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박소란 시인의 ‘다음에’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매번 ‘다음에’라는 말로 나와의 일을 미룬다면 나의 마음은 얼마나 차갑게 얼어붙겠습니까. 행여 막역한 친구가 그런 일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면 당장 헤어지라는 충고를 건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다음을 싫어하는 우리도 바쁜 일상과 여러 고민에 치이면 하느님을 자꾸 다음으로 미루고 맙니다. 어째서 하느님께는 이렇듯 쉽게 ‘다음에’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의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십니다. 열 명이 치유받았지만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이는 단 한 명뿐이었지요. 그렇다고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치유를 받고 가장 먼저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하지 못했던 일을 먼저 하느라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일을 뒤로 미뤘을 뿐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앞가림을 한 다음 예수님을 찾아갈 심산이었겠지요. 그러고 보니 돌아오지 않은 아홉 사람과 우리는 참 닮아 있습니다. ‘잠시만요, 이 일만 처리하고 갈게요.’ ‘만날 시간이 주일밖에 없어 미사에 참례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바빠 기도를 게을리했습니다.’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는 예수님의 한탄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 탄식을 듣지 않으려면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님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 지금도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실 하느님께 ‘지금 당장’을 선물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