일입니까, 경찰 실적과 공적 쌓는 일을 하자는 것입니까? 이게 도대체 뭘 하는 일인지 생각합니다. 정작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습니다. 고통은 그냥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범죄자를 붙잡아 처단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지옥에 갇혀 사람 아닌 취급을 당하고 학대당하는 아이들을 구출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오지로 들어가는 남편을 쉽게 떠나보낼 수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남의 나라 일이고 남의 아이들입니다. 그 아내도 참으로 대단한 강심장을 가지고 있다 싶습니다. 아무튼 남매를 잃은 아비의 심정으로 구출작전을 짜고 들어가는 팀의 활동이 전개됩니다.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가 공감은 갑니다. 그리고 그 악한 환경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사건을 가지고 이렇게 영화를 밋밋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긴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거참! 영화 ‘사운드 오브 프리덤’(Sound of Freedom)을 보았습니다.
쥐구멍에 해 뜨는 인생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가장 많이 질문 받은 것이 있습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될래? 요즘도 이런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대답은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도 하고 어쩌면 실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라면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거쳐야 하는가 알면서도 괜히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들 많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아이가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나는 무엇이 될까? 부모의 영향도 크고 가까운 어른들의 영향도 큽니다. 우리 자랄 때만 해도 사내아이는 대통령이나 이마에 별이 번쩍이는 대장이 되겠다는 정도 대답해야 어른들의 눈에 들었습니다. 이것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한창 ‘0사’가 유행처럼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세월 따라 바뀝니다. 취업난으로 젊은이들이 오래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뭐가 되든 취업이나 하자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무엇이 될꼬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한번 사는 인생인데 중요하지요.
우리 모두 한 개인으로 자라면서 그리고 사회생활 하면서도 변화는 계속됩니다. 그래서 대학에 일단 들어가 다니다가도 다시 들어갑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다시 대입을 거쳐 입학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졸업 후에 다시 다른 대학에 들어가서 새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생활 하다가도 전혀 다른 종목으로 방향 전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속된 말로 이것이 아닌가보다 해서 180도 바꾸는 것이지요.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가항력적으로 바꿔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와 같은 경우가 그럴 것입니다. 목회자가 된다? 저의 인생에서 그런 계획도 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 인생 초창기에는 아예 하나님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되었고 나아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엄청난 변화이지요. 대학을 마치며 시험이라는 것 때문에 다시는 스트레스 받을 일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입학시험을 비롯하여 오랜 동안 시험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꿈에라도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건 전혀 나의 뜻과는 다른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경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물론 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러니 사실 그런 꿈도 필요 없었지요. 가만있으면 왕이 되든지 아니면 왕족으로 평생 편안하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인생은 180도 회전합니다. 자기가 바랐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지요. 다윗도 그랬습니다. 일개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왕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평생 목동으로 살 수도 있었습니다. 양 떼를 몰고 들판을 다니며 쉴 때는 하프나 뜯고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인생으로 바뀝니다. 다윗 자신도 예측하지 못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에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고전 15 :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오늘 우리는 수천 년 전 역사의 현장으로 갑니다. 하나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곳에 가서 요셉이라는 사람을 만날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지만 요셉 또한 우리에게 늘 감동과 따뜻함을 주는 인물입니다. 어디를 봐도 모난 곳이 없는 사람, 어쩌면 예수님에게 가장 근접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겠습니다. 그것이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에게 어떻게 응용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요셉의 여정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더구나 야곱의 네 아내들 중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지요. 언니 레아가 아들 여섯을 낳고 시녀 둘이 아들 넷을 낳는 동안 라헬에게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 안타까움이 얼마나 심했을까요? 창 30 :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정작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자식을 얻지 못한 야곱 또한 마음으로는 많이 아파했을 것입니다. 오랜 후에 22절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을 생산하게 됩니다. 그 기쁨이 오죽하였을까요. 라헬의 기쁨과 더불어 야곱의 기쁨 또한 컸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비의 사랑이 그 아들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자식들의 시기를 불러옵니다. 나중에 요셉이 꿈을 꾸고 그 이야기를 가족에게 말 했을 때 급기야 시기는 미움으로 발전합니다. 창 37 :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결국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품게 됩니다.
요셉이 아비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알고자 집을 떠나 형들의 있는 곳을 찾아갑니다. 사흘을 떠돌다가 마침내 형들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형들을 찾은 동생의 기쁨은 아랑곳없이 형들은 요셉을 처리할 궁리를 합니다. 창 37 : 18 - 20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죽음은 면하지만 요셉의 인생은 갑자기 고난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은 꿈도 꾸어보지 못한 전혀 딴판의 생활입니다. 아비의 사랑만 받으며 곱게 자라온 청소년이 견디기에는 너무 혹독한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노예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모든 것이 낯선 곳입니다. 애굽에서 요셉은 그야말로 가장 밑바닥 인생부터 시작합니다.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는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일으킵니다. 하다못해 좋은 환경으로 바뀐다 해도 일단 익숙해지기까지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나서도 스트레스 지수가 적지 않게 나오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쁜 환경으로의 변화라면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요셉은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좀 잘되나 싶었을 때 오히려 감옥에 들어가는 일까지 당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옥살이를 한다면 억울할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의를 지키려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하나님,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하십니다, 하는 원망이 절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또 수년의 세월이 지나갑니다. 도대체 언제나 이 옥살이가 끝나려나? 이래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는 오겠는가? 늙은 아버지는 얼마나 오랜 세월 실망과 낙심 속에 지내셨을 텐데 혹 살아는 계실까? 내가 살아서 여전히 살아 계신 아버지를 만날 수는 있는 것일까? 그렇게도 사랑해주신 아비에 대한 사랑 그리움 그리고 걱정이 요셉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 와서 어언 십 년여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궁전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요셉을 불러내어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더니 궁전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왕이 꿈을 꾸었으니 그 해석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인가? 그러나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요셉이 도망가려 해야 도망갈 기회도 방법도 없습니다. 끌려오다시피 왕 앞에 나왔습니다. 창 41 :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더라” 글쎄 그게 제가 할 일입니까? 기가 막힐 일이지요. 요셉이 대답합니다. 16절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그래서 지금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있습니다. 대답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더 큰 곤욕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2. 하나님의 섭리
물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는 자체부터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일,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마 10 :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아멘! 하찮은 생명도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우리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30 - 31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안에서 세상에 태어납니다. 물론 죄악 속에 태어나 그 관심과 사랑을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와 그 계획 안에 들어있는 줄 믿습니다.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아들을 얻습니다. 요셉을 얻은 기쁨은 아마 여타 아들들보다는 분명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요셉이 소년이 되어 사리를 분별할 즈음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창 37 : 6 - 7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과연 요셉은 그 꿈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알 수가 없지요. 우리는 장래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꿈으로 가지고 실현시키려 노력은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루어지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직 힘껏 달려갈 뿐입니다. 요셉의 꿈은 좀 더 발전합니다. 9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물론 두 꿈은 결국 같은 내용입니다. 반복하여 꿈을 꾼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일이기도 합니다. 그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오랜 고난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준 힘이 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요셉은 어느 날 갑자기 아비의 심부름을 갔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요셉의 삶에 있어서 전혀 예측되지 않은 일입니다. 아비인 야곱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입니다. 아무튼 나머지 아들들이 전해준 소식은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창 37 : 31 - 32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야곱은 알아챘습니다. 심부름 간 아들 요셉이 들에서 야생동물에게 먹이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35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이 모든 일들이 야곱의 뜻하던 바도 아니요 요셉이 추구하던 일도 아닙니다. 아비는 아비대로 아픔을 겪고 있으며 아들 요셉은 요셉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아픔을 당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의 섭리는 유효합니다. 그래서 집에 남아있는 야곱의 이야기는 일단 제쳐둡니다. 이제 하나님은 애굽에 노예로 끌려간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창 39 : 2 - 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아멘! 비록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하찮은 사람, 그것도 아직 나이가 새파랗게 젊은 갓 청년이 되어 가는 아이인데 그의 생활 속에서 남다른 기미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 소년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왠지 잘되는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도 크고 작고 간에 다들 요셉을 좋아하고 따르는 편입니다. 요셉이 맡은 일마다 결과는 항상 만족스럽게 나타납니다. 그러니 주인이 그 집안의 쟁쟁하다는 사람들을 다 제쳐두고 요셉을 책임자로 세웁니다. 6절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분명 하나님이 요셉을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 앞에 무슨 일이 생길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계획하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당신의 뜻대로 만드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고난이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합니다. 철을 용광로에 녹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녹인 철은 다시 주인의 뜻에 맞는 틀에 부어져서 그 용도에 맞는 형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이라는 용광로에 빠져 ‘나’라는 자아가 다 녹아지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만약 고난이 없다면 어쩌면 그다지 쓸모가 없는 재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 조각이나 사기 조각 같은 것을 용광로에 집어넣어서 녹여 새로 쓰겠다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새롭게 만들어질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3. ‘무엇이’ 아니라 ‘왜’로 삽시다.
초두에 우리는 무엇이 될 것인가에 관심과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관심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초점을 바꾸기 바랍니다. 요셉의 인생을 잠시 살피며 여기까지 왔지만 요셉이 처음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려고 애굽에 온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물론 꿈을 가지고 기억하고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는 이야기가 될 것인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노예로 팔린 자가 어떻게 고관대작이 됩니까?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이 그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고사하고 자기를 노예로 팔아치운 형들에게까지 원한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요셉은 무엇이 될꼬? 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왜 살아야 하는가 그 마음은 내내 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서려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내쳐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왜 애굽에 팔린 것일까?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형들의 시기 미움 원망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첫째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는 일이고 나아가 형들을 미워하거나 형들에 대한 원한을 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영부영 시간을 때우는 삶을 살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될꼬?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선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그릇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앞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고전 15 :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멘! 요셉 또한 똑같은 고백을 할 것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살리시기 위함이었고 그곳에서 당신의 백성을 번성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당신의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될까 그것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시고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최선을 다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하신 바는 변함이 없습니다. 처음 아담을 창조하신 때부터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은 하나입니다. 아담을 만드시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무슨 사명을 부여하셨습니까?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 동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들었습니까? 애 많이 낳아서 길러라 하는 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인구폭발을 걱정하며 살 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또 인구 감소를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래서 요지경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이 우리 육신을 위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신앙생활 하던 것처럼 땅에 속한 자로 살지 않기 바랍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을 육으로 듣지 맙시다.
이 세상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그 실권을 마귀 사단이 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을 만드시고자 합니다. 아담을 통해서 시작하셨습니다.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 그래서 땅을 정복해라, 땅을 다스려라. 그런데 잘 아는 대로 아담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다시 택하십니다.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사람들이 마귀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어둠에 빠져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빛 가운데로 살려내기를 원하십니다. 우선 그들부터 살려내야 합니다. 처음 아담은 실패하였고 둘째 아담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깨닫습니까, 못 깨닫습니까? 요 1 :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래서 예수님이 많은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사명을 완수하고 씨를 뿌리고 가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명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빛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마 5 :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다시 말해서 육의 말씀이 아니라 영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으나 육의 말씀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옛날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사명을 알게 되었지요? 어두움에 빠져 있는 백성을 건져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육으로 가르치고, 육으로 듣고, 육으로 믿고 있는 불쌍한 백성들,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쥐구멍에 빠져서 자기가 소경이 된 줄도 모르고 따라가는 우리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어서 빨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십니다. 창 41 : 40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치리해야 합니다. 이 땅이 곧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하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고 하나님이 치리하시는 땅으로 바꾸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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