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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소통광장 스크랩 단군조선시대의 신지녹도문 천부경 원본 풀이
bongsun 추천 0 조회 299 13.01.15 17:59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1. 들어가는 말

천부경은 고대 한민족의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고 잘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천부경에 대해 연구하고 해석을 해 왔읍니다.

그러나 천부경에 대한 고대 자료는 몇가지 극히 제한된 자료 밖에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최치원의 한문 천부경에 의존해서 자기 나름대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읍니다.

이 글쓰는 이도 최치원의 한문 천부경을 해석하여 [천지창조의 비의]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보았읍니다만, 신라시대의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한 고조선 시대에 세운 비문의 녹도문 원문이 어떤 것인지 무척 궁금하였읍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많은 분들이 천부경의 신지전자 원문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었서, 그런 연구기록들을 계속 관찰해 보고 있었지만, 한문 천부경과 일치하는 신지전자의 적절한 해석을 지금까지 발견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직접 이 연구에 뛰어 들어 보기로 했읍니다.

 

신지전자는 두가지 고대비문이 사진으로서 시중에 공개되고 있는데,

하나는 28자의 신지전자인 창성조적비 비문이고, 또 하나는 16자로 된 평양 법수교 비문입니다.

이 두가지 비문 중에서 천부경의 원문은 평양 법수교 다리  밑에서 발견된 16자 비문이 천부경 원전으로 알려져 있읍니다.

그런데 이 16자 비문의 글자 배치 순서대로 고운 최치원의 한문 천부경 내용과 비교하면 전혀 의미가 통할 수 있는 부분을 발견 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최치원의 81자 한문 천부경의 각 문장과 신지전자의 각 글자들을 수개월에 걸쳐 여러가지 비교 검토 해 보면서 서로 의미가 통하는 글자를 나열해 본 결과 북한 영변지에서 발표한 글자 순서와 공교롭게도 일치하게 되었읍니다.

결국 1948년 북한 영변지에 수록된 신지전자가 천부경 원전이라고 결론을 짓고, 신지전자 각 글자와 최치원의 한문 번역 천부경의 각 문장을 세밀하게 그 상징적인 의미의 공통점을 도출해 본 연구결과가 바로 이글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원래부터 신지전자가 천부경 원문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그 고대글자를 명확하게 해석하여 한문 천부경과 확실하게 일치한 해설을 아직 본적이 없읍니다.

물론 요즘도 신지전자와 천부경의 관계를 연구하는 분들은 많읍니다.

신지전자에 나타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한문지식등,어떤 전문 지식 같은 것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 같읍니다.

오히려 그런 전문적인 학문과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너무나 단순한 신지전자의 의미를 푸는데 커다란 장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읍니다.

아주 단순하고 소박하게 묘사한 그림문자이며, 오히려 칠팔세정도의 어린이들이 더 쉽고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쉽고 간단합니다.

바로 문자 그자체의 그림을 보는 요령만 잘 파악하면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읍니다.

 

이글의 전체 구성은

첫번째로 14자 신지전자에서 각 글자에 해당하는 최치원님의 한문 천부경 문장을 대응시켜서 비교해 보겠읍니다.

두번째는 한문 천부경의 의미를 간단하게 해석해 보겠읍니다.

필자는 이전에 [천지창조의 비의]라는 제목으로 부로그와 네이버 지식사전에 최치원님의 한문 천부경에 대한 해석글을 올린 바 있읍니다.

이것을 미리 읽어보시면 이 글을 읽는데 사전에 도움이 좀 될 겁니다.

세번째는 신지전자의 그림 구조를 분석하여 설명하면서 한문 천부경의 의미와 일치하는 점을 증명해 보겠읍니다. 

네번째는 신지전자와 14글자가 하나, 둘, 셋,넷,----열, 이라는 우리말 숫자세기와 같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시므로, 이참에 과연 각 신지글자를 우리말 수세기와 비슷한가를 검토해 보겠읍니다.

각 숫자말에 해당되는 옛말의 음운변화를 추적하여, 그 옛말의 기본 어근의 의미가 신지문자 그림 및 한문천부경의 의미와 비슷한가 확인하고,또한 그와 유사한 옛말의 뜻을 찾아 대조하는 방법으로 조사했읍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수를 세는 말로만 알았던 <하나, 들,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이 바로 천부경 그 자체라는 것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천부경을 일상에서 항상 되뇌이고 있었지만, 마치 개가 값비싼 금덩어리를 옆에 두고서 그것이 단순히 쇠나 돌덩어리로만 알듯이, 천부경을 노상 입으로 항상 중얼거리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 의미를 모르고 있었으며, 만일 그것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는다면,<하나,둘,셋,네,--열>의 평범한 일상의 수세기가 오천년전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인 천부경의 바로 그 내용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사건일수도 있읍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단어의 음운변화와 옛말의 어원을 찾아서 여러각도로 탐색해 보았읍니다.

 

2. 한문 번역본의 원전인 신지전자 비문

우리가 현재 천부경이라고 알고 있는 한문 번역본은 신라시대의 학자인 최치원님이 고조선시대의 고대 비문을 발견하여 그 비문의 신지전자를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태백산(묘향산)석벽에 새긴것을 계연수 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단군교에 전달했다는 것과 기타 몇가지 유사한 한문 천부경들이 있는 것 같읍니다.

아래 글은 최치원님의 한문 천부경을 경전으로 정하고 있는 대종교에서 천부경의 유래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있는 글입니다.

 

[ 우리 천손 천민의 배달겨레는 개천 이래로 위대하고 거룩한 3대 경전으로 조화경인《천부경》과 교화경인《삼일신고》와 치화경인《참전계경》이 있다.

81자로 구성된《천부경》은 한배검께서 천부삼인을 가지시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오셔서 신시를 열어 인간을 넓고 크고 유익케 하기 위하여 만백성을 가르치실 적에 조화의 원리 곧 우주창조의 이치를 81자로 풀이한 참 경전이다.
   말로써 전해 오던 것이 신지 혁덕(神誌 赫德)에 의하여 녹도문자(鹿圖文)로 기록되었고, 뒤에 신라의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선생께서 신지[*글을 맡은 사관 벼슬이름]가 쓴 그 천부경이 전자(篆字)로써 옛 비석에 적힌 것을 찾아내어, 그것을 작은 수첩에다 한자로 옮겨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귀중한 경전이 오랫동안 묻히게 되었는데, 특히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유교의 책만을 읽게 하고 이를 돌보지 아니 하였고, 그러는 동안 개천 4363(1916)년에 선천(宣川) 계연수(桂延壽) 선생께서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여 개천 4364(1917)년 대종교에 전했으니,- 중략- ]

 

또 다른 책에서도 이렇게 전하고 있읍니다.

[맥(李陌)이 편찬한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는 천부경 원문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간략한 설명을 해 놓았다.
"천부경(天符經)은 천제(天帝) 환국(桓國)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글귀(書)이었는데, 환웅(桓雄) 대성존(大聖尊)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후,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신라시대 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역시 옛 비석(古碑)에서 신지(神誌) 전문(篆文)으로 새겨진 이것을 보고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 
 

    <대종교의 고은 최치원 한문 천부경>

dnl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하기 이전에 있었던 신지전자의 천부경 비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래서 현재 알려진 신지전자 비문의 몇글자 안에서 최치원의 한문번역의 뜻과 유사한 신지글자를 찾아 보기로 한 것입니다.
 
3. 신지전자(神誌篆字) 고대비문의 몇가지 자료.
신지전자로 된 비문은 몇가지 알려진 것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평양 법수교 아래에서 발견된 비와  중국 산동성 백수현에 있는 창힐의 묘비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장성 조석비와 평양 법수교 비문이 1942년 평양 영변지에 사진으로 발표된 것이 인터넷에 많이 나돌고 있읍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그 비문의 사진이며, 이 중에서 오른쪽에 있는 14자 비문이 천부경으로 알려지고 있읍니다.

 

4. 백수교 비문과 최치원의 한문 천부경
위의 사진 오른쪽이 평양 백수교 비문의 신지전자인데, 두자씩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서 각 문자를 최치원 한문 천부경 내용과 비교해 보면 전혀 공통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한문천부경의 각문장과 14개의 신지문자를 개별적으로 여러번 비교검토하여, 적절한 순서로 배치한 것이 아래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은 본인이 한문천부경의 의미에 맞게 글자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몇달 동안 애써서 순서대로 정렬한 신지문자 순서가 결국은 평양 영변지에서 1948년에 발표한 내용과 일치하였읍니다.
아래 그림은 1948년에 북한 영변지에서 두번째 발표한 신지문자 천부경 그림입니다. 누군가가 새로 그린 것인데, 몇군데 글자가 원래 비문과 모양이 좀 다르게 그려져 있읍니다.
 
앞으로 이 신지전자 배치순서대로 한문천부경의 문장과 비교해 보겠읍니다.
 
5.신지전자와 <하나,둘,셋,--- 열>의 관계.
이 14자 신지전자가 우리가 일상 수를 세는 말인 <하나,둘,셋,---열>이라고 제안한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이 의견에 호기심이 생겨서, 이글에서 혹시나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근거라도 찾을수 있을까 해서 몇가지 검토해 보았읍니다.
이 글에서도 신지전자,한문 천부경, <하나,둘,셋---열>이 세가지가 동시에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는 옛말의 근거가 있는가를 찾아 보았읍니다.
그리고 이 14자 신지전자를 취급하면서 마땅하게 각 글자의 명칭을 뭐라고 칭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 임시로 <하나,둘,셋---열>로 부르면서 그 명칭에 마땅한 의미를 신지문자의 모양과 한문 천부경에서 찾아내려고 시도해 보았읍니다.
그러나 오천년전의 옛말 흔적을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며,
주로 국문학자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의 뿌리"라는 우리말 어원연구서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어원연구서들을 탐색하고, 국어사전 속에서 비슷한 의미의 옛말을 찾는 방법으로 조사했읍니다.
일단은 각 신지문자의 임시 명칭이 필요하므로 "하나, 둘,---열"로 정해서
부르고, 각명칭과 신지문자의 특징에 의미적으로 연결될 수가 있나를 옛말을 추적해서 검토해 보았읍니다.
 
 
6. 신지전자와 한문 천부경의 해석
 
신지전자 각글자에 알맞는 최치원님 천부경의 한문 문장을 맞추어 보겠읍니다.
 
< 하    나 > 
 
<하>
* 신지전자 읽기 : <시작된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 고운 한문천부경 : 一始無始一 
* 한문해석 : 하나의 시작도 없음이 하나의 시작이다.
 
* [해설]
[한문천부경 해설]
하나의 시작도 없음이 하나의 시작이라는 말은 오직 절대 無만 있을 뿐이며,
하나를 시작한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하나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은 하되, 어디로부터 하나가 시작한다는 말이 없읍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 일원적인 <無>상태를 말없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절대본체 그자체인 無 자체가 "一"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일의 시작이 "無"에서 시작했다면 "一" 다음에 줄줄이 사탕처럼 달려서 나오는"이,삼,사,오,륙,칠,팔,구,십"도 결국은 모두가 "無"그자체 일뿐인 것이며,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一"부터 열까지는 모두가 개념적인 허상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絶大無)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 비교]
신지전자의 그림문자를 보면서 한문천부경과 비교해 보겠읍니다.
그림문자를 보면, 마치 위성안테나와 비슷한 접시의 곡선이 그려져 있읍니다.
이것은 하늘공간 또는 해를 그린 것 같이 보입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현상으로 나타난 하늘이나 해라기 보다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절대바탕을 상징해서 그린 것으로 볼 수가 있읍니다.
그 하늘같이 그린 절대본체에서 한줄기 빛이 직선으로 밑으로 그려지다가 옆으로 꺽여져서 빗금으로 내려왔읍니다.
그 아래로 내려 온 직선이 바로 "一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一"이 바로 "시작" 그자체죠.
직선으로 내려온 선이 <一始:하나가 시작하다>라고 고운이 한문으로 번역했읍니다.
그다음에 직선이 내려오다가 중간에 갑자기 꺾어졌읍니다.
이 꺽어진 선이 <無始一> 즉 '하나의 시작도 없다'하는 부정(不定)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위의 "하"라는 그림문자는 <一始無始一>이라는 뜻으로 고운은 해석한 것 같읍니다.
이것은 "無"를 그림으로 표현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빛 한줄기가 나오는 그림을 그려놓고 "그 한줄기 조차도 나오지 않았다"라고 부정의 표현을 하여,
그 본바탕이 "無"임을 역설적으로 표현 한 것 같읍니다.
이 부정을 의미하는 빗금은 뒤에도 몇군데 나와 있읍니다.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하나"의 의미찾기
그런데 위의 신지전자를 순수 우리말 <하>로 읽을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를 검토해 보겠읍니다.
우리말에 "ㅎ." 는 하늘,해, 하느님, 하얗다, 크다,등 태양이나 빛 또는 하늘 무한히 큰것에 관계된 말이 많읍니다.
위의 위성 안테나 접시 같이 생긴 곡선도 하늘이나 해를 상징한 것 같읍니다.
또한 하느님,즉 보이지 않고 높은데 있다고 여기는 무한한 절대신도 역시 하늘이나 해와 같은 존재로써 상징화 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고 전체에 편재되어 있는 절대바탕을 둥그런 하늘이나 해같이 표현한 것 같읍니다.
 
국문학자 서정범 박사의 명저작인 "우리말의 뿌리"라는 책을 보면,
{ㅎ.나(一)은 "ㅎ.ㄷ.ㄴ"의 어근 "ㅎ.ㄷ"의 꼬리음 ㄷ 이 ㄴ으로 바뀌면 "ㅎ.ㄴ"이다. 여기에 접미사 "아"가 붙어서 "ㅎ.나"가 된다.
그러므로 "ㅎ.ㄷ" > "ㅎ.ㄴ" > "ㅎ.아" > "ㅎ.나" > "하나"의 형성이라 하겠다.}
라고 "하나"의 음운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을 추정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위의 서정범교수님은 순수한 옛말의 음운변화과정에 대해서만 설명하신 것입니다.
 
천부경의 신지문자 구조를 살펴보면, "빛 한줄기가 나오는 것도 없다"라는 "無"자체가 "하"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수 있읍니다.
이 천부경에서는 "하"가 "아무것도 없는 본바탕"을 말하는 것 같읍니다.
현상계에서 가장 크고 높은 것은 하늘이나 해이지만, 보이지 않는 절대바탕을 그림으로 표현 할 수 없으므로, 일단 하늘에서 나오는 한가닥 빛이 나오는 것처럼 그려 놓고, 그 시작조차도 없다고 부정적 표현을 함으로써, 그것으로 절대바탕인 "無"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천부경에서 의미하는 <하나>란 <無에서 시작하는 無> 또는
<無의 절대바탕>이 실제적인 뜻입니다.
 
원래 일반적으로 말하자면,"하나"란 "비롯되다" 또는 "시작한다" 그리고 "해에서 나온다"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따라서 위의 그림문자를 보면 "ㅎ. 에서 온 것"라는 말을 단축해서 <하나> 라고 부른 다고 볼 수도 있겠읍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말하자면 빛과 같은 존재죠.
그러나 시작된 것도 없으니, 그대로 절대바탕인 無 본체 자체가 시작인 것입니다.
참고적으로 우리나라 말과 뿌리가 거의 같은 일본어의 "一"인 "히토"라는 말도
"비롯되다", 또는 "시작하다"(始)라는 뜻입니다.
 
<나>
 
* < 신지전자 나 >- 이세상은 세가지 요소로 나눠지지만,
                    본바탕은 아무 변화도 없느니라.
* 한문원문 : 析三極無盡本
* 한문해석 : 삼극으로 나눠지지만 본바탕은 변함이 없다.
* [해 설]
[한문천부경 해설]
원래는 <하나>를 같이 묶어서 해설해야 하지만, 고운의 한문천부경에는 문장이 나눠져서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한문 해석을 위해서 따로 나누어서 해설하고 있읍니다.
 
하나는 절대본체이며, 이것이 세가지로 나누어지지만,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본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세가지 기본요소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요소가 한문 천부경에서는 天,地,人,으로 묘사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보는 현상세계의 하늘,땅,사람을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하늘,땅,사람도 포함되고 있지만, 그것들 보다는 더 근본적인 기본요소를 의미하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은 공간,시간,생명기운(의식), 이 세가지를 의미하는 것이죠.
또 다른 표현을 하자면 조화성,활동성, 불활성, 이세가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는 절대신 밑에 대략 삼신(三神)의 상징적인 신들이 배치되어 있읍니다.
인도의 흰두교를 보자면 부라흐마(창조),비슈누(유지),쉬바(파괴),의 세신이 있고, 기독교의 성부,성자,성신, 그리고 불교에서도 그런 비슷한 개념들이 있읍니다.
절대 본체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 창조성(상승활동력) 조화성(유지력), 소멸성(파괴 불활성)이라는 세가지 기본요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요소는 절대본체 속에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나타나지 않지만,
이원화되어 그림자가 비치추어지면 이세가지 활동이 활성화되어, 5가지 물질원소인 地水火風空과 활동성,유지조화성,소멸성의 세가지 활동들이 서로 결합해서 수억천만의 다양한 삼라만상을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본체자체는 전혀 아무런 변화없이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죠.(절대존재)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 비교]
이제 신지문자 <나>에 대하여 고운이 한문으로 해석한 내용을 보겠읍니다.
그림문자를 보면 수평으로 직선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세개의 작은 직선이 그려져 있읍니다.
이 그림문자만 보아도 < 析三極無盡本:3극으로 쪼개지는데 바탕은 다함이 없다>라는 의미를 쉽게 한눈으로 알수가 있읍니다.
신지문자에서 수평으로 그은 선은 대개가 절대본체의 움직이지 않는 침묵상태를 상징합니다.
또한 수평선 위에 세개의 선을 그은 그림도 절대본체 속에 天地人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상태가 절대 無이며, 이 無를 <하나>라고 부르고 있읍니다.
 
["나"라는 말] 
위에서도 말했읍니다만,"하나"란 "늘에서 온 것"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로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말하자면 빛과 같은 신의 존재죠.
<나>라는 신지전자 그림을 보면 수평으로 그은 선에 세개의 뿔같이 천지인을 표시했는데, 이그림은 마치 신라시대의 금관의 장식구조와 같읍니다.
그당시 아마도 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이 왕관에  천부경의 "나"라는 글자와 같은 장식이 있다는 것은 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라는 권위를 표시하는 표상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언제부터인지 "나"라는 말은 "자기자신"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로 쓰고 있지만,
고대에는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온 왕만이 "나"라고 불렀는지 모르겠읍니다.
우리가 절대본체를 보통 진아(眞我) 또는 참나라고 하는데, 이 <나>라는 말이 천부경에서는 <절대본체>를 이르는 것이며, 절대본체가 <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자기자신을 "나"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러한 연관이 혹시 "하나,둘,셋,--"으로 표현되는 고대천부경의 발음과 연관이 되어 저절로 자기를 <나>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입니다.
신지전자의 "나"라는 글자는 바로 참나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말은 <참나> 또는 <無我>와 같은 의미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읍니다.
우리가 보통 <나>라고 자신을 부르고 있지만, 그 <나>라는 말이 실은 천부경에서 <하나>라는 말에서 나온 <절대 바탕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절대존재> 그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라시대의 금관장식을 보면 천부경 <하나>의 신지문자와 그 장식이 비슷합니다. 정면 맨 꼭대기에 태양을 상징하는 동그란 원이 <하>를 상징하는 조형물 같고, 그 밑으로 신지문자<나>와 같은 장식물이 상하로 세개가 나란히 있읍니다. 이는 1,2,3 과 4,5,6 과 7,8,9,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읍니다. 또 주변에 수십개의 푸른 옥돌로 만든 작은 씨앗 또는 태아같이 생긴 옥돌은
천부경에서 <셋>인 <생명기운의 씨앗>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왕관이 상징하는 것이 <하나-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권위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천부경에서 표현하는 상징들이 신라시대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 같읍니다.  
<하나 : 절대 본바탕>
 
 

 <둘>    <셋>

 * <신지문자 둘, 셋>-세요소가 합쳐져 생명기운이 되지만 본바탕이므로

                    아무것도 없느니라.    
*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 절대 일원화에서 잠재상태로 있는 天(공간)의 요소가 첫번째로 있고, 天이 움직이는 地(시간)의 요소가 두번째가 되며,
天과 地가 합쳐진 人(생명기운의식)의 요소가 세번째로 되지만,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것이므로 아무것도 없다. 
 
* [해설]
[한문천부경 해설]
둘,셋을 한번에 묶은 것은 최치원님 한문천부경의 문장이 둘,셋을 한문장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묶었읍니다.
 
<天一一>은 절대본체 그자체를 말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절대바탕 그자체는 항상 변함없는 정지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움직일 경우에는 공간적인 요소를 말하며 공간성이기도 합니다.
<地一二>는 움직이지 않을 때는 절대바탕 그자체(地一)이지만, 앞으로 움직일 때에 절대바탕이 변화되는 순서(二)를 표시한 것이며, 창조성 또는 활동성, 시간요소의 잠재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人一三>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절대바탕(人一)이지만, 앞으로 움직일 때는 地에 이어서 세번째(三)로 변화되는 것(合)을 말합니다.
만일 절대바탕이 움직이면, 절대바탕인 天이 地로 변하고 天과 地가 합쳐진 것이 人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비유를 써서 설명해 보겠읍니다.
어떤 연못표면에 갑자기 물결파동이 일어나는 순간을 보면 처음 물결이 일어나는 순간은 활동성이 작용해서 물결이 올라왔다가, 다시 소멸성에 의해서 내려가고 이 상승성과 하강하는 소멸성이 합쳐서 한파동이 생기며, 이 한파동 상태를 위에서 말하는 人, 즉 조화성을 말합니다.
조화성은 침묵하고 있는 본바탕(1)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상승력(天,공간성)이 움직여서 그 다음에 하강력(地,소멸성)이 작용하여 이 상승성(天,공간성)과 하강성(地,시간성)이 합쳐진 것이 조화유지성(人,한파장, 생명기운,의식)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변화하는 것은 이원화가 시작되는 순간에 이렇게 변할 뿐이고,
지금 여기의 절대본체 상태에서는 활성화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절대의식)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비교] 
신지문자 <둘,셋>과 한문 번역 내용을 비교해 보겠읍니다.
<둘>   : 天一一 地一二 
위 그림의 맨위의 수평선 ㅡ이 절대본체의 바탕(天11)을 그린 것입니다.
그다음 ㅣ이 위에서 아래로 그린 직선은 절대바탕의 움직임(변화)을 그린 것이죠.
그 다음 두번째 ㅡ 수평선은  절대바탕이 地12로 내려온 상태를 그렸으나, 변함없는 수평선이므로 그대로 절대바탕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맨밑의 ㅣ의 수직선은 地12가 다시 변화한다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셋>   : 人一三
위 그림은 새총같이 생겨 가지고 가지가 두가닥의 나무가지처럼 보이는데,
맨 위의 두 가닥은 각각 天과 地이며, 天의 가지와 地의 가지가 합쳐져서
몸통까지 세가닥으로, 이 전체 나무가지가 [人]을 상징하고 있읍니다.
이 나무가지를 보면 天(1) + 地(2) = 人(3),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나무가지의 밑부분은 갑자기 옆으로 꺽어져 있읍니다.
이 꺽어진 것은 <無> 또는 "아니다"라는 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본체바탕의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아무것도 없다"라고 마지막에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위의 <하나>에서도 빗금으로 "없다"라는 표시를 한바 있읍니다.
그런데 고운의 한문번역에는 이것을 人一로 표시했읍니다.
고운 최치원이 이 신지문자 두개를 합쳐서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이라고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참으로 기막히게 멋진 번역입니다.
한마디 군소리없이 아주 깔금하게 번역을 했읍니다.
이 <三>인 나무가지를 최치원은 <人>이라고 한문으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전체생명기운의 씨앗>을 말합니다.
생명기운의 가장 기본요소인데, 이 생명기운이란 바로 다름아닌 <의식>입니다.
의식의 씨앗상태인 것이죠.
이 절대상태에서 三의 생명기운씨앗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잠재된 의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三의 순수의식이 4,5,6에서 계속 모양이 약간씩 다르게 나옵니다. 나무가지 같이 생긴 순수의식의 씨앗은 의식의 파동성을 말합니다.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둘"의 의미 찾아내기]
우선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의 뿌리"에서 보면,
{국어에는 <둘>과 <두블>의 두형이 있었다고 하겠다. 양주동 교수는 <두블>외에 <둘>형이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두블>은 <둘>에 접미사 <웁>이 붙은 <둘웁>이 두룹>두웁>둡 으로 되고 여기에 접미사 <을>이 붙어 <두블>이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둘의 어원에 해당되는 단어들과 신지문자의 그림이 상징하는 의미에 적절한 어휘는 찾지를 못했읍니다.
신지문자를 보면 맨위의 수평선이 아래로 내려와서 다시 수평선이 그어진 것은 天이 地로 변하지만, 그대로 天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즉 변함이 없이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변한다는 말만 했지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읍니다.
우리 옛말에 둘치,둘암소,둘암닭,들암개,라는 말이 있는데, 새끼나 알을 못 낳는 암짐승을 말합니다. 
또한 둘은 미련하고 움직이지 않는 굼뜬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새끼를 낳아야 할 암소가 새끼를 못낳는 것과 같이,
<天이 움직이면 당연히 地가 되지만 ,실지로는 地가 되지 않고 그대로 天이다>라는 의미에서 <둘>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天>은 절대바탕의 공간요소이고, <地>는 절대바탕의 시간요소인데,
움직이는 시간요소인 <地>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둘>이라고 말한 것 같읍니다.
시간이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개념적인 시간> <또는 개념적인 地>라는 것입니다.
즉, "새끼를 못 낳는 암소의 새끼"는 개념적이고 꿈같은 환상을 말합니다.
인도의 베단타 수행체계에서 "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의 아이"를 이 꿈같은 현상세계라고 묘사합니다. 실제로는 없는 것인데 있는 것으로 말할 때에 마야 또는 환상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변화하지도 않는 시간>이 <둘地>이며,
이 <둘지>를 <둘>로 부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둘>이란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읍니다.
우리말에 <둘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미련하고 둔하다>라는 뜻입니다.
<둘의 말뜻 : 움직임이 없는 시간요소>
 
[신지전자에서 우리 말 "셋"의 의미 찾아내기] 
신지문자를 <셋>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신지전자 그림에서 찾아 보겠읍니다.
신지전자 셋의 나무가지를 보면 밑부분에 빗금이 그려져 있어서 이 빗금은 "부정 또는 無"를 표시한다고 위에서 말했읍니다.
따라서 "셋"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숨기운 또는 생명기운(의식의 씨앗)>이라는 뜻이 있읍니다.
 
국문학자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의 뿌리"라는 책에서 "셋"의 음운변화에 대한 문장을 잠깐 인용해 보겠읍니다.
{"셋"의 어근(語根)은 "설"이라고 여겨진다.설>설-잇>서-릿>서잇>셋}
이렇게 "셋"이라는 소리의 운음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셋"의 어근인 "설"이 무슨 뜻인가를 알아보겠읍니다.
"설"은 국어사전에 보면"동사나 동사에서 전성된 명사 앞에 붙어서, 불충분함을 나타냄, 예를 들면, 설구이, 설삶다,설익다, 설죽다 따위",라고 설명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위의 신지전자의 그림에서 나무가지로 표시된 "三"의 꼬리부분에 빗금이 그어진 표시는"아직 활성화 되지 않고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는 의미와 일치합니다.
셋의 음운변화과정에서 "설"이 "설-잇"으로 변화했는데, "잇"은 "잇다"의 어근인 "잇"이 붙은 것으로 추측되며, "잇다"란 "앞뒤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잇는다"라는 뜻이 있읍니다.
그런데 "셋"이라는 글자에서 "ㅅ"받침은 공교롭게도 "넷,다섯,여섯"까지 연속해서 "ㅅ"받침이 붙어 있읍니다.
"ㅅ"은 "숨"이라는 우리말의 첫글자이며, 숨은 생명 그자체이고, 이것이 바로 생명기운 또는 의식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또 한가지는 위의 음운변화 중에서 <서릿>이라는 글자가 있읍니다.
사전에 <서리>라는 말 중에서" 무엇이 한군데 많이 모여 있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읍니다. 한점에 밀집되어 있다는 뜻인데, 이 단어가 <셋>의 의미에 가까운  것 같읍니다. <셋> -><서리 ㅅ>로 분해하여 <한점에 뭉쳐진 생명기운>이렇게 되겠죠.  이렇게 라도 <셋>에 대한 어원을 조사해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이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숨(생명기운씨앗)이 절대바탕에 그대로 잠재상태로 뭉쳐져 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시 말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기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숨"이란 단순히 호흡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기운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목숨"이라고 하고, '죽는다'를 "숨이 끊긴다" '살아 있다'를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하고 있죠.
그래서 숨은 곧 생명이며, 생명기운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기운이란 바로 의식 그자체인데, 여기서는 <의식의 씨앗> 또는 <생명기운>이라고 부르겠읍니다.
이것을 고운 최치원은 사람"人"으로 번역했읍니다.
참고적으로 <셋,넷,다섯,여섯>의 네개에 각각 "ㅅ"받침이 있는데, 신지문자의 그림을 보면 똑같이 <셋,넷,다섯,여섯>에 해당하는 그림문자에 "나무가지"로 상징하는 그림이 있으며, 이것은"생명기운" 또는 "순수의식"을 그린 것입니다.
-셋(서릿) : <천지인이 한점에 뭉쳐있는 움직임없는 생명기운 씨앗(本種)>-
 

<  넷  > 

* <신지문자 넷>- 전체가 하나의 순수한 생명기운으로만 펼쳐있느니라. 
* 一積十鉅無?化三 
* 하나 속에 전체가 뭉쳐져 있는데, 
경계가 없을 때는 오직 생명기운 三만이 전체에 두루 펼쳐져 있다.
(의식의 공간적 요소)
 
*[해설]
[한문천부경 해설]
절대바탕인 "1"안에 전체가 하나로 뭉쳐져서 들어 있는데, 이것이 밖으로 나오게 될 때에 어떤 조건화를 만드는 경계, 즉 육체 등의 방해나 간섭이 없다면 전체가 순수의식인 三으로 동일하게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태양에서 직접 나오는 순수한 태양빛 자체는 밖에서 어떤 장애물이나 간섭이 없다면 그대로 태양에서 나온 순수한 빛 그자체로 전체에 펼쳐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절대바탕이 이원화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의식의 공간성 요소를 말하며, 그 자체는 움직임이 전혀 없고 변형없는 순수한 의식이기 때문에 절대본체의 특성과 다르지 않읍니다.(의식적 공간)
 
[신지전자와 한문 천부경 비교] 
신지문자 "넷"과 한문문장을 비교 검토해 보겠읍니다.
왼쪽 그림문자를 보면, 가운데 수평선을 중심으로 상부(1,2,3)와 하부(4,5,6)에 각각 세개의 짧은 선이 그어져 있읍니다.
그리고 왼쪽의 첫번째(1) 위에 있는 선에서 부터 수평선을 가로질러 오른쪽 하부의 끝선(6)까지 한선으로 그어져 있읍니다.
가운데 수평선을 중심으로 상부의 세가닥(1,2,3) 선은 일원적인 天地人 절대본체상태이고, 하부의 세가닥 선(4,5,6)은 절대본체가 움직일 때에 이원화(그림자)되는 의식의 天地人을 그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문자는 "1"이 전체(1,2,3,4,5,6)에 두루 펼쳐져 있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것이죠.
 : < 一積十鉅 ; "1"이 전체에 펼쳐져 있다.> 
 
그 다음 오른쪽 문자를 보면 "三"인 생명기운(순수의식)의 나무가지가 두개나 있읍니다.
왼쪽에 있는 나무가지는 꼬리를 바탕에 길게 내려 놓고 있죠.
이것은 순수의식인 "三"이 "움직임이 없다"는 표시이며, 절대바탕에 누워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누워있는 꼬리의 앞부분을 자세히 보면 약간 몸통 쪽이 들려서 둥그렇게 되어 있읍니다. 이것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표시입니다.
그 꼬리 위에 또 하나의 三인 나무가지가 꼬리에 어떤 변화도 없이 뻣뻣이 서 있읍니다.
이 왼쪽 나무가지가 三이 절대바탕에 누워있다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에,
"三"인 순수의식 그 자체로써 변형없이 그대로 전체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 입니다.

이것은 절대바탕의 한 부분이 밖으로 이끌려 나오는 순간인데, 절대바탕이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그림자로서 밖으로 이끌려 나온 의식의 공간성을 표시한 것입니다.

 :  < 無櫃化三; 경계가 없을 때는 三만이 펼쳐진다>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넷"의 의미 찾아보기
위의 두개의 그림문자가 우리말로 "넷"라고 읽을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는지 검토해 보겠읍니다.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 뿌리"에서 "넷"의 음운 변화를 참고해 보겠읍니다.
{넷은 널>널-잇>너-잇>넷, 으로 변화했다.}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여기서 "너-잇"은 "넓게 있다"라는 합성어입니다.
"너비"는 "넓이"의 옛말이라고 사전에 있읍니다.
신지전자에서 이전에 있던 "셋"이 그대로 밖으로 이끌려 나오는 상태를 "넷"이라고 부른 것 같읍니다.
신지전자 그림과 고운의 한문번역에서 보자면,
"셋"이 밖으로 이끌려 나오면서 <넓게> 펼쳐진다는 의미의 그림글자이므로
"셋" + "너비"가 합성된 소리가 "넷"으로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읍니다.
그래서 "셋"과 '너비'의 앞문자인 "ㄴ"과 합해져서 "넷"으로 변형되었다고 볼 수있읍니다.
"넷" : < 넓게 펼쳐져 있는 생명기운(遍在)>
 
참고적으로 "넷"의 옛말은 "?"도 있었읍니다.
그런데 옛말을 전체적으로 찾아보면, "하나"가 "하낳", "둘"이 "?", "셋"은 "?"
"넷"은 "?", 이렇게 하나에서 넷까지 공통으로 "ㅎ"밑받침이 들어가 있읍니다.
물론 이것은 조선초의 조선말을 한글로 표기하는 방법이 지금과 다른 개념으로 ㅎ자 소리로 표기했는지는 모르겠읍니다만, 현대의 표기에서는 하나와 둘에서는 이 ㅎ받침이 사라져 있읍니다.
그런데 하나,둘,셋, 까지는 절대본체상태인데, 넷도 또한 절대본체와 같은 움직이지 않는 순수의식 상태이므로 절대본체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옛말에 "ㅎ"받침의 발음이 이 "절대바탕"에 관계된 아주 특별한 "ㅎ 발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ㅎ"은 하늘,해,희다,하느님,등의 높고,고귀하고,순수하고,신성한 소리이고, 신적이며,우주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에 많은데,
하나~열까지의 수에서 유독 절대본체상태인 하나,둘,셋,넷과 앞으로 나올 아홉(사람)에만 이 "ㅎ"가 들어가 있읍니다.
이 "ㅎ"받침 발음은 다른 글자의 발음과는 좀 다르게 끝에서 '길게 내쉬는 숨'이며,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몸 아랫배의 단전에서 시작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쉬는 깊은 숨이기 때문에, 하낳,?,?,?을 입으로 세면 자동적으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게 되고, 호흡이 아랫 단전을 중심으로 되기 때문에 육체도 안정되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원래의 "ㅎ" 받침음이 사라지고 짧은 호흡으로 끝나는 "ㅅ"받침으로 변형이 된 것 같읍니다.
만일 앞으로 "하낳 ?,?,?---열"을 신성한 신의 경전으로 여겨서 "명상의 만트라"로 사용한다든가, 조용히 쉴 때에 눈감고 마음 속으로 "하낳,?,?--열"을 암송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으면, 일상적으로 돈을 셀때라든가 물건을 셀때의 "하나,둘---열"이라고 평범하게 발음할 것이 아니라, 옛말의 발음을 흉내내서
"하나~ㅎ, 둘~ㅎ, 세~ㅎ,네~ㅎ --열"이렇게 숫자 맨끝 발음을 내쉬는 숨으로 약간 ㅎ자 발음을 길게 끌면서 수를 세면 마음을 더욱 느슨하게 풀어질 수가 있겠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 까지만 "ㅎ"받침발음이며, 다섯,여섯은 그대로 짧게 끊어지는"ㅅ"받침의 발음입니다.  
 

< 다 섯 > 

* <신지문자 다섯>- 생명기운이 움직이니 
                   전체가 이원화로 나눠지느니라. 
*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 절대바탕의 움직이지 않는 일원화 침묵상태에서 생명기운씨앗 三에 움직임이 일어나므로서,전체가 이원화상태로 나누어진다.
天二三은 天이 둘(二)로 나누어져 움직이는 생명기운(三)이며,
地二三은 地가 둘(二)로 나누어져 움직이는 생명기운(三)이며,
人二三은 人이 둘(二)로 나누어져 움직이는 생명기운(三)이며,
의식 그자체이다. 
 
* [해 설]
[한문천부경 해설]
전체가 하나로 된 생명기운인 "넷"이 움직이자마자, 절대본체와 절대본체의 그림자로서 둘(이원화)로 나눠져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넷"속에 있는 생명기운씨앗(3)의 움직임 자체가 다섯이라는 것입니다.
"셋"까지는 일원화적인 절대바탕이 씨앗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넷"이 되면서 다섯으로 전체를 둘로 나누는 것이죠.
원래 본바탕이 있고, 움직임자체로 본바탕의 그림자가 하나 더 생겨서 이원화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넷"과 "다섯"은 동일한 의식파동의 두가지 측면을 말합니다.
즉 공간적인 것(정지상태)과 시간적인 것(움직임상태)을 말합니다.
이것들은 생명기운이 움직이면서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죠.
또한 다음에 나올 "여섯"도 "넷,다섯"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각각 세밀하게 기본요소를 미분(微分)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의식적 시간)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 비교] 
신지문자 다섯과 고운의 한문번역을 비교해 보겠읍니다.
 왼쪽의 그림문자는 가운데 수평선을 중심으로 天地人이 위와 아래로 둘(이원화)로 나누어져 있읍니다.
따라서 <天二 地二 人二>으로 한문으로 묘사했읍니다.
 
 왼쪽 그림문자는 생명기운씨앗(3)이 밑부분의 꼬리 부위가 둥그렇게 휘였읍니다. 이렇게 둥그렇게 꼬리가 휜 것은 생명기운씨앗(3)이 동작한다는 움직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공통인자 三을 세가지에다 각각 덧붙혀서 <天三 地三 人三>으로 표현을 했읍니다.
두 그림문자를 합쳐서 종합적으로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으로 표현을 했읍니다.
그런데 사실 이그림문자를 보자면 이렇게 복잡하게 숫자를 여러개 줄세워서 나열해 놓는 한문번역을 안해도, 간단하게 이원화로 변화했다는 것을 한문으로 표현 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숫자를 줄줄히 늘어 놓는 통에 후세사람들이 온갖 상상을 다해가며 별의별 해석을 하느라고 애들를 무척 ?읍니다.
한문으로 써 보자면 <以三運 天地人二元化> 이렇게 쓸수도 있겠죠.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다섯>의 의미 찾아보기]
 옆의 신지문자를 <다섯>이라고 읽는 근거를 조사해 보겠읍니다.
먼저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 뿌리"에서 음운변화를 보겠읍니다.
"다섯"의 옛말은 <다 ㅅ.ㅅ>입니다.(옛글폰드가 없어서 이렇게 타자쳤읍니다.)
{<다 ㅅ.ㅅ>의 어근(語根) <닷>에 접미사 <ㅇ.ㅅ>이 붙었다.
어근<닷>은 <닫>으로 재구(再構)할 수 있다.} 이렇게 언급하고 있읍니다.
 
즉, 닫 > 닷 > 닷 ㅇ.ㅅ > 다 ㅅ.ㅅ > 다섯, 이렇게 음운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신지전자 그림에서 의미하는 것은 생명기운(나무가지)이 움직이기 시작(나무가지 밑이 둥그렇게 휘여 있음)하는 것이며, 절대바탕의 한점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은  절대바탕의 <정지상태> 에서 "떨어져 따로 분리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절대바탕의 "정지상태"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원래 정지상태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절대상태가 이원화 된다는 것은 움직임 때문이며, 그 움직임으로 인해 절대침묵의 바탕과는 다르게 따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죠.
이 신지문자의 그림은 이원화상태를 상징화한 그림이므로 절대바탕에서 떨어지는 상태를 표시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말 뿌리를 보겠읍니다.
<다섯>의 어근이 <닫>이라고 했읍니다.
<닫>은 "따로"의 옛말입니다. 즉 "절대바탕에서 별도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미인 <ㅇ.ㅅ>에서 ㅅ받침이 생명기운(순수의식)이므로,
<다섯>이라는 말은 <(본바탕과)따로 떨어지는 생명기운(순수의식)>이라고 표현된 의미라고 볼 수 있읍니다.
또 하나는 <다>라는 옛말에 <꺽는다> <꺽인다>라는 뜻의 말이 있읍니다.
그래서 이 옛말 뜻을 빌리면 < 꺽여서 둘로 나눠지는 생명기운(의식)> 이라는 뜻으로 볼 수가 있읍니다. 
이렇게 해서 이 신지전자가 <다섯>이라고 읽을수 있다는 근거를 탐색해 보았읍니다. 
[다섯 : 본바탕에서 따로 떨어져 둘로 나눠지는 의식](離脫) 
 

 < 여  섯 > 

 
* <신지문자 여섯>-두개의 생명기운이 연이어 결합하며 맞돌아가니 
                  이 현상계의 우주삼라만상이 생겨나느니라.
* 大三合六 生七八九
* 넷(공간성)과 다섯(시간성)이 합쳐져 여섯(존재의식)이 되고,
  여섯에서 현상세계인 7(공간),8(시간),9(인간)이 나타난다.
 
* [해설]
[한문천부경 해설]
한문천부경 내용을 검토해 보겠읍니다.
<大三合六生七八九>는 앞의 넷과 다섯이 합쳐서 여섯이 되고, 여섯에서 이 나타난감각세상인 전체세상(7)과 시간(8)그리고 사람(9)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섯으로 이원화된 두개의 天地人이 서로 결합해서 교번적으로 반복 진동하여 六이라는 존재의식파동을 만들어 낸다고도 볼수 있읍니다.
넷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에 밖으로 내비쳐진 절대바탕의 그림자이며,
다섯에서 움직임으로써 둘로 나눠진 이원화가 생긴 것이죠.
출발점인 넷에서 움직이기 시작해서 되돌아 오는 다섯이 합해져서 한바퀴의 파동의식이 생기고, 이파동의식은 연이어져서 회전함으로서 그 여섯자체가 존재의식이 됩니다.
이 존재의식으로부터 이 현상계의 시공간(時空間)이 흐르며, 온갖 사물과 사람이 나타나 보여지는 것입니다.(존재의식)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 비교] 
신지전자 <여섯>과 한문천부경을 비교해 보겠읍니다.
 <大三合六生七八九>
왼쪽 그림문자는 마치 남녀가 서로 결합하고 있는 모습과 같읍니다.
고대에는 지역에 따라 남여가 교합을 할때에 서로 마주보지 않고 앞뒤로 붙어서 씨받이 행위를 했다는 속설도 있읍니다.
그래서인지 최치원님께서는 왼쪽그림을 두개의 三이 合하는 것으로 해석해서 大三合이라고 한문으로 번역을 하셨죠.
왼쪽그림을 남녀가 합(合)하는 뜻으로 해석을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넷과 다섯이 연이어져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 같읍니다.
두三이 合하면 여섯이고, 여섯은 7,8,9,를 낳는다,라고 한문번역이 되어 있읍니다. 왼쪽그림에서 두개의 7자 아래에 뭔가 똥같은 것이 하나 떨어지는데, 고운 최치원님께서는 그것을 7(공간),8(시간),9(인간)이 나오는 것으로 묘사했읍니다.
그래서 <大三合六生七八九>라고 번역하셨읍니다.
그 다음 오른쪽 그림문자는 <셋>인 생명기운씨앗의 나무가지 두개가 둥그렇게 휘어져서 서로 X 자로 교차하고 있읍니다.
두개의 나무가지가 둥굴게 휘어진 것은 이원화된 의식이 서로 맞돌아 간다는 움직임을 묘사했읍니다.

이것이 두개가 엇갈려 있으므로 서로 교차하면서 돌아간다는 의미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옆의 그림과 같이 어떤 신지전자는 그림에서 두개의 나무가지 중에 왼쪽의 가지하나가 더 붙어 있는 것도 있읍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최치원의 한문천부경에 맞추어(運三四成) 해석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지를 하나 더 그려 놓았던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가지 하나가 더 붙어 있다면, 위의 백수교 비문도 동일해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읍니다.
 
이 오른쪽 그림문자는 의식이 이원화로 조합되어 회전운동을 반복하는 파동의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존재의식은 현상세계를 나오게하는 복합된 파동성 의식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존재의식이란 바로 이 감각적인 현상세계의 주시자이며,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그 "내가 있다"의 앎 그자체일 뿐만 아니라, 대상적인 전체 현상세계와 마음의 움직임을 만들어 내어 현시화시키는 이세상의 신의식입니다.
사람이 깨어있는 채로 아무생각없이 "지금현재"속에 침묵하고 있는 상태에 있으면 바로 이 순수한 존재의식상태로 접어들수가 있읍니다.
 
[신지전자에서 우리말<여섯>의 의미를 찾아보기]
이 신지전자를 <여섯>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를 찾아 보기로 하죠.
서정범 교수의 "우리말 뿌리"를 보겠읍니다.
{ <여슷>의 어근은 <엿>이고 <읏>은 접미사가 된다.}
어미인 <엿>의 의미가 신지전자가 설명하는 의미와 비슷한 옛말은 발견하지 못했읍니다. 
<여섯>의 옛말은 <여슷>,<어슷> 이 두가지가 있읍니다.
이 중에서 <여슷>이 일반적으로 옛부터 전해오는 말같읍니다.
신지전자의 왼쪽 그림을 보면 마치 77 자같이 그려져 있는데,
7의 맨위에 수평선에서 밑으로 비스름하게 그어진 것이 두개 있는 것은 "넷"과 "다섯"이 연이어진다는 것을 그린 것 같읍니다.
그 밑 중간에 짧은 똥같이 떨어지는 것이 바로 이 현상세계를 상징한다고 보아야지요.
두번째 그림문자는 두개의 "셋"이 서로 엮여져 움직이면서 반복해서 교차한다는 것을 나타낸 것 같읍니다.
이것은 절대바탕과 절대바탕이 움직여서 생긴 그림자의 생명기운이 교차하며 회전하는 파동운동을 한다는 것이며, 의식의 복합적인 파동작용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여섯에는 절대바탕과 움직임으로 이원화 되어 생긴 절대바탕의 그림자가
서로 뒤섞여져 있는 복합적인 파동의식이며, 그중에서 그림자로써 비교적 거친 의식파동은 현상계로써 감각작용을 통해서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는 순수의식은 주시자 또는 내면의 절대본체로써 고요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타나 보이는 거친 의식의 감각대상과 마음,외부대상들에게만 관심들을 주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내면의 절대본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서 자기들의 원래 본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죠. 잠깐 주제가 약간 빗나가 버렸읍니다.
<여슷>에 <여>라는 것은 위의 신지문자의 앞부분 그림과 같이 <이어지다>는 의미 같읍니다. 즉 '이어지다'의 '이어'가 <이 + 어=여>로써 음성이 합성됩니다.
그래서 <여>는 <이어진다>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지만,사실 근거자료 불충분으로 억지로 꿰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새끼를 엮다', '이엉을 엮다'의 "엮다"에서 "엮"은 옛말에는 "엿"으로도 쓴 기록들이 있읍니다.
따라서 "엿"은 여섯의 기본 어근이므로 <엮어져 합쳐서 돌아간다>라는 뜻으로 풀어 쓸수도 있읍니다.
어미(꼬리)인 <슷>은 생명기운인 ㅅ받침을 붙혀주기 위한 음운변화에 맞추어지기 위해서 <스>가 저절로 붙혀져서 <슷>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따라서 <여섯>은 <어어져 함께 움직이며 세상을 엮는 파동의식>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도 있으며, 신지문자가 표현하고 있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읍니다.
[여섯 : 이어져 함께 움직이며 세상을 엮어내는 의식].(編世)
 
여기서 이해해야 할 것은 넷과 다섯과 여섯은 각개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한통속의 의식입니다.
여섯이라는 존재의식의 파동성 자체가 공간적 요소와 시간적인 요소로 구성되었다는 것이지, 별도로 넷과 다섯을 분리해서 말할 수는 없읍니다.
연못의 물결파동을 예를 들면, 물표면자체가 넷이라고 볼 수가 있고,물결파동의 크기나 움직임 세기가 다섯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전체 물결파도를 여섯이라고 비유할 수가 있읍니다.
넷과 다섯은 최초로 움직임이 발생하는 찰나에 한파동이 생기는 순간을 미분(微分)해서 개념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여섯인 존재의식에서 별도로 넷과 다섯은 구별할 수가 없읍니다.
어떤 구도자가 존재의식까지 도달한 후에 다섯이나 넷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식에서는 바로 절대본체 밖에 없읍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1,2,3.  4,5,6. 7,8.9. 이렇게 세가지로 구분했을까요?
의식의 생성원리 또는 우주와 자기가 생겨난 기본요소를 명확하게 이해해서
자기자신이 전체 우주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세밀하게 개념적으로 분리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본체인 1,2,3 과 현상세계인 789 사이에 있는 중간매듭인 456은 단순히 우리들의 보편의식 또는 우주적인 자아를 말합니다.
이 존재의식이 바로 이 꿈같은 현상세계를 그려 냅니다.
우리는 현상세계 안에서 육체를 가진 개인적인 자아라고 생각들을 하고 있지만,
개인적인 자아(마음) 너머에는 경계없는 우주적 자아가 있읍니다.
이 우주적자아가 "내가 있다"는 순수존재의식입니다.
그리고 이 존재의식인 우주적 자아 넘어에 있는 절대 본바탕이 바로 우리의 참나인 본래 성품입니다.
여기서 1,2,3,이 절대본바탕이고, 4,5,6,이 우주적 자아인 존재의식상태이며,
7,8,9,가 이 나타나 보이는 전체 현상적인 우주와 개인적인 나를 말합니다.
자기자신이 일개 육체라고 생각하는 꿈을 벗어 버리게 하기 위하여 육체마음 이전에 우주적인 의식이 있으며, 그 의식을 넘어가면 전체가 하나인 절대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逆으로 이 천지가 생겨나오는 원리를 천부경을 통해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제 天上(절대)세계와 천하세상의 중간지대인 존재의식까지 내려왔으니, 현상화 된 지상세계로 내려가 보겠읍니다.  
 

< 일 곱 > 

 
* <신지문자 일곱> -본바탕으로부터
                   현상세계의 天地(공간)가 나타나느니라.
* 運三四成 環五七一妙衍 
* 생명기운(3)이 움직이면 의식의 공간요소(4)가 형성되고,
  의식의 시간요소(5)가 회전하면 현상세계의 공간(7)이 묘하게
  하나로 펼쳐진다.
 
* [해설]
[한문천부경 해설]
절대바탕에서 잠재되어 있던 생명기운씨앗(三)이 움직이면 의식의 공간성인 四가 형성되고, 五로 회전하는 것이 존재의식인 六이 되며, 六에서 현상세계의 공간(7)이 묘하게 펴쳐진다는 것입니다.
즉 현상세계의 공간(7)이 전체로 펼쳐진 것은 의식의 움직임(五)으로 인해서 생긴 것인데, 그 움직임인 五는 四라는 의식 공간요소가 움직인 것이며, 四는 절대바탕의 잠자고 있는 생명기운의 씨앗인 三으로 기인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절대본체에서 의식의 한점이 움직여서 존재의식이 되고, 이 존재의식으로 세상전체를 펼쳐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아주 가늘고 미세한 빛 한줄기가 영사기 렌즈를 통과해 넓은 스크린에 퍼져서 온갖 다양한 영화장면을 펼쳐내듯이, 아주 미세한 의식의 핵점으로부터 나온 의식의 빛줄기 하나가 이 전체 우주삼라만상을 다양하게 펼쳐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묘사하는 기본 메세지는 만물이 나타나는 것은 의식의 본바탕인 깊은 마음 속으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현상화된 공간)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 내용 비교]
 옆의 신지전자 그림을 보면, 맨 상부에 수평선이 오른쪽으로 그어지다가 아래로 조금 내려오고, 다시 왼쪽으로 수평선이 그어지다가 다시 밑으로 쭉 내려왔읍니다. 맨위의 수평선은 절대바탕에 잠재해 있는 생명기운의 씨앗인 三을 말합니다.
그 다음 오른쪽에서 약간 밑쪽으로 내려오는 선은 三이 움직여서 의식의 공간성인 四로 변하는 움직임(5)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을 고운 최치원은 <運三四成>이라고 한문으로 해설하였읍니다. 
그 움직임인 시간성 五가 되어 두번째 수평선도 절대상태와 같은 존재의식 六의 공간성이며, 수평으로 그어져 있는 것은 절대상태와 별다름이 없이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표시하며,그 다음 왼쪽 밑으로 쭉 뻣어내려 그은 선이 존재의식(6)의 파동작용으로 의식이 거칠게 저하하여 현상화하는 과정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 테라스 지붕같은 그림 밑에 그려진 작은 산봉오리같은 것이 바로 이 우주삼라만상의 공간인 7을 표시한 것입니다. 이것을 고은은 <環五七一妙行>으로 묘사하고 있읍니다.
五가 고리처럼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존재의식의 파동작용을 말합니다.
다르게 말해서 존재의식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5)의 회전하는 파동작용때문에 
이 우주공간(7)이 전체가 하나로 나타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 조그만 산봉우리같이 생긴 것 내부(밑)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사는 이 감각으로 그려진 현상적인 세상입니다.
그 산봉우리는 감각적인 조건화에 제한된 현상세계의 하늘(제한된 공간)을 그린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위의 테라스 지붕같이 생긴 모양은 절대바탕에서 미세한 의식이 점점 저하하며 거칠어져서 현상화되는 과정을 상징한 그림입니다.
우주삼라만상은 바로 의식으로부터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일곱>의 의미 찾아내기]
신지전자 그림 속에서 우리말의 <일곱>의 의미를 찾아 보겠읍니다.
서정범 교수의 "우리말 뿌리"에서,
{닐굽의 어근은 <닐>이고 접미사 <읍>에 ㄱ 이 개입되어 <?웁>이 형성되었다.
<닐굽>어근의 변화는, 낟>->?>닐-읍>닐굽}
기본어원의 어근인 <낟>은 <나타나다>의 옛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읍니다.
또한 <닐굽>의 어근인 <닐>은 옛말에 <닐다>가 있으며, 현대어로 <일어나다(起)>가 있읍니다.
따라서 <일곱>이란 말은 그 어원의 뜻으로 볼때 현상세계가 나타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읍니다.
<굽>의 <ㅂ>받침은 "보인다"의 첫 발음이며, <구>와 합성되어 <굽>이라고 변형된 것 같읍니다. 즉 현상세계는 <보이는 것>이며, 보이는 것은 나타난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굽>은 <우주공간이 나타나는 것을 보라>라는 뜻입니다.
즉 이 우주삼라만상이 내면의식으로 부터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깊은 마음의 바탕으로부터 만물이 현상화 되어 나타난다는 말이죠.
 
앞으로 나올 여덟과 아홉에도 역시 이 <ㅂ>받침이 붙었읍니다.
이 <ㅂ>받침이 붙어 있다는 것은 바로 "보인다"라는 현상을 그대로 표시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말 "하나,둘,셋,---일곱,여덟,아홉,열>은 어찌보면 정확하게 이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에 그 뜻이 맞아 떨어집니다.
한글학자들은 이 <ㅅ>받침과 <ㅂ>받침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적인 음운변화 현상이라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겁니다.
천부경에서 <ㅅ>받침은 "생명기운인 의식>을 상징하는 것이고, <ㅂ>받침은 이 나타나는 현상세계(감각세상)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며, 또는 보인다, 또는 지켜보라(주시하라)는 의미라고도 여겨집니다.
만물이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 보는 자는 이 보이는 현상세계 안에는 없읍니다.
절대바탕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지켜 봅니다.
[일곱 :내면의 마음바탕으로부터 만물이 나타남을 지켜보라](觀照)
 

<여 덟> 

* <신지문자 여덟> - 시간이 왔다갔다 흐르지만
                    본바탕은 변함이 없느니라.
* 萬往萬來用變不動本
* [한문해석] : 천지가 수없이 오고 가며 시간(8)이 흘러가도
               본바탕에는 변함이 없다.
* [해 설]
[한문천부경 해설]
이 현상세계가 수만번이나 왔다 갔다 변화할지라도 절대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이 현상세계가 변하는 것은 존재의식 안에서의 움직임입니다.
의식은 공간성과 시간성으로 이루어진 파동성으로 그 자체가 순시적인 움직임이며 변화하는 것이 그 기본 특성입니다.
의식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은 절대상태에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의식의 변화하는 시간성 때문에 우주삼라만상은 변합니다.
만물이 변화한다는 것은 바로 의식의 변화를 말합니다.
우주의 생주이멸(生住離滅)은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며,절대바탕에서 나왔다가,절대바탕으로 되돌아가는 의식의 반복작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바탕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도 없읍니다.
또한 천지개벽이 수만번 반복되드라도 절대바탕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읍니다.
그 절대바탕이 바로 우리들의 참나입니다. (현상적 시간)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 비교]
 옆의 그림을 보면 마치 ㄹ자 같이 생긴 그림이 맨위부터 수평선의 오른쪽 끝에서 내려갔다가 왼쪽으로 수평선이 그어지고,다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수평선이 그어져 있읍니다.
이것은 바로 의식의 시간성의 움직임을 나타낸 것이며,
세개의 수평선이 있는 것은 위에서부터 절대상태(1,2,3),보편의식(4,5,6),현상세계(7,8,9), 이렇게 세가지 세상에서 만물은 변화하드라도 본바탕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운최치원님이 한문으로 표현한 <萬往萬來用變不動本-(천지가)만번 왔다가 만번 가며 변하드라도 본바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라는 문장입니다.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여덟>의 의미 찾아내기]
<여덟>의 옛말은 <여?>입니다.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 뿌리"를 보겠읍니다.
{<여?>의 어근은 <?>이고 여기에 접미사 <을>이 붙어 <여들>이 되고
다시 <ㅂ>이 첨가되어 <여?>이 되었다.}
<여?>의 어근인 <?>의 옛말을 찾아 보겠읍니다.
<?>의 옛말은 요즘말로 <이제,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을>이란 <지금을>이라고 풀면,
밑바침인 <ㅂ>는 <보다,안다,>이므로,
<여?>은 <지금 현재를 보다> 라는 뜻이 되겠읍니다.
또한 <여덟>은 <여닫다> 가 합성되어 변형된 말같기도 합니다.
<여닫다>는 만물이 오고간다고 하는 의미의 시간의 흐름을 을 말하며,
<여덟>은 만물의 왔다갔다하는 변화를 지켜보라는 의미로도 볼 수는 있읍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닫>의 옛말을 이용하여 "지금 여기서 지켜보라"는 뜻으로 선택하겠읍니다.
즉 만물이 무상하게 흐르지만 "지금 현재를 알아라"라는 가르침 같읍니다.
그림을 보면 시간이 흘러가지만, 항상 지금현재는 변함이 없는 것이죠.
따라서 지금현재를 안다는 것은 시간이 흐름을 지켜본다는 말과 같읍니다.
그러므로 <여덟>은 <만물이 오고가며 변화하지만,지금현재에서 지키고 보라"하는 가르침 같읍니다.
지금현재를 본다거나 안다는 것은 바로 "내가 있다"는 존재자체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아는 자는 시간이 정지된 곳에 있읍니다.
시간이 없는 곳에서 지켜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절대바탕이 모든 것을 압니다.
[여덟 : (시간은 끝없이 흘러가지만) 지금현재를 지켜보라.](今存
 

  < 아홉 > 

 
* <신지전자 아홉> - 본바탕이 마음이며,천지인을 다 품고있어
                    마음의 태양이 전체 세상에 비추고 있느니라.
* 本心 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 근본 바탕이 마음이며, 근본의 태양으로써 밝게 비추고 있으므로,
사람 안에 천지가 모두 하나인 것이로다.
 
* [해 설]
[한문천부경 해설]
절대바탕이 바로 사람의 마음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태양처럼 높고 밝게 비추고 있으므로,
사람 안에서 전체 우주 삼라만상은 의식으로써 일체라는 것입니다. 
마음 그자체가 절대바탕 그자체이며,
온갖 삼라만상의 경계는 단순히 의식의 움직임 일 뿐이고,
모든 것은 절대본체에서 나온 의식의 한점에서 그려낸 환상이며,
오직 하나의 절대바탕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와 수많은 깨달음 수행법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인간)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의 비교]
 옆의 그림문자를 보면 왼쪽에 사람을 상징한 것 같은 그림이 있읍니다.
머리부분에는 수평선의 절대바탕에 天地人 세선(三枝)이 그려져 있는 데, 마치 신라금관에 붙은 장식과 흡사합니다.이것은 <하나>에서 <나>의 신지문자가 머리로 된 것이죠.그중 가운데 선은 밑부분까지 그대로 내려와 있고,밑에는 산 같은 곡선(현상계)이 그려져 있읍니다.
이 그림은 사람의 표상이지만, 천지인을 모두 포함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은 최치원님이 <本心  人中天地一>이라고 묘사한 부분입니다.
사람 마음인 본바탕(本心)은 머리부분의 天地人이 표시된 절대바탕을 묘사한 것입니다. 가운데 길게 위에서 밑으로 그어진 선과 그 밑에 두다리 혹은 산같이 그려진 것이 <人中天地一,사람안에 천지가 하나이다>라는 묘사입니다.
그 오른쪽 문자는 맨위에 둥그러게 그린 가운데에 점이 있는 것이 <本太陽>이라고 묘사된 것으로, 그 밑에 ㄹ자모양의 지그자그선은 본태양이 전체 우주를 두루 비추며 펼쳐지는 모양이 <仰明>으로 묘사했읍니다. 
그래서 오른쪽 글자는 <本太陽仰明>으로 묘사되고 있읍니다.
이 부분을 보아도 신지전자가 고은 최치원의 한문번역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읍니다.
 
[신지전자에서 <아홉>의 의미 찾아보기]
 <아홉>의 옛말은 그대로 아홉입니다.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 뿌리"에서 음운변화를 보겠읍니다.
{아홉은 앗-옵>아솝>아옵>아홉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앗>은 <?>으로 재구(再構)된다.}
그러나 <앗>이나 <?>이라는 어미글자의 의미가 신지문자와 비슷한 의미를 찾지 못했읍니다.
<아>는 우리 옛말에 <아이>라는 말의 어미입니다. 아이,아들,앗(아우),아히,아해 등 남자 특히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지금도 경상도 지방에서는 남편이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아내에게 "아-, 밥 묵었나?"라고 묻는데,자기 아들 밥먹였느냐고 묻는 것이죠.
그래서 왼쪽에 있는 그림은 <아이>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 하필이면 사람을 어린아이를 표현하는 <아>라고 썼을까요?
바로 절대본체(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 절대본체의 아들입니다.
또 아이들은 천사와 같다는 말도 있읍니다.
아이들의 마음은 때묻지 않고 순수함 그대로이며, 그것이 바로 절대 본바탕의 하나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홉>에서 <ㅎ>은 절대본체인 하나의 "한"의 "ㅎ" 머리만 따온 것입니다.
"ㅎ"는 해,하늘,하느님, 등 높고 신성한 것을 상징합니다.
오른쪽 그림의 위에 태양같이 생긴 절대본체(하나님)가 있읍니다.
왼쪽그림의 태양에서 빛이 비치는 형상의 전체가 이 "ㅎ"로 표현하고 있읍니다.
<홉>에서 <오>는 접미사로서 "~로"라고 볼 수 있읍니다.
받침인 <ㅂ>은 물론 <보다,알다,나타나다>는 의미로 "보다"의 머리<ㅂ>만 따온 것입니다.
그래서 <홉>은 <태양(절대바탕)으로 보다, 또는 알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홉>은 <아이의 마음이 본바탕임을 보라(알아차리라)>
이런 말씀이 바로 <아홉> 한마디로 축약되어 있읍니다.
그런데 혹시 <아홉>이 고대에는 <나홉>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왼쪽의 신지문자 <아>를 다시 보면 사람 형상의 머리부분이 <하나>의 <나>인데, 이 나는 바로 절대 바탕 그자체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아홉>이라고 하지만, 고조선 시절에는 <나홉>이라고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얼뜬 머리를 스칩니다.
또한 <아>를 상징하는 "사람"이란 다름아닌 "나 자신"을 말하니깐, <아>를 "나"라고 여기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렇다면 <아홉>은 <나의 마음이 전우주를 비치는 태양임을 알아라>
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사람 또는 아이의 마음으로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감응력을 주는 것 같읍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석했읍니다.
[아홉] :나(사람)의 마음이 전우주를 비치는 본바탕의 태양임을 알아라.                                  
이 얼마나 귀중한 가르침입니까? 
 
 
  <  열  >

 

 

* <신지전자 열> - 이세상 전체가 오직 하나이지만,
                  그 하나 마저 없으며, 
                  만물이 각각 모두 하나에서 나왔지만,
                  그 하나마저도 無이니라.
* 一終無終一
* [한문해석] : 하나의 끝남도 없음이 하나의 끝남이노라.
 
* [해설] 
[한문 천부경 해설]
지금까지 하나에서 아홉까지 순차적으로 펼쳐졌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없었고 항상 변함없는 절대바탕 그대로 라는 말입니다.
앞서 맨처음에 <하나의 시작은 시작없음에서 시작한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항상 변함없는 절대바탕만 있을 뿐이기 때문에 끝날 것도 없다는 것이죠.
만일 무엇인가 시작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겠죠.
이 모든 삼라만상의 다양한 움직임은 단순히 하나에서 나온 의식의 빛그림자 환상일 뿐입니다.
 
1,2,3은 원래부터 있는 절대바탕입니다. 이 절대바탕에서 3,4,5,라는 의식의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와 커지면서 7,8,9,라는 우주현상계가 그 거품 안에서 나타났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의식의 거품은 저절로 꺼져버릴 수 밖에 없읍니다.
의식의 거품이 꺼지면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가 7,8,9 의 이 현상세계에 살아 있을 때에 우리자신이 거품이 아니고,
오직 영원한 본바탕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깨쳐서 체험해야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과 탄생이라는 육체의 조건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탄생했다고 여기면 그것은 탄생과 동시에 죽음도 똑같이 동반하고 살아가는 것이죠.
마치 동전의 양면이 항상 붙어 있는 것처럼 탄생과 한쌍인 죽음도 같이 붙어서 따라 다닙니다.
태어났다는 것은 항상 죽음의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탄생한 적이 없는 절대바탕이라면, 태어나지도 않은 것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읍니까?
자기가 육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원죄입니다.
오직 태어난 것만이 죽으므로, 자기가 태어났다고 여기면 죽을 운명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에, 그 죽음의 공포때문에 자기존재를 더욱 확장시키려 하고,사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쾌락을 얻기 위하여 욕망에 젖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앞으로 닥쳐올 죽음을 두려워 하니깐, 자기 존재를 조금이라도 연장하고 확장하기 위하여 명예를 구하고,권력을 구하고,재력으로 자기의 욕망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태어났다고 여기는 그 육체를 턱~ 놓아 버리고, 자기는 육체가 아니고 영원하고, 모양도 없으며,아무런 속성도 없지만,전체에 두루 펼쳐져 있는 유일한 절대바탕 참나 일 뿐이라는 진리의 믿음을 확고하고 유지하고 있으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5000년전 우리 배달겨레의 조상들이 전해주는, 인생최고의 가치와 최선의 보람있는 삶이 보장되는, 너무나도 단순하며 소박하고 쉬운 전승 가르침입니다.
 
[신지전자와 한문천부경의 비교]
 옆의 신지전자를 보면, 왼쪽그림문자는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크게 사선이 그려져 있고,또 하나의 약간 곡선이 진 선이 가로질러 그어져 있으며,두개선이 X자 같이 그려져 있읍니다.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약간 곡선을 그리며 그려진 선은 <절대바탕부터 현상세계 전체를 통틀어서 묘사한 "전체가 절대바탕"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오른쪽 위에서 부터 왼쪽 아래로 그려진 긴 사선은 "하나도 없다"라는 의미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왼쪽그림은 <전체라는 하나도 없다>라는 그림입니다.
여기서 "하나도 없다"라는 것은 모두가 절대바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1~9까지 말한 것이 모두가 "無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개념이라는 말입니다.
그 오른쪽의 그림문자는, 4자 비슷한 그림이 두개 나란히 있읍니다.
4자 그림 하나를 분해해 보자면,ㄴ자 비슷하게 그린 것은 이 현상세계의 각 개체를 말합니다.
이 ㄴ자 가운데로 선이 하나 밑으로 쭉-그려지다가 옆으로 빗나가게 그렸읍니다. 이것은 각 개체마다 모두 하나(빛) 이지만, 그 하나조차도 없다, 모두가 개념이다, 라는 뜻입니다.
즉 4자 하나의 뜻은 <사람, 사람마다 바탕에서 나오는 하나의 빛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각 개인마다 모두가 절대바탕인 <無>라는 의미입니다.
두개를 그린 것은 모든 만물의 "각 개체마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운 최치원은 이 두 글자를 단 한마디로
<一終無終一, 하나의 끝남조차 없다>하고 아주 간단하게 끝내 버렸읍니다.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 불교경전인 금강경의 전체 내용이고 기본 주제입니다만,
그 중 금강경 마지막 부분의 한구절 예를 들어보겠읍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읍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신 것은, 얻은 바가 없음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읍니다.
"사실이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나의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어떤 것도 전혀 얻은 바 없느니라. 다만 그 이름이 최상의 깨달음일 뿐이니라.}
 
[신지전자에서 우리말 <열>의 의미를 찾기]
 우리말 <열>과 그림과는 얼뜬 보면 전혀 관련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렇지 않읍니다.
먼저 서정범 박사의 "우리말 뿌리"라는 책에서,
{열의 어근은 ?>?>?>열이 되었다.}
그러나 어근의 변화과정인 ?,?,?에서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읍니다.
우선 그림과 고운 최치원의 한문 번역을 보면, <전체가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이며, 이렇게 <아무것도 없으니, 완전히 전체가 본바탕(無)에 활짝 열려있다> 라는 뜻으로 해석을 해야 될 것 같읍니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無이니<해~ 방~>이라고 외치는 대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이죠.
<절대본체로써 활짝 열렸다> <모든 것이 오직 절대 참나일 뿐이다>라는 의미의
절대바탕이 "열렸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 닫혔읍니까? 바로 하나부터 아홉까지가 단순히 개념적으로 닫혔던 것이며, 이 하나부터 아홉까지도 모두가 無(아무것도 아님)이므로 "열렸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원래부터 본바탕으로 열려 있었던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열렸다"라는 마지막 말은 <나는 절대 본바탕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개념적으로만 닫혔던 것이 "열렸다"는 말이죠.
애당초 닫혔던 것은 없었읍니다.
[열 : 열렸다(깨달았다) 또는 해방](開眼)
 
7.맺는 말
본글은 원래 신지전자 천부경과 고은 최치원님의 한문천부경을 비교하여 정확하게그 뜻이 통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으나, 원래 목적하는 방향에서 글내용이 약간 벗어난 것 같읍니다. 
이제 우리는 신라시대 석학 고은 최치원님이 백두산에서 보았다는 단군시대의 신지녹도문자로 된 천부경 원문을 되찾아 복원했읍니다.
 
천부경을 연구하는 어떤 분이 주장하시는 우리말 수세기의 <하나,둘,셋---열>이 천부경이라는 추정을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읍니다.
우리말의 음운변화나 옛말자료를 정확하게 찾기가 어려워서 기대할 만큼의 완벽한 근거를 얻지는 못했읍니다만, 사실 약 5000년전의 수를 세는 우리말을 지금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한글표기가 조선시대 초부터 시작했으니까, 그 이전의 소리변화는 거의 알수가 없읍니다.
그러나 이글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우리말 수세기의 <하나,둘,셋--열>이 천부경 내용 그자체 일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느낌을 얻었읍니다.
이것이 수세기 말로 바뀐 것은 아마도 까마득한 단군 시대부터 어린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시기부터 이 <하나,둘,셋-->으로 된 14개 단음 천부경을 가르쳐주는데, 하나 하나 열손가락을 꼽으면서 외우도록 가르쳐 주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이 수세기의 하나,둘,셋이라는 관습으로 되어 아예 수세기 말로 바꿔지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한,둘,셋,넷,다섯,여섯,일곱,여덟,아홉,열>이 천부경 내용자체라는 사실은 이 글에서 탐색해 본 옛말의 근거로써 대략은 미약하나마 가능성은 보이는 것 같읍니다.
물론 앞으로도 옛말 탐구와 음운변화에 대한 좀 더 깊은 연구와 학술적인 논증이 필요하긴 하겠읍니다만, 이것을 계기로 많은 분들이 참여하여 우리민족의 경전인 천부경의 가치를 높혀 줄것으로 기대됩니다.
  
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본어와 몽고어등 중국대륙과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숫자읽기와 우리나라 숫자읽기 발음이 비슷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고대에는 한뿌리 민족이었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만일 <하나,둘,---열>이 천부경 그 자체라면 이것은 한민족만의 조상에서 나온 것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민족이 공유하는 천부경이라고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동양전체, 더 나아가서는 지구촌 전체인류의 고대비전(秘傳)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 글쓴이가 이전에 쓴 <천지창조의 비의>라는 최치원 한문 천부경 해석을 읽어 보시면 이글을 읽는데 더욱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5000년전 우리조상들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공부하면서 참으로 감탄했읍니다.
아주 심오한 가르침을 간단한 그림문자로 표현하고, 고은 최치원님 역시 그 그 옛전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한문으로 번역해 놓으므로써 후손들에게 고대 한민족의
선조들이 이루어 논 수승한 지혜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데에 대해서 후손의 한사람으로써 두손 모아 경배드립니다.
이 천부경 해석이 정확하게 맞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를 계기로 많은 분들이 우리 선조들이 전해준 천부경의 심오한 의미와 가르침의 방향을 옳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글은 천부경과 관련이 있는 특정종교단체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다만 천부경이라는 옛글을 깊히 숙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직관 결과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적 목적성이 있는 글이라고 오해하거나,기타 종교 또는 지성적인 어떤 편견을 가지고 이글을 비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너무나 단순하며, 학문적 지식이나 지성에 의해 복잡하게 얽힌 머리를 통해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도 없을 뿐 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분별적 지식들은 진리를 아는데 방해물만 됩니다.
 
이 글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마음을 완전히 텅 비우고, 마치 일곱,여덟살 쯤 되는 어린이와 같은 순진하고 오염되지 않은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읽어야 글의 제맛을 볼 수가 있읍니다.
직관(直觀) 속에서 쓰여진 글이므로, 기존 학문적인 접근이나 소위 지성적인 학식과 이원적인 분별논리를 통해서 이모저모로 따져 본다면 전혀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짓이 될 것입니다.
긴글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읍니다. - 무한진인-
 
 
 
 
 
 - 한글 천부경 -
 

 하나 둘  셋 , 넷 다섯 여섯 , 일곱 여덟 아홉 ,  열-렸다 !

 

출저: 네이버 블로그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무한진인)
http://blog.naver.com/muhanjinin/80057347068
http://blog.naver.com/muhanji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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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16 08:08

    첫댓글 나름의 연구글 잘 보았읍니다
    질문이 있는데 우리말 하늘과 동양학에 쓰이는 천의 개념을 어떻게 보시나요?
    하늘과 한자식 무는 어떻게 보시나요?

  • 13.01.17 18:22

    새로운 해석 잘 보았습니다.^^

  • 13.01.18 15:49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 차후에 이 글 한겨레개천경방으로 옮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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