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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에 따라 다니는 오해. 그는 통속적인 작가였나 ? 밀레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도 아마 없을 것이다. 여기서 대중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통속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것은 예술가에게는 더없는 모독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는 널리 알려져 있는 대신, 예술적으로는 삼류 소설과 같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 과연 밀레는 싸구려 예술의 한 대명사일까. 적어도 밀레의 경우,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밀레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은 결코 그의 예술의 어떤 총체적인 것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의 작품에 근거하고 있다. 이 점이 밀레에 따라 다니는 오해의 한 요인이랄 수 있다.
물론 이들 작품 속에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미만을 강조했을 때 작품이 지니는 예술성은 그만큼 윤색될 수 있고, 따라서 통속적인 것으로 떨어질 위험을 지니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에 따라 다니는 통속성도 이런 저간의 연유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유파를 초극하는 보편성이 예술이 갖는 영원성이기도>
말하자면 그는 화가이자 동시에 철학자이기도 했는데, 이점은 르동이 적절히 지적해 준 바 있다. 밀레의 위대한 독창성은 한 사람 속에서는
그가 처음 파리로 나온 것은 23세 때였다. Cherbourg 시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파리에 나온 그는 주로 루브르를 다니면서 미켈란젤로, 들라크로아, 푸생, 지오르지오네 등의 작품에 깊은 감명르 받았다. 그러나 파리 생활의 지독한 빈곤은 갓 결혼한 아내 오노마저 병마로 잃게 되었으며, 그의 실의는 한층 깊어져 갔다. 주변 인물들의 초상외에도 초기에 그려진 누드화들은 생활을 위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밀레는 누드만을 그린다는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본의 아닌 이런 종류의 그림은 그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로 이 무렵이 바르비존에 깊이 매혹되던 때이다. 그의 나이 35세때였다. 밀레의 화가로서의 길은 어떤 면으로 보면, 바로 이 바르비존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것은 밀레의 농민화가 이때부터 그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난은 바르비존에서도 여전했지만 그의 작품은 점차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미국인들에게 많이 그는 생전에 어느 정도 명성을 누리긴 했지만, 가난과 병고로 인해 평생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그의 끝없이 고요하고 경건한 그림들은 이 고통속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런 유의 작품은 그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농민화에 이르는 한 과도기적인 성격에 머물고 있다. 자신의 영역을 모색하고 있던 시절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에게 감명을 주었던 옛 거장들의 영향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음을 엿볼수 있다. 본격적인 농민화에 이르기 직전의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취재한 것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농민화에로의 추이를 엿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몹시도 정적인 농민화들에 비하면, 이 일련의 그림들에서 밀레에겐 참으로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동력과 드라마를 갖추고 있다. 그는 이들 그림에서 주로 인간 육체가 받는 고통에 찬 모습을 각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노동의 신선함이 철학으로서 화면 속에 확고히 용해되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밀레의 농민화들은 극히 평범한만큼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다는, 이 의미에 의해서만이 또한 다른 자연주의나 사실주의 화가들과 구별짓는 요체이기도 하다. 이점은 곧 동시대에 쿠르베의 작품이 무의미 때문에 비판이 된 것과 대조적이다. 쿠르베는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만 그리려고 하였으나, 밀레는 무언가를 표출해 내려고 하였다. 벤칠 리가 말한대로 밀레에게 있어 미술의 목적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을 표출해 내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현실의 재현이 아닌 또 다른 현실의 표출>
그의 작품은 당대의 풍조에 휩쓸려 정치적 오해까지도 받았으나, 결코 작품 속에 혁명적인 의미를 새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은 결코 부유한 계급에의 시기도 도전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농부속의 농민으로서 자신을 보았으며, 농부들의 삶 속에서 영원을 확인하였을 뿐이다. 어째서 농부의 삶과 죽음이란 것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남는가 라고 한 밀레의 넋두리 가운데서 우리는 또 한번 그의 영원의 개념을 확인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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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이삭 줍기>와 함께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밭에서 일을 끝내고 저녁 종이 울리는 가운데 부부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이 장면은, 단순히 노동에서 오는 기쁨뿐만 아니라 삶의 진실과 기쁨을 전해주고 있어 쉽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수 있었다. 먼 지평선에 황혼이 물들어 가고, 이 빛을 받은 부부의 경건한 자세는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종교화의 새로운 양식이라고 칭송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작품은 처음 1천프랑에 국외로 팔려 나갔으나, 많은 사람의 손을거쳐 다시 프랑스로 팔려 왔을 때는 그 8백 배가 되는 80만 프랑으로 올랐다는데도 이 그림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1906년에 루브르에 기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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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소녀와 양떼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가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농가에 들어가 생애를 농민 화가로서 보냈다. 이 깊숙한 농민 생활의 체험은 그의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이아니라 언제나 모티브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몸으로 부터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그림 속에 배여 있다. 어린양치기의 모습과 양떼의 조화는 순진한 이미지의 동일성에서 밀레의 화인(畵因)을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모습과 지팡이에 기댄 어린 양치기의땅과의 밀착된 관계가 돋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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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 밀레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획한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많은 데상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농민화 가운데서도 비교적 주제가 뚜렷한 것으로, 어떤 점에선 밀레의 사상의 단면을 보여 준다고까지 할 수 있다.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고 있는 두 여인과 그 오른편에 약간 허리를 굽힌 한 여인의 배치가 주는 견고한 짜임새와, 세 여인이 지니는 양감이 먼 지평의 배경을 통해 더욱 리얼하게 전달되고 있다. 농민 가운데 가장 하층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견고한 인물의 설정 때문에 일종의 사회적 향의의 성격을 띤다고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1857년, 83.5*111cm, 캔버스에 유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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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뿌리는 사람 밀레는 1849년 파리 근교 퐁테느블로 숲속에 자리한 바르비존이란 작은 마을로 찾아든다. 이 마을엔 밀레 말고도 자연을 동경해서 찾아든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존파(派)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비존을 무대로 한 자연파 화가들의 명칭이었다.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대표적인 농민화들이 여기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건초를 묶는 사람들>과 같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한 것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는 약간 비뚜름한 지평선의 불안한 배경과 어울려 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주고 있다. 대지와 인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드러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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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치는 소리 1863년. 캔버스 유채. 81*101cm, 1864년에 살롱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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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니스와 클로에 롱고스 작으로 전해지는 유명한 그리스의 전원 시적(田 園時的)인 소설 '다프니스와클로에'에서 취재된 그림 으로, 코르마르의 은행가 토마의 의뢰에 의해서 제작된 것이다. 사계(四季)를 나타낸 3점(봄, 가을, 겨울)의 타블로와 1점(여름)의 친정화 가운데 <봄>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농민화가로서의 밀레에게는 다소 특이한 신화적 주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초기파리 시대의 신화적 소재의 그림에서는 엿볼 수 없는 인물 이나 배경이 고전적인 완벽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밀레는 이 작품에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후에 몇 장의 소품으로 남기고 있기도 하기때문이다. 섬세한 필치와 아름다운 색채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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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빌의 낭떠러지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밀레는 세르부르로 피난하여 바다를 접하게 되었다. 1870년경. 종이에 파스텔. 43.5*54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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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士官의 초상 역시 밀레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초상화중의 하나,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밀레가 1845년 잠깐 동안 르아브르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항구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초상은 당시에 그렸던 주문화 가운데 하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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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경부터 다루어온 소재인데, 이 파스텔 화는 70 년에 제작된 것이다. 농가의 생활 단면을 아무런 꾸밈 없이 극히 담담하면서도 솔직하게 붙잡고 있다. 이런 그림은 화가가 방안에 들어와 모델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스스럼 없는 시각을 느끼게 되는데,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뛰어난 점도 이런 소박성에 있음이 분명하다.
화면에 있어서 별다른 구도적 배려도 찾을 수 없다. 화면 가운데 큰 통을 앞에 두고 우유를 젓고 있는 시골 여인의 약간 거친 표정이 일하는 사람의 건강한 야성미(野性美)로 대치된다. 우유를 휘젓고 있는 막대기는 이상하게도 <어린 양치기>나 밭에서일하는 사람 들의 쟁기와 연결되는, 대지에서 솟아오른 듯한 상징적인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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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의 물을 옮기는 여인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노동하는 남자들은 한결 같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묘사되고 있으나, 농가의 여성들은 조용하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이라도 그 동작은 크지 않고 여성 특유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는 여인도 그 동작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동작이나 표정이 다소곳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여성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개의 물통에 물을 붓고 있는, 약간 구부린 여인이 정직하게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그 배경으로 농가의 뒤뜰이 보여 주는 정적이 오히려 정답기까지 하다. 저쪽 문 쪽으로 뒤뚱거리며 가고 있는 집오리의 모습도 농가의 한가로움을 더욱 실감시켜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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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당 부인의 초상 1837년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제로와 푸생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40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지 3년 후가 되는 셈이다. 이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의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 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향 세르브르에 돌아와주문받 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한 수법을사용, 인물의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다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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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이 초상 첫 번째 부인 포리느가 죽었을 때 이들 부부가 아사(餓死)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초기의 초상화에는 짙은 술픔의 그림자가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초상화의 여인도 슬픈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검은 옷에 화려한 레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정숙한 품격을 자아내게 하는데, 앞으로 포개어진 두 손과 얼굴을 연결하는 목걸이 선이 눈길을 끈다. 어두운 배경에 인물의 얼굴만은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고있는데, 엄격한 데상에 의한 인물의 포착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단단한 기법을 말해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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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초를 묶는 사람들 밀레가 바르비존으로 오면서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작품으로, 점차 농민화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다. 밝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 건초를 묶고 있는 두 남자와 왼편에 건초를 긁어 모으는 여인의 모습은 일하는 즐거움과 노동의 신선함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명암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주는 긴장감과 더불어 거대한 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의 숭고한 모습이 극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하겠다.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요소 역시 자연과 인간의 대비적이면서도 조화 있는 관계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초상화 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표현이 농민화의 특성에 더욱 걸맞는 효과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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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spring) 밀레는 사계의 시리즈를 몇 장 그린 바 있다. 이 작품도 사계 중 봄의 풍경이다. 알사스의 실업가 프레드릭 알트망으로부터 주문받아 그린 것이다. 농가의 사계는 더욱 자연의 풍부한 변화를 보여 주는데 만년에 갈수록 자연이 갖는 하나의 서사시로서 엮고 있다. 아마도 화가로서나 인생으로서의 완숙과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수평의 구도적 맥락을 보여 주면서 신비한 기운이 한층 짙게 깔려 있다. 과수들이 선 사이로 난 길 저쪽엔 목책이 수평으로 가로 지르고, 그 뒤쪽으론 수목이 울창하다. 이제 막 비가 개이는 듯 한쪽 하는엔 무지개가 반원을 그리며 하늘에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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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그림설명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이 자란 환경, 그 삶의 성찰속에서 잉태한 작품은 성화 못지않게 가슴에 다가옵니다.
어~휴..엄청..대충보며.. 전..잘알려진 이삭줍기만.. 구도의 짜임새. 감상..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