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 6월호
다낭의 미궤비치에서
박종숙
야자나무가 바닷가 둘레에 길게 늘어서 있는 남중국 해안은 아름다웠다. 나무와 나무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물빛의 시원함.
끝이 보이지 않는 백사장은 20킬로미터나 길게 늘어서있는데 그곳이 세계에서 6번째 가는 모래 해안이란다.
그 비치 앞에는 고급호텔과 리조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부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요즘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하루에 3,000명씩이나 다낭 여행을 한다고 한다. 사드 문제로 중국과의 교역이 불편해지자 꿩 대신 닭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첫날 우리는 오행산으로 가기 위해 남중국 해안에서 잠시 쉬었다가 떠났는데 마지막 날에도 그 백사장을 거닐며 석별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평범하게만 보였던 미퀘비치는 다낭의 슬픈 역사를 안고 있었다. 바다는 그날도 변함없이 파도를 몰고 왔지만, 모래사장을 덮치는
울음소리는 이방인의 가슴에 뼈아픈 한처럼 들려왔었다. 인도차이나 전쟁은 몇 차례에 걸쳐 베트남이 외세에 침략을 받았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중 1960년대 중반부터 치러졌던 월남전은 우리나라가 참전했던 전쟁이었는데 그때 파월되었던 군인 아저씨와 나누었던
위문편지는 평생 잊지 못할 나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우리 학교는 화천에서 나오는 군인 아저씨들을 환송하기 위해 전 학년이 춘천역에 나가 배웅하는 수고를 번번이 담당했었다.
여고 1학년이었던 나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군인 아저씨들을 위해 위문편지를 써야 한다는 호소에 주소를 건네주었고 1년 반 동안이나 펜팔을 했었다.
그 아저씨는 문장력이 얼마나 좋은지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고 말았다. 나는 그분 편지에 버금가는 답장을 쓰느라고 진땀을 뺐었다.
점차 편지쓰기에 몰두하면서 나도 모르게 분홍빛 감정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때 우리나라 맹호, 백마, 청룡 부대 용사들은 등등한
기세로 베트콩을 전멸시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인다.
베트남은 고대부터 중국, 프랑스
일본에 재배를 받았었고 영국과 미국의 침략을 받으며 외세에 굳건히 대항해온 나라였다. 월남전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내부분열에
휩싸이자 미국이 개입하면서 우리나라에 협조를 구해왔는데 이에 응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피 끓는 목숨을 타국에다 바치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그 보상금으로 우리는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었지만, 미국이 패망하면서 베트남은 사회주의국가로 추락하고 말았다.
북베트남의 주도권을 잡았던 혁명가 호찌민은 오로지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헌신했으므로 지금도 도시 이름을 호찌민으로 명명할 만큼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죽으면서 ‘과거는 잊을 수 없지만, 그것이 미래의 발판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국민들은 그의 말을
신봉하면서 생활전선에 나서서 열심히 뛰고 있어 미래가 밝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한국군이 철수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따이한 2세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었다.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은 일본군 못지않게 극악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우리나라 참전용사들에게 희롱 당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는 뮤지컬로 만들어지면서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으니 전쟁이 나은 상처는 필연적으로 따라 다니게 되나보다.
국가의 이미지를 손상 시킨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선량한 주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였다는 사실이었다.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확인한 것은 마을 주민 135병을 무고하게 죽인 범인이 한국의 참전용사들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위령 비를 세우면서
베트남 국민들은 그 사실을 고발하였지만 그 틈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구순의 할머니는 불구의 몸으로 평생을 살면서도 한국 사람이
밉지 않느냐는 물음에 과거의 일이라고 일축했다고 한다. 김대중, 문재인 대통령이 특사로 다녀가면서 베트남 정부에 공식으로 사과를
한 때문인지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다행히 우호적이라고 한다.
그날 베트남에서 가장 큰 절 영흥사를 돌아 나온 우리는 미퀘비치에서서 멀리 절 마당에 세워진 해수관음상을 의미 있게 바라보았었다.
그 동상은 월남전이 끝나자 갈 곳을 잃은 남베트남의 상류층, 반공주의자, 화교, 몽골족, 미국에 협조했던 한국, 프랑스, 일본인들이
추방당하면서 낡은 배에 몸을 싣고 탈출하다가 풍랑에 휩쓸리고 식량과 식수가 떨어져 바다에 빠져 죽고 실종 되었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동상이었다.
다낭 사람들은 보트피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해수관음상을 세우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나라 잃은 서러움을 절실히 깨달았던
민족의 애환을 우리는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보트피플들은 지금도 전쟁 중에 있는 나라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 아픈 역사를 딛고 다낭은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마침 월드컵 4강전을 치르던 날 승리의 기쁨을 안은 다낭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붉은 옷을 입은 오토바이의 물결이 발 디딜 틈 없이 춤추고 있었다. 흡사 2002년의 우리나라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젊은이들은 거리에 넘쳐나고 고대도시 호이안의 밤 문화는 찬란하였으며 1,000년간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이 있는 바나산은
관광지로 베트남 수입원 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렇게 다낭은 국제도시로 발돋움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곳을 찾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들은 두 개의 상반된 이념이 공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베트남의 지난 역사를
비교하면서 어떤 생각에 잠길는지 추이가 궁금했다.
첫댓글 참전용사 무조건 비난하는 글들 글쎄요?. 무조건 동의하기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