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세례는 죽은 자들을 위해서 받는 것이다.
세례 받는 목적은 아담안에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살기 위해서 받는 것이 아닌가?
천주교에서 이미 육신이 죽은 자들을 위해 속전을 드리는
연옥미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난해한 구절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세례는 아무도 대신 받을 수 없다.
지금의 유아세례는 난 지 8일 만에 받는 할례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세례를 받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산 자는 발만 씻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아니 그 안에 있음을 계속 시인하고 묵상하면 되는 것이다.
30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 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만약 죽음과 삶의 갈림길을 넘어가지 않고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느냐는 반문이다.
사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는 육신의 죽음이란 큰 의미가 없다.
31절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바울의 자랑이다. 부활과 생명의 신앙을 가진 자의 자유이다.
나의 죽음은 곧 그리스도의 삶이므로 날마다 자신을 죽여 그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를
가진 자의 사역의 원리이다. 그리고 산 순교이다.
32절 맹수와 싸우는 것, 맹수는 바로 맹신자나 광신자를 말한다.
죽은 자로써 다시 사는 것이 바로 참 신자이다. 십자가의 도가 아닌가?
그러나 이 비밀을 모르면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니 먹고 마시자.
현실의 복을 받고 즐기자 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의
복을 맛보지 못하면 육신의 목숨을 위한 방탕한 자들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안에 부활이 없으면...
다시 말하면 그 안에서 날마다 사는 것이 없으면 신앙이 너무 허무하다.
헛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재미가 없다. 새로움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의 심령은 날마다 새롭다. 이것이 진정한 부활신앙이다.
33절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일에 속지 말라.
악한 동무 곧 먹고 마시자 하면서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자들이다.
먹고 마시고 잘 사는 게 복으로 말하는 악한 말쟁이들이 맹수들이다.
잠7:21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고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꾄다.
34절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런 말을 하므로 육신 안에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로 죄를 짓게 되므로 깨어서 의로 근신하라고 권한다.
알지 못하는 말로 떠들지 말라는 말이다.
35절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많은 사람의 부활관이 이렇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뿐이다.
부활의 원리 -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상태가 될 것인가?
36절 씨가 죽어야 다시 산다(원리)
그리고 그 종자에 따라 형체를 이룬다(상태)
37절 알갱이만 뿌리지만 형체를 입는다.
그러나 씨는 형체가 없다. 그 씨가 형체로 자라간다.
그래서 열매를 맺고 난 다음에야 그 열매를 따라 심판을 하게 되는 것이다.
38절 하나님이 각 종자마다 고유한 형체를 주신다.
씨가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는 순간부터 형체가 주어진다.
알갱이는 씨 뿌려짐 그 다음에 자람은 형체의 완성이다.
이 형체는 종자에 따라서 다르다.
하나님의 역사는 씨를 뿌리기도 하시고(마13장) 각 씨에 따라 형체도 주신다.
39절 육체는 4 가지의 등급이 있다.
사람, 짐승, 새, 물고기의 형체이다.
우리 안에 씨가 아담의 씨냐 그리스도의 씨냐
따라서 그 형체가 다르다.
당연히 영광이 달라진다.
40-41절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의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형체 곧 몸과 영광(열매)의 관계성이다.
아담 안에 속한 만물은 속되고 부정한 것들이며
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만물들은 거룩한 것들이다.
땅에 속한 자의 형체와 영광과 하늘에 속한자의 형체와 영광은 당연히 다르다.
개와 사람과는 형체도 다르고 영광도 다른 것과 같다.
자연의 원리가 영적원리의 그림자이다.
42절 이하는 혼적인 몸 곧 썩을 것(아담적인 요소) 욕된 것,
약한 것을 심고 다시 살며(현재수동형이다) -죽고 다시 산다는 뜻이다.
죽은 자(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 이건 혼이며 육신의 것이다.
부활한 자(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능력적인 것)-신령한 몸이며 영적인 것이다.
결국 몸 안에 있는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는 이야기이다.
아담이냐 그리스도냐 하는 싸움이다.
45절 산 혼과 살려주는 영, 생명주는 영
존재하는 혼 역사하는 영
형체의 조상(혈과 육) 생명의 조상(영)
생명이 호흡에 달려있다. 처소(하나님의 임재, 좌소)
세상적 하나님의 나라
아담의 타락은 성령의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혼적인 능력마저 변질되었다.
오염이 되어 마귀적인 기질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를 그의 대속의 은총으로 살리시고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계속해서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다.
46절 혼적인 것이 먼저 되는 이유
우리는 영이 아니라 몸이 있는 영적인 존재이다.
혼적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부활은 속사람 곧 영이 다시 사는 것이다. 몸은 영과 혼을 담은 질그릇이다.
49절 흙에 속한 자의 형상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영을 가진 혼 곧 하나님의 영을 가진 영이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이다.
그러나 영이 미혹의 영이면 혼도 미혹의 혼이 된다.
인간은 외모로 인해 잘못되는 것이 아니다.
50절 하늘의 형상을 입어야 하는 이유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서이다.
형상 자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다.
땅의 형체 곧 혈과 육에는 성령이 임하시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에 의해 평강과 안식과 기쁨의 하나님의 나라의 요소가 깃든다.
혈과 육은 아담의 혈통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다윗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의 강이 흐른 것이다.
51-53절 마지막 나팔사건이다.
1) 죽은 자들이 다시 살고
2) 우리는 변화가 된다
계20장 죽은 자는 심판의 부활, 산자는 생명의 부활(요5:29)
그러면 7째 나팔은 언제 부는가?
54절은 계20장의 마지막 부분과 같다
그 전에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계19:20)
마귀(계20:10)
사망과 음부가 불 못으로 들어감(계20:14)
55-56절 사망은 죄를 쏘아댄다.
사망의 독이 있는 화살과 같다. 그리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고통을 느낀다. 육신의 생각을 하도록 한다.
57절 감사할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김을 계속 주시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요일5:4)
-‘우리 안에 계신 이는 사망보다 크신 부활과 생명의 그리스도이시다’
롬7장과 8장의 차이다. 지느냐 이기느냐의 싸움이다.
7장은 언제나 마음뿐이고 결국은 지고 만다.
그러나 8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긴다.
58절의 권면 - 견고, 흔들리지 말며, 항상 힘쓰라 항상 넘치도록(충만)하라
그래야만 항상 이김을 주신다. 공허가 있으면 잡된 것이 들어가고 만다.
부활과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수고로 말미암아 항상 넘치므로
사망을 덮어 이겨버린다. 이 방법 밖에 없다.
고전15장은 부활의 장이며 복음의 장인데 예수의 역사적인 다시 사심(1-11절)과
현재 아담 안에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부활한 것
곧 알갱이가 다시 산 것(12-49절)과 장차 형체가 썩지 않고 영화로운 것으로
변화될 부활(50-54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말씀이다.
그리고 난 다음 현재적인 승리의 삶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야 한다(55-5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