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
벙커는 숨은 그림 곁에 오래 머무는 이름이었다
잎을 태우고 그늘을 만들고 열매를 매다는 나무면 좋겠지
벙커에 물을 채우면 상수원이 되고
감자나 와인을 저장하면 창고가 되는
본적없는 그림을 본 적 있다
그 그림에 총을 겨누는 사람이 있고
한마리 짐승이 수납과 저장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다
강이 범람하고
폭염이 와도
스스로 변온할 수 있는 짐승
깡마른 바닥에
짐승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1제곱킬로미터당 평균 5.7개의 벙커로
법과사랑을 만들고 병원과 학교를 짓고
죄와 종교를 낳는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손님을 환대하라
약자를 보호하라
베사는 피로 물들수 있다
서로를 매립하는 구조
은폐와 의심을 한 움큼씩 쥐어
주머니 속에 넣어준다
그림 속에선 동그란 주먹
동그라미 속엔 뼈가 있다
주먹을 쥐었을 때만 뾰족해지는 마음이 있듯이
벙커 속엔 아동복지기금도 옛 왕가의 녹슨 칼도 있다
들통날 것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숨겨온 것들뿐
볼트와 너트로 잠긴 철문을 열면
웅크린 어둠이 먼저 뛰쳐나온다
벙커 속에선 세상을 예언할 수 없지만
살기 위해
벙커는 벙커로 지워진다
거기, 벙커가 있었다
거기 당신이 있었다
내란의 밤이 있었다
죽은 새끼를 끌어안고
벙커 속에 들어가 눕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장총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우산을 쓴 아이들이
거리에 목을 매단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다
어둠만이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는 벙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전시되어 있다
_계간 『유심』 (2026년 봄호)
_이소연 시인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거의 모든 기쁨』,『콜리플라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