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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설
이 비는 1920년 중국 낙양(洛陽)의 북망(北邙)에서 출토된 것으로 하남도서관(河南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출토된 지점이 아마 이 묘지에서 말하는 北芒 청선리(淸善里)일 것이다.
탁본의 크기는 가로, 세로 모두 58cm이다. 글자는 가로와 세로로 선을 그어 사각형 구획을 만들고 그 안에 하나씩 새겼는데, 1행마다 27자씩 26행으로 모두 669자로 되어 있다. 글씨체는 해서(楷書)가 중심이 되고 예서(隷書)가 일부 섞여 있다.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드러나 있지 않다. 또한 표제어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붙어 있는 특징이 있다.
부여융은 의자왕(義慈王)의 아들로서 그의 행적은『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일본서기(日本書紀)』, 『삼국사기(三國史記)』,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 「류인원기공비(劉仁願紀功碑)」 등에 단편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묘지명이 발견됨으로써 문헌에 누락된 것을 보충하고, 잘못 기록된 것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구당서』 백제전, 『신당서』 백제전 및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그가 백제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옛 땅에 머물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비문을 통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가 사망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백제가 멸망기까지에도 고구려와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명문에서 백제 왕실을 하손(河孫)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河伯의 자손’ 또는 외손이란 뜻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서문 첫머리의 판독되지 않은 부분에도 하백의 자손이란 표현이 들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온조가 주몽(朱蒙)의 아들이라는 건국신화와 관련된 것이다. 역시 명문에 나오는 사수(㴲水)도 고구려 주몽신화에 나오는 엄사수(淹㴲水)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를 합하여 양맥(兩貊)이라 표현한 것이라든가, 계루(桂婁)가 어지러워지고 요하(遼河)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표현에서도 그러한 고구려와의 일체의식을 느끼게 한다.
이 밖에 부여 융을 진조인(辰朝人) 즉 백제 이전에 존재하였던 진국인(辰國人)으로 서술한 것은 백제인들의 진국 계승 관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묘지와 문헌 기록을 토대로 작성한 부여융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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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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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 16年 |
615 |
義慈王의 셋째 아들로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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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 4년 |
644 |
太子로 책봉됨 (맏아들 孝가 태자로 책봉된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설도 있음). |
唐 현경(顯慶) 5年 |
660 |
백제가 멸망하자 義慈王 등과 함께 당나라 서울로 압송됨. 같은 해, 의자왕이 죽은 뒤, 부여 융에게 사농경(司農卿)을 제수함. |
용삭(龍朔) 2年7월 |
662 |
수군 및 군량선을 이끌고 복신(福信), 부여풍(扶餘豊) 등이 부흥운동을 벌이던 주류성(周留城)으로 진군함. 이들을 평정한 뒤 당으로 돌아감. |
린덕(麟德) 2年 |
665 |
웅진도독(熊津都督), 백제군공(百濟郡公), 웅진도총관(熊津道摠管)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로 임명되어 웅진성으로 부임 |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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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劉仁軌)의 주선으로 웅진성 취리산(就利山)에서 신라 문무왕과 화친을 맺는 의식에 참여함. 유인궤가 귀국한 뒤 신라의 압박을 받아 당으로 돌아감. |
의봉(儀鳳) 2年 |
677 |
부여융을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상원외경(太常員外卿)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임명하여, 백제 옛 땅에 돌아가 유민을 안무하도록 하였으나, 신라가 이미 차지하고 있어서 결국 돌아가지 못함(『구당서(舊唐書)』 권5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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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순(永淳) 元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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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세를 일기로 집에서 사망하자 조정에서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내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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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 |
洛陽의 北芒 청선리(淸善里)에 장례지냄. |
이 묘지의 판독문은 여러 군데 소개되어 있는데, 서로 다른 부분이 약간씩 보인다. 이곳에 제시한 것은 이들을 서로 비교하여 정리한 대만 중앙 연구원(中央硏究院) 역사 어언 연구소(歷史語言硏究所)의 판독문이다.
[판독문]
公 諱隆, 字隆, 百濟 辰朝人也.
공 휘융, 자융, 백제 진조인야.
공(公)은 이름이 융(隆)이고 자(字)도 융(隆)으로,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다.
元□□孫 啓祚暘谷 稱雄, 割據一方, 跨躡千載.
원□□손 계조양곡 칭웅, 할거일방, 과섭천재.
(시조는 河伯의?) 자손이니 그가 처음 나라를 열어 동방에서 우두머리로 일컬었고, 한 쪽 귀퉁이를 차지하여 천 년 동안 이어내려 왔다.
仁厚成俗, 光揚漢史, 忠孝立名, 昭彰晉策.
인후성속, 광양한사, 충효립명, 소창진책.
어질고 후덕함이 풍속을 이루어 한(漢)나라 역사에서 빛을 발하였고,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움으로 이름을 날리니 진(晉)나라 책 속에서 밝게 빛이 났다.
祖璋[1], 百濟國王, 沖撝淸秀, 器業不羣,
조장, 백제국왕, 충휘청수, 기업부군,
할아버지는 장(璋)으로서 백제 국왕이었는데, 온화하고 겸손함에 맑고 빼어났으며 도량과 학문에는 따를 자가 없었으니,
貞觀年, 詔授 開府儀同三司 柱國 帶方郡王.[2]
정관년, 조수 개부의동삼사 주국 대방군왕.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당 태종이 조(詔)를 내려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을 수여하였다.
父 義慈, 顯慶年授 金紫光祿大夫 衛尉卿,[3] 果斷沈深, 聲芳獨劭.
부 의자, 현경년수 김자광록대부 위위경, 과단침심, 성방독초.
아버지는 의자(義慈)로서 현경(顯慶) 연간(656~660)에 당 고종이 김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을 수여하였으니, 과단성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
趨藁街[4]而沐化, 績著來王, 登棘署[5]以開榮, 慶流遺胤.
추고가이목화, 적저래왕, 등극서이개영, 경류유윤.
고가(藁街)로 달려가 교화를 받으니 그 업적이 후세의 왕들에게 나타났고, 대리사(大理寺)에 올라 영화를 얻으니 그 경사스러움이 후손에게 흘러 넘쳤다.
公 幼彰奇表, 夙挺瓌姿, 氣蓋三韓, 名馳兩貊.
공 유창기표, 숙정괴자, 기개삼한, 명치량맥.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량맥(兩貊)(백제와 고구려)에 드날렸다.
孝以成性, 愼以立身. 擇善而行, 聞義能徙.
효이성성, 신이립신. 택선이행, 문의능사.
효성스러움으로써 본성을 이루었고, 신중함으로써 몸을 닦았다. 선한 것을 택하여 행하였고, 의로운 것을 들으면 능히 이를 본받았다.
부사몽위 이□발참공, 미학손오 이륙기한출.
그러하니 려몽(呂蒙)과 위의(衛顗)를 스승으로 삼지 않았어도 … 그 학식을 부끄러워 하였고,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여섯 가지 기묘한 계책이 잠깐 사이에 나왔다.
顯慶之始,[8] 王師有征, 公 遠鑒天人, 深知逆順.
현경지시, 왕사유정, 공 원감천인, 심지역순.
현경(顯慶) 연간(656~660) 당시에 황제의 군사가 백제를 정벌하였으니, 공은 멀리 천인(天人)(천자)을 거울로 삼아 거역과 순종의 길을 깊이 깨달았다.
奉珍[9]委命, 削衽歸仁, 去後夫之凶, 革先迷之失.
봉진위명, 삭임귀인, 거후부지흉, 혁선미지실.
훌륭한 학덕을 받들어 신명을 바쳤고, 오랑캐의 풍속을 버리고 어진 데로 돌아갔으니, 후세 사람들의 재앙을 없앴고, 선인들이 미혹에 빠진 잘못을 고칠 수 있었다.
款誠押至, 襃賞荐加, 位在列卿,[10] 榮貫蕃國.
관성압지, 포상천가, 위재렬경, 영관번국.
공의 정성이 천자에 계속 다다르자 포상이 거듭 내려졌으니, 마침내 그 지위는 경(卿)의 반열에 들게 되었고, 영광은 번국(藩國)을 꿰뚫게 되었다.
而 馬韓餘燼, 狼心不悛, 鴟張 遼海之濱, 蟻結 丸山之域.[11]
이 마한여신, 랑심부전, 치장 료해지빈, 의결 환산지역.
그러나 마한(馬韓)에 남아 있던 무리들이 이리와 같은 마음을 고치지 않고, 료해(遼海) 바닷가에서 올빼미처럼 폭력을 펼쳤으며, 환산(丸山) 지역에서 개미떼처럼 세력을 규합하였다.
皇赫斯怒, 天兵耀威, 上將擁旄, 中權奉律.
황혁사노, 천병요위, 상장옹모, 중권봉률.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하여 천자의 병사가 위엄을 발하였으니, 상장군(上將軍)은 지휘의 깃발을 옹위하였고, 정예의 중군(中軍)은 군률(軍律)을 받들었다.
呑噬之筭, 雖稟廟謀, 綏撫之方, 且資人懿,
탄서지산, 수품묘모, 수무지방, 차자인의,
이들을 병탄하는 꾀는 비록 조정의 계책에 따르는 것이지만 백성을 위무하는 방책은 사람의 덕에 의지하는 것이니,
以 公爲 熊津都督, 封 百濟郡公, 仍爲 熊津道摠管 兼 馬韓道安撫大使.
이 공위 웅진도독, 봉 백제군공, 잉위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
이에 공을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고 백제군공(百濟郡公)에 봉하였으며, 이어서 웅진도총관(熊津道摠管)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로 삼았다.
公 信勇早孚, 威懷素洽, 招攜邑落, 忽若拾遺, 翦滅姦匈, 有均沃雪.
공 신용조부, 위회소흡, 초휴읍락, 홀약습유, 전멸간흉, 유균옥설.
공은 신의와 용감성을 일찍부터 길러왔고, 위엄과 포용력이 본디부터 충만하였으니, 읍락들을 불러 회유하매 흘린 것을 소중하게 줍듯이 하였고, 간악한 무리를 섬멸하매 뜨거운 물에 눈 녹듯이 하였다.
尋奉明詔, 脩好新羅,[12] 俄沐鴻恩, 陪覲東岳.[13]
심봉명조, 수호신라, 아목홍은, 배근동악.
이윽고 천자의 밝은 조서를 받들어 신라와 수호하게 되었고, 갑자기 크나큰 은혜를 입어 동악(東岳)에서 천자를 모시게 되었다.
勳庸累著, 寵命日隆, 遷祑 太常卿, 封 王帶方郡.[14]
훈용루저, 총명일륭, 천질 태상경, 봉 왕대방군.
공훈을 여러 차례 쌓아 총애하는 칙명이 날로 융성해졌으니, 태상경(太常卿)으로 벼슬을 옮겼고, 대방군(帶方郡)의 王에 봉해졌다.
公 事君竭力, 徇節亡私, 屢獻勤誠, 得留宿衛.
공 사군갈력, 순절망사, 루헌근성, 득류숙위.
공은 임금을 섬기매 온 힘을 다하였고, 절개를 지키매 사사로움을 잊었으니, 누누히 정성스러움을 바쳐 마침내 숙위(宿衛)할 수 있게 되었다.
比之秦室, 則 由余[15]謝美, 方之漢朝, 則 日磾[16] 慙德.
비지진실, 칙 유여사미, 방지한조, 칙 일제참덕
진(秦)나라 황실에 비교하면 유여(由余)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사양할 것이고, 한나라 왕조에 견주면 김일제(金日磾)가 자신의 덕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雖 情深匪懈, 而 美疢[17]維幾, 砭藥罕徵, 舟壑潛徙.
수 정심비해, 이 미진유기, 폄약한징, 주학잠사.
비록 인정을 두터이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언제나 삼가하려 하였으나, 병환이 생겨 침술과 약이 효험이 없었고, 계곡에 견고하게 숨겨진 배가 모르는 사이에 옮겨지듯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春秋六十有八, 薨于私第.[18] 贈以 輔國大將軍, 諡曰.
춘추륙십유팔, 훙우사제. 증이 보국대장군, 시왈.
이 때 공의 나이는 68세로서 사제(私第)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내렸다.
公 植操堅慤, 持身謹正, 高情獨詣, 遠量不羈.
공 식조견각, 지신근정, 고정독예, 원량부기.
공은 굳세고 성실한 지조를 세웠고, 신중하고 정직한 몸가짐을 지녔으며, 고상한 정취에 홀로 이르렀고, 원대한 도량으로 아무 속박도 받지 않았다.
雅好文詞, 尤翫經籍, 慕賢才如不及, 比聲利於遊塵.
아호문사, 우완경적, 모현재여부급, 비성리어유진.
문사(文詞)를 고상하게 좋아하였고 경적(經籍)을 더욱 탐하였으니, 현명한 사람을 사모하되 항상 그에 미치지 못하는 듯이 하였고, 명성에 대해서는 마치 떠도는 티끌에 견주었다.
天不憖遺, 人斯胥悼.
천부은유, 인사서도.
그러나 하늘도 어쩔 수 없이 그를 세상에 남겨두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여기에 모두 슬퍼하노라.
以永淳元年歲次壬午十二月庚寅朔廿四日癸酉,[19] 葬于北芒淸善里, 禮也.
이영순원년세차임오십이월경인삭입사일계유, 장우북망청선리, 례야.
영순(永淳) 원년(682) 임오년(壬午年) 12(11)월 24일 계유(癸酉)(癸丑)日에 洛陽 北茫 청선리(淸善里)에 장례를 치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司存有職, 敢作銘云 海隅開族, 河孫效祥, 崇基峻峙, 遠派靈長.
사존유직, 감작명운 해우개족, 하손효상, 숭기준치, 원파령장.
유사(有司)로서 직임을 맡아 감히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바다 한 귀퉁이에서 겨레를 이루니 河伯의 자손으로서 상서러움을 드러냈고, 나라 기틀을 우뚝 세우니 국운이 멀리 이어져 내려왔도다.
家聲克嗣, 代業逾昌, 澤流㴲水,[20] 威稜帶方.
가성극사, 대업유창, 택류사수, 위릉대방.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하고 대대로 이어받은 국업(國業)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은덕이 사수(㴲水)에 흘러넘쳤고 위엄이 대방(帶方)에 발하였구나.
餘慶不孤, 英才繼踵, 執尒貞慤, 載其忠勇.
여경부고, 영재계종, 집이정각, 재기충용.
조상들이 쌓은 선행이 외롭지 않아 영민한 후손들이 줄을 이었으니, 곧고 성실한 마음을 꼭 지켰고, 충성스럽고 용감한 마음을 항상 가졌도다.
徇國身輕, 亡家義重, 迺遵王會,[21] 遂膺天寵.
순국신경, 망가의중, 내준왕회, 수응천총.
나라를 위해 몸바쳐 자신의 몸은 가벼이 여겼고, 나라 걱정에 집안 일을 잊고 의로움을 중시하였으니, 왕회편(王會篇)에 기록된 법을 준수하여 마침내 천자의 은총을 받게 되었구나.
桂婁初擾, 遼川不寧, 薄言[22]攜育, 寔賴威靈.
계루초요, 료천부녕, 박언휴육, 식뢰위령.
처음에 계루(桂婁)가 어지러워지고, 료하(遼河)가 평안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마침내 어린 백성들을 이끌어 천자의 위광에 의지하였도다.
信以成紀, 仁以爲經, 宣風徼塞, 侍蹕云亭.[23]
신이성기, 인이위경, 선풍요새, 시필운정.
신의를 법도로 삼고, 어진 것을 도리로 삼아, 변방의 요새에서 교화를 펼쳤고, 운운산과 정정산에서 천자를 모셨구나.
爵超五等,[24] 班參九列,[25] 虔奉天階, 肅恭臣節.
작초오등, 반참구렬, 건봉천계, 숙공신절.
봉작(封爵)으로는 5등작(等爵)을 뛰어넘었고, 반렬(班列)로는 9경(卿)에 동참하여, 천자를 삼가 받들었고, 신하로서 절조를 엄숙히 지켰도다.
南山匪固,[26] 東流遽閱,[27]敢託明旌,[28] 式昭鴻烈.
남산비고, 동류거열, 감탁명정, 식소홍렬.
그러나 南山은 견고하지 못하였고, 흐르는 물이 갑자기 모여 내를 이루듯 세월이 흘러갔으니, 감히 명정(銘旌)에 의탁하여 삼가 크나큰 공적을 밝혀두노라.
大唐 故 光祿大夫[29] 行太常卿[30] 使持節[31] 熊津都督 帶方郡王 扶餘君 墓誌.
대당(大唐)의 고인(故人) 광록대부(光祿大夫), 행태상경(行太常卿), 사지절(使持節),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 부여군(扶餘君) 묘지(墓誌)
[1] 30대 武王(600~641)의 이름.
[2] 『구당서(舊唐書)』권1 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무덕(武德) 7년(624) 정월 기유일(己酉日)에 무왕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봉하였다고 하였고, 같은 책 권199상 백제전에는 무덕 7년에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고 하였으며,『구당서』권220 백제전에도 무덕 연간에 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비문에서 정관(貞觀) 연간에 책봉하였다는 것은 잘못이다.
[3] 『구당서』권3 태종본기하(太宗本紀下)에는 貞觀 15년(641) 5월 병자일(丙子日)에 의자왕이 무왕의 뒤를 이어 대방군왕(帶方郡王)에 책봉되었다고 하였고, 같은 책 백제전에는 주국(柱國), 대방군왕, 백제왕으로 봉해졌다고 하였으나, 이 비문에서는 이를 생략하고 660년 낙양에서 사망한 뒤에 추증된 관작만 기록하여 놓았다.
[4] 고가(槀街)라고도 하며, 한나라 때 장안성 남문 안의 거리 이름이다. 주변국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 있는 거처에서 묵도록 하였다.
[5] 극사라고도 하며, 중앙의 최고 심판기관으로 귀인의 범죄를 다루던 대리사(大理寺)를 이른다.
[6] 려몽(呂蒙)과 위의(衛顗)를 이름. 여몽(178~220)은 字가 자명으로, 삼국시대 여남 부피인(富陂人)이다. 주유(周瑜) 등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조조(曹操)를 대파하였고, 손권(孫權)의 권유로 역사서, 병서를 많이 읽어 학식에도 뛰어났다.『三國志』권54 여몽전 참조. 그리고 위의(衛顗)는 字가 백유(伯儒)로서, 삼국시대 위(魏)나라 하동 안읍인(安邑人)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三國志』 권21 위의전(衛顗傳) 참조.
[7] 손무(孫武)와 오기(吳起)를 이름. 모두 병법가(兵法家)로서 이들의 저서에 각기『손자(孫子)』와『오자(吳子)』가 있다.
[8] 당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은 660년이므로 현경 말년이 된다. 따라서 현경 초기는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현경 연간 당시’로 해석하였다.
[9] ‘석상지진(席上之珍)’ 즉 유학자의 훌륭한 도(道)를 받듦.
[10] 660년 의자왕이 죽은 뒤 부여융이 당으로부터 사가경(司稼卿)(사가정경(司稼正卿))을 제수받은 것을 가리킨다. 『新唐書』 권220 백제전 참조. 그러나『舊唐書』권5에는 사농경(司農卿)으로 되어 있다. 司農卿은 당나라 9사의 하나인 사농사의 장관이다. 그런데 사농시는 룡삭(龍朔) 2년(662)에 사가사(司稼寺)로 개칭되고, 경(卿)은 정경(正卿)으로 바뀌었다가 함형(咸亨) 원년(670)에 사농시로 다시 바뀌었다. 따라서 부여융이 받은 벼슬은 사농경(司農卿)이 옳을 것이다.
[11] 백제 유민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부흥운동을 벌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12] 665년 8월에 웅진성(熊津城) 취리산(就利山)에서 신라 문무왕과 화친을 맺은 것을 가리킨다.
[13] .동악(東岳) : 5악의 하나로 동쪽의 진산(鎭山)인 태산(泰山)을 가리킨다. 이 문장에서는 부여융이 당나라로 들어가 명목적이나마 백제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면서 천자를 모시게 된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14] 『舊唐書』권199상 백제전에 의하면 당에서 의봉(儀鳳) 2년(677)에 부여융을 광록대부, 태상원외경, 겸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임명하고 백제 옛 땅으로 돌아가 유민을 안무하도록 하였으나, 신라가 이미 차지하고 있어서 결국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15] 유여 : 춘추시대 사람. 원래 융의 신하로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목공(穆公)에게 당시에 중원이 어지러웠던 반면에 융적은 잘 다스려졌던 원인에 대해서 강론하였다. 나중에 진나라로 들어가 목공에게 중용되어 서융(西戎)을 정벌하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史記』권5 및 권110 참조.
[16] 일제(日磾) : 漢나라 사람 金日磾(기원전 134~86)를 이른다. 원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는데 한나라에 투항하여 무제(武帝)에게 중용되었다.『漢書』권68 김일제전 참조.
[17] 미진(美疢) : “미진부여악석(美疢不如惡石)”(『좌전(左傳)』襄公 23년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맛있는 음식은 오히려 사람을 해치고 약석(藥石)은 오히려 질병을 고친다는 뜻이다. 즉 편안함을 좋아하기 보다는 올바른 가르침을 좋아하라는 뜻이다.
[18] 『舊唐書』백제전,『新唐書』백제전 및『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부여융이 백제 유민을 안집(安輯)하려 하였으나 신라 세력이 워낙 강성하여 백제 옛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 지역에 머물다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 비문에는 락양(洛陽)으로 돌아가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 연월일에 일부 착오가 있다. 永淳 원년 12월 초하루는 기미(己未)이고, 11월 초하루가 경인(庚寅)이므로 12월은 11월의 잘못이다. 또한 12월 24일은 壬午이고 11월 24일은 계축(癸丑)인 것으로 보아 계유(癸酉)는 계축(癸丑)의 잘못이다.
[20] 사수(㴲水) : 고구려 주몽신화에 나오는 엄사수(淹㴲水)(『三國史記』권13 참조)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 강의 이름에 대해서는『론형(論衡)』,『후한서(後漢書)』,『위략(魏略)』,『량서(梁書)』, 「광개토왕비문」 등에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21] 왕회(王會) : 『일주서(逸周書)』의 편명(篇名). 주공(周公)이 락읍(洛邑)을 만든 뒤 제후들을 크게 불러모았다. 이 때 조의(朝儀)와 공례(貢禮)를 제정하여 왕회편(王會篇)에 기록하게 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23] 운정(云亭) : 운운산(云云山)과 정정산(亭亭山)을 가리키는데, 황제들이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史記』권28 봉선서 참조.
[24] 오등(五等) : 공, 후, 백, 자, 남의 5단계 봉작.
[25] 구렬 : 아홉 사람의 장관. 여기서는 9寺의 하나인 태상사(太常寺)의 장관이 된 것을 지칭한다.
[26] 남산비고(南山匪固) : 남산은 종남산(終南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산이 붕괴되지 않는 것 같이 장구하고 견고한 것을 이른다.『詩經』소아(小雅) 천보(天保) 참조.
[27] 동류거열(東流遽閱) : 동류는 보통 流水(흐르는 물)를 가리키며, 세월이 흘러 사물들이 폐기되는 것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열(閱)은 모인다는 의미이다.『문선』晉 륙사형(陸士衡)(陸機)의 「탄서부(歎逝賦)」에 “천열수이성천(川閱水以成川), 수도도이일도(水滔滔而日度), 세열인이위세(世閱人以爲世), 인염염이행모(人冉冉而行暮)”라 하였다.
[28] 명정(明旌) : 죽은 사람의 관직, 성명을 적은 깃발. 명정(銘旌), 정명(旌銘), 명(銘)이라고도한다.
[29] 광록대부(光祿大夫) : 당나라의 문산관(文散官)으로 종2품에 해당한다.
[30] 행태상경(行太常卿) : 태상경(太常卿)은 태상시(太常寺)의 장관으로, 태상시는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던 곳이다. 行은 행수법(行守法)에 의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하면 품계가 관직보다 높을 경우 관직 앞에 ‘行’을 붙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守’를 붙였다. 여기에서는 태상경이 정3품인 데에 비하여 광록대부는 종2품에 해당하므로 태상경이란 관직 앞에 行자를 붙이게 된 것이다.
[31] 사지절(使持節) : 唐 武德(618~626) 초기에 변방의 요충지에 總管을 두어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그에게 사지절(使持節)이란 칭호를 덧붙였으니, 대체로 한나라 때의 자사(刺史)에 해당한다고 한다.『新唐書』권49하 백관지(百官志) 외관(外官) 도독부(都督府)에 대한 註를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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擾 시끄러울 요, 움직일 우㉠시끄럽다 ㉡흐려지다 ㉢어지럽다 ㉣길들이다 ㉤탁해지다 ⓐ움직이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