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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北漢山城] 경기 고양
산줄기 : 한북정맥
들머리 : 은평구 진관동, 종로구 구기동, 성북구 정릉동,
강북구 우이동, 고양시 북한동 효자동 일원
위 치 : 경기 고양시 신도읍 북한리/孝子洞
사적 제162호.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다. 이때 백제의 주군력(主軍力)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그뒤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벌군의 중심요새가 되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를 보면 대서문(大西門) ·동북문(東北門)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자단봉(紫丹峰) 위에 동장대(東將臺) ·나한봉(羅漢峰), 동북에 남장대(南將臺) ·중성문(中城門), 서북에 북장대(北將臺)가 있었고, 1712년에 건립한 130칸의 행궁(行宮)과 140칸의 군창(軍倉)이 있었다. 성내 중흥사(重興寺)는 승군(僧軍)을 배치한 136칸의 대찰이었으며 12개의 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성곽의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은 무너졌으나, 대서문이 남아 있으며, 성체(城體)는 완전히 보존되었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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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백운대에 오르니 구름이 반기네...고양 북한산성
새벽 열차는 유년의 기억처럼 쓸쓸하다. 불은 환하게 켜 있고 사람들은 두런댄다. 어느 것 하나 정돈되지 않은 시간, 잠들 수도 깨어 있을 수도 없는 시간. 그런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열차는 북으로 달린다. 그침없이 계속 이 열차가 휴전선을 넘어 사리원역을 지나 평양역에 닿았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그 푸른 대동강 물에 내 마음을 조각배처럼 띄웠으면 좋으련만... 열차는 이제 한강을 지난다. 서울의 불빛들이 시린 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곧이어 이 열차는 서울역에 도착한다.
지하차도에는 몇 사람의 노숙자들이 IMF 시절을 회상시키듯 엷은 이불을 덮은 채 기억의 저편에 잠들어 있고, 종로 3가를 거쳐 구파발 역에 도착한 시각이 6시 반. 우리는 1번 출구를 나서 인공폭포를 바라본다. 비는 내리고 낯익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 해장국을 시킨다. 아침이지만 이 집의 해장국은 너무 맛이 없다. 박기성씨의 핸드폰은 꺼져 있다. 설마 밤새워 술을 마신 것은 아닐까? 제일 먼저 오재성 판사가 나타나고, 몇 줄의 김밥과 어묵국물로 북한산 자락의 아침상은 푸짐하다. 글쎄? 먹기 위해 사는 걸까? 살기 위해 먹는 걸까? 풀리지 않는 화두를 떠올리면서도 내 마음속엔 안개가 자욱하다. 산성기행 안내를 맡은 박기성씨가 오고 안 오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종일 비가 내린다면 오늘의 여정을 어디애서 어디까지로 정한단 말인가? 백운대에 올라 가없이 펼쳐진 서울과 지난해 8월, 내가 걸었던 한강을 바라보리라던 나의 바람은 이렇듯 속절없이 꺾이고 마는가?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비옷을 입는다. 아침비는 천리를 간다는 속담처럼 금세 그칠 것이다. 북한산 오르는 길로 접어드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박기성씨다. 밤새워 술을 마신 게 아니라 새벽녘까지 책을 보다가 이제야 깨어났단다.
구기동을 넘어와 대남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저녁까지 비가 내린다는 예보 탓인지 사람들은 많지 않다. 아직 샛노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발 아래 깔리고 오리나무, 아카시아나무, 소나무들이 내린 빗방울들을 함초롬히 매달고 있다.
안개 자욱한 길을 헤치고 한참을 올라가자 대서문이다. 담쟁이 넝쿨이 울긋불긋 드리워진 성문을 들어서자 성문상회가 나타난다. '대서문 안길' 이라는 길 표지판을 바라보고 대서문루로 오른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북한산은 희끗희끗한 암벽들이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킨다.
차들이 끊임없이 우리가 가는 길을 앞질러갔다 돌아나오고 그 차들엔 여러 절 이름들과 산장 이름이 씌어져 있다. 그 사이 비가 그쳤다. 원효산장. 그래, 이 시대의 원효는 북한산에서 동동주를 팔고 있구나! 새마을교를 지난다. 대동문까지는 4km. 갈 수 있을 테지... 문득 저 건너 산중턱에서 까악 까악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린다.
까치들의 등살을 못이겨 까마귀는 지금 깊은 산 속으로 숨고, 삶에 지친 사람들은 휴일 날이면 산속으로 산속으로만 들어가다 보니 나라 곳곳 심산유곡들은 병이 깊고도 깊구나! 북한산성 안내판을 바라보는 사이 일행들이 산행 방향을 전면 수정하잔다. 북한산에 와서 백운대나 인수봉을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서운하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럴 법도 하다. 결국 여정을 되돌려 백운대 가는 길로 접어든다. 이곳에서부터 길은 외길이다. 오재성씨의 발걸음은 산책로를 걸어가듯 부드럽다.
앞서서 가고 있는 나이 드신 분은 무엇을 그리 배낭에 많이도 쟁였는지 숨소리마저 가쁘고, 가방을 두 개나 멘 아주머니는 무슨 소원인지는 모르지만 돌탑에 돌 하나를 정성스레 얹는다. 개울을 건너면서부터 덥다. 배낭과 카메라를 벗어 바위 위에 놓고 세수를 한다. 정신까지 서늘해진다. 길은 이제부터 오르막이다. 사람들은 자꾸 뒤쳐지고 조용주씨, 오재성씨 그리고 나까지 세사람은 사람들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세상에 쉬운 것이 어디에 있는가, 사귀는 것도 어렵고 사귀어야 하고 헤어지는 것도 어렵게 생각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만나고 너무 쉽게 헤어지는 이 풍토' 그렇다. 지금은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음이라고 부르는 진정성이 무시되고 사라지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 무엇을 사랑이라고 진정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무거운 탓인지 가파른 길이 더욱 더 팍팍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 가파른 오르막길 위에 서 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나이, 더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하는데 물러서기가 쉽지 않은 나이, 나는 밤새 내린 비 머금은 갈참나무에 기대어 붉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과 아직도 남은 청춘의 아쉬움으로 푸르름이 짙어가는 나뭇잎들을 바라다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쉰다.
먼 산에서 우우 소리 지르는 소리 들리고 약수암에서 약간은 흐릿한 물을 마신다. 약수암에서부터 모든 장소는 운무 속에 숨는다. 뒤따라 오는 일행들은 보이지 않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뿐. 정상은 30분 정도만 오르면 도착한다는데 시간은 벌써 10시20분.
앞서 올라간 손동명씨는 철계단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우리는 가쁜 숨을 내쉬며 한게단 한계단 철계단을 오른다. 땀이 비오듯 한지는 이미 오래. 온몸이 흠뻑 젖는다. 드디어 우리는 조선시대 사름들이 힘겹게 축성했던 북한산성의 위문에 다다랐다. 북한산은 예로부터 삼각산으로 불리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김상헌는
'가노라 삼각산이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라고 서울과 북한산을 떠나는 이별을 아쉬워 했다.
<새종실록지리지>에는 '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이었고, 일명 북한산군인데 근초고왕 24년에 남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북한성으로 부른다'고 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삼각산은 양주 경게에 있는데 화산이라고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이라고도 하였다. 평강면의 분수령에서 잇달은 봉우리와 첩첩한 산봉이 굴곡을 이루면서 구불구불 돌아 양주 서남쪽에 와서 도봉산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로 경성의 진산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찾은 곳이 바로 이 산이다' 라고 적혀 있으며,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이었던 비류와 온조가 이 산을 올랐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북한지>에선 '삼각산은 인수봉, 백운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깎아 세운 삼각과 같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인데, 일명 화산 또는 화악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북한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토축산성으로 사적 제162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대서문과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시설의 일부가 남아있는 이 성은 삼국시대부터 한강유역을 차지하려는 고구려, 신라, 백제 사이의 쟁탈지였다. 북한산성은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할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에 축조한 것이다. 이곳에서 백제의 주력군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였고 백제 13대 임금인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정군의 중심요새가 되어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참살하는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북한산성을 포위, 함락시켜 475년(개로왕 21) 왕을 죽이고 백제의 도성을 유린하였다. 백제는 결국 공주의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신라와 힘을 합쳐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다. 그러나 553년(진흥왕 14)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어기고 백제의 영토인 한성지역을 점령하였다.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세워진 것이다.
603년(진평왕 25) 8월 고구려 장군 고승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자 진평왕 자신이 1만의 군사로써 이를 구원하였다. 또한 661년(태종무열왕 8) 5월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강인 장군 생태와 함께 20여일 간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쌍방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이때 성주 동타천은 2,800인의 군민과 필사적으로 이 성을 방어하였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였으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삼국 통일계획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동타천은 대사(제12관등)에서 대나마(제10관등)로 승급되었다. 그후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고종 19)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우왕 13)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츰을 자주 겪으면서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선조 29년에 조정에서는 이곳 북한산성을 도성 외곽성으로 축성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어났다. 그때 병조판서였던 이덕형이 '도성 근처에 이런 형세가 있는데 그대로 버려 두는 것이 가히 아깝다'고 하였다. 그뒤 1659년(효종 10) 송시열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였다. 하지만 북한산성의 축성에 대해서 찬반양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대 숙종은 '북한산은 곧 온조의 옛 도읍지이며 도성 또한 지극히 가깝다. 염려되던 물도 산성 안에는 넉넉하다고 하니 지금 축성하는 것이 옳다.
큰 계획이 이미 정해졌다면 재력의 많고 적음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곳의 돌을 이용해서 쌓으면 어찌 많은 비용이 들겠느냐'며 결국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북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시단봉 위의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졌으나 성채는 잘 남아 있다.
위문에서부터 백운대로 오르는 길은 암벽등반처럼 아찔아찔하다. 오재성 판사의 이야기대로 평일이라면 사람이 북적북적해서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는데 오늘은 비가 내린 뒤끝이라 금방 오를 듯 싶다. 이곳에 등산로를 내기가 수월찮았을 터인데 우리는 지금 뚫어 놓은 길을 마음 가볍게 가고 있으니 고맙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너무 자연을 파괴했다고 푸념이라도 해야할까? 발아래 인수봉은 흡사 작은 숫마이산을 연상시키는데 벌써 몇 사람은 암벽타기를 해서 올라가 있다. 저 인수봉은 그 바로 아랫자락인 깔딱고개에서 올려다보면 불알처럼 보인다는데 그 불알이 부아(負兒)-불(火)-화(火)-화(華)로 변천하여 북한산이 '화산'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드디어 백운대 정상에 선다. 백운대 정상에 꽂힌 태극기는 한족이 찢어진 채로 바람에 펄럭거리고 뾰족뾰족 매화꽃잎처럼 솟아있는 만경대 너머로 구름은 쉴새없이 넘나든다. 저 만경대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로부터 천도의 명을 받았던 무학스님이 올라 나랏일을 생각했다고 하여 국망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나는 조용주씨의 휴대폰을 빌린 뒤 "나 지금 백운대에서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잠시 바라보는 사이로 구름은 다시 산 아래에 가득하다. 쉴새없이 가고 쉴새없이 밀려오는 구름의 물결이여, 나는 지금 북한산 백운대에서 바람결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겨울이 성큼 내 가슴에 밀려온 듯 손이 시려온다. 저 멀리 보이는 비봉에는 이 지역을 차지했던 신라의 진흥왕이 진흥왕순수비(국보 3호)를 세웠었는데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고 모형의 유지비가 서있다.
봉우리 봉우리마다 불그스레함이 더함을 보고 가을이 이렇듯 깊고도 깊음을 실감한다. 발아래 원효봉 아래 쌓여진 성벽은 구불구불하고 그 너머 멀리 내가 걸었던 한강이 그림처럼 보일 뿐이다. 원효봉, 용촌봉, 문수봉, 노적봉, 만경대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서있는 백운대를 향해 가을 노래를 부르는 듯 싶은 시월 어느 날의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리라 마음먹으며 하산길에 접어든다.
아무도 먹을 것을 싸오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하산길에 다시 퍼마신 약수암의 물은 진국이었고, 얼굴을 씻었던 골짜기에서 다시 얼굴을 씻는다. 시원하다, 문득 나뭇잎들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려앉고 내리막길 산행도 이제 멀지 않다. 결국 박기성씨는 만나지 못하고 가는구나 생각하는데 웬걸, 팔경정 앞에서 박기성씨가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질기고 기이한 인연이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어디 사람들의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베고팠던 우리들은 팔경정에서 막걸리 두병에 파전을 시켰다. 먼저 나온 김치는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렇다. 조선사람은 맛있는 김치 한가지만 있어도 감격한다. 이렇듯 감칠맛 나는 김치에 반한 우리들의 발길이 또 다시 이곳으로 오게 될지 안 오게 될지 그 또한 모를 일이다. 대낮에 마신 술 한잔에 풀어진 눈길 위로 구름 걷힌 북한산은 푸르고 붉게 물 들어가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한강을 건너며 바라본 북한산 위로 내 마음의 슬픔처럼 정호승의 시 '서울의 예수' 중 한 구절이 정신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교통
지하철 3호선 구파발 역에서 내려 156번 시내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팔경정의 김치와 막걸리 맛이 독특하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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