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사의 주제는 ‘밀양 송전탑 강제 건설 사태의 평화적 해결과 쌍용자동차 국정 조사 실시와 해고자 원직 복직을 위한 미사’입니다. 이토록 긴 이름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연대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이 세상을 한 바퀴 삥 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폭력의 막강한 세력에 맞서 싸울 때 하는 시위 방법 중 하나가 인간사슬입니다. 그 악을 사람의 장벽으로 둘러싼다고 해서 무슨 큰 변화가 생기겠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가장 막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도 기술도, 권력도 폭력의 힘도 인간 하나 하나가 파편화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질 때 그 사슬을 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서는 자본과 정권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현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지 고립되어 외로이 싸워가는 곳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연대의 사슬이 그들을 묶어내어 거대한 힘으로 버텨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은 현장이 69군데입니다. 어느 곳도 똑같은 방식으로 싸워가는 곳은 없습니다. 69곳 현장 각각은 그곳만의 독특한 특징을 품고 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현장에 흩어진 어르신 수 천명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사안이 동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은 다른 현장의 사람들이 열심히 싸워줬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모두가 하나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섞이기 힘든 이질감으로 한동안 고생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내 일이 결국 남의 일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싸움의 와중에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고, 또 그 연대의 체험은 밀양을 넘어서 한진, 현대차, 유성, 쌍용차 투쟁 현장으로 희망순례단이라는 이름으로 찾아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밀양의 이 싸움에서도 기존의 오손도손하던 공동체는 분열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오랜 기간 형님동생하며 살갑게 살아오던 이웃사촌이 한순간에 철천지 원수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더더구나 처음 한마음으로 싸움을 해오던 동지들 중에서도 한전의 속임수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대책위를 떠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분열의 아픔은 우리를 슬프게 하지만 결코 이것이 다는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100일동안 이곳 대한문에서 미사를 봉헌해 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도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끈근한 연대의 기쁨을 맛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로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이곳에서 우리는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뼈아픈 지난날의 분열된 공동체의 기억은 이제 오늘과 내일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익숙한 공동체가 세상의 거짓 평화에도 불구하고 파괴되는 것을 가슴 아프게 목격하게 되지만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눈맑은 사람과의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를 우리는 목격합니다. 이것은 이 싸움이 우리에게 선사해준 아이러니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세상의 거짓된 평화에 만족하고 스스로를 속이며 튀지 않게 머물렀더라면 우리는 한동안 편안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을뿐만 아니라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이기에 마음 편할 일도 없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려봅니다. 폭풍과 어둠을 뚫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목격하고 그 또한 어둠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그 위를 걷고자 당돌한 용기를 낸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안락하고 익숙한 배 안의 사람들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폭력의 심연 위를 걷는 허무맹랑한 모험을 감행하게 됩니다. 물론 그는 단박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익숙하고 평안한 거짓 평화의 배 안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용기를 보고 주님은 손을 내밀어 그가 다시 폭력과 두려움의 심연 위를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곳 대한문에서 새로운 인간사슬로 엮인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을 결심하고 또 기뻐하고 있습니다. 밀양과 쌍용차, 모두 동지의 죽음을 목격한 상처받은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죽음의 늪에 빠지지 않고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 하나로 손잡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밀양과 쌍용차 그 뒤에 끊이지 않는 투쟁의 이름들을 연결시켜 모두를 하나로 묶어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인간사슬이 땅에서 엮일 때 그 사슬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세상의 거짓 평화에 현혹되지 말아야 겠습니다. 혹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알면서도 모른 척 눈을 돌려서도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목격하고 체험한 하나 되는 체험이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여 이곳 현장과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을 강력하게 엮어내었으면 합니다.
“밀양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염원하는
전국 15개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미사”를 위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 메시지
참 생명과 평화의 수호자이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선의의 국민 여러분!
저는 지난 5월 28일 765kv 송전탑 건설 강행으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던 밀양주민들을 위로하고 살펴보기 위해 현장을 방문했었습니다. 산비탈의 움막을 그날도 여전히 떠나지 못한 채 제 손을 꼭 붙들고 살려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던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뵈오며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험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있는 공사 현장을 매일 오르내리시는 어르신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이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송전탑 건설과 그에 따른 보상 문제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전답의 농작물을 돌보아야 하는 절박한 계절이지만 모두 들에 그대로 버려둔 채 노인들은 마치 생사를 건 투쟁을 하듯 조를 짜서 산비탈을 오르내리고 계셨습니다. 도대체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누가 만들었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송전탑 건설을 위해 잘려나가는 것은 나무 몇 그루가 아니라, 건강과 생명이며 조상대대로 일구어온 삶의 터전과 전통이자 마을 공동체이고, 나아가 소박하지만 든든하게 서로를 지켜주던 이웃 사이의 인정이었습니다.
마을회관 게시판에 눈길이 멈추어 섰습니다. 구십을 훌쩍 넘긴 어르신부터 사십대 손자며느리까지 마을 주민 전체가 송전탑 기습 건설을 감시하기 위해 당번 명부를 작성해 게시해야 하는 마을에 무겁게 드리워진 비장함과는 대조적으로 그날 제 눈앞에 펼쳐진 마을 풍경들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 생경함은 아마도 평화로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평화로울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마을주민들의 고통 같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조용한 산골짜기에 둥지를 틀고 한 평생을 고요 속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시는 갈멜 수도회의 수녀님들의 불안하고 근심스런 내일도 마을 주민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위해 평화롭지 못한 처지가 된 지, 고요를 지키기 위해 고요하지 못한 처지가 된 지 어언 8년입니다.
방문을 마치고 마을 주민들의 따듯한 환송을 받으며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전문가 협의체 구성이 결정되었고 검증기간 40일 동안 공사가 중단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미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40일 동안 한국전력공사는 매우 불성실한 자료제출과 성의 없는 대화로 협의를 파행으로 치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7월 11일 전문가 협의체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진행된 여야의 권고안 채택을 위한 논의는 긴 시간 끝에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하지만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는 회의 후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한전 측에게는 주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조치와 대화에 나설 것을 주문했고 밀양주민들에게는 다시 한 번 대화에 임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국회산업통상자원위의 금번 입장발표처럼 이제 정부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단순히 시혜적 차원에서 사업자인 한전과 밀양주민들의 갈등을 이번 사건에만 국한해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전국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갈등을 정의롭게 해결할 구체적인 법적 체계와 장치를 마련해야 함은 물론 다양한 의견들을 폭넓게 청취하고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공론으로부터 사업의 타당성을 얻도록 강제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와 유사한 갈등을 공정하게 조정할 상설 기구를 정부는 빠른 시일 안에 출범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 미사에 함께하신 교우 여러분들과 시민여러분. 밀양 송전탑 문제뿐만이 아니라 그 배경을 이루는 핵발전소의 문제점과 에너지 정책에 대하여 바른 안목과 자세를 가지도록 노력해주시길 다시 한 번 청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일찍이 핵발전소가 결코 미래의 대체 에너지 또는 청정 에너지 공급체계가 될 수 없음을 거듭 밝혀왔고 그 폐해에 관하여도 수차례 강조하였습니다.
밀양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대립과 반목은 사업자인 한전과 지역 주민들의 갈등 차원을 넘어 우리 사회가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데 얼마나 상호 인권을 존중하는 성숙한 의식을 갖고 있는지 식별하는 가늠자인 동시에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이 땅에 대한 우리들의 공동체적 책임의식을 자각하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나 자신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생명이 위협받고 또 희생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에너지 공급 체제를 총체적으로 되돌아야 보아야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참 평화와 생명의 수호자로 불림 받고 계시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땅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땅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거류민이고 순례자일 따름입니다.(레위기 25장 23절 참조) 따라서 이 땅과 자연에 대한 겸허함은 바로 하느님께 대한 겸손함과 경외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자연을 창조하실 때의 공존과 조화, 균형과 상생의 길이 우리 안에 온전히 실현되도록 간절하고 쉼 없이 기도드려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연로하신 몸을 이끌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느라 애틋하게 키우던 들의 작물들과 마음을 돌볼 새 없는 밀양 주민들께 하느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부디 선한 마음,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평화의 마음, 수고로운 땀에 정직하게 보답하는 땅을 신뢰하는 생명의 마음을 잃지 않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성실하고 정직한 행위들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선한 결실을 맺어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교회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밀양주민들의 고통에 함께하겠습니다.
2013년 7월 15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
쌍용자동차 국정 조사 실시와 원직 복직을 위한 기도회
한 여름밤의 동상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