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번역어가 '제구'밖에 없지만, '제구'는 사실 두 가지. 컨트롤(control)과 커맨드(command)로 나뉜다. 컨트롤은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커맨드는 자기가 원하는 곳에 공을 넣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니까 컨트롤은 커맨드 안에 포함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고, 더 정교한 제구력은 사실 커맨드로 표현하는 것이 맞다. LA 다저스의 돈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이 양쪽 사이드 깊숙히 공을 찔러넣는 투구를 보며, 커맨드의 아티스트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위대한 메이저 리거 커트실링은 '컨트롤은 스트라이크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지만, 커맨드는 질 좋은 스트라이크(quality strikes)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라 말한다.
흔히 구질이 좋은 투수는 정교함이 떨어지더라도 스트라이크를 잡는 것 자체로 타자를 압도할 수 있다. 이때 구질이라는 것은 단순한 구속만이 아니다. 공의 회전력을 높여 공 끝의 힘을 유지하는 것도 구질에 포함되며, 난해한 투구폼으로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교란시켜 히팅 포인트에서 공을 어긋나게 만들어 공을 무겁게 만드는 것도 구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투수들은 공을 스트라이크에 잘 꽂아 넣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투수가 될 수 있다. 지난 몇 경기에서 안영명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직구와 변화구를 마음대로 섞어가며, 낮게 낮게 컨트롤을 유지하는 것이 상대 타자를 얼마나 까다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장면이었다. 술에 물탄 듯, 물에 술 탄듯. 독기 서려있지만, 여유자적한 안영명의 플레이를 보며 나는 자꾸 취권이 생각나더라. 안영명의 경기는 직구와 변화구의 컨트롤이 좋았던 경기였다.
어제 배영수의 경기는 분명히 '커맨드'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는 어제 포심, 포크볼, 슬라이더, 체인지업, 투심을 섞어 던지며 상대 타자를 교란했다. 놀라웠던 것은, 어제 그의 공은 구종에 가리지 않고 커맨드가 좋았다는 것이었다. 타자들이 약한 코스와 강한 코스, 구종과 구질은 대부분 데이터로 정리가 되어 있고 포수는 전력 분석을 통해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포수가 원하는 곳으로 공을 던져 줄 수만 있다면, 투수가 타자와의 싸움에서 질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게 안되는 이유가, 포수가 원하는 곳으로 정확하게 공이 오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배영수는 분명 조인성이 미트를 가져다 대는 곳으로 정확하게 자신의 공을 꽂아넣었다. 경기가 진행될 수록 안정되어가는 배영수의 투구폼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볼 배합은 투수의 커맨드가 좋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커맨드가 좋지 않을 경우는 기껏 타자가 잘 치지 못하는 구종을 넓은 범위의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는 정도의 수싸움 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커맨드가 좋은 투수들은 좌, 우, 위, 아래, 그리고 공의 속도 차이를 통해 타자를 교란 시킬 수 있다. 조인성이 포크볼을 잡아내기 위해 팔을 앞으로 주욱 내밀고 안타까워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는 이 공이 떨어지기 전에 잡으면 반드시 스트라이크라는, 즉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제스추어였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투수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포수가 온 몸을 던져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너의 공을 믿는다고 말이다. 어제 배영수는 조인성의 그 믿음에 100% 응답했다.
배영수의 리듬이 있다. 배영수가 배테랑인 이유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타자로 하여금 인내심 싸움으로 돌입하게 만든다는 것이며. 경기가 자기 페이스대로 풀릴 때는 짧은 인터벌로 호흡을 빠르게 빠르게 가져가면서 타자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어제 보인 투구폼의 속도 조절은 원숙한 배테랑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메이저리그의 클레이튼 커쇼나 NBP의 오승환은 이중키킹 동작으로 유명하다. 느리게 올랐다가 빠르게 내딛는, 이 이중투구 동작은 타자로 하여금 공이 뿌려지는 타이밍을 방해하기 때문에 공 끝을 무겁게 하는 효과가 있다. 실제 오승환이 돌부처라 불리는 이유에 공의 회전수도 있지만, 이 이중키킹 동작에 의해 타이밍을 빼앗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이런 이중키킹 동작은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이 동작은 공의 위력을 반감시키기 때문에, 코치들이 금지 시키는 동작에 가깝기도 하다. 위의 두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킨 경우로 봐야 한다. 배영수의 경우 투구 폼 자체에 이런 디저분한 디셉션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하나의 투구 폼에서 두 가지의 동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을 던질 때 마다 준비동작의 리듬을 달리 하면서 타자들로 하여금 타이밍을 잡기 어렵게 만든다. 이건 철저하게 배영수가 노력으로 인해 도달한 리듬의 교란이다. 오랜 세월 정교한 과정을 거쳐 숙성시킨 명주 같은 느낌이었다.
안영명의 공이 '칠 테면 쳐봐라'고 말하며 배짱있게 공을 찔러넣는 느낌이었다면, 배영수는 '너가 내 공을 어떻게 친다는 거지?'라는 듯. 압도적으로 상대를 제압해 나갔다. 이렇게 공을 던지면, 정말 어떻게 칠 수 있다는 걸까. 어제 보여준 배영수을 그가 올 시즌 내내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는 흔히 말하는 탈크보 수준의 선수라고 봐야 한다. 잘 다듬어진 보검은 아무나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전하는 사람이 오히려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범모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배영수는 정범모라는 칼집에 넣을 수 있는 칼이 아니었다. 서너차례의 폭투가 있었다. 공이 땅에 떨어질 때, 조인성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혼신의 힘을 다 해 민첩하게 움직이며 그의 공을 막았다. 아마 배영수와 정범모의 호흡이 무너진 것이 여기가 아닐까 하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사실 블로킹 미스만이 아니었다. 어제 배영수는 조인성의 공에 한 번도 고개를 저은 적이 없었다. 배영수의 호흡과 리듬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를 온전히 배영수이도록 만들기 위해 정범모가 갈 길이 멀어보였다. 어제의 배영수는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강속구는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공에 대한 자신감이다. 배영수가 남긴 말이다. 어제 그가 던진 모든 공은 강속구였다. 어제 그의 투구에서 그가 쫓고자 하는 투수로써의 삶을 약간이나마 엿본 것 같았다. 어제의 경기가 1년에 한 번 신내린 경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그는 포텐이 아니라, 완성품이다. 잘 만들어진 완성품을 만나는 것은 이렇게나 기분 좋은 일이다. 안영명이 지난 해와 비교해 환골탈퇴 한 것 처럼, 배영수 또한 김성근의 조련 아래 그 간의 약점을 바로 잡고. 더 나은 투수로 다시 태어났음을 증명했으면 좋겠다. 그가 우리 한화에서 완성된 투수로써, 오래 오래 공을 던졌으면 좋겠다. 배영수가 우리의 것이다.
첫댓글 배영수 어제 경기는 가희 역대급 투구라고 보입니다... 6회 끝나고서는 이거 완봉 페이스라고 생각들었는데, 7회초 연속 안타가 많이 아쉽드라고요...나키님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ㅎㅎ;;
어제 정말 좋았더랬습니다. 오늘까지 막 기억에 남을 정도였어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처럼만 던지면 올 시즌에 140승 채울듯
어제 정말 140승 기세였네요. ㅎㅎ
정근우 선수 수비하나가 살짝 아쉬웠어요 ㅠㅠ 정말 최고의 투구였습니다!
정근우 선수도 이제 컨디션이 올라오고 있으니 점점 더 안정되겠죠. ^^
어제 배영수공 보면서 공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니 타자들이 칠 수가 없었겠죠. 두선수의 궁합 조합은 진짜 천생연분 이상인듯 합니다. 두 베테랑이 웃는 모습 많이 봤으면 좋겠네요.
정말 잘 다듬어진 작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배영수 선수 지난해 투구폼이랑 차이점을 비교해보고 싶네요. 감독님과 하면서 뭐가 달라졌는지 궁금하더라구요.
@나키 역시 나키님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찔러주시내요. 덕분에 많이 배우게 됩니다.^^
@유원 감사해요~ ^^
좋은 감상평입니다
감사합니다. ^^
어제 보면서 야구로 직접 경기해본적이 없지만 온라인겜 스타크래프트에서 2:2로 팀플레이 경기할때 같은편을 믿고 협공하거나 빠지거나 해야 하는데 호흡이 맞지않으면 신뢰가 무너지고 혼자만의 플레이를 하게됩니다. 같은 이치로 생각됩니다. 아침부터 나키님의 글을 보게되어 기분이 좋습니다.많이 배우게 됩니다.
신뢰라는게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믿고 던지고 믿고 받아야죠. 우리 범모선수 부상당해 안타까운데, 좋은 포수로 성장하길 빌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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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배영수 선수 걱정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잘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제 같이 만 던져준다면 리그 탑 에이스라 해야할 정도였던 것 같네요. 평균 기량과는 차이가 있겠죠. 다음 등판이 참 기대됩니다.
투수세요? 지금까지는 단지 분위기가 좋아서 응원을 하였는데, 님의 글을 보고있자니, 투수와 포수, 투수와 타자, 포수와 타자와의 줄다리기를 읽을 수가 있어서...... 님의 실력을 가늠케 해주는군요. 배열사의 제3의 전성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냥 열심히 보는 야구팬이에요. ^^ 저도 답답해서 더 열심히 공부하려구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칼집비유는 최고네요. 확실히 정범모 그릇에 아직 담아내질 못하네요. 많이 공부해야죠.
포수나이 서른도 풋내기란 말이 있더군요. 우리가 기다려야 할 시간이 긴 것 같습니다. 빨리 나아서 백업을 든든히 채워주면 좋겠어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설명해주시니 잘 이해가 되네요
어제 배영수선수와 조인성선수의 호흡은 한 예술작품을 보듯 아름다웠습니다
야구고수의 경지를 그대로 보여주었고 저희는 감동을 받았지요
학구적인 관전 자세에 존경심을 다 갖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글이 점점 어려워지는 듯 해서 걱정입니다. ㅠ 빈수레가 요란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조인성선수 배영수 선수 조합도 그렇지만 감독님 야구도 한편의 정교한 작품 같을 때가 많더군요.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먼저 글을 읽기만 합니다. 어떤 느낌을 받으면 비로서 작성자를 봅니다. 역시...
답변이 늦었네요. 늘 좋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참 고마워요.
글을 읽으며 많이 배우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
점점 빈수레가 요란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곤 하네요. 좀 더 편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어제 배영수의 배짱있는 호투를 보다 오늘 유창식의 심약한 볼질을 보려니 힘이 드네요;; 도대체 어떤 포수랑 짝을 지어줘야 잘 던지려는지... 류현진 커쇼 등판 경기는 종종 하이라이트랑 인터뷰 보는데 항상 커쇼가 커맨드가 좋았다고 하는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군요^^
저와 비슷한 심정이군요!! 배영수 후유증이 사실 저도 좀 있었어요. ㅎㅎ 이제 뭔가 전력의 실체가 다 드러는 것 같습니다. 시즌이 점점 중반을 향해 가고 있네요. 감독님과 선수들, 다 건강히 좋은 경기 많이 하면 좋겠습니다. ^^
놀러갔다가 돌아와서 이제야 나키님의 글을 보내요.ㅋㅋ콘도에서 야구는 다 봤는데 인터넷을 못해 좀 답답했네요.^^ 앞으로 탈보트, 유먼, 송은범 선수의 경기도 기대가 되네요. 어제 배영수 선수의 공은 정말 언터쳐블이었네요. 감탄하며 봤네요. 그러고 보니 에이스는 두들겼는데 그렇지 않은 투수에겐 승리를 가져오지 못한 롯데나 기아의 1패는 정말 아쉽네요. 이길 수도 있는 찬스가 몇 번이나 있어 연승을 이어갈 수 있는 경기였던거 같은데ㅋㅋ 역시 야구는 이래서 더 재밌나봐요.ㅋㅋ오늘도 잘 봤습니다.
놀러가서 야구 보시면, 그게 어찌 놀러 간 거에요. 야구 보러 간 거죠. ㅎㅎ 탈보트와 유먼, 송은범 모두에게 물음표가 그려졌네요. 오늘. 참 아쉽고 그렇습니다. 야구가 이래서 재미있기도 한건 같네요. 오늘 경기는 이겨서 좋았고, 내일 야구의 승리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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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 감사해요. 그냥.
마치 읽는 제가 배열사가 된 기분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