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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아름다운 만남 (행9:1-9절)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치류인 북미산 고슴도치는 몸에 약 3만 개의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는 천적의 몸을 뚫을 만큼 강력합니다. 일단 고슴도치의 미세한 가시가 몸에 박히면 체온으로 그 가시가 부풀면서 더 강하게 고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상처가 곪고 최악의 경우에는 중요한 기관이 상하여 죽음에 이르는 수도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동물은 아닙니다. ‘신경질적인 등’이라는 말 라틴어 ‘에레티존 도르시툼’은 고슴도치의 외모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수많은 책과 영화들이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단 한 번도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도 없고 애완동물로 키우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 흔한 어린아이들의 사랑도 받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고슴도치의 기슬은 공격과 후퇴, 둘 뿐입니다. 꽁무니를 빼거나 바늘을 바짝 세우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고슴도치는 외로운 동물입니다. 늑대와 이리, 들개와 까마귀조차 떼로 몰려다니지만 고슴도치는 항상 혼자입니다.
그렇다고 고슴도치가 언제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늦은 가을, 젊은 고슴도치의 마음에 사랑이 싹틉니다. 그러나 고슴도치에게는 이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암컷은 일 년에 단 한 번 수컷과 데이트를 하는데 기회의 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닫혀 버리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슴도치 아가씨의 마음의 문을 열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두려움과 분노로 똘똘 뭉쳐진 이 작은 생물체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합니다.
이것이 ‘고슴도치 딜레마’ 입니다. 어떻게 해야 상처를 입지 않고 고슴도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이 말은 우리의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누구나 고슴도치의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시의 이름은 거부, 비난, 분노, 오만, 이기심, 시기, 경멸, 같은 것입니다. 이 가시를 잘 숨기는 사람도 있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여지없이 가시가 보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변에는 가시투성이 고슴도치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만 고슴도치의 가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누군가에게 고슴도치라는 사실입니다.
사람 하나가 변화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한 번 보세요. 사람이 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면 달라집니까. 찬만의 말씀입니다. 공부하는 것과 달라지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많은 경험을 하면 달라지겠습니까.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병도 걸리면서 고생을 많이 하면 달라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세월, 실패를 하고 그 실패를 반복하면서 사람이 달라지기는커녕 도리어 더 완악해집니다.
성공을 거듭하면 달라집니까. 아닙니다. 성공을 하면 할수록 사람은 교만해지고 그 마음이 부패해집니다. 그렇다면 굳게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하고 맹세를 하면 달라집니까. 아닙니다. 손가락을 잘라도 다리를 부러뜨려도 사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결심을 해도 그 마음의 욕구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환경이 변화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원시시대로 돌아가도, 선진국이 되어도 역시 사람은 그대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확 변했습니다. 그의 인생관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사상이 변하고, 180도 확 바뀐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변함으로 세상이 변하고 인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습니까. 누구를 만났기에 그렇게 위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까.
심리학자 ‘조지 하버드 미드’ 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이 자아를 형성해 나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시그니피컨트 아더스(Significant Others)’ 라고 말했습니다. ‘의미 있는 타인’이라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그 만남이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자아를 형성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평생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내 운명을 좌우합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 좋은 목사님을 만나는 것, 좋은 교인들을 만나는 것,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사업하는 사람은 좋은 동업자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흔히 인연이라고 합니다만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000년도의 일입니다. 미래 산업이라는 회사를 경영했던 정문술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자기 소유의 재산 중에서 300억 원을 카이스트에 연구비로 기부했습니다. 장안에 화재가 되었는데 개인 재산 300억 원을 과학기술원에 기부했다는 것은 칭찬 받을 만한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 내용은 간단합니다. 그가 사업이 부진하고 방향을 잃고 연구가 미진하여 미래가 캄캄하였을 때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카이스트에 근무하던 교수 한 분이 자진해서 찾아와서 첨단기술을 전수해 줌으로써 회사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 고마움을 한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찾아와서 사례도 받지 않고 그 대단한 첨단기술을 전수해 준 데 대해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00억 원을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300억 이라면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자기에게 그 기술을 전수해준 교수님은 당시 카이스트에 근무했던 이광형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또 묻습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그 회사를 찾아가서 그 좋은, 그 훌륭한 기술을 전수해 주었습니까.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국가가 저를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서 나로 하여금 과학 기술인이 되게 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나라에 봉사하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정문술 회장과 이광형 교수와의 만남, 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요, 또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그 은혜를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만남의 관계로 그들의 운명도, 카이스트의 발전도 바꾸어놓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찾아가서 만나는 것을 탐구적 만남이라고 하지만 타인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 주었을 때 이것은 은총적인 것입니다. 인연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새사람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만 같은 이야기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바울이 한 평생 전도를 하고 다녔을 때 어디를 가든지 자기가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계속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종합해 보면 이는 그리스도의 은총의 역사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바울을 찾은 것입니다. 창조적이고, 강권적이고,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찾아 만나 주셨습니다. 특별히 가는 길을 막고 만나주십니다. 바울은 나름대로 자기 철학도 있고, 생각도 있고 사명도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소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이렇게 자기 길을 열심히 가야한다고, 이것만이 옳은 사명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 주관이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위대한 힘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종교적 열심이 포장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 하나의 거짓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악한 성품을 종교적 분노로 가장했던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게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판단으로 이단 종파라는 기독교에 대해 여전히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종교적 거룩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유대교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위협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나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인간의 죄에 대해 정당한 지적을 한 것이지 신성을 모독하는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지적당한 문제를 은폐하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는데 사울은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그 일선에 나섰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의 죄의 지적에 대해 유대교 지도자들의 사악한 품성이 종교적 거룩한 분노로 위장되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낸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합니다. 그보다 이상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빗나갈 때 광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지나치게 열성적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그 율법대로 판단하고 율법대로 정죄하였습니다.
*갈1:13-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이는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인을 핍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메섹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그리고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잡아다가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그 먼 길을 달려갑니다.
대제사장에게 체포령을 받아 공문을 손에 들고 가는 길입니다. 누가 뭐래도 당당합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요지부동의 자기 철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너 죽고 나 살자는 것이 아니라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유대교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반드시 그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리사욕이 아닙니다.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하는 사명의 길입니다. 어떤 위험이 닥칠지라도 달려가야 할 고난의 행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큰 빛으로 막아놓고, 가는 길을 정지시키고, 그리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개별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사울아!’ 하고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 같이 ‘사울아, 사울아’ 그의 이름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저편에서가 아니라 하늘로서, 초자연적인 빛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빛이 그에게 비추었을 때 그는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길바닥에 엎드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 극적인 만남은 사울의 종교를, 그의 사명을, 그의 삶 전체를 ‘원인 무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먼저 빛으로 사울을 제압하신 예수께서 이제는 말씀으로 그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빛’으로 나타나심은 주님이 생명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또한 ‘말씀’으로 나타나심은 예수님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사울의 어두웠던 삶에 새 생명을 계시하셨고, 말씀으로 나타나셔서 그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는 그 대항하는 만큼 스스로를 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에게 뒷발질하는 사람과 먼저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죽음에 대한 생명의 말씀이며, 미움에 대한 자비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상대방의 정체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깜짝 놀라면서 빛으로 나타나신 분의 정체를 확인한 것입니다. 바울은 침착하고 용기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내게 빛으로 나타나신 당신은 누구입니까. 내게 말씀으로 나타나신 당신이 누구입니까.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그 밝은 빛 앞에서 ‘당신이 누구입니까.’ 물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 우레 같은 음성 앞에서 ‘당신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담대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하면 이 시간은 정오입니다.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중입니다.
그 밝은 대낮에, 사람들이 통행하는 도로 상에서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볼 수 있습니까. 밤에 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솔로몬처럼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대낮에 큰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책망까지 듣고 그렇게 물을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를 잘 압니다. 루터는 키도 크고 몸집도 훌륭한 청년입니다. 잘 생긴 사람인데 그가 법대를 다닐 때 여름 방학을 하고 시골의 집으로 귀향합니다. 친한 친구와 함께 즐겁게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순간적으로 꽝하는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치면서 함께 가던 친구가 새까맣게 타서 죽었습니다. 그 무서운 장면 앞에서 루터는 그대로 끓어 엎드리고 헛소리 같은 기도를 남발합니다. ‘성 안나여, 나를 살려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법관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중에 그가 깨닫고 하는 말입니다만 그 때 ‘성 안나여’ 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정신없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루터에 비해서 바울은 얼마나 굉장한 사람입니까. 이 밝은 빛 앞에서 ‘사울아’ 할 때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빛 가운데서 음성이 들리는데 자기 이름을 부릅니다. 모세는 자기 이름을 부를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렇게 순종의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신이 도대체 누구요.’하고 상대방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참으로 당돌하고 대담한 행동입니다. 얍복 강가에서 밤새 씨름했던 야곱이 상대방의 정체를 물었을 때 여호와의 사자는 ‘네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끝까지 정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바울에게 정체를 밝힙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 같은 사람은 십자가에서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자기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제자를 박해하고 내 교회를 박해하는 것은 곧 나를 박해하는 것이다.’
‘네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은 곧 나를 박해하는 것이다. 너는 지금 나를 핍박하고 있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밝히셨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누구냐 하는 것을 밝히셨고, 나아가 바울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까지 다 드러내신 것입니다.
자기 앞에 나타나 말씀하시는 분이 자기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바울은 전생애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배운 학식, 그가 믿은 유대교, 그가 헌신해 온 하나님의 실체가 일시에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신관의 변화는 그의 가치관,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그는 참으로 깜짝 놀랍니다. 여기서 그는 할 말을 잃습니다.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죽은 자와 같은 바울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너는 이제 새로운 만남을 가질 것이다. 이제 네가 해야 할 새로운 일을 만나거라.’ 그래서 아나니아를 만나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됩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군인은 항상 민감합니다. 더군다나 전쟁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실전 상황에서 밤에 보초를 서고 있으면 마음이 대단히 불안합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온 정신이 그쪽으로 기울고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전율이 흐릅니다.
그때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면 ‘누구야!’ 하고 총을 들이대고 소리를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 반사적인 행동입니다. ‘누구야’ 다시 말하면 자기 정체를 밝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에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함호’ 그럽니다. 상대방이 그날 밤에 정해진 암호를 대지 못하면 가차 없이 총을 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관이든지, 사령관이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암호를 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과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을 밝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그대로 사살합니다.
이것은 전쟁 상황에서 아주 쉽게 일어나는 현실이요, 그대로가 사실입니다. ‘암호’라고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어느 부대에서 그날 밤 암호가 ‘저녁 먹었어.’ 라고 물으면 ‘진돗개’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저녁 먹었어.’하고 다정하게 물으니까 자기를 생각해주는 줄로 알고 ‘네 먹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다가 체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암호를 모르면 적군입니다. 상대방의 정체와 신분을 당장 알아보는 것입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체 의식과 사명의식이 분명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야 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여기 존재하는가.’ 그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고 또 말해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대로 쏘아 버립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분이 ‘가방을 다시 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리팩킹 유어 백’ ‘Repacking Your Bags' 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자기가 현재 서 있는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며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았다.‘ 라고 생각될 때, 그렇게 확인될 때,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만남의 관계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살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인연입니까. 아니면 악연입니까.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고 그렇게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바로 이 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이 만남은 하늘이 주신 축복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내가 당신을 만나고, 당신이 나를 만난 것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라고 합니다. 정말 ’의미 없는 인생을 산 사람‘은 가방을 다시 사야 할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유혹할 때 가장 치명적인 유혹의 방법은 지극히 심리학적이라고 합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환경적인 것도 아니고, 지극히 심리학적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나는 아무 재능도 없다. 나는 무능하다. 그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존심을 낮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스스로 짓밟아 버립니다. 이것이 사탄이 주는 마음인 것입니다.
둘째, 내게는 미래가 없다. 꿈도 없고 희망도 없다. 그렇게 미리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꿈을 잃어버린 인생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아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고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무 쓸모가 없다. 나는 능력도 없고 실력도 없다. 너는 죄인이다. 네 지은 죄가 얼마나 많으냐.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마음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멀리 다메섹까지 달려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진멸하려고 발악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꼭 붙들어서 너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나를 위해 수고를 해야겠다고 하시면서 그를 고용하십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알게 되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가를,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서 자기 정체를 알고, 자기 사명을 알고, 자기의 남은 운명도 알게 되었습니다.
*행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이라 하시니.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은 바울이 예수를 알고 예수를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바울을 알고 그를 찾아가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길을 막고 만났습니다. 말씀을 주시면서 만나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큰 수고를 해야겠다고 사명을 주시면서 만나주셨습니다.
이 만남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가장 참되고 거룩한 만남입니다. 가장 진실하고 깨끗하고 진정성 있는 만남입니다. 누구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사람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만남입니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아름다움을 주고, 진실함을 주는 참으로 복된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은 영광을 받았고 바울도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윈윈 전략과 같은 모두가 승리하는 만남이었습니다.
주님과 나와의 바른 만남! 바른 정체 의식, 바른 사명 의식이야 말로 그 속에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귀한 만남이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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