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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루카 9,23-26
순교는 일상에서의 끊임없는 부활 체험의 결과
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순교는 순종의 피로써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신앙 행위입니다.
따라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살아내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순교의 정신을 함양할 수 있을까요?
바로 더 확고한 ‘부활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4)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희망 없는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당신 죽음을 말씀하실 때 반드시 부활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순교의 열매를 위해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의 확신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겸 타자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있습니다.
그 선수는 땅에 버려진 쓰레기가 남이 버린 운이라고 생각하여 경기 중에도 잠깐씩 쓰레기를 줍습니다.
‘나’는 더 가지려 하고 더 평하려 하고 더 높아지려 합니다.
그런데 쓰레기를 줍는 일은 그러한 소유욕-육욕-지배욕과 반대의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가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순교입니다.
이렇게 작은 순교를 하는 것은 그가 반드시 그렇게 해서 운이 온다는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너무나 큰 모험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를 그런 모험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니라는 ‘자존감’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마약 중독자였다가 억만장자가 되었고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쓰고
강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된 계기는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한 일 때문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부유하게 자라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다시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 공허함은 마약으로 채우려 하였고 정신과 몸이 피폐해졌습니다.
아무리 마약을 끊으려 해도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을 넘기고 재활 센터에 들어가
한 달을 있었습니다.
그는 마약을 하지 않고도 한 달을 버틸 수 있다는 것에 자기도 놀랍니다.
더 놀란 것은 마지막 날 그에게 “당신은 절대로 마약을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인격적인 모욕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카돈은 집에 돌아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해보겠다며 앞으로 가족을 돈 걱정시키지 않게 하겠고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 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결심이 집착이 되었고 그 집착이 그를 이전의 삶으로부터 구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대한 집착이 결국 이전의 자신을 죽이는 힘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집착을 하도록 살과 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가 자아의 종살이 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자존감으로 이 세상에서 이미 부활, 곧 천국을 체험해야 하고 그 체험들이 쌓여 나중에는 목숨까지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당시 가장 낮은 계급인 백정 출신입니다. 그러던 그가 당대 위대한 가문의 사람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게 되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 하나는 이미 이 세상에 또 하나는 후세에, 이렇게 해서 두 개다”라고 기뻐하였습니다.
작은 순교를 통해 천국의 부활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를 모진 고문을 이겨내게 하였고 순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모진 고문에 “만 번 더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님을 배반하지 않겠으니 저를 마음대로 해 주십시오” 하면서 의연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박해를 피해 도망치다가 신자들을 버릴 수 없어 되돌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사제로 부활하게 되었는데 자신도 신자들을 부활의 믿음을 심어줄 필요를 느겼던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돌아가시기 전에 삼구(三仇)와 끝까지 싸우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는 두 분 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곧 부활로 이어짐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으로 나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이것들이 쌓여 결국 기쁨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싶은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17일 [연중 제24주일]
마태오 18,21-35
눈만 뜨면 용서하십시오! 밥먹듯이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평생에 걸쳐 매일 매순간 밥먹듯이 되풀이해야하는 매일의 과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복음 18장 22절)
우리 모두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내게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해서,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덮어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란 개념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 훨씬 폭넓은 의미로 확장됩니다.
잘못한 사람의 죄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을 넘어섭니다.
용서의 대상을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의로운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을 포함한 하느님의 거룩한 구원 활동이 곧 용서입니다.
2007년 개봉되어 큰 화제를 몰고왔던 이창동 감독님의 ‘밀양’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있습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모든 것을 잃고 난후, 어린 아들 손을 잡고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신애에게 업친데 덮친격으로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처이던 아들이 유괴·살해된 것입니다.
너무나 큰 충격 앞에 주저앉아 있던 신애는 오로지 신앙에 매달리며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면회하러갑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를 용서해주러 간 것입니다.
면회실에서 신애는 살인범의 태도에 또 한번 무너지고 맙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백번천번 준비했던 말을 꺼내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란 말을 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살인범은 세상 편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제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치 신선같은 미소를 짓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온 신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습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용서 받았데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또 다시 그를 용서하냐구요?”
곰곰히 따지고 보니 용서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서에는 식별과 절차와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안에서 큰 상처를 입었는데, 원인을 곰곰히 분석해보니
50:50 쌍방과실이라면, 용서하는 게 맞습니다.
50:50까지 아니어도, 상대방이 70, 내가 30 정도 된다 할지라도, 억울하겠지만 큰 마음 먹고 용서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1:100 같은 경우도 만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일방적으로 당하는 경우 말입니다.
그럴 경우에 필요한 것이 용서 이전에 정당한 과정이요 절차입니다.
때로 징계나 처벌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사과가 뒤따라야겠지요.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씻을수 없는 깊은 상처와 치명적인 고통을 안겨준 인간 말종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사악한 존재들, 피해자들은 매일 죽어가고 있는데 해맑은 얼굴로 호의호식하고 있는 인간들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섣불리 용서했다가는 나중에 두고두고 홧병을 앓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인생이나 가족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범죄자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일제군국주의자들, 친일파들, 자기 한목숨 건지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 사익을 위해 선량한 백성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군부 독재자들은 그냥 용서하면 안 됩니다.
합당한 처벌과 배상, 진정성 있는 사과가 반드시 먼저 이루어져야 마땅합니다.
물론 무조건적 용서는 가장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예수님의 권고에 따라 일흔 일곱 번 용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만 뜨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밥 먹듯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인간의 힘으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무조건 하느님께 맡겨드려야겠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강론>
(2023. 9. 17.)(루카 9,23-26)
<순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3-26).”
1) 순교는 목숨으로 하는 증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라는 믿음이,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믿음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하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사람들 앞에서’는 ‘박해자들 앞에서’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다.”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온 삶과 목숨으로 증언하다.”입니다.
<‘말’로 하는 증언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과 ‘삶’이 일치되어 있을 때에만 ‘말로’ 하는 증언이 유효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말로만 증언한다면,
그 증언은 ‘거짓 증언’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과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순교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실행하는 일, 그것이 순교입니다.
3) 순교는 봉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을 봉헌한 어떤 가난한 과부를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3-4).”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전부 다 봉헌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곧 ‘봉헌 정신’이고, ‘순교 정신’입니다.
<그 과부는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했을 것이고,
하느님을 굳게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가진 것을 다 봉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과 믿음이 ‘순교 정신’의 바탕입니다.>
4) 순교는 희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저 주겠다.
승리하는 사람은 이것들을 받을 것이며, 나는 그의 하느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묵시 21,6ㄹ-7).”
순교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그 희망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서,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린 분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희망하는’ 생활입니다.
희망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고, 순교도 없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희망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에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버리면서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순교는 승리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죽음만 보고,
그것을 패배라고, 또 허망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킨 것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켰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힘에 굴복해서 신앙을 버리고 육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은 패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패배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승리자로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이고,
“자신을 버리고”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이고, “제 십자가를 지고”는 “신앙생활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들을 감내하고”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날마다’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기억도, ‘앞으로’ 하겠다는 다짐도,
지금 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지금’ 하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해야 하고, ‘끝까지’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는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는 “내가 가르친 대로 영원한 것만 추구하면서 허무한 것들을 버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이고,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다.”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즉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은 “나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이고,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이다.”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