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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5장 35-43절 죽은 소녀를 살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 지체하시는 동안 회당장의 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야이로가 조금도 기대했던 일도, 예상했던 일도 아니었습니다. 야이로의 간절한 마음은 자신의 딸이 병으로부터 나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딸은 죽었습니다. 어쩌면 그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 지체하지만 않았어도 살아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체된 시간동안 딸은 죽었습니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 말을 들었을 때 회당장의 마음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의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밖에 까지 들리지 않았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얼마의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짓없는 참소망을 주십니다. 수많은 사기꾼들이 거짓 소망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수많은 이단교주들이 거짓된 소망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다단계에 빠져서 패가 망신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마음 속에 욕심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혹을 당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 안에 어떤 욕심이든지 간에 욕심이 잠재되어 있다가 그 욕심이 미혹하는 자를 만나면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미혹하는 자들은 그들 마음에 욕심을 건드려서 자기들을 따르게 만듭니다. 일단 그렇게 끌려가는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된 것이니 따라가지 말라고 해도 완전히 망할 때까지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일부를 이미 그에게 갖다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돈을 1억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존 100만원을 바쳤습니다. 그 100만원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사기꾼들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단교주가 바치라고 하는 중요한 어떤 것을 바쳤기 때문에, 또 진리보다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커서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조금은 의심이 되는데도 금방 생각이 바뀌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함께 그 올무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 있는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 결과 완전히 멸망당할 때까지는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하면서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간다고 해서 꼭 옮은 것은 아닙니다. 그건 아니라고 생각되면 친구들이 몰려가거나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가도 가지 않을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따르는 여러분들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은 영원한 참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36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은 처음 시작할 때의 믿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가졌던 그 믿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라는 의미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 믿고 계십니까?
마음이 수시로 이랬다 저랬다하면서 왔다갔다 하는 사람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변함없이 동일하게 행동할 때 갖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누군가와 약속을 해놓고 미안함도 없이 어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처음에는 여러분들을 믿었던 사람들이 점점더 여러분들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약속을 지키려고 해도 못지키는 경우가 있는데 아얘 처음부터 개념없이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보면 사람들은 그에 대한 믿음을 점점 잃게 되어 이제는 그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안믿을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믿지 못할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한 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 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까?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하여 철저합니까?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의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런 신실한 사람으로 살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인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부터는 예수님께서 단 세명의 제자들만 따라오게 하시고 나머지 제자들은 밖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야이로의 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떠들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울며 심히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사람을 사서 대신 울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했다는 말씀은 고용된 사람들은 울었지만, 야이로의 딸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은 심히 통곡했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야이로의 딸은 부모에게 뿐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착한 아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떠드는 사람들과 울며 심히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 말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과학적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죽은 그들은 모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잠에서 깨어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할 것이기 때문입니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5절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모두 자는 자들로 표현하십니다. 이 표현은 언젠가는 그들이 깨어 일어날 때가 있으며 그 잠을 깨우는 것은 주님의 음성과 더불어 들리는 천사장의 호령과 나팔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는 자들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그들은 죽은 자들로 다시 표현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가 죽지 않는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학적 상식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문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살아계심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창조세계에 새겨두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자연만물 속에서 살아게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인할 수 없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고 영광 돌리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1장 20-2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신성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천하만물 가운데 분명히 보여 알려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몰랐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계신 것이 보여졌어도 일부러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기 위해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주장하고 안계신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심판을 받을 이유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많은 은혜와 자비 속에서 수없는 혜택을 받았어도 하나님께 감사치도 않고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졌고, 마음이 어두운 데 빠져서 신이 아닌 것들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신인 양 제사를 드리면서 자기 믿음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사는 것입닏. 이것이 인간의 사악함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좀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따라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특히나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면 더욱더 비웃습니다. 그러다가 과학적으로는 도저히 고치지 못할 병에 걸리거나 자기 의지로 이루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에야 그제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헤입니다. 병들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고, 망하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하나님을 이제는 믿게 되었고 그런 그들을 조건없이 구원해주시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방앞에 이르신 예수님은 그런 떠들며 울고 있는 그들을 다 방에서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세명의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들어가셨고 또 야이로를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하신 행동이 41-42절에 나옵니다. 우리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님이 죽은 자를 부르시거나 죽은 자의 손을 잡으실 때 부활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 하셨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달리다”는 작은 소녀를 가리키고 “굼”은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열 두 살의 나이에 죽었던 소녀가 사랑스러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손에 붙잡히면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주님께서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살리실 표적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않게 될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이 일로 예수님 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4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왜 예수님은 이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까요? 오랫동안 아파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살리시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지만 먹고 기운을 차리며 활동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 소녀를 살리신 것은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활동하라고 살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활동해야 합니다. 방안에서 핸드폰만 하지 마시고 활동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보내셨고 할 일을 위해 학교에 다니면서 준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 직장 생활이나 사회에서 일하며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꿈을 꿀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를 위해 예수님께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하지 않습니다. 죽은 대로 병든대로 방치합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를 위해 기도할 부모들이 어디 있을까요?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들이 바로 이 시대의 야이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살리시고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