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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樂浪), 대방(帶方) 그리고 괄지지(括地志)의 경(京)
2023년 08월 05일
○ 소위(所謂)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미명하(美名下)에 만들어지고, 설명(說明) 되어지는 “역사통설(歷史通說)”이란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이요, 식민사관(植民史觀)이요, 친일사관(親日史觀)” 논리(論理)를 일컫는 말이다.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대륙(中原大陸)』에서 시원(始原), 자생(自生)하며 토착(土着)된 “대제국(大帝國)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으로 만들어 놓고, 반도(半島)라는 좁디좁은 땅의 주인(主人)으로 이식(移植), 무지몽매(無知蒙昧)한 백성(百姓)들을 회유(懷柔)하고 억압(抑壓)과 협박(脅迫)으로 세뇌(洗腦)시켜 강제(强制) 암기(暗記)토록 교육(敎育)시킨 것이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냉전(冷戰)의 산물(産物)로 태어난 “대한민국 민주 공화국(大韓民國民主共和國)”이다.』
역사관(歷史觀)에서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일제(日帝)+일제(日帝)에 의한 강제점령(强制占領)+국권피탈(國權被奪)+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은, 변(變)한 것이 전혀 없는 “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똘똘 뭉쳐 있는 것, 오늘의 팩트[fact]다.
➨ 누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자주자립(自主自立)의 독립국가(獨立國家)’라고 칭하는가? 실상(實像)을 보면 : 웃기는 나라(國家)요, 국민(國民)들이다. 『국민(國民)들 스스로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을 원(願)하고 있는 한(限), 변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조상(祖上)님들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침을 튀기며 자랑하기에 바쁘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때 : 00 공신(功臣)의 양반(兩班) 사대부가(士大夫家)요, 정승(政丞) 판서(判書)를 역임(歷任)한 명문(名門) 중의 명문가(名門家)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조상(祖上)님네들이 어디에서 살았으며, 무엇을 근거(根據)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하면 머뭇거리며 대답(對答)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건 모두가 암기(暗記)토록 세뇌(洗腦)된 것이다. 양반가(兩班家)의 본관(本貫)은 바로 시조(始祖) 또는 중시조(中始祖) 등이 세(勢)를 일으키며 살았던 그 땅(地)의 이름[地名)을 말하는 것이고, 유래(由來)하는 것이다.】
자신(自身)이 그렇게 존경(尊敬)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조상(祖上)님이 살았던 터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슨 얼어 죽을 사대부가(士大夫家) 타령이요, 양반(兩班) 타령인가?
그래서 비참(悲慘)하다는 것이다. 희망(希望)이 없다는 것은, 곧 절망(絶望)이다. ‘절망(絶望)’만이 대한민국(大韓民國) 온 땅(地)과 하늘(天)을 뒤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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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 요동군(遼東郡), 요서군(遼西郡), 현토군(玄菟郡』등의 ‘5개 군(郡)’의 이름을 고전사서(古傳史書)에서 빼버리면 ‘대륙사(大陸史)든 조선사(朝鮮史)든 간에 한 축(軸)이 무너져버린다.’ 곧 대륙사(大陸史)도 조선사(朝鮮史)도 수백(數百) 또는 일천(一千) 년 이상(以上)의 역사(歷史)를 삭제(削除)해야 될 정도(程度)로 중요(重要)한 지명(地名)들이다.
즉(卽) 기원전(紀元前) 수천년(數千年) 전(前)부터 고려왕조(高麗王朝)까지도 이들의 지명이 늘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 요동군(遼東郡), 요서군(遼西郡), 현토군(玄菟郡』의 지명(地名)들은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한족(漢族) 중심(中心)의 왕조(王朝)’들과의 사이에서는 빼래야 뺄 수 없는 관계(關係)에 있었다는 사실(史實)이다.
➤ 전회(前回)【2023.07.14.…조선왕(朝鮮王) ‘만(滿)’이 살았던 상하장(上下鄣)】의 글에서 “낙랑(樂浪)” 땅에 상하장(上下鄣)이 있었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 관내(管內)에 있는 ‘장수(漳水)=장천(漳川)’의 양안(兩岸) 땅을 말한다』고 설명(說明)했다.
당시(當時)의 낙랑군(樂浪郡)은, 감숙성(甘肅省) 중부(中部)로부터 섬서성(陝西省) 장안(長安)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땅을 말하며, 이곳에 25현(縣)이 있었다고 보면 합당(合當)하다. 낙랑군(樂浪郡) 땅이 이곳에 설치(設置)되어 있었다고 이해(理解)하면 : 아래의 글 역시 쉽게 이해(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낙랑군(樂浪郡)과 평양(平壤)’은, 고구려(高駒驪)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함께 변천과정(變遷過程)을 함께했다고 보면 올바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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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회(前回)에 『낙랑군(樂浪郡), 요동군(遼東郡), 요서군(遼西郡), 현토군(玄菟郡』등의 호수(戶數)와 인구(人口)를 설명(說明)했는데,
➊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新羅)의 전성시대(全盛時代)에 경중(京中)의 호수(戶數)가 178,936호』에 달했다고 전해지며,
➋ 동사(東史) 보견(補遣)에 기재(記載)되어 있는 『고구려(高句麗)의 전성(全盛) 시의 경중(京中)의 호수(戶數)는 210,508 戶』,
➌『백제(百濟)의 전성(全盛) 시의 경중(京中) 호수(戶數)가 152,200호』라고 하였다. 더불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호적기재사항(戶籍記載事項)”으로는, 〈호주(戶主)의 주소(住所), 직업(職業), 성명(姓名), 년갑[年甲: 生年甲子], 본관(本貫), 사조[四祖: 父. 祖父. 曾祖父. 外祖父], 처(妻)의 년갑(年甲), 본관(本貫), 사조[四祖 : 父. 祖父. 曾祖父. 外祖父], 솔거(率居) 자녀(子女)의 년갑(年甲), 사위(여서: 女婿)의 년갑[年甲: 生年甲子], 본관(本貫) 및 노비(奴婢) 등의 년갑(年甲) 등을 기록(記錄)하였다〉고 하였다.
인구(人口) 및 호수(戶數) 등을 공부(工夫)하거나 연구(硏究)하는데 참고(參考)될만한 내용(內容)이다. 실제 ‘인구조사(人口調査)’에서는 : 그 수(數)를 짐작(斟酌)조차 할 수 없는 숫자의 노비(奴婢)들과 함께 천인(賤人)과 그 자식(子息)들은 이 수치(數値)에서 포함(包含)되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병역(兵役)에서도 제외(除外)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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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樂浪)은, 고구려(高駒驪)의 핵심(核心) 요충지(要衝地)였고, 또한 백제(百濟)는 또한 낙랑군(樂浪郡)을 두고 태수(太守)가 이곳을 다스렸고, 신라(新羅)의 낙랑(樂浪)은 곧 계림(雞林) 경주(慶州)였다고 하니, 낙랑(樂浪)은 조선사(朝鮮史)에서 빼버리면 삼국(三國) 모두가 없었던 일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중요(重要)한 지명(地名)이다.
낙랑(樂浪)이 평양(平壤)인가? 경주(慶州)인가? 그렇다면 백제(百濟)의 낙랑태수(樂浪太守)는 평양(平壤)에 있었는가? 경주(慶州)에 있었는가?
또 대방(帶方)이란 지명(地名)은 뭔가? 이르기를 : 서력(西曆) 3세기 초(初) 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樂浪郡)의 남부(南部)를 분할(分割)하여 군(郡)을 설치(設置)한 것인데, 본래(本來) 낙랑군(樂浪郡) 25개 현(縣) 중에 대방현(帶方縣)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확대(擴大) 개편(改編)한 것이다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또 삼국지(三國志)에서는 : 당시(當時) ”대방군(帶方郡)에 한(韓)과 왜(倭)가 있었다“고 하였다.
【三國志·公孫度傳:先時,屬國公孫昭守襄平令,召度子康為伍長。《三國志·魏志·東夷傳》〈高句麗〉: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三國志·烏丸鮮卑東夷傳》:「桓、靈之末,韓濊強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三國志·牽招傳》:又遼東太守公孫康自稱平州牧,遣使韓忠齎單于印綬往假峭王。峭王大會群長,忠亦在坐。】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우순(虞舜)』 편의 주석(註釋)을 보면 :
《正義 注 : 鳥或作島 : 조(鳥)는 혹은 도(島)라고도 한다. 括地志云:百濟國西南海中有大島十五所,皆置邑,有人居,屬百濟. : 괄지지(括地志)에서 이르기를 : 백제국(百濟國) 서남(西南) 바다 가운데(海中) 큰 섬(大島) 15개가 있어, 모두 고을을 두고, 사람들이 사는데, 백제(百濟)에 속했다. 又倭國西南大海中島居凡百餘小國,在京南萬三千五百里 : 또 왜국(倭國)은 서남(西南) 큰 바다 가운데(大海 中)의 섬(島) 백여(百餘) 소국(小國)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서울(京=都城)에서 13,500리에 있다.》라고 아주 친절(親切)하게, 간결(簡潔)하게, 확실(確實)하게 설명(說明)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괄지지(括地志) 원문(原文)”에도 이와 똑같이 기록(記錄)되어 있을까? 즉(卽) 『倭國西南大海中,島居凡百餘小國,在京南萬三千五百里. : 왜국(倭國)은 서남(西南) 큰 바다 가운데(大海 中), 모두 백여 작은 나라가 섬(島)에서 사는데, 서울(京=都城)에서 13,500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동일(同一)한 내용(內容)이다.
➨ “왜국(倭國)” 또한 당시(當時)의 기록(記錄)을 바탕으로 보면 : “서남(西南) 대해(大海)”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열도(列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서남(西南) 아세아(亞細亞)의 큰 바다 가운데(大海 中)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당시(當時)의 서울【京·도성(都城)·황성(皇城)】에서 남(南)쪽으로 13,500리 떨어진 서남(西南) 큰 바다 가운데(大海 中)의 섬(島) 등에 의지해 사는 왜국(倭國)이 있었다”고 하였다.
➊ 첫 번째 “핵심(核心)”은 ➨ “서남(西南)쪽의 큰 바다 가운데(大海 中) 큰 섬(大島)”이라는 것이고, 또 “서울 남(南)쪽 13,500리 떨어진 곳”이 또한 포인트(Point)다. 바로 “인도네시아[Indonesia]와 호주(濠洲)” 사이에 있는 큰 섬과 작은 섬들이다.
➋ 두 번째 핵심(核心)은 ➨ 낙랑(樂浪), 대방(帶方)에서 12,000리(里)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이나 일본열도(日本列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수만리(數萬里) 머나먼 땅의 이야기다.』 참 답답하고 애달픈 이야기다.
※ 아세아(亞細亞) 지도(地圖)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중심지(中心地)였던 “장안(長安)” 땅으로부터 그 남(南)쪽의 남아세아(南亞細亞)를 살펴보자. 경(京) 즉(卽) 도성(都城)으로부터 ‘13,500리’를 말이다. 또한 낙랑군(樂浪郡), 대방군(帶方郡)으로부터 12,000리를 생각해 보자.
○ 고전(古典) 원문(原文)은 : 〈‘왜(倭)’의 위치(位置)에 대해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을 중심(中心)으로 기록(記錄)하고 거리(距離)까지를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일까?〉 이게 진짜 궁금한 한 것이다.
(1) 후한서(後漢書) 왜(倭) 【後漢=東漢 : AD 25年-220年】
《“왜(倭)는, 한(韓)나라의 동남(東南)쪽 큰 바다(大海) 가운데에 있다. 낙랑군(樂浪郡)의 경계로부터 그 나라까지는 ‘1만 2천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台國。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與朱崖﹑儋耳相近,故其法俗多同]》고 하였다.
(2)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조위(曹魏) : 220年-266年】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남(東南)쪽 큰 바다(大海) 가운데에 있다. [倭: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為國邑.舊百餘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中略.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朱崖同.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고 하였다.
(3) 南齊書 : [479年-502年] :
《“왜국(倭國)은, 대방(帶方) 동남(東南) 큰 바다 섬 가운데 있다” [倭國,在帶方東南大海島中,漢末以來,立女王]》고 하였다.
(4) 南史
《북사(北史)에 상세(詳細)하다. 물산(物産)은 담이(儋耳), 주애(朱崖)와 대략적으로 같다[倭國,其先所出及所在,事詳北史.中略.物產略與儋耳,朱崖同.地氣溫暖,風俗不淫]》고 하였다.
(5) 北史
《왜국(倭國)은, 백제(百濟)·신라(新羅) 동남(東南)쪽 수륙(水陸) 3천리(千里)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산(山)과 섬(島)에 의지하며 사는데, 그 나라의 땅의 기세(氣勢)는 동(東)쪽은 높고(高), 서(西)쪽은 낮다(下). 전하는 바에 따르면 : 낙랑군(樂浪郡) 지경과 대방군(帶方郡)에서 나란히 1만2천리 떨어져 있는데, 회계(會稽) 동(東),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 [倭國在百濟,新羅東南,水陸三千里,於大海中依山島而居.其地勢東高,西下.又云:去樂浪郡境及帶方郡並一萬二千里,在會稽東,與儋耳相近.] 俗皆文身,自云太伯之後 : 풍속은 문신을 하는데, 스스로 '태백'의 후예라 한다. 計從帶方至倭國,循海水行,歷朝鮮國,乍南乍東,七千餘里,始度一海.又南千餘里,度一海,闊千餘里,名瀚海,至一支國.又度一海千餘里,名末盧國.又東南陸行五百里,至伊都國.又東南百里,至奴國.又東行百里,至不彌國.又南水行二十日,至投馬國.又南水行十日,陸行一月,至邪馬臺國,即倭王所都 . : 대방(帶方)에서 왜국(倭國)에 이르는 길은 바닷길을 따라서 조선국(朝鮮國)을 지나 남(南)쪽으로 잠깐, 동(東)쪽으로 잠깐 가서 7천 여리이면,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다. 또 남(南)쪽으로 천여 리에 바다를 건너는데, 이 천여 리의 넓은 바다를 일명 한해(瀚海)라 부른다. '일지국'에 이르게 된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 리에 말노국이 있다. 또 동남(東南)으로 육지를 따라 5 백리이면 이도국에 이른다. 또 동남(東南) 백리(百里)에 노국에 이르고, 동(東)쪽으로 백리를 가면, 불미국에 이른다. 남(南)쪽으로 물로 이십 일이면, 투마국에 이르고, 더 남(南)쪽으로 십일을 가고, 육지(陸地)로 한 달을 가면 사마대국에 이르지 곧 '왜왕'의 소도(所都)다.]》고 하였다.
(6) 양서(梁書)【502年-557年】
《왜(倭)는, 대방(帶方)에서 1만2천 여리 떨어져 있는데, 대체로 보아서 회계(會稽)의 동(東)쪽이다[倭者自云太伯之後俗皆文身去帶方萬二千餘里大抵在㑹稽之東相去絶逺従帶方至倭循海水行厯韓國乍東乍南七千餘里始度一海海闊千餘里名瀚海至一支國又度一海千餘里名未盧國又東南陸行五百里至伊都國又東南行百里至奴國又東行百里至不彌國又南水行二十日至投馬國又南水行十日陸行一月日至祁馬臺國即倭王所居.其官有伊支馬次曰彌馬獲支次曰奴往鞮民種禾稻紵麻蠺桑織績有薑桂橘椒蘓出黒雉真珠靑玉有獸如牛名山䑕又有大蛇吞此獸蛇皮堅不可斫其上有孔乍開乍閉時或有光射之中蛇則死矣.物産畧與儋耳朱崖同地温暖風俗不淫男女皆露紒富貴者以錦繡雜采為帽似中國胡公頭食飲用籩豆其死有棺無槨封土作冡人性皆嗜酒俗不知正嵗多壽考多至八九十或至百嵗其俗女多男少貴者至四五妻賤者猶兩三妻婦人無婬妬無盗竊少諍訟若犯法輕者沒其妻子重則滅其宗族漢靈帝光和中倭國亂相攻伐歴年乃共立一女子卑彌呼為王彌呼無夫壻挟鬼道能惑衆故國人立之有男弟佐治國自為王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使一男子出入𫝊教令所䖏宫室常有兵守衛至魏景初三年公孫淵誅後卑彌呼始遣使朝貢魏以為親魏王假金印紫綬正始中卑彌呼死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復立卑彌呼宗女臺與為王其後復立男王竝受中國爵命晉安帝時有倭王賛賛死立弟彌彌死立子濟濟死立子興興死立弟武齊建元中除武持莭督新羅任𨚗伽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鎮東大將軍,高祖即位進武號征東將軍其南有侏儒國人長三四尺又南黒齒國裸國去倭四千餘里船行可一年至又西南萬里有海人身黑眼白裸而醜其肉美行者或射而食之]》라고 하였다.
(7) 진서(晉書)
《왜인(倭人) : 왜인(倭人)은 대방(帶方) 동남(東南) 큰 바다 가운에 있으며, 산(山)과 섬(島)에 의지해 산다. 중략(中略). 그 나라의 여왕(女王)이 보낸 사자(使者)가 대방(帶方)에 이르러 조견(朝見)하였다.[倭人:倭人在帶方東南大海中,依山島爲國,地多山林,無良田,食海物。舊有百餘小國相接,至魏時,有三十國通好。戶有七萬。男子無大小,悉黥面文身。自謂太伯之後,又言上古使詣中國,皆自稱大夫。昔夏少康之子封於會稽,繼發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人好沈沒取魚,亦文身以厭水禽。計其道里,當會稽東冶之東。其男子衣以橫幅,但結束相連,略無縫綴。婦人衣如單被,穿其中央以貫頭,而皆被發徒跣。其地溫暖,俗種禾稻糸甯麻而蠶桑織績。土無牛馬,有刀楯弓箭,以鐵爲鏃。有屋宇,父母兄弟臥息異處。食飲用俎豆。嫁娶不持錢帛,以衣迎之。死有棺無槨,封土爲塚。初喪,哭泣,不食肉。已葬,舉家入水澡浴自潔,以除不祥。其舉大事,輒灼骨以占吉凶。不知正歲四節,但計秋收之時以爲年紀。人多壽百年,或八九十。國多婦女,不淫不妒。無爭訟,犯輕罪者沒其妻孥,重者族滅其家。舊以男子爲主。漢末,倭人亂,攻伐不定,乃立女子爲王,名曰卑彌呼。宣帝之平公孫氏也,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其後貢聘不絕。及文帝作相,又數至。泰始初,遣使重譯入貢.]라고 하였다.
➨《其 女 王 遣 使 至 帶 方 朝 見 : 그 나라의 여왕(女王)이 보낸 사자(使者)가 대방(帶方)에 이르러 조견(朝見)하였다.》는 기록(記錄)이 바로 당시(當時)의 “대방군(帶方郡)”은 대륙(大陸) 요충지(要衝地) 땅에 있었다는 강력(强力)하고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이걸 능가(凌駕)하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가 또 있을까!
(8) 通典 倭
《왜(倭)는, 대방(帶方) 동남(東南) 큰 바다 가운데에, 산과 섬(島)에 의지해 사는데 모두 백여 나라이다. 광무(光武) 중원(中元) 2년에, 왜노국(倭奴國)의 봉공조하(封貢朝賀)하였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대부(大夫)라고 하면서, 왜국(倭國)은 가장 남(南)쪽 지경(極南界)에 있다고 하였다. 요동(遼東)에서 1만2천리 떨어져 있는데, 백제(百濟)·신라(新羅)의 동(東)쪽에 있다. 그 나라의 지경(地境)은 동서(東西:橫)로 5개월을 가야하고, 남북(南北)은 3개월을 가야 한다. 각기 바다에 이르는데, 대략 회계(會稽), 민천(閩川)의 동(東)쪽으로, 역시 주애(朱崖),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倭自後漢通焉,在帶方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光武中元二年,倭奴國奉貢朝賀,使人自稱大夫,倭國之極南界也.其王理邪馬臺國[或云邪摩堆]去遼東萬二千里,在百濟,新羅東南,其國界東西五月行,南北三月行,各至於海,大較在會稽,閩川之東,亦與朱崖,儋耳相近]》고 하였다.
【필자(筆者) 주(注) : 光武 中元 二年 : A.D. 57년(年)이다】
(9) 괄지지(括地志) :
《倭國西南大海中,島居凡百餘小國,在京南萬三千五百里. : 왜국(倭國)은 서남(西南) 큰 바다 가운데(大海 中), 모두 백여 작은 나라가 섬(島)에서 사는데, 서울(京=都城)에서 13,500리에 있다.》고 하였다.
(10) 舊唐書 倭國
《왜국(倭國)은 옛 왜노국(倭奴國)이다. 경사(京師)로부터 1만 4천리(千里)이다. 신라(新羅) 동남(東南)의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산(山)과 섬(島)에 의지해 사는데, 동서(東西)는 5개월을 가야하고, 남북(南北)은 3개월을 가야 한다. 대대로 중국(中國)과 통했다. 의복(衣服)의 제도(制度)는 신라(新羅)와 같다.[倭國者,古倭奴國也。去京師一萬四千里,在新羅東南大海中。依山島而居,東西五月行,南北三月行,世與中國通。衣服之制,頗類新羅]고 하였다.
(11) 新唐書 日本 :
《일본(日本)은, 옛 왜노(倭奴)다. 경사(京師)로부터 1만 4천리 떨어져 있다. 곧바로 신라(新羅) 동남(東南)인데, 바다 가운데 섬(島)에 사는데, 동서(東西)는 5월을 가야하고, 남북(南北)으로는 3월을 가야 한다.[日本,古倭奴也。去京師萬四千里,直新羅東南,在海中,島而居,東西五月行,南北三月行.]》고 하였다.
(12) 宋史
《일본국(日本國)은, 본래(本來) 왜노국(倭奴國)이다. 그 나라의 땅은 동서(東西) 남북(南北) 각각 수천(數千)리이다. 서(西)쪽과 남(南)쪽은 바다이고, 동(東)과 북(北)쪽 모퉁이로는 큰 산에 막혀있다. 산(山) 밖에는 곧 모인국(毛人國)이다. 가축(家畜)으로는 물소(水牛)·나귀(驢)·양(羊)이 있고, 무소(犀)와 코끼리가 많다.[日本國日本國者,本倭奴國也。自以其國近日所出,故以日本爲名;或云惡其舊名改之也。其地東西南北各數千里,西南至海,東北隅隔以大山,山外即毛人國。畜有水牛、驢、羊,多犀、象。產絲蠶,多織絹,薄致可愛。樂有中國、高麗二部。四時寒暑,大類中國。國之東境接海島,夷人所居,身面皆有毛]》고 하였다.
(13) 太平寰宇記 : 倭國
《왜국(倭國)은 옛 왜노국(倭奴國)이다. 신라(新羅) 동남(東南)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중략(中略). 왜왕(倭王)이 다스리는 곳은 사위대국(邪為臺國) 혹은 사마유(邪摩維)라고도 하는데, 요동(遼東)에서 1만2천리 떨어져 있고, 백제(百濟)와 신라(新羅) 동남(東南)쪽에 있다. 그 나라의 지경은 동서(東西) 5월을 가야 하고, 남북(南北)으로는 3월을 가야 하는데, 각기 바다에 이르고, 대체적으로 회계(會稽), 민천(閩川)의 동(東)쪽으로 또한 주애(朱崖),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倭國自後漢通焉古倭奴國也在新羅東南大海中,中略.倭王按其王理邪為臺國或名邪摩維去遼東萬二千里在百濟新羅東南其國界東西五月行南北三月行四境各至於海大較在㑹稽閩川之東亦與朱崖儋耳相近]》라고 하였다.
(14) 太平御覽 倭
《왜(倭)는, 남해경(南海經)에서 말하기를 : 남왜(南倭), 북왜(北倭)는 왜국(倭國)에 속했다. 대방(帶方) 동(東)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여자(女子)가 왕(王)이다.[南海經曰:南倭,北倭屬倭國,在帶方東大海中,以女為王.其俗零結衣服,無針功,以丹朱塗身,不妒忌,一男子數十婦]》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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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글 “(1)∼(14)”의 “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남제서(南齊書)·남사(南史)·북사(北史)·양서(梁書)·진서(晉書)·통전(通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송사(宋史)·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태평어람(太平御覽)” 등에 기록(記錄)된 “왜국(倭國)”을 나타내는 거리(距離)의 기점(起點)을 찾아보면 :
➊ 기점(起點)은 :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에서 “12,000리다”고 하였다.
➋ 왜왕(倭王)의 사마대국(邪馬臺國:邪摩維) : 요동(遼東)에서 “12,000리다” 하였다.
➤ ‘반도(半島) 평양(平壤)’에서 ‘열도(列島) 왜(倭)’는 동(東)쪽이고, 규슈(九州)까지는 700km, 규슈(九州)에서 도쿄[東京]까지는 900km 합(合) 1,600km로 약 4 천리(千里)일 뿐이다. 어떤 명분(名分)과 어떤 이유(理由)를 대어 찍고 돌고 돌아간다고 해도 5,000리를 벗어날 수 없다.
또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는 경(京) 남(南)쪽, 후한(後漢) 光武 中元 二年 : A.D. 57년(年)에 왜 사신(使臣)이 스스로 말한 “극남계(極南界)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오늘날의 열도(列島)가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分明)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은, 오늘 이 시간(時間)에도 옛 원전(原典)을 들먹이며, 예(例)로 들면서, “조선(朝鮮)은 반도(半島) 땅에서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를 이었고, ‘왜노국(倭奴國)=왜(倭)=일본(日本)’은 천황(天皇) 체제(體制)를 갖추고 열도(列島) 땅에 있었다.”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침을 튀긴다. 그러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로 이를 바라보면 :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낙랑(樂浪)과 대방(帶方)】으로부터 “1만 2천리” 되는 곳은, 미합중국(美合衆國)의 50번째 “하와이주[Hawaii State]”와 “열도[倭]” 사이의 중간 태평양(太平洋) 바닷속으로 인간(人間)이 살아갈 수 없는 말 그대로 바다 가운데다.
또한 요동(遼東)으로부터 12,000리(里) 역시(亦是) 똑같다. 태평양(太平洋) 바다 가운데다. 그렇다면 이건 “애당초 잘못 선정(選定)된 기점(起點) 또는 기점(基点)”이 되는 것이다.
곧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은,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것이다”라는 것을 여실(如實)이 증명(證明)해주고 있는 기록(記錄)이다.
○ 그렇다면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은 어디에 있어야 이러한 고전원문(古典原文)의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을까?
대륙(大陸)의 천년고도(千年古都) “장안(長安)”이다
이곳 “장안(長安)”을 “장안(長安)”이 아닌 다른 도시(都市)로 이해(理解)하려면 이곳으로부터 출발(出發)한 수많은 각국(各國)【동서남북(東西南北) 각 곳의 수많은 나라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 포함】의 리수(里數)를 재정(再訂)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대(古代)에 이곳으로부터 시작(始作)된 리수(里數)는 오늘날에 봐도 정확(正確)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 중요(重要)한 것은 : ‘장안(長安)과 서안(西安)’을 혼동(混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卽) 장안(長安)은 장안(長安)일 뿐, 서안(西安)이 될 수 없다. 곧 서안(西安)이란 “서안(西安)”일 뿐, “장안(長安)이 될 수 없다”는 논리(論理)와 똑같은 예(例)다.
낙읍(洛邑) 또는 낙양(洛陽) 역시(亦是) 똑같은 이치(理致)다, 낙수(洛水)도 있고, 또 낙수(雒水)도 있으며, 낙양(雒陽)도 있기 때문이다. 낙읍(洛邑)과 신라(新羅)는, 뗄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가 있다.
➀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에서 12,000리(里)〉
➁ 〈요동(遼東)에서 12,000리(里)〉
➃ 〈경(京) 남(南)쪽 13,500리(里)〉
➄ 〈경사(京師)로부터 14,000리(里)〉
➅ 〈왜(倭)는 극남계(極南界)의 땅에 있다〉
괄지지(括地志)의 “경(京) 남(南) 13,500리”와 “왜(倭) 사신(使臣)이 스스로 말한 : ”왜(倭)는 극남계(極南界)의 땅에 있습니다【光武 中元 二年 : AD 57】”라고 한 곳은 같은 곳(地)을 말하는 것이고, 위의 “➀∼➅”의 곳에서 말하는 “왜(倭)”까지의 거리(距離)를 나타낸 곳은 모두 『남아세아(南亞世亞)의 극남계(極南界)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 여기서 그 방향(方向)을 보면 : “동(東), 동남(東南)”쪽은 모두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므로 해당사항(該當事項)이 없다. 괄지지(括地志)에서의 남(南)쪽과 왜(倭) 사자(使者)가 말한 “극남계(極南界)의 땅은 똑같은 곳(地)을 지칭(指稱)하는 것이다” 즉(卽),
➌ 바로 호주(濠洲)【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의 북(北)쪽에 있는 큰 섬(島)들인 말레이[Malay]와 인도네시아[Indonesia]의 여러 큰 섬(島)들이다.【말레이 반도[Malay 半島]·슈마트라[Sumatr]·쟈바[Java]·보르네오[Borneo]·티모르[Timor]·셀레베스[Celebes:술라웨시(Sulawes)]·말루쿠제도[Maluku 諸島]·필리핀제도[Philippines 諸島] 등지(等地)】
➎ 대부분(大部分) 사서(史書)에서 말하기를 : “왜(倭)”는, 『낙랑(樂浪), 대방(帶方) 또는 요동(遼東)에서 12,000리』라고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서는 경(京) 남(南) 13,500리』라고 하였고, 『당서(唐書) 에서는 14,000리』라고 하였는데, 이 모두는 『회계(會稽)의 동(東)쪽, 또는 회계(會稽), 민천(閩川) 동(東)쪽, 주애(朱崖), 담이(儋耳)와 서로 가깝다(相近).』고 하였다.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 “회계(會稽)”는, “절강(浙江)과 복건(福建)의 지명(地名)”이었다 한다. 【왕조(王朝)에 따라 그 위치(位置)가 다소 다르다. 그러나 절강(浙江)과 복건(福建)을 떠날 수 없다.】
➨ 그러면 : 『“회계(會稽)가 절강(浙江)이나 복건(福建) 땅의 지명(地名)이었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을 즉시(卽時) 눈치챌 수 있다.』
즉(卽) 『절강(浙江)이나 복건(福建) 땅의 동(東)쪽에 ‘해남도(海南島)=해남성(海南省)’이 있다』는 기절초풍(氣絕招風) 할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남도(海南島)=해남성(海南省)’은, 절강(浙江)과 복건(福建)의 서남(西南)쪽 4,000 여리(餘里)【1,300km 이상(以上) 떨어져 있다.】떨어져 있는 뢰주반도(雷州半島)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섬(島)이고, 이곳에 ”주애(朱崖)와 담이(儋耳)“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 이걸 역산(逆算)하면 “회계(會稽)”는, 인도지나반도(印度支那半島)와 말레이반도(Malay, 半島)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동(東)쪽의 보르네오(Borneo)의 해안(海岸) 땅에 “주애(朱崖)와 담이(儋耳)”가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 예(例)를 들어 오늘날의 “해남도(海南島)의 주애(朱崖), 담이(儋耳)”에서 북(北) 또는 북동(北東)쪽으로 12,000∼14,000리는 어딜까? 북(北)이면 : 러시아 동토(凍土)의 땅에 닿고, 북동(北東)이라면 : 캄차카반도(Kamchatka, 半島)에 이른다. 이러한 곳이 ‘낙랑(樂浪)이나 대방(帶方)’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明白)한 사실(事實)이다.
➏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 『담이(儋耳)와 주애(朱崖)』는, 오늘날의 광동성(廣東省) 남서(南西) 뇌주반도(雷州半島)와 해남도(海南島) 경주(瓊州) 주변을 지칭한다고 하는데, 이는 경사(京師)【당시(當時) 장안(長安)】로부터 7,300-7,4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거리(實際距離)는 4천리(千里)【직선거리(直線距離) : 1,700km】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7,000 리가 넘는다는 말은 2,800km를 상회(上廻)하는 거리여야 맞는 말이다.
따라서 거리(距離)로 볼 때 : ‘장안(長安)=서안(西安)’에서 2,800km 정도(程度)가 되는 곳은, 베트남[Vetnam] 최남단 메콩강(Mekong, 江) 삼각주(三角洲) 땅이 된다. 이곳에 “담이(儋耳)와 주애(朱崖)”가 있었다고 한다면 거리(距離)상으로 올바른 해설(解說)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12,000∼13,500∼14,000’리라고 한 것을 보면 : 오늘날의 인도네시아[Indonesia] “자바(Java)” 섬(島) 땅에 해당(該當)되는 것이다. 이걸 ‘돌고 돌아서’라는 이유(理由)까지를 들먹이면 “말레이시아[Malaysia]와 보르네오[Borneo] 등지(等地)에 닿는다.
이런 논리(論理)를 깨뜨릴 수 있는 합당(合當)한, 합리적(合理的)인 근거(根據), 논리(論理)가 없다.
【‘前漢書 武帝紀 本文 註釋’편 : 《漢書卷六.武帝紀第六〔五〕應劭曰:二郡在大海中崖岸之邊.出真珠,故曰珠崖.張晏曰:異物志二郡在海中,東西千里,南北五百里.臣瓚曰:茂陵書珠崖郡治瞫都,去長安七千三百一十四里.儋耳去長安七千三百六十八里,領縣五. : 응소(應召)가 이르기를, 담이(儋耳)와 주애(朱崖) 2군(郡)은, 큰 바다 애안(崖岸)의 가장자리로, 진주(珍珠)가 나오는데, 주애(朱崖)라고 일렀다. 장안(張晏)이 이르기를, 이물지(利物志)에서 2군(郡)은 바다 가운데 있는데, 동서(東西)가 천리(千里), 남북(南北)이 5백리다. 신(臣) 찬(瓚)이 이르기를 : 무릉서(武陵書)에, 주애군(珠崖郡)은 심도(瞫都)에서 다스리는데, 장안(長安)까지 7,314리이다. 담이(儋耳)는 장안(長安)에서 7,368리이며, 현(縣)이 5개이다.》라고 하였다.】
겨우 7,300리(里)일 뿐이다. 이곳에서도 5,000∼7,000리를 더 가야 하는데, 바로 말레이시아[Malaysia]와 보르네오[Borneo]에, 수마트라[Sumatra], 자바[Java] 섬(島) 등지(等地)에 닿게 되는 것이다.
○ 이를 역산(逆算)하면 :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는 『경(京)』이란 “장안(長安)”을 말하는 것이고, ➀ 장안(長安)은 곧 낙랑(樂浪)이 되며, ➁ 대방(帶方)은 낙랑군(樂浪郡)의 속현(屬縣)인 대방현(帶方縣)을 중심(中心)으로 확대(擴大) 개편(改編)한 것이다.
곧 괄지지(括地志)에서 말하는 “경(京)”은 곧 장안(長安)이고, 조선(朝鮮)의 낙랑군(樂浪郡)이 되고, 대방군(帶方郡) 또한 낙랑(樂浪)과 같은 땅이다.
2023년 08월 05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사실 책상앞에 앉아 있기가 두려울 정도다.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생각해봐도 답답한 인간임이 분명해 보인다.
진짜 답답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쩌랴!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대단히 감사합니다!
폭염에 옥체 만강하십시요
"로터스"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무더운 날씨에 건강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