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목간학회가 창립과 동시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시간상으로 지금은 이튿날의 일정이 시작될 때이군요. 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어제 하루동안 참석했지만, 백제부여발해고조선방 게시판에 이번 학술대회와 관련해서 백제의 문자 기사가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늘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발표들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저야 사실 목간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초입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제 지도교수님께서 학회장을 맡으셨기에 학교의 선배들과 우르르 다녀왔습니다. 물론 저만 조기귀환했지만요ㅋㅋ 어쨌든 감상의 글을 간단하게 남깁니다.
다만 아래 글은 제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겨온 것이라 어투에 약간의 불손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여러 회원분들의 사려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그럼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빌며...^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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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찾기 쉽지 않은 서울시립대는 지하철 회기역에서 내린 순간부터 꼬불꼬불 골목길만을 허락하며, 불가피하게 행인들의 도움을 빌리도록 강요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길을 물을 때는 해당 동네에 살고있는 아저씨들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서울에 들를 때는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 복잡한 도시의 시민들은 자신들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도시의 지리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해 두는 것을 기피하는 성향이 있는 듯 하다. 어쩌면 귀찮다는 이유로 모른다고 할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10일과 11일, 양일간의 행사 중 첫째 날만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조금은 안타깝게 생각되고, 함께 찾아간 여러 선배들의 유혹도 있었지만 이튿날의 일정은 포기해야만 했다.
오전 주보돈 선생님과 平川南 선생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윤선태, 전덕재, 이용현, 이병호 선생님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하루 종일 열리는 학술대회는 사실 조금만 주의력이 흩어질 경우 내내 꿈나라를 헤매다가 끝나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학술대회의 경우는 몇몇 안면있는 선생님들이 계셨고, 개인적으로 문외한에 가까운 분야라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던 데다, 지도교수님이 학회장을 맡으셨다. 아직은 그저 생소한 발표내용을 기록해두고,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들로 옮기는 작업 밖에는 할 것이 없지만 여하튼 맹렬하게 참가한 학술대회로 기억될 것이다.
여러 좋은 발표내용들 가운데, 몇 가지를 메모해 두고자 한다.
주보돈,「한국의 목간 연구의 현황과 전망」
한반도(사실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한반도라는 용어보다 한국이 더 적절할 듯 싶다.)에서 목간이 처음 출토된 것은 1931년 평안남도 대동군 소재의 彩篋塚에서의 일이지만 그것이 다름 아닌 樂浪 시기의 것이고 또 1점에 지나지 않아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5년에 이르러 경주의 안압지에서 수십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듬해 1976년 전남 新安에서 海底 유물이 발굴되면서 다수의 荷札木簡이 출토된 바 있으나 이것 역시 중국 元代의 것이어서 주목받지 못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彌勒寺址를 필두로 지금까지 30년 동안 목간이 잇달아 출토되기 시작하였다. 바로 얼마 전인 2006년 12월에는 경남 咸安의 城山山城에서 30여 점이 새로 추가된 것으로 알려져 크게 관심을 끌었다.
지금까지 목간이 나온 곳을 일별하면 慶州나 扶餘 등 신라나 백제 등 고대국가의 정치적 ․ 문화적 중심지인 王都를 비롯하여 二聖山城이나 城山山城과 같은 군사적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라카와 미나미(平川南), 「목간연구의 시점과 전개」
본래 중국목간에서 지적되고 있는 목간의 내용과 목간의 길이와의 밀접한 관련과 규격성은 오히려 근년 일본 각지에서 보이는 소위 지방목간 중에 의외로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漢簡은 통상 길이 1척을 ‘尺牘’이라 하고, 길이 2척은 軍書로 이용하며 ‘檄’이라 한다. 또 漢에는 ‘尺一詔’라는 말이 있는데, 보통 문서가 1척인 것에 대해 황제의 詔는 1척 1촌의 목간을 사용했다는 것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史記』흉노전에 따르면, 漢帝가 흉노 선우에게 보낸 書簡이 1척 1촌이었던 것에서 당시 군사적, 외교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흉노 선우는 1척 2촌의 簡을 사용해서 답서를 보내어 여기서도 우위를 보여주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 목간의 길이가 서적의 격과 관련되어 있는 예(춘추는 2척 4촌, 考経은 1척 2촌, 논어는 8촌) 등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한간의 특질은 일본의 목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한국목간에 대해서도 일정한 길이가 특별히 의식되어 있었는지 어떤지 검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윤선태, 「한국고대목간의 형태와 분류」
한국고대목간은 현재 300여점 가까이 된다. 특히 1991년 발굴이 시작된 경상남도 함안의 성산산성에서는 하나의 유적에서 무려 110점 이상의 많은 묵서목간이 출토되었다.
6~7세기 이후 한국과 일본에는 종이가 보급되어 ‘紙木’이 병용되었던 시기였다. 이로 인해 많은 양의 정보는 종이에 서사되었고, 나무서사재료는 주로 附札이나 간단한 메모, 아니면 종이에 正書하기 전의 기초정리용이나 習書用으로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대체로 목간 하나하나가 자체 완결적으로 사용되는 단독간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日本木簡學會의 『木簡硏究』에는 주사위나 장기알 같은 것도 문자가 있으면 목간으로 수록, 보고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순수한 서사재료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목제품에 문자를 기록한 경우에 이를 목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아울러 토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를 들어 부여 능산리사지 출토 백제목간 중 소위 ‘男根形木簡’이라고 부르는 목제품도 이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道祭’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남근 모양으로 만든 목제품으로 추정되며, 반드시 문자를 쓴다는 목적으로 제작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다면목간은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漢代에 ‘觚’라고 불리워졌다. 이 목간은 그 형태로 인해 한 면을 볼 때 다른 면을 볼 수 없어 초학자들의 암기학습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부여 능산리사지, 경주 월성해자, 안압지 출토의 다면 ․ 원주형목간으로 볼 때, 한국고대사회에서는 이 목간이 학습용이나 습서용으로서만 한정해서 사용되진 않았다. 그 중에서도 사면목간 여러 개를 셋트로 묶어, 六部 별로 각 里에서 ‘受(받은 것)’과 ‘不(받지 않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월성해자 151번 목간>을 비롯해, 정식의 ‘支藥兒食米記’를 만들기 전에 기초메모로 활용하기 위해 중간 정리해 둔 목간으로 추정되는 <능산리사지 사면목간> 등은 장부로 사용된 문서목간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목간을 ‘다면’으로 제작한 본질적 이유는 목간에 서사할 묵서의 공간을 늘리기 위한 방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다면목간은 6~7세기에 월등히 많이 사용되었고, 8세기 이후에는 현격히 축소, 소멸되어 갔다고 생각된다.
결국 한국고대사회에서 다면이나 원주형목간은 편철간의 변형된 형태로 잔존하다 종이의 일반화 추세 속에서 사라져갔다고 볼 수 있다.
첫댓글 중국 원대의 것이라면 원나라의 것이 건너온걸 뜻하는거에요? 아니면 강화 천도-환도 사이에 원나라가 제작한 것을 뜻하는거에요? 아니면 단순하게 원나라가 존재하고 있던 시기에 고려에서 만들어진건가요?
원나라의 것을 의미합니다..^ㅡ^
순간적으로 목간을 목욕으로 착각했네요. 이런이런....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