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즈리아
취약성: 성장의 특징
우리는 스스로를 취약한 상황에 내맡길 때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안락한 영역을 벗어나기를 거부한다면, 결코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crab)를 생각해 보십시오. 게는 낡은 껍질 속에 웅크리고만 있다면 새로운 껍질을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게가 자라면서 더 큰 껍질이 필요해집니다. 그래서 게는 낡은 껍질을 벗어던지고, 잠재적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부드러운 모래 속에 파고든 뒤, 새로운 껍질을 만들어 냅니다.
게는 껍질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극심한 취약함을 겪지만,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영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올라가기 위해서는 떨어질 가능성을 감수해야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홀로
이번 주 토라 구절은 임산부를 언급합니다. “여자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때...”
임신부터 출산까지의 길은 길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또한 기쁨이 가득한 여정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기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아기가 잉태된 순간부터 어머니가 임신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녀는 아기를 적극적으로 돌볼 수 없습니다. 태아에게 이 시기는 엄청난 취약함을 겪는 시기입니다.
다윗 왕이 기록했듯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받아 주셨나이다.”(시편 27편). 라시는 다윗이 부모가 자신을 잉태한 시점과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시점 사이에 흐른 긴 시간을 언급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두 분 모두 잠들었을 때, 방금 창조해 낸 태아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 태아는 의식이 없지만, 영혼은 의식이 있습니다. 영혼이 깊은 사람인 다윗은 그 시절 자신의 영혼이 겪은 트라우마와 그것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을 예리하게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 트라우마가 정서적 버림받음이나 불안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용기와 담대함에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는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비록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품에 안아 주셨던 것입니다. 이 생각은 다윗의 평생 동안 그에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내가 태어나기 전 그 끔찍한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였던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셨다면,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실 것이다.‘
누락된 글자
우리가 가장 취약한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시나요?
다윗 왕은 시편 145편에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든 글자를 순서대로 배열한 두운시(acrostic(를 엮었는데, ‘넘어지다’를 뜻하는 ‘노펠(נוֹפֵל, nofel)’이라는 단어가 ‘눈(נ, nun)’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글자만은 의도적으로 제외했습니다.
다윗 왕은 ‘넘어짐’을 주제로 삼고 싶지 않았기에 그 글자를 생략했지만, 바로 다음 구절인 “하나님은 넘어진 자를 붙들어 주십니다”에서 이를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넘어져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넘어짐은 단지 다른 형태의 발전일 뿐입니다.
넘어지는 법과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정상에 오를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통해 교훈을 얻지 않고서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졌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며, 그분께서 지탱해 주실 수 있는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련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를 주십니다.
창조의 첫 번째 토요일 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습니다. 이전에 어둠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아담과 이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공포와 취약함이 가득한 시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해를 다시 떠오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담에게 불을 피우는 법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취약함은 좌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둠이 내리지 않았다면 결코 배울 수 없었을 무언가를 배우게 하는 원동력이었습니다.
에세이를 쓸 때마다, 창작 과정에서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정체기를 겪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체는 진전의 역행이 아니라 창작 과정의 일부입니다. 창의적인 에너지가 분출되기 위해서는 먼저 억제되어야 합니다. 댐에 고인 물처럼 에너지와 힘을 모은 뒤, 그 에너지가 터져 나올 때 비로소 창의적인 추진력이 놀라운 명료함의 빛을 선사합니다.
삶 속에서
이는 삶의 모든 면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좌절을 겪을 때마다, 그것은 폭풍 전의 고요함입니다. 그것은 곧 긍정적인 것으로 극복될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과정의 일부입니다.
결혼을 하고 배우자가 자신의 소울메이트이며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겟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됩니다. 그때 마음은 산산조각 나고, 완전히 버림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잘못된 사람에게 믿음을 두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지고, 그 무력감이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그것은 수익성 좋은 고객, 꿈에 그리던 직장, 아름다운 집, 절친한 친구, 젊은 시절의 추억, 사랑하는 부모를 잃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실이든, 어떤 어둠이든, 그 목적은 당신을 새롭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임을 알아두십시오. 일시적인 좌절이 없었다면 당신은 결코 그곳에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시적인 소강 상태 동안,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들판
도시에서 온 한 남자가 농장에 사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아침에 밖으로 나가 새파란 풀밭 위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친구는 트랙터를 끌고 나와 흙을 갈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푸르름은 이제 지저분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고, 뒤집힌 갈색 흙덩이들 사이에는 아주 작은 씨앗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친구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화가 나서 농장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 들판은 싹을 틔운 작물로 생기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파괴적으로 보였던 그 일이 성장에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은 들판이고 우리의 꿈은 씨앗입니다. 환경은 갈색 흙덩어리들입니다. 신성한 농부가 뜻을 펼치실 때, 우리의 들판은 시련과 슬픔이라는 흙덩어리에 심어진 기쁨의 씨앗들로 싹을 틔웁니다.
By Rabbi Lazer Gurk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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