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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버 해협은 영국 해협 동쪽의 가장 좁은 부분으로
영국 도버와 프랑스 칼레 사이 폭 34 km(21 마일) 해협.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버해협 건너 영국에 상륙했을 때
대영 제국 역사는 시작되었다" - 영국의 前 수상 윈스턴 처칠-
.....................................영국.......................................
BC 55·54년 카이사르 침공으로 로마의 속주(屬州).,브리타니아.
약 400년간 로마 군정 뒤 앵글로색슨 침공으로 6∼8세기 7왕국시대.
829년 통일왕국을 이루고, 1066년에는 봉건국가 노르만조(朝)가 성립.
1215년 대헌장(大憲章)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절대군주제는 엘리자베스 1세 치세후 점차 쇠퇴
17세기 100년 동안의 내란으로 국왕이 처형되었고
크롬웰(Cromwell, O.)이 주도한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그가 죽은 뒤 왕정으로 돌아가 1688년 명예혁명이 이룩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른다.
엘리자베스시대에 시작된 해외영토 확장은
18세기에 이르러 ‘대영제국(大英帝國)’을 건설,
19세기 말 빅토리아(Victoria) 치세 때 절정이었다.
이즈음 우리나라에도 한영 수교의 기원이 발단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치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은 영연방(英聯邦)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상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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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해협
도버해협 넓이는 30~40㎞이고 깊이는 35~55m.
BC 5000년 경까지 밖으로 드러나 있던.,강의 유역.
그때까지 영국은 유럽과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후, 해협을 통과하는 북동쪽으로 흐르는 조류는
지속적인 북동풍으로 인해 방향을 바꾸기도 했으며
영국 해안의 하얀 절벽은 침식작용으로 계속 깎이었다.
도버해협은 세계에서 가장 통행량 많은 해상교통로.
1977년에 와서야 교통항로와 항해정보 체계가 잡혔다.
주요항구로는 영국 도버, 포크스턴, 프랑스 칼레 불로뉴.
호버크래프트(수륙 양용차)
도버.,수륙양용차
정규 여객업무 대부분은
호버크래프트(hovercraft)
도버 페리.
고압공기로 물 위를 떠서 운행하는 쾌속정이 담당한다.
'해협 바닥' 해저철 터널 계획이 1856년 처음 제안되었고
수차례 재검토 끝에 1991년 터널 굴착작업에 성공 후., 운행.
.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상전투 격전지였던 도버해협.
영국이 스페인 무적함대에게 최초 승리(1588)했던 곳.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불로뉴 항구는 주요군사기지.
도버해협은 '도버 수비대' 본부로
도버해협에 있는 선박을 보호했다.
1940년 프랑스의 됭케르크에서 철수한
연합군이 해협을 건너 도버에 도착했다.
도버는 '바다' 또는 '해류'라는 뜻말이다.
기원전 카이사르는 세계제국이었던 로마의 지배자였고
연인 클레오파트라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성능력 개발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았다 한다.
이집트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왜곡은
기원전 1세기 그녀가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던 때부터
키케로(Cicero)와 같은 당대 로마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후, 조지 버나드 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이르기까지
2천년에 걸쳐서 20세기까지 시도되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그녀를 역사 상 가장 유명한 팜므 파탈 중 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로마인들은 이집트 부를 약탈하려는 탐욕을 감추고
이집트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녀를 비난했다.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와 같은 로마 역사가들은
제국의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로마에 저항한 동방의 여왕을 매춘부 수준으로 폄하한 것.
아무리 역사를 왜곡해서 여왕을 매춘부로 둔갑시켰어도
분명한 사실은 당시 로마와 옥타비아누스는 가해자였고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은 한때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를 정복했던
대제국 로마에 대해서 진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디오 카시우스의 오만하고 왜곡된 역사관은
셰익스피어, 푸슈킨, 버나드 쇼, 브리태니커,
그리고,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에게까지 승계.
클레오파트라 7세.
클레오파트라는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후계를 다투었던
4 장군 중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에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라지드 왕조의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말한다.
라지드 왕가에는 '아버지의 영광'이라는 의미인
클레오파트라 이름을 가진 여인이 유난히 많았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클레오파트라(클레오파트라 5세).
라지드 왕가의 적통자인 그녀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가지고 있지만 삼대 위의 할머니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로 시집 온 시리아 공주(페르시아 왕가 혈통).
클레오파트라가 태어날 당시 이미 이집트는
로마에게 정복당해 속주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모든 나라는 이미 로마의 속주였다.
유일하게 이집트와 현재 이스라엘인 유대 땅만이
로마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쳐 독립국 명맥을 유지.
당시 로마인은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이라 불렀다.
'마레 노스트룸' = '우리들의 바다'.
당시 이집트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약 100만 인구인 무역항.
물을 정화해 도시에 공급하는 정교한 상수도 시스템이 있고,
효율적인 운하와 여러 개의 구획으로 잘 정리된 시가지에서는
중국과 인도로부터 수입되는 갖가지 진기한 물품과 이집트에서
생산되는 식량과 옷감 등이 지중해 전역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70만 장서를 소장한 도서관에 많은 학자들이 활동.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서기들이 과학과 수학,
철학에 관한 저서들을 필사해 로마 제국에 공급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가진 파라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왕가를 따라 이주한
그리스계 주민들로 삼지 않고 대다수 토착 이집트인들로 삼았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이
1만 명 남짓한 소수의 병력만 데리고 왔기에 수세에 몰렸다.
카이사르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불질러 도서관을
태운 것도 대규모의 이집트군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해군이 항구를 장악해 원군이 상륙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로마군이 정박해 있던 이집트 함대에 불을 놓았는데,
이 불이 마침 강한 바람을 타고 크게 번지는 바람에 일어난 일.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관계도
클레오파트라가 유혹한 것이 아니라
전력이 열세인 가운데 두 사람이 함께
왕궁에 있었기에 전투 중 관계가 급진전.
두 사람 사이가 뜨거워지고 로마의 원군이 도착.
때마침 나일 강의 홍수가 이집트군의 진영을 덮쳐
프톨레마이오스가 병사들과 함께 익사하며 사태수습.
클레오파트라는 왕가의 전통에 따라
다시 10살짜리 막내 동생과 결혼했다.
달리 할 일이 없던 카이사르는 나일 강 탐험을 계획.
신비에 쌓여 있던 나일강의 발원지를 찾으려는 대모험.
그는 나일강을 올라가는 모험에 클레오파트라를 초청했다.
카이사르는 강의 발원지를 찾는 목표에는 실패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임신시키는 데는 성공.
클레오파트라가 정말 미인이었는지 논란의 대상.
디오 카시우스는 '사랑을 거부하는 어떤 남자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미인이었다 했지만,
목소리와 화술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전한다.
영국 대영박물관은 클레오파트라.
대략 서른 살 전후였을 때의 모습.
키는 150센티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는 미인이라기보다는
날카로운 매부리코와 겹쳐진 두 개 턱.
두툼한 목덜미에 통통한 근육질인 육체.
그녀는 전세계 여성 중 최고 지성을 갖춘 지식인.
어렸을 적부터 문학, 과학, 수학, 철학, 천문학, 수사학,
의학 등 모든 분야의 지식과 9개국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
악기 연주와 노래에도 능했으며 체육과
군사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승마에 능했다.
사실 여자의 미모라는 것은 전망 좋은 방과 같다.
처음 들어서면 감탄하지만 오래 머물면 익숙해지는 것.
카이사르 역시 지적인 사람이라 그의 취향에 잘 맞는 여자.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되기 직전 클레오파트라는
'작은 카이사르'라는 의미의 '캐사리온(Caesarion)'이라는
별명인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를 데리고 로마를 방문.
카이사르의 개선식을 참관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로마인은 이집트에 대한 탐욕을 감추며 여왕에 대해 적의.
당대의 논객이었던 키케로(Cicero)는 여왕의 오만함을 공격.
다른 로마인들은 근거없이 여왕의 방탕함을 공격.
캐사리온은 카이사르의 유일한 직계 혈육이었기에
이집트 여왕의 아들이 로마 통치자가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캐사리온이 카이사르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에
정당성을 실어주려 여왕을 방탕한 여인으로 몰아간 것.
그당시 크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 정국이 불안정했음에도
로마에 2년 가까이 머물렀고 카이사르는 영리한 여왕을 경계.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는 막내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캐사리온을 데리고
로마를 탈출해 이집트로 돌아와 정국을 수습.
그녀가 이집트 어수선한 상황을 수습하는 동안
허울만 남편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운명.
캐사리온이 그의 뒤를 이어 이집트 파라오로 즉위.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잡고
여기에 카이사르의 근위대 대장이었던 레피두스가 가세해
제2기 삼두정치가 성립되면서 공화파를 대대적으로 숙청 시작.
이때 여왕에 대해 적대감을 표출했던 키케로도 살해되었다.
브루투스 중심으로 그리스에서 마지막 저항을 벌였던 공화파는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하고 브루투스가 자살하자 완전히 몰락했다.
이 혼란한 와중에서도 클레오파트라는 현명하게 대처했다.
공화파들은 시리아나 마케도니아 같은 동방을 근거지로 삼았고
알렉산드리아에 주둔하던 로마군까지 공화파에 가세한 상황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충직한 카이사르파 장군 돌라벨라 지지.
군대를 파견하거나 하는 직접적인 전쟁 개입은 하지 않았다.
여왕의 직접 통치가 다시 시작되면서
이집트는 안정을 되찾았고 혼란스럽던
로마 정세에도 이집트는 휘말리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 시절의 로마는 폭력 탐욕 야만성이 충만.
이집트 여왕을 로마 영웅을 추락시킨 팜므 파탈로 간주.
클레오파트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조국과 민중에게 최선을 다했던 헌신적인 파라오였다는
사실은 카이사르나 안토니우스와의 연인 관계가 입증한다.
약소국인 이집트 여왕이
강대국 로마 장수들에 대한
연인관계를 요부로 매도함은
대단히 위험한 역사관 사고방식.
로마는 분명히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약탈하면서 대제국을 건설.
갈리아인, 게르만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들의 희생.
그위에서 번영했던 로마제국은 야만적인 피의 제국이다.
그런데도 유럽인들은 항상
로마 제국이 재현되길 꿈꾼 것.
그들은 로마 제국의 영광 만을 기억하지만
그 역사 뒤에 감춰진 야만성을 잊은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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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은 대양 항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5세기 무렵부터
그들은 폭력을 동원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정복.
무적함대를 앞세운 스페인이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분명하게 로마 제국의 복사본인 셈.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했던.,이집트.
이집트 마지막 파라오.,클레오파트라.
대영박물관에 가면 그녀가 영국을 점령한듯.
이집트 문화재로 가득 채워진듯한 대영박물관.
그녀의 미이라 앞에는 언제나 관람객들이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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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15세가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BC51~47)와 결혼, 공동 파라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BC47~44)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일시 하야.
BC48년 10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 중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여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한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 아들인는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안토니우스와 협동 3년 후 결혼.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 여동생과 결혼한 사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각각 손위처남과 매제 사이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 유혹에 끝내
아내를 버리고 그녀와 연인이 된 것.
이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그가 복수를 다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재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 권력투쟁을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 유다 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안 클레오파트라는 39세로 자살;
뱀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한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도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그리고 생전에도 그녀는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이집트 여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女傑)이었다는 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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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중에서 유일하게 생명체가 만들어내는.,진주.
또한 조개가 분비물로 오랜 고통 끝에 만든 소산물.
진주는 조개 속에 들어간 이물질에 의해 생기는 보석.
조개 껍질 바로 밑에 외투막이 둘러쳐져 있는데
조개는 속으로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올 경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외투막에서 배출한 껍질의
원료 분비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이물질을 감싼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막은 점점 두껍고
단단해져서 마침내 진주가 되는 것이다.
결국 진주는 조개 몸 속에 들어온 이물질과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작용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몸 속에 갇우웠던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적을
도와 주었다는 일로 항의하기 위해 이집트 방문.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진주를 이용해 그와 협상한다.
그녀는 성대한 연회 중에 시종에게
식초를 담은 술잔을 가져오게 하고
진주 귀걸이 한쪽을 술잔에 담근다.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버리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진주가 녹은 이 식초를 마셔버리고
귀걸이 한쪽을 다시 술잔에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그녀의 대범함에 놀라 항의를 철회하고
결국, 클레오파트라 유혹에 넘어가 몸과 마음까지 빼앗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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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의 사원에서 성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넓적다리 단련 등을 했으며
달콤한 목소리와 빼어난 몸매로 뭇 남성 마음을
애태우고 근육질 노예를 상시 대기시켜 욕구를 해소.
그녀가 22세 때 만난 51세의 카이사르는 대단한 정력가.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그를 희대의 카사노바로 평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그는 루빈콘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원정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
전쟁에서 돌아온 카이사르 승전군은
신전까지 늘 개선 퍼레이드를 펼쳤다는데
그의 군사들은 개선행진에서 크게 외쳤단다.
“로마의 남편들이여,
아내를 감춰라!"
두 사람은 첫만남부터 특별하게 묘사된다.
회춘의 물로 목욕하고, 향유로 마사지 하고,
공작색 눈 화장한 알몸 여인이 융단에 감싸져서
건장한 노예가 둘러메고 카이사르 침실로 옮긴다.
카이사르 장군이 융단의 끈을 풀어 펼치는 순간에
융단에 감긴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알몸이 드러났고
그순간 방 안에는 달콤하고 은은한 향기가 진동했다.
이집트 여왕이 카이사르에게
자신의 알몸을 선물로 받친 것
카이사르는 그 여인과 깊은 포옹.
카이사르 후원을 받게된 클레오파트라는
12살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한다.
둘은 애정행각을 숨기려 허수아비 남편을 내세운 것.
이를 통해 클레오파트라는 성과 권력을 얻었고,
바람둥이 카이사르는 매력 넘치는 여인을 얻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로마로 귀국한 뒤
아예 클레오파트라를 집 근처로 불러들인다.
다시 정복 전쟁터에 나가는 카이사르 시저 장군은
자신의 믿을만한 부하 안토니우스에게 여인을 맡긴다.
그러나, 그가 암살당한 뒤 그녀는 안토니우스 품에 안긴다.
그녀의 정치적인 야망도,
식을줄 모르는 사랑의 열정도
가득 채워줄 남자가 필요했던 것.
결국, 안토니우스는 전쟁 중 부상으로 숨지고,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도 황금 옥좌에서
자신의 젖꼭지를 독사가 물게 해 자살로 생을 마감.
"그녀의 코가 한치만 낮았어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그녀의 참 모습이었고
그녀는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이었다 전한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
악티움 해전.
도버해협
1987~88년 도버 해협 양쪽에서 굴착공사를 시작하여
1991년 완공, 공식적으로는 1994년 5월 개통된.,유로터널.
시속 300㎞ 고속열차 유로스타 런던-파리, 런던-브뤼셀 운행.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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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 탑(Tower of London)...
런던 시 동쪽, 템스 강의 북측 강변.
정복왕 윌리엄 1세가 대관식을 마친 뒤, 토
착상인 사회를 지배하고 중요한 항구였던 런던 소를
통제할 목적으로 세운 요새를 세웠고 13개의 탑이 있다.
13탑 중 유명한 것은.,블러디 타워,
비첨 타워, 웨이크필드 타워 등이다.
영국 왕실 의전에 쓰이는 보물과 의복들은
런던탑 지하에 있는 '주얼 하우스'에 보관한다.
런던탑 건물(면적 7㏊) 출입구는 런던 시내와 연결.
'반역자의 문'이라는 수문은 오랫동안 감옥으로 쓰이던
런던탑에 호송되는 죄수들이 이 문으로 지나간데서 비롯.
런던 다리 하류에서 템스 강을 가로질러
도시 중앙으로 통하는 유일한 다리인
타워 다리(1894)가 런던 탑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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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강., 런던 타워 브리지 & 시티 오브 런던.
런던 템즈강
템즈강 유람선
바이킹의 후예
런던의 연인들.
영국 런던의 연인들은
프랑스 파리의 연인들과
극명하게 대비가 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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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London)은 잉글랜드와 영국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인구는 2014년 약 8,538,689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2천년전 로마인들의 테임즈 강변 론디니움 요새부터 시작.
시티 오브 런던은 고대 시대부터 런던의 핵심 지역인데,
1.12-마일(2.9 km2)로 중세시대부터 변하지 않고 있으며
2011년 7,375명이 거주하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작은 도시.
19세기부터 "런던"은 주변까지 개발된 대도시를 의미했다.
이러한 광역 도시권 대부분은
런던 지역과 그레이터 런던으로,
런던 시장과 런던 의회에서 통치한다.
런던은 세계적인 글로벌 도시인데,
예술, 경제, 패션, 엔터테인먼트, 금융,
의료, 매체, 전문산업, 연구와 개발산업,
관광, 교통 등 거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뉴욕과 함께 세계 최고 역할을 하고있다.
특히, 세계의 가장 중요한 금융 지구 중 한 곳으로,
기관에 따라 세계 도시 GDP 순위 중 5~6위로 선정된다.
뉴욕과 함께 세계의 문화 수도이며 국제 항공편 승객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이고 여객 수송 담당 도시.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43개 대학을 보유
1908년, 1948년, 2012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세계 최초로 3번이나 하계 올림픽을 개최한 도시이다.
런던은 지리학적으로도 중요한데 본초 자오선,
즉 경도 0도선이 지나며 협정 세계시의 기준선.
런던에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고있으며
런던 행정 구역안에서 300개 이상 언어가 사용된다.
런던 인구는 영국 인구의 12.5%를 차지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방 자치제.
런던은 1831년부터 192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보유했던 도시이기도했다.
런던에는 런던 탑, 큐 왕립식물원, 웨스트민스터 사원
세인트 마가렛 성당으로 이루어진 웨스트민스터 궁전,
그리니치 천문대, 본초 자오선, 경도 0°, 그리니치 평균시 등
그리니치 유적지 총 네 개의 세계유산이 있다.
다른 유명한 랜드마크로는 버킹엄 궁전, 런던아이,
피커딜리 서커스, 세인트 폴 대성당, 타워 브릿지,
빅 벤, 트라팔가 광장, 더 샤드 등이 있다.
또 수 많은 박물관, 갤러리, 도서관, 체육시설, 문화회관
대영 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대영 도서관,
웨스트엔드 그리고, 런던 지하철은 세계최초 철도망이다.
대영제국의 산업· 상업· 정치의 중심지.,런던.
잉글랜드 남동부 템스 강변, 북해에서 65km 떨어져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휴식 공간이 많아 도시경관 자체가 여유로웁다.
오랜 전통을 지닌 시민의식을 갖고 있어
런던은 도시적 삭막함이 덜한 편인 대도시
20세기 말의 눈부신 발전을 따라잡는데는 실패.
지난 세기들의 많은 장점을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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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런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
지금의 런던 지역에는 켈트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후, 로마인이 43년 론디나움(Londinium) 건설.
론디니움
200년대 초반, 로마인들은 도시에 많은 벽을 세웠는데
외부로부터 침입자들로부터 방어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410년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면서 로마군들이 본국으로 철수.
<중세 런던>.
게르만족 부족인 색슨족, 앵글족, 유트족이
브리튼 섬의 동부를 공격해, 결국 그곳에 정착.
왕국 건설 후 런던은 새로운 도시로 번영하였다.
800년대에는 덴마크의 바이킹이 도시를 공격
후에 알프레드 대왕이 런던을 새로 설립하였다.
1000년대 앵글로색슨
왕인 에드워드 참회왕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세웠다.
1066년에는 프랑스의 귀족인 기욤
(윌리엄 1세)이 영국을 통치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위에 올랐다.
윌리엄 1세는 런던 시민들을 자치 정부로 승인하였다.
중세기 동안에는 런던의 다른 건조물들이 건설되었는데,
1090년 쯤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0년 후 완공.
1209년 런던 브리지가 템스강에 첫 돌다리였고
후에 나무 다리로 변했다가 가끔씩 재건하였다.
1100년대에는 런던의 공예와 상업의 길드가 발달.
길드는 각각 동업끼리 숙련공과 상인들을 상징하였다.
길드의 조합원들은 1190년대에 런던의 첫 시장을 뽑았다.
1215년 존왕이 런던이 자기 뜻으로 통치되는 것을 확립하였다.
역사가들의 주장으로는 1400년대 런던 인구 75,000명.
런던은 1500년대와 1600년대 초기에 빠르게 번영하였다.
헨리 8세 통치 때 귀족들이 장벽 바깥 서쪽에 사유지를 지었다.
헨리 8세가 사망한 1547년에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이 의회의 회의장소.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 때 와서는
런던은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상인들이 부유해지면서, 화려한 집들을 짓기 시작.
영국의 첫 극장들이 외곽 지역들에서 개장되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1600년대 중반에는 런던의 인구는 500,000명이었다.
많은 런던 시민들은 장벽의 밖에 있는 구역들에 살았다.
1642년에 찰스 1세와 의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자,
런던은 올리버 크롬웰과 다른 청교도들 의회편에 섰다.
신앙심이 깊은 청교도들이 1649년에 찰스 1세를 처형하고
권력을 잡자, 런던은 번영이 못 갔다. 크롬웰 정부가 극장들을
문닫는 등, 시민들의 인기를 잃었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망명으로부터 돌아오자, 런던 시민들은 그를 환영하였고 왕정 복고.
흑사병이 1655년에 도시를 황폐시키기 시작하였다.
쥐들이 빈민가를 들끓면서 100,000 생명을 빼앗았다.
1666년 9월 2일 대화재에 다행히, 사망자는 적었다.
그러나, 세인트 폴 대성당과 80개의 다른 교회들, 44개의
길드 회관과 13,000채의 주택들이 불에 타 재가 되고 말았다.
<현대 런던>.
런던 시민들은 목재 대신, 돌, 벽돌 등을 이용해 도시 재건.
하였다. 새 도시의 위대한 건축인은 크리스토퍼 렌 경이었다.
파괴된 많은 건물들을 재건, 많은 상인들도 웨스트 엔드로 이전.
런던의 비지니스들은 곧 회복되었다.
1700년대 초반 런던 증권거래소가 열렸고,
신문업계들도 생겼고 18세기 이후 산업혁명기.
1800년에는 인구가 대략 1,000,000명이었다.
1800년대에는 런던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산업혁명기동안의 런던의 주요 역할은
공업 제품을 파는 시장들을 발달시키는 것
도시 상인들과 은행가들은 막대한 행운을 만들었다.
부자인 런던 시민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기는 하나,
웨스트 엔드 지역에서 시간을 보냈다.
1800년대 중반에는 웨스트 엔드는
유행적인 생활지역으로 유명해졌다.
산업혁명은 런던에 번영은 물론 고통을 끼치기도 하였다.
부두, 공장,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
빈민굴에서 살았는데 후에 슬럼은 서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1800년대에는 수많은 런던 시민들이
도시의 외딴 지역들로 옮겨가기 시작
교통의 발달과 함께, 외곽의 번영이 시작.
1750년에는 웨스트민스터 다리,
그후 수많은 다리들이 세워졌다.
19세기에는 마차가 도시의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고,
1800년대 중반에는 철도 서비스가 급격히 발달되었다.
런던 정부의 첫 개혁은 1888년 세워졌다.
그레이터런던이 그해에 성립되었고,
다음 해에 28개의 자치구가 생겼다.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공군이 런던에 폭탄 투하.
제2차 세계 대전에는 더 크고 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나자, 런던의 수많은 지역이 무너졌고,
15,000명 ~ 50,000명의 런던 시민들이 사망했다.
그러나, 곧 런던은 재건되어
영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발달.
1946년에는 1차 국제 연합 총회가 런던에서 열렸고,
2년 후인 1948년에는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20세기 동안에 식민지들이 독립되자,
그 나라들로부터 들어오는 이민들이 급증
2005년에는 2012년 하계 올림픽의 개최가 결정
세 번 올림픽을 개최한 세계 유일한 도시가 되었다.
영국 영화는 군더더기가 없는 편이다.
바이킹 영화, 007 시리즈 영화 등이 그렇다.
남녀 간 애정 표현도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편.
영화 내용 또한
화려하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으며
웅장하고 박진감 넘친다.
'영국은 어떠한 나라일까?'
.......................영국...................................
유럽대륙 서북쪽 대서양상에 위치한 입헌왕국.
면적은 24만 3,610㎢, 인구는 1997년 현재 5,882만
앵글로색슨족(Anglo-Saxon族)과 켈트족(Celt族).
공용어는 표준영어이고 겔릭어 ·콘월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50%) 외에
가톨릭(11%), 감리교(Methodism)(30%)가 신봉된다.
기후는 멕시코만류와 편서풍 영향으로
북위 50°∼60° 고위도 임에도 따뜻하다.
....................................................
영국으로 들어가는 바다 관문이.,도버해협이다.
해협 너비는 30~40㎞, 깊이는 35~55m에 달한다.
BC 5000년경까지는 밖으로 드러나 있는 강의 유역.
이때 영국은 유럽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탁월풍 때문에 해협을 통과하는 조류(潮流)는
영국해안의 하얀 절벽을 침식작용으로 깎고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해상교통로
1977년 교통항로와 항해정보 엄격한 체계가 잡혔다.
영국의 도버와 포크스턴, 프랑스의 칼레와 불로뉴.,항구.
호버크래프트(고압공기로 물 위를 떠서 운행하는 쾌속정)
해저철로 터널 계획이 1856년 처음 제안되었고
수차례 재검토 끝에 1991년 터널 굴착작업에 성공.
도버 해협은 여러차례 역사적으로 중요 해상전투.
영국군이 스페인 무적함대에게 최초의 승리(1588).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불로뉴는 주요군사기지였으며,
도버는 '도버 수비대' 본부로 해협에 있는 선박을 보호.
1940년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철수한
연합군이 해협을 건너 도버에 도착했다.
도버는 원래 '바다' 또는 '해류'라는 의미.
기원 전 55/54년 케사르(Caesar)의 침공으로
로마의 속주(屬州) 브리타니아로 불렸던.,영국.
약 400년간 로마의 군정이 있은 뒤
앵글로색슨의 침공으로 6∼8세기에
7왕국시대가 있었으나 829년 통일왕국.
1066년 봉건국가 노르만조(朝)가 성립되었다.
1215년 대헌장(大憲章)은 이 시대의 소산이다.
영국은 언제부터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라 불리운 것일까?
.................엘리자베스 1세...............................
25세였던 1559년 왕위에 올라 44년 동안 영국을 통치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여왕 중 하나이며 평생 처녀.
어머니가 아버지 헨리8세에 의해 처형당한 끔찍한 경험.
결국, 남성을 받아들이지 못해
평생 독신 처녀로 살았던 여왕.
여왕의 어머니 앤 볼린은 결혼 1,000일 만에
간통 혐의로 다혈질인 헨리 8세에 의해 처형.
잉글랜드 역사 상 가장 뛰어났던 국왕,
유럽 변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잉글랜드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기초를 다진 통치자
일레자베스 1세는 비정상적인 수준의 천재였다.
7개국어를 사용했고, 문학은 상상 못할 정도 재능.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 주도권을 쟁취.
아메리카 대륙에 새 식민지를 개척했고
인재를 발탁해 영국의 황금기를 연.,여왕.
..........................................................
절대군주제는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의 치세 이후
점차 쇠퇴하여 17세기 100년 내란으로 국왕이 처형되고
크롬웰(Cromwell,O.)이 주도한 공화정부가 들어섰으나,
그가 죽은 뒤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 1688년 명예혁명이 이룩.
이때부터 영국은 입헌군주제하에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오늘에 이른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시작된 해외영토 확장은
18세기에 이르러 대영제국(大英帝國)을 건설했고,
그 위세는 19세기 말, 빅토리아 치세 때 절정이었다.
이즈음 우리 나라에도 한영 수교의 기원이 발단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치른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대영제국은 영연방(英聯邦)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상 붕괴.
대영박물관.
영국 국빈용.,마차.
웨스트 민스트 사원.
버킹엄궁전 & 대영박물관.
영국 런던.,대영박물관.
셰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선사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물 유적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이 볼만하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와
로마 등에서 시작된 고대 문명에 대한
전시품들이 유명하며 그중에서도 미라와
로제타석은 언제나 관람객들로 붐비는 섹션.
또한 내부에는 한국관이 2000년 11월에 신설되었는데,
구석기 유물부터 조선 후기 미술품까지 전시하고 있다.
지하철 : Central, Northern
Tottenham Court Road 역에서 도보 5분
Piccadilly / Central 라인 홀본(Holborn) 역에서 도보 5분
버스 : 1, 7, 8, 10, 14, 19, 24, 25, 29, 38, 55,
59, 68, 73, 91, 98, 134, 168, 188, 242, 390번
.................대영박물관....................
세계3대 박물관으로 알려진 대영박물관.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 소장품들을 전시.
런던의 블룸스베리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1753년 한스 슬론 경(1660~1753)이 소장하고 있던
예술품과 장서를 영국 정부가 매입하면서 설립되었다.
의회법에 따라 설립된 이 박물관은 1759년 대중에게 공개.
작품이 많지 않았던 초기에는 몬터규 후작의 저택에 전시.
그후 전 세계에서 기증한 작품과 다양한 작품 구매 덕분에
전시품들이 많아짐에 따라 1824년 로버트 스머크 경이 설계.
1823~52년 몬터규 백작 저택 부지 위에 건설.
신고전양식인 현재의 건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고대 및 중세의 공예품과 예술품
민속학적 수집품들은 런던에 있는 인류박물관에 따로 전시.
1973년 이 박물관의 도서관은
다른 몇몇 주요기관들의 장서를
합하여 영국도서관으로 창설되었다.
영국 박물관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고고학 및
민속학 수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로제타 스톤이나 람세스 2세 석상과
그리스 신전 부조물을 비롯해 이집트의
미라 등 그리스 양식의 건물 내에 전시된
엄청난 양의 수집 전시품들을 관람하다 보면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듯 하다.
...............................................,,..............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 들어가 보면
이집트여왕 클레오파트라 미이라 주변에는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붐비는 사실이 놀랍다.
이집트 관.,클레오파트라 미이라.
대영박물관 이집트 관에는
유리관 속 아마포에 둘러쌓인
클레오파트라의 미이라가 있다
가냘픈 체구에 단신의 여인이며
수천년 고대왕국 마지막 여왕이고
시저의 애인이며 안토니우스의 아내.
악티움 패전과 더불어
스스로 자살을 택했던 여왕.
독사에게 젖가슴을 물게 한 것.
그리고 나서,
그녀의 시신은
미이라가 된 상태로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그녀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대영박물관 유리관에 갇혀 있다.
아울러, 대영박물관 내에는
세계 각국의 고대 유물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곳에 1,300만 여점의 소장품들 중에서는
대영제국 시대 약탈한 문화재도 적지 않다.
초기에는 몬터규 후작의 저택에 전시되었지만,
그후 전 세계에서 기증한 다양한 유물 유적을 전시.
또한, 한국관이 별도로 있어
한국의 유물 유적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영박물관 수많은 유물 유적을
압도하는 전시품은., '클레오파트라 미이라'.
마치, <이집트 박물관>에 온듯한 느낌이 든다.
고대 이집트여왕.,<클레오파트라>.
마치, 그녀가 대영박물관을 점령한듯.
.........클레오파트라 7세..........
기원전 69~기원전 30년 8월 30일.
이집트여왕(사망지 : 알렉산드리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였으며
뒤에는 안토니우스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부왕이 죽은 뒤(BC 51) 왕위에 올라
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51~47 재위),
프톨레마이오스 14세(BC 47~44 재위) 및 자기 아들
카이사르(BC 44~30 재위)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자살했고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그녀는
로마의 중대한 시기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로마 병합(BC 31) 때까지 마케도니아 마지막 군주.
그녀의 조상은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의 피는 전혀 섞이지 않은 여성이고
그녀를 제외한 왕가 사람들은 모두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사실상 BC 168년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령.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아버지를 복위시킨 대가로
돈을 요구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을 필요로 했던 것.
BC 47년 3월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2주간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기에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 카이사르 아들이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
BC 3000년 이미 청동기 문명국.,이집트.
이집트는 BC 2925년경 메네스 왕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통일로 인해
이집트 문명은 절정기에 든 후 3,000년 동안
본토 출신들이 지배자 위치를 계속 이어갔다.
31개 왕조에 걸쳐 BC 332년까지 계속된 이집트 고대사에서
피라미드는 고왕국의 유산이며, 오시리스 숭배와 조각의 세련미는
중왕국에서 이뤄진 것이고, 제국시대와 유대인 출애굽은 신왕국에 속한다.
나일 강 범람의 규칙성을 알아내기 위해서
이집트에서는 태양력, 천문학이 발달하였다.
투탕카멘의 무덤, 기자의 거대한 피라미드 등은
이집트 문명의 뛰어난 건축술과 기하학을 보여준다.
이집트 사회는 신, 왕, 죽은 사람, 인간으로
이루어진 하향식 ;피라미드형' 계급 구조 사회.
왕은 어떤 인간보다 잠재 능력이 크다고 여겼기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웠고 파라오라고 불렸다.
이집트 대피라미드 구조.
파라오는 고대 이집트의 정치적·종교적 최고 통치자.
'두 땅의 주인(Lord of the Two Lands)' 이라는 칭호.
'모든 사원의 수장(High Priest of Every Temple)'이다.
‘두 땅의 주인’이란 상이집트와 하이집트 전체의 통치자.
파라오는 두 지역의 모든 토지에 대한 소유권, 법률 집행권,
조세의 권리와 함께 두 지역을 외부 침입으로부터 보호할 의무.
파라오는 ‘모든 신전의 수장’으로
지상에서 신을 대신한다는 의미이며,
제사 의식을 주관하고 신전을 건설한다.
안토니우스 &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와 사랑을 나눈 끝에 아들인
'카에사리온'까지 낳은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당시 로마에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다급히 이집트로 귀국하여 자기가
로마로 떠날 때 형식 상 세워 놓았던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아들 카에사리온을 왕으로 세운 뒤 막후 실력행사.
한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소탕한
동방 속주에서의 자기의 명성을 과시하는 동시에
세력확장을 위해 소아시아 지방을 순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클레오파트라를
키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호출했다.
그녀가 원로원파를 돈으로 매수했다는
풍문의 사실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파르티아 원정자금을 조달하려는 의도.
이유야 어떻든 간에 호출 명령을 받은
클레오파트라는 즉시 떠날 준비를 갖췄다.
과거 카이사르를 유혹해 정권을 잡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안토니우스
힘을 빌어 자신의 세력을 안정시켜 보려는 생각을 품었다.
금은보화로 장식한 배 위에서 향연을 베풀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들뜨게 했으며, 사교술과
자신의 요염한 자태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 안토니우스
본분마저 잃어 파르티아 원정을 미루어놓고
클레오파트라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월을 보냈다.
이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는
남편을 로마로 끌어오기 위한
계책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부하 한 사람과
옥타비아누스 사이에 싸움을 붙이자,
그러면 남편은 틀림없이 로마로 돌아올 것이다."
그녀가 생각한 대로 사건이 발생하자,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내인 풀비아는 돌아온 남편과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귀국한 안토니우스를 이해 화해 한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도 불러 3년 전 삼두정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때에 3인은 각자 지배 영토를 분배,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와 에스파냐를 차지,
안토니우스는 동방,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차지
옥타비아누스는 아내를 잃은 안토니우스와
자신의 과부 누이인 옥타비아를 결혼시켜서
유대를 굳게 다져 삼두정치는 더 굳건해졌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균형이 무너졌다.
그것은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하여 로마의 곡물 수입을 방해하면서 시작되었다.
삼두 체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화해도 해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던 중에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6년에
부하 아그리파를 보내어 섹스투스 세력 타도에 성공.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인기를 한몸에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군력을 완전히 장악.
군사력에 있어서 로마의 최강자가 되었고 곧이어
레피두스를 실각시켜 아프리카 속주까지 차지하여
명실공히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던 것.
반면 안토니우스는
몇 년 전에 중단했던
파르티아 원정을 재개.
로마를 떠날 구실을 찾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에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대동하고
원정에 올랐으나 사랑에 빠진 장군의 밑에서
파르티아 원정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결국 원정은 대실패로 끝나고
안토니우스는 많은 부하를 잃었다.
그래도 안토니우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페니키아, 시리아, 키프로스 등의 로마의 속주들을
자기 멋대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는 등 매국 행위.
이러한 소식이
로마에 퍼지자,
시민들은 흥분.
"클레오파트라는 나일 강의 마녀다.
그런 여자에게 놀아나는 안토니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처벌해야 한다."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를 규탄하기 시작했고,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점점 더 인기가 상승했다.
그럼에도,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안토니우스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로마 시민들이 그를 욕하건 말건 간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다는 것만이 기쁨.
결국 기원전 33년에는
그의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로마 시민들은
그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 유언장이 로마에서 공표되었다.
내가 죽거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오파트라 옆에 묻어달라.
이쯤 되자 로마 시민은 그에 대한 분노를 더 참을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를
당장 로마로 끌어와 시민 앞에 세우고,
마녀 클레오파트라를 우리의 손으로 쳐죽이자."
이런 분위기를 타고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집트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것은
안토니우스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선언.
안토니우스는 운명이 걸린 전쟁을 맞이하고도
클레오파트라 품 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안토니우스 육군은 옥타비아누스보다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의 의견에 따라
해전으로 승부를 내기로 결정했다.
전쟁은 그
리스 서북쪽 악티움에서
기원전 31년 9월 1일에 벌어졌다.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 얼마간은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결판도 나기 전에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이집트 함대가
싸움터에서 빠져나가자, 안토니우스도 달아났다.
그의 부하들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계속 싸우다가 거의 전멸.
악티움의 패전으로 몹시 상심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
자기 때문에 안토니우스가 불행하게 되었다고 슬퍼하면서
지하 묘실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시녀를 안토니우스에게 보냈다.
"여왕께서는 장군의 불행을 슬퍼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이 소식을 듣자 안토니우스는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겼다.
"클레오파트라여, 외로워 말고 나를 기다려라. 이제 나도 네 곁에 가리라."
이 말을 남기고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배를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즉시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순간에 클레오파트라의
시녀가 안토니우스 앞에 다시 나타났다.
"여왕께서는 아직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시녀는 깜짝 놀라며 안토니우스를 지하 묘실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숨이 끊어진다.
안토니우스가 죽자 알렉산드리아는 쉽게 함락.
포로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가 자기를 로마로 끌고 가
개선행렬에 내세울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도 마지막 결심을 했다.
몸을 단정히 하고 이승에서
마지막 식사를 마친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남기고
스스로 독사에 물려 자살하고 말았다.
저는 로마의 위대한 영웅을 파멸시킨 불행한 여자입니다.
비록 저의 잘못이 클지라도 그대의 부친 카이사르를 생각해서
저의 시체를 욕되게 마시고 무사히 장례를 치러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렇게 해서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던
헬레니즘 왕국들 가운데 단 하나 남았던
이집트마저 멸망후 로마의 지중해 통일이 완성.
아울러 안토니우스의 죽음으로
100년 간의 로마의 내란도 모두 끝났고
로마는 "옥타비아누스 만세!"를 외치며 평화를 맞았다.
이집트여왕.,클레오파트라 7세.
여성 '파라오'이자., 강력한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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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라미드’하면 흔히 ‘이집트’를 떠올린다.
'이집트 기자' 3개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모두 제4왕조(B.C.2600~2480)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자 피라미드 중 가장 북쪽에 피라미드.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가 세운 대피라미드.'
밑변 평균길이 230.4m, 높이 147m 규모이다.
3개 중 가운데 피라미드는 제4왕조 4대왕 카프레.
남쪽 끝 피라미드는 제4왕조 6대왕 '멘카우레' 것.
각 건조물은 원래 죽은 왕의 시신을 모신 피라미드
이에 딸린 장제전, 장제전에서 나일강 가까운 계곡에
위치한 사원으로 통하는 경사진 둑길로 구성되어 있다.
각 피라미드 옆에는
다른 왕족의 무덤으로 쓴
보조 피라미드가 1~2개 있다.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이 걸렸고
성인 남자 10만 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
그런데, 중국 장안에 있는 피라미드들이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더 오래 되었다는 설.
중국 장안은 "서울 장안"과 관련이 깊은 지명.
서울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말.
하나는 한 나라 수도를 지칭하는 일반명사로서,
또 하나는 한국의 수도 ‘서울’이란 고유명사이다.
예전에는 수도 ‘서울’을 "장안"이라고도 불렀지만
현대에 이르러 이 말을 쓰는 사례가 줄어들고 있다.
장안은 옛날 중국 한(漢)나라 수도였다.
한나라가 이곳에 도읍을 정한 뒤에 수나라,
당나라 때까지 계속 도읍으로 자리 잡은 도시다.
중국을 섬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물든
조선의 유학자들이 '장안'이란 말을 들여와서
‘서울 장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한나라 수도.
서안(西安)은 흔히 장안이라고 알고 있는 곳이다.
중국 산시성 성도이며, 전한 수도 장안성(長安城).
서안 피라미드 중 큰 것은 기자 피라미드 보다 2배 이상.
적벽돌로 만들어졌는데 많은 피라미드들이 유실되고 있다.
기원전 200년 경 유물들로 추정되는데 고조선 유물설도 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출범했던.,한나라당.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해 한나라당은 야당이 되었으나
제16대 총선에서 승리하여 여소야대 승리를 거둔 여당이 되었다.
대영박물관.,한국관.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나흘간 한국을 방문.
일정은 영국 왕실의 계획에 맞춰 의전 행사를 최대한 배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영국 여왕은 1999년 4월 21일 오전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
보물 제414호 풍산류씨충효당(忠孝堂)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여왕은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모습을 본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왕이 해외 나들이에서
신을 벗은 일은 처음이라
언론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어 안동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가 펼치는
하회 별신굿 탈놀이 양반선비마당 공연을 감상.
충효당에서 20여 분간 머문 뒤 50여m 떨어진 담연재에서
조옥화 안동소주기능보유자가 준비한 73회 생일상을 받았다.
그런 뒤 봉정사를 방문하고 안동 방문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영국 여왕의 방문 이후 안동 하회마을은
세계인의 마을로 더욱 사랑을 받고 있으며,
2008년 8월 관광객 수가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영국 여왕 방문 이후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문
하회마을 기념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방문 기념전시관에는
하회마을 방문 때 여왕의 생일상과 선물 모조품,
사진 등 70여 점이 전시되어 영국 여왕의 방문 이후
하회마을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마을’ 관광지로 부상.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대영 제국.
영국의 국가 브랜드.,엘리자베스 여왕.
과연, 그 위력을 새삼 더 실감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26년 4월 21일 ~ )....................
영국을 포함한 16개국(영국 연방)과 기타 국외 영토와 보호령의 왕.
그는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또한, 영국 외에도 (실질적으로는 연방 총독이 대표하고 있지만)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키츠 네비스
왕이 군림하는 영국 연방 16개국 총인구는
보호령까지 포함해 1억 2900만 명이 넘는다.
그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셈이지만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밖에도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피지의 최고 추장,
함대 사령장관 등의 직함을 보유한 전세계 군주 중 최고령인 여왕.
현재, 타이의 국왕 라마 9세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다.
2012년 6월 재위 60주년 엘리자베스 2세는
64년 동안 재위했던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영국 역사상 두 번째 다이아몬드 주빌리 군주.
군주가 96세가 되는 2022년에
군주의 재위 70주년을 기념하는
플래티넘 주빌리를 맞게 되는데,
현재, 건강 상태가 매우 좋기 때문에
이 또한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위 60주년을 맞아 실시된
영국의 가장 위대한 국왕이
누구인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또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5년 9월 9일 오후 5시 30분을 기점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기간을 넘어선 최장수 통치자.
버킹엄 궁전.,정문
버킹엄 궁전.,근위병 교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