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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땅끝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일
남도행
칠월 백중날 고향집 떠올리며
그리운 해남으로 달려가는 길
어머니 무덤 아래 노을 보러 가는 길
태풍 셀마 앨릭스 버너 원이 지난 길
홍수가 휩쓸고 수마가 할퀸 길
삼천리 땅 끝, 적막한 물보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마음을 주다가
문득 두 손 모아 절하고 싶어라
호남평야 지나며 절하고 싶어라
벼포기 싱싱하게 흔들리는 거
논밭에 엎드린 아버지 힘줄 같아서
망초꽃 망연하게 피어 있는 거
고향 산천 서성이는 어머니 잔정 같아서
무등산 담백하게 솟아 있는 거
재두루미 겅중겅중 걸어가는 거
백양나무 눈부시게 반짝이는 거
오늘은 예삿일 같지 않아서
그림 같은 산과 들에 절하고 싶어라
무릎 꿇고 남도땅에 입맞추고 싶어라
『지리산의 봄』 1987.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남자가 모여서 지배를 낳고
지배가 모여서 전쟁을 낳고
전쟁이 모여서 억압세상을 낳았지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사랑을 낳는다네
모든 여자는 생명을 낳네
모든 생명은 자유를 낳네
모든 자유는 해방을 낳네
모든 해방은 평화를 낳네
모든 평화는 살림을 낳네
모든 살림은 평등을 낳네
모든 평등은 행복을 낳는다네
여자가 뭉치면 무엇이 되나?
여자가 뭉치면 새 세상 된다네
『여성해방출사표』 1990.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 불현듯
가슴이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라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덥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0.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 時代의 아벨』1983.
사랑법 첫째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어머니, 나의 어머니
내가 내 자신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나직이 불러본다 어머니
짓무른 외로움 돌아누우며
새벽에 불러본다 어머니
더운 피 서늘하게 거르시는 어머니
달빛보다 무심한 어머니
내가 내 자신을 다스릴 수 없을 때
북쪽 창문 열고 불러본다 어머니
동트는 아침마다 불러본다 어머니
아카시아 꽃잎 같은 어머니
이승의 마지막 깃발인 어머니
종말처럼 개벽처럼 손잡는 어머니
천지에 가득 달빛 흔들릴 때
황토 벌판 향해 불러본다 어머니
이 세계의 불행을 덮치시는 어머니
만고 만건곤 강물인 어머니
오 하느님을 낳으신 어머니
『지리산의 봄』1987.
우리 동네 구자명 씨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서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집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그러나 부엌문이 여닫기는 지붕마다
여자가 받쳐든 한 식구의 안식이
아무도 모르게
죽음의 잠을 향하여
거부의 화살을 당기고 있다
『여성해방의 문학-또 하나의 문화 ․ 3』
1987.
매맞는 하느님
깡마른 여자가 처마 밑에서
술취한 사내에게 매를 맞고 있다
머리채를 끌리고 옷을 찢기면서
회오리바람처럼 나동그라지면서
음모의 진구렁에 붙박혀
증오의 최루탄을 갈비뼈에 맞고 있다
속수무책의 달빛과 마주하여
짐승처럼 노예처럼 곤봉을 맞고 있다
여자 속에 든 어머니가 매를 맞는다
여자 속에 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쓰러진다
여자 속에 든 형제자매지간이 매 맞고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여자 속에 든 할머니가 매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는다
여자 속에 든 하느님이
매 맞고 쓰러지고 피 흘리며 비수를 꽂고 윽 하고 죽는다
여자 속에 든 한 나라의 뿌리가
매 맞고 피흘리고 비수를 꽂으며 윽 하고 죽는다
깊은 밤 사내는 폭력의 이불 밑에 잠들고
세상도 따라들어가 잠들고
오뉴월 한서린 여자의 넋 속에서
분노의 바이러스가 꽃처럼 피어나
무지개 빛깔로
이 지상의 모든 평화를 잠그고 있다
아아 하늘의 씨를 말리고 있다
『여성해방의 문학-또 하나의 문화 ․ 3』
1987.
반월시화1 - 아버지의 초상
아버지가 반월에 오셨습니다, 어머니
당신과 혼인하고 보낸 그 오십년 동안
기쁘고 당연했던 일
아프고 쓰라렸던 일 꾹꾹 눌러 가방에 넣고
왼쪽 어깨죽지를 조금 낮추신 채
아버지가 안산에 오셨습니다, 어머니
바다 건너 걸린 노을 같은 북망산천에
당신을 묻은 지 반년만이건만
십년은 더 늙어보이는 아버지는
홀홀단신임을 확인이라도 하듯
삼춘집과 오빠집과 막내집 들러
해남에서 가져온 바람을 골고루 나눠주고
해남 토종인정도 서운찮게 안겨주고
홀가분한 하향길,
우리 큰 딸 하는 것도 살펴보시겠다며
경기도 안산에 여장을 푸셨습니다
서울에서 걸치신 뒤끝이긴 하지만
그토록 즐기시는 약주 한잔 마다시고
이제 그만 잘란다, 묵묵하게 묵묵하게 티뷔만 보시다가
어머니가 누워야할 그 자리에
낯설고 쓸쓸한 강 하나를 풀어놓으시고는
아무도 건너오지 말라는 듯
홀로 쿨쿨 잠드셨습니다
조심히 문을 닫아드리고
깊은 밤 마지막 전등을 끄니, 어머니
아버지가 풀어놓은 그 강물에
한세기 동안 쌓긴 한국인의 어둠이
시냇물 소리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구한말의 좌절과 왜정시대의 서러움과 동족상잔의 육이오
아아 그리고
자유당 시절의 뼈아픈 혼돈과
유신치하의 암울한 광풍과
오일팔 항쟁의 뼈속깊은 슬픔이
아버지의 등처럼 외로운 그림자를 만들며
새벽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광주의 눈물비』1990.
동행
스산한 불빛들로 가득한
가리봉동의 밤거리를 걸으며
동행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음산한 어둠으로 가득한
구로동의 골목길을 더듬으며
저무는 우리 삶 어깨동무해 주는
동행이 기쁜 날 생각했습니다
가리봉동에 엎드려 웃는 여자들이
지폐를 헤아리는 남자들의 발 아래서
여름날 수풀처럼 무성했다가
가을날 단풍처럼 무르익었다가
겨울날 눈발처럼 휘날렸다가
진구랑 가랑잎 되어 뒹구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무서움 생각했습니다
유방에 불을 켠 여자들이
동해안처럼 줄선 남자들의 발 아래서
실크로드의 황혼이 되었다가
허구한 날 강태공의 월척이 되었다가
홍둥가 이무기의 횟감이 되었다가
더는 내려갈 수 없는 곳, 거문도
거문도로 내려가는 길 돌아오며
동행하는 분노를 생각했습니다
오 거문도 해안에서 우는 여자들이
한반도의 썩은 물로 철석이다가
한반도의 쓰레기로 솟구치다가
그러나, 그러나
세상의 더러움 다 걸러내고
푸른 해일 일으키며 달려오는 곳에서
깊은 바다 이끌며 돌아오는 포구에서
동행의 벅찬 힘 생각했습니다
동행의 소중함 생각했습니다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1988.
그대 생각
너인가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품이어라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살맛나는 세상을 위한 풀잎들의 시편
―한국성폭력상담소 탄생에 부쳐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있음은
해와 달이 더 이상 자매이지 못하고
별들마저 운행을 멈춘 그곳
끝내는 강물이 통곡으로 흐르는 그곳
즈문 가람 모래밭에
무참하게 유린당한 자매들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있음은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을 겁탈하고
어린이가 어른에게 강간당한 그곳
굶주린 악마들의 오두막에서
양갈보 똥갈보가 태어나는 그곳
인두껍을 쓴 사자들의 도성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딸들의 비명을 듣기 때문입니다
아아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있음은
언제부턴가 팔려가는 신세의 냉혹한 피눈물이
죄없는 여자들의 차지가 되고
언제부턴가 전쟁과 평화의 골깊은 어둠이
여자들의 운명으로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일자리를 찾아나선 여자가 어느날
쥐도 새도 모르게 거리에서 사라집니다
햇빛 쏟아지는 골목에서
일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뛰놀던 아이가 어느날
입을 틀어막힌 채
사나운 독수리 발톱에 채여 어딘가로 사라집니다
상사의 수족처럼 일하던 여성이
어느날 갑자기 비탄어린 사표를 쓰고
야업 잔업 끝내고 귀가하던 딸들이
그 어느날
광란하는 밤거리의 야수에 붙잡혀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당하고 피흘리고 숨을 거둡니다
의지했던 사촌이
믿었던 인척이
혈육인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악령으로 변신하여
앙가슴 젖무덤 눌러 덮칠 때
칼날보다 무서운 강요된 침묵만이
아주 뻔뻔스럽게
「 아! 대한민국」무궁화로 피고 집니다
뼈 속 깊은 수모와 굴욕의 고통이
딸들의 생애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누가 그 치욕을 모른다 말하리까
누가 그 공포를 모른다 외면하리까
우리가 오늘 여기 모여 있으니,
동쪽에서 일하던 어머니들 달려오고
서쪽에서 일하던 자매들이 달려오고
시방세계 여자 남자 울울히 달려와
우리가 여기 오늘 터를 닦아 한 집을 세우니
우리는 이 집을 살림의 집이라 이름합니다
우리는 이 집을 위로의 집이라 이름합니다
우리는 이 집을 해방의 집이라 이름합니다
피맺힌 팔자들이 운명의 가시를 털고
늠름한 숲으로 돌아오는 세상
순결 정절 형틀에 불길 확 끼얹어
풀잎으로 풀잎으로 파도치게 하는 세상
각자 자존의 깃발
각자 목숨의 깃발
창궁 끝간데까지 나부끼는 세상
그런 살맛나는 세상을 위하여
새로 태어나는 딸의 머리 위에
축복의 향유를 붓고
새로 출발하는 신부의 발걸음에
자유의 꽃다발 평등의 꽃다발을 바치는
그런 살맛나는 세상으로 가기 위하여
살맛내는 사람 자매들이여
그대들 바로 여기 터를 닦았구나
살맛내는 사람 동지여
우리가 바로 여기 집을 신축했구나
우리 서로 깍지낀 이 동아리 따뜻하여라
우리 서로 떠받치는 이 어깨동무 든든하여라
빙벽을 허무는 강강수월래
우리들의 두 발로 우리 땅에 입맞춤하는 강강수월래 으쓱, 으쓱하여라
우리 슬기, 우리 기상으로 다진 이 터에서
맺힌 한 풀어주고 고통을 싸매주는 이 부활의 터에서
살맛나는 집이 나란히 나란히
살맛나는 풀잎들이 나란히 나란히
지평선을 이루고 징소리 깃드리라
어린 딸들이 춤추고 맘껏 뛰노리라
아아 평화를 꿈꾸는 우리들 가슴마다
마음 가득 차오르는 여백의 고요함이여
그 창궁 아슬히 솟은 성화대에
우리들 못다한 사랑의 불꽃을 당기나니
다함없는 생명의 기름을 붓나니
1991.4.13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식 축시
즈믄가람 걸린 달하
―여성사연구 1
절간을 지으러, 정자를 지으러,
나랏님 연희마당 누각을 지으러
충렬왕조 남정네들 노역에 나간 뒤
모화관 조공이며 식솔들 풀칠이란
고려여자 살가죽 벗기는 짐이라지만
목숨 부지하기까진 여자도 사람인지라
석달째 노역에 동원된 남편이
이웃동기 밥동냥에 의지하고 있다 하여
소첩 백방으로 길을 찾다가
겨우 한끼 밥잔치 마련하여 갔더이다
놀란 남편은 대뜸 윽박질렀지요
가세가 빈한하여 도리없는 노릇인즉
뉘에 몸을 팔았는가 혹여 도둑질인가
꿈엔들 여보, 막말은 하지 마오
가난도 절통한데 누구와 눈맞추며
천성에 없는 흑심 도둑질이 웬말이오
하나 남은 머리채를 잘라 팔았소이다
이 말에 올라가던 수저를 내려놓고
목메어 등돌리던 이웃동기들이시여
밤이 이슥토록 강둑을 걸을 때는
들건너 창호지 불빛 아래 포효하는
다듬이소리로 울부짖었나이다
홍두깨소리로 울부짖었나이다
날 잡숴 날 잡숴
길쌈하는 여자들 뒤통수 내리치는
잉아소리, 베틀소리로 부르짖었나이다
즈믄가람 걸린 달하
서방정토 관음보살님전 뵈옵거든
시방세계 가위눌린 여자생애
천지개벽 원왕생 아뢰주오
『여성해방의 문학』, 또 하나의 문화 제3호,
1987, 56―57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 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 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수넴 여자 아비삭의 노래
―암하레츠 시편 15
어디로 갔나
익모초 즙에 입술을 적시며
이웃의 슬픔에 입맞춤하던
고난의 사제들은 어디로 갔나
예언자와 시인들은 어디로 갔나
사람 사는 일 적막강산 같아서
오 여기 그대들이 버린 몸뚱아리
그대들이 버리고 달아난 몸뚱아리에
여자더러 살을 섞으라네
이 늙고 병든 자유의 몸뚱아리에
여자더러 피를 섞으라네
이불을 덮어도 더워지지 않고
아무리 끌어안아도 회생하지 않는
싸늘하고 막막한 민주의 몸뚱아리
맥박이 늦어지고 살이 굳어지는
분단의 몸뚱아리에
여자의 아리따움 벗어 덮으라네
여자의 부드러움 뿜어 보듬으라네
차디찬 수족에 온기를 불어넣고
꺼져가는 오관에 생기 불러오라네
아 괴로워라 생명의 비밀이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소리쳐 불러도 대답이 없는
저 늙고 병든 몸뚱아리와 살을 섞어야 하나
저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뚱아리와 숨을 섞어야 하나
저 버림받은 몸뚱아리와 넋을 섞어야 하나
여자의 더운 목숨 벗어 덮어야 하나
『광주의 눈물비』, 1990, 94―5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
―외경읽기
어린 딸들이 받아쓰는 훈육 노트에는
여자가 되어라
여자가 되어라…… 씌어 있다
어린 딸들이 여자가 되기 위해
손발에 돋은 날개를 자르는 동안
여자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발톱이 된다
일하는 여자들이 받아쓰는 교양강좌 노트에는
직장의 꽃이 되어라
일터의 꽃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일터의 여자들이 꽃이 되기 위해
손톱을 자르고 리본을 꽂고
얼굴에 지분을 바르는 동안
꽃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이빨이 된다
신부들이 받아쓰는 주부교실 가훈에는
사랑의 여신이 되어라
일부종신의 여신이 되어라 …… 씌어 있다
신부들이 사랑의 여신이 되기 위해
콩나물을 다듬고 새우튀김을 만들고 저잣거리를 헤매는 동안
사랑 아닌 모든 것은 사자의 기상이 된다
철학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권력이 여자를 불러 사자가 되고
종교가 여자를 불러 사자로 둔갑한다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그러니 여자여
그대 여자 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사자의 발톱은 평화?
사자의 이빨은 고요?
사자의 기상은 열반?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 134-36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고요하여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무심히 지나는 출근버스 속에서도
추운 이들 곁에
따뜻한 차 한잔 끓는 것이 보이고
울렁거려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여수 앞바다 오동도쯤에서
춘설 속의 적동백 화드득
화드득 툭 터지는 소리 들리고
눈물겨워라
너를 내 가슴에 품고 있으면
중국 산동성에서 날아온 제비들
쓸쓸한 처마, 폐허의 처마 밑에
자유의 둥지
사랑의 둥지
부드러운 혁명의 둥지
하나 둘 트는 것이 보이고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0, 102―3
북한강 기슭에서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서 위로받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 등을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들을 기대지 못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건너지 못할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루나무 잎새처럼 안타까이 손 흔드는 두 눈에서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상에 안식이 깃드는 황혼녘이면 두 눈에 흐르는 강물들 모여 구만리 아득한 뱃길을 트고 깊으나 깊은 수심을 만들어 그리운 이름들 별빛으로 흔들리게 하고 끝끝내 못한 이야기들 자욱한 물안개로 피워올리는 북한강 기슭에서, 사랑하는 이여 내 생애 적셔줄 가장 큰 강물 또한 당신 두 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관계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 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 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우리 깊고 아득한 강을 이루자
―천구백팔십육년 가을의 일기
우리 강을 이루자
깊고 아득한 강을 이루자
북한산 하늘이 절하러 내려오고
첫 동트는 새벽이 이마를 담그는
맑고 큰 강을 이루자
저 빈 거리에서 홀로 깊어지는 강,
너나없이 눈을 씻고 귀를 씻기도 하는
초록빛 융융한 강을 이루자
해동의 슬픔이 깊은 강물 이루는 날
바람이 달려와 옥문을 열어젖히리
돌들이 일어나 해방노래 부르리
광화문통 사람들이여
퇴계로와 율곡로 사람들이여 오
수유리 사람들이여
우리 일어나 강물로 흐르자
굳게 닫아지른 빗장을 활짝활짝 열어젖히고
순금 족쇄와 쇠사슬을 풀어버리고
더운 목숨 저 깊은 곳
다만 도도한 강물로 흐르자
서대문에서 남대문까지
남대문에서 동대문까지
동대문에서 북문로까지
최루탄과 총칼을 잠재우는 강,
마포진에서 강남진까지
강남진에서 강동진까지
강동진에서 강북진까지
온갖 쓰레기들 쓸어가는 강,
넓고 찬란한 강을 이루자
그 강물에 돛 올리는 일천의 거룻배
고향으로 달려가 자유 하늘 만나려나
그 강물에 띄우는 일만의 봉화불
서천서역국에서 민주세상 비추려나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강물은
바로 어머니의 핏줄 속에 있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람은
바로 우리 가슴 속에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이여
탄생에서 죽음까지 그리운 사람이여
우리 황홀한 강을 이루자
수억만리 타관까지 흐르고 흘러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강,
오천만이 엎드려 혼을 씻기도 하는
대천세계 가이없는 강을 이루자
최초의 최대의 부활을 이루자
『지리산의 봄』, 1987, 95―97
봄비
가슴 밑으로 흘려보낸 눈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이뻐라
순하고 따스한 황토 벌판에
봄비 내리는 모습은 이뻐라
언 강물 풀리는 소리를 내며
버드나무 가지에 물안개를 만들고
보리밭 잎사귀에 입맞춤하면서
산천초목 호명하는 봄비는 이뻐라
거친 마음 적시는 봄비는 이뻐라
실개천 부풀리는 봄비는 이뻐라
오 그리운 이여
저 비 그치고 보름달 떠오르면
우리들 가슴속의 수문을 열자
봄비 찰랑대는 수문을 쏴 열고
꿈꾸는 들판으로 달려나가자
들에서 얼싸안고 아득히 흘러가자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리
다만 둥그런 수평선 위에서
일월성신 숨결 같은 빛으로 떠오르자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0,
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와 나눈 대화
―외경읽기
어느 먼 나라 힌두교 대사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손이 여덟 개인 신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문득,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우리 나라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지나가는 말로 수작을 걸었습니다
여덟 손을 가진 신의 아내여
빛나는 신들의 시대,
백포도주로 강을 넘치게 하고
떠오르는 보름달을 그 위에 멈추게 하던 신의 시대에서도
여자는 일하는 어머니였습니까 아니면
임신과 출산의 기계였습니까
신들은 이마에 땀을 내지 않지만
백성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답니다
내 남편 위시누는 머리가 넷이지요
동서남북 백성을 점지하기 때문이고
내 팔이 여덟임은
사면팔방 백성들의 마음을 보살피기 때문이랍니다
생기복덕 발원하는 백성들을
훈육하고 다스리고 먹이고 잠재우고
축복하고 일으키고 싸매주고 위로하는 일이란
신의 아내가 담당하는 것이지요
남편 위시누는 통치를 주관하고
나는 그 내조를 책임졌답니다
아하, 공―사 역할 분리가 당신 시대 것이군요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까?
파리나 날리고 있답니다
세속의 남자들이 대권에 골몰하고
그 여자들이 내조에 서원하니
우리는 속세에서 버림받았답니다
신들은 사원에 갇힌 신세랍니다
신이 버림받은 시대
인간 승리 시대를 어떻게 보십니까?
오고 있는 역사는 언제나 개벽세상이고
와 있는 역사는 언제나 남자세상이었으니
이제 평등하지 않은 것은 종래 버림받겠지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1992, 108-110
가을 편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아름다운 사람 하나』, 1990,
이 시대의 아벨*
며칠째 석양이 현해탄 물구비에 불을 뿌리고 있었읍니다.
이제 막 닻을 내린 거룻배 위에는
저승의 뱃사공 칼롱의 은발이
석양빛에 두어 번 나-부-끼-더-니, 동서남북
금촉으로 부서지며 혼비백산
숲에 불을 질렀읍니다.
으-아, 솔바람 불바람 홀연히 솟아올라
둘러친 세상은 넋나간 아름다움
넋나간 욕망으로 끓어 오르고 있었읍니다.
아세아를 건너지른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에 당도한 건 바로
이때입니다.
오그덴 10호*는
몇 명의 수부들을 바다 속에 처넣고
벼락을 때리며 외쳤읍니다.
오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안락한 처마밑에서
함께 살기 원하던 우리들의 아벨,
너희 따뜻한 난롯가에서
함께 몸을 비비던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너희 풍성한 산해진미 잔치상에서
주린 배 움켜 쥐던 우리들의 아벨
우물가에서 혹은 태평 성대 동구 밖에서
지친 등 추스르며 한숨짓던 아벨
어둠의 골짜기로 골짜기로 거슬러 오르던
너희 아벨은 어디로 갔는가?
믿음의 아들 너 베드로야
땅의 아버지 너 요한아
밤새껏 은총으로 배부른 가버나움아
사시장철 음모뿐인 예루살렘아
음탕한 왕족들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야
너희 식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침상과 아벨을 바꿨느냐
너희 교회당과 아벨을 바꿨느냐
독야청청 담벼락과 아벨을 바꿨느냐?
회칠한 무덤들, 이 독사의 무리들아
너희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 고통을 짊어진 아벨
너희 족보를 짊어진 아벨
너희 탐욕과 음습한 과거를 등에 진 아벨
너희 자유의 멍에로 무거운 아벨
너희 사랑가로 재갈물린 아벨
일흔 일곱 날 떠돌던 아벨을 보았느냐?
아흔 아홉 날 한뎃잠을 청하던 아벨을 보았느냐?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돌들이 일어나 꽃씨를 뿌리고
바람들이 달려와 성벽을 허물리라
지진이 솟구쳐 빗장을 뽑으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아벨의 울음은 잠들지 못하리
오 불쌍한 아벨
외마디 소리마저 빼앗긴 아벨을 위하여
나는 너희 식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아방궁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별장을 엎으리라
나는 너희 교회당과 종탑을 엎으리라
소돔아 너를 엎으리라
고모라야 너를 엎으리라
가버나움아 너를 엎으리라
예루살렘아 너를 엎으리라
천사야 너도 엎으리라
깃발을 분지르고 상복을 입히리라
생나무 마른 나무 함께 불에 던지고
바다더러 산 위로 오르라 하리라
산더러 너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바람부는 이 세상 어디서나
이제 침묵은 용서받지 못한다
울지 않는 종은 입에 칼을 물리고
뛰지 않는 말은 등에 창을 받으리
날지 않는 새는 뒷축에 밟히리
뒷날에 참회는 적당치 못하다
너희가 쫓아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어 버린 아벨
너희가 쫓아 묻고 부인한 아벨
너희는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시치미뗀
아벨의 울음 소릴 들었느냐?
금동이의 술잔에 아벨의 피가 고이고
은소반의 안주에 아벨의 기름 흐르도다
촛농이 녹아 흐를 때 아벨이 울고
노랫가락 높을 때 아벨이 탄식하도다
오 불쌍한 아벨을 찾을 때까지
나는 이 세상 어디든 달려가
너희 잔치상과 보신탕을 엎으리라
너희 축복과 토룡탕을 엎으리라
너희 개소주와 단잠을 엎으리라
돌들이 일어나 옥답을 일구고
지진이 솟구쳐 평지 풍파 일으키리라
바람더러 주인이라 주인이라 부르리라
너희의 어둠인 아벨
너희의 절망인 아벨
너희의 자유인 아벨
너희의 멍에인 아벨
너희의 표징인 아벨
낙원의 열쇠인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아벨……
그때 한 사내가
불 탄 수염을 쥐어뜯으며
대지에 무릎을 꿇었읍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읍니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동안만이라도
주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다음날 신문은
오그덴 10호가
현해탄의 대기권을 완전히 떠나갔다고
보도했읍니다.
* 창세기 4장 2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첫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고 카인은 농부가 되었는데, 형 카인은 아벨에 대한 질투 때문에 아우를 들로 꾀어내어 쳐 죽였다. 이때 야훼께서 이렇게 꾸짖으셨다.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1981년 8월 초 한반도에도 상륙한 태풍 이름
서울 사랑 - 다시 핀 꽃을 위하여
오호 소리꽃 네로구나
오호 침묵꽃 네로구나
오호 인내꽃 네로구나
오호 낙엽꽃 네로구나
오호 타작꽃 네로구나
오호 추도꽃 네로구나
오호 죽순꽃 네로구나
오호 갈대꽃 네로구나
오호 망초꽃 네로구나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에헤 꽃 핀다고 다 핀 것은 아니란다
에헤 잎 진다고 다 진 것은 아니란다
에헤 떠난다고 다 간 것은 아니란다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어허---날 저물어 세상은 잠들고
어허---날 저물어 이 봄도 잠드니
어허---해 저물어 청춘은 애늙은이
어허---길 저물어 인생은 오리무중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아니란다 아니란다 끝난 것 아니란다
새봄 찾아와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새날 찾아와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새복 맞아들여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새물에 발담궈도 끝난 것은 아니란다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오라 돼지꽃 네로구나
오라 황소꽃 네로구나
오라 늑대꽃 네로구나
오라 이리꽃 네로구나
오라 여우꽃 네로구나
오라 안개꽃 네로구나
(어랑어랑 어화 어랑어랑 어화)
세계가 무너져도 지렁이꽃 피는 강산
두 동강이 나라여도 개구리꽃 피는 강산
뱀꽃 한 잎 입에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흑염소꽃 한 잎 물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어이 넘차 어허 넘차 어허어이 넘차)
아니란다 아니란다 잊은 것은 아니란다
가는 세월 속에서도 잊은 것 아니란다
길 가로막혀도 올 것은 오고
수전벽해라 해도 남는 것은 남는단다
(어이 넘차 어허 넘차 어허어이 넘차)
오오 눈물꽃 네로구나
오오 하늘꽃 네로구나
오오 자유꽃 네로구나
오오 얼음꽃 네로구나
오오 적막강산 적막꽃 네로구나
첫댓글 한신대 신학과 졸업 후 이 땅의 척박한 여성의 삶의 개선을 위해 불철주야 기도했던 시인 고정희의 시를 몇 편 음미해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울부짖는 수많은 아벨의 피가 선연히 여기 저기에 꽃잎처럼 흩날립니다. 좋은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