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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館試 |
한성부 |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 |
강원 |
평안 |
황해 |
함경 |
계 | |
합격예정자수 |
문과시 생원시 진사시 |
50 |
40 200 200 |
20 60 60 |
25 90 90 |
25 90 90 |
30 100 100 |
15 45 45 |
15 45 45 |
10 35 35 |
10 35 35 |
240 700 700 |
향 교 정 원 |
200 |
400 |
1,770 |
2,100 |
2,350 |
2,870 |
1,240 |
2,160 |
1,140 |
1,320 |
15,330 | |
주 : 1) 한성부의 향교 정원은 4부학당의 정원임. 2) 각도의 향교정원은 경국대전과 각 군현의 향교 정액을 토대로 산출한 것임. |
출처 : 다음 지식검색
http://k.daum.net/qna/view.html?category_id=QQO012&qid=4wfoi&q=%ED%96%A5%EA%B5%90&srchid=NKS4wfoi
09:55 성내리
10:11 보덕사
10:50 ×540.9
11:02 신선봉(630.5m)
11:42 영취산(△681.3m)
13:08 병봉(673.7m)
13:33 옥천~구계임도
13:57 보름고개
14:33 종암산(546.6m)
15:57 ×512.2m
16:15 함박산(500.6m)
16:38 함박약수터
성내리에서 보는 신선봉
해발 70m 밖에 안되는 성내마을에서 신선봉을 향한다.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가 신선봉이라하는 ×540.9봉이다. 빛바랜 대형 등산안내도가 있는 삼거리에 [보덕사 500m] 팻말이 있다만 실제 걸어보니 1km쯤 되고, 에북 가파른 비탈길이다.
15분 걸려 고도 210m 되는 작은 절집 보덕사에 이르는데 입구에서 바로 산길로 올라도 되나, 절에 들러 물 한잔 마시고 대웅전에 부처님 뵙고 나오니 산신각 앞으로 등산로가 나 있다.
보덕암 대웅전
[영취산 2.4km] 이정표를 지나 잠깐 옆으로 돌고는 곧바로 쳐 올리는데 코가 박히는 급비탈이다. 성내리에서 쳐다보이던 비탈 그대로인데 꼬빡 30분 쉼없는 오름이다. 한 일주일 쌓인 노폐물 뿐만이 아니라 사골 진국까지 다 빠져나오는거 같네. 고도 300을 한방에 올리고 보니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데, 사실은 중국산 미세먼지로 뿌연 하늘이었다.
위 사진 이정표 뒤쪽 숲을 보면 울창한 숲 소나무 사이사이에 벗나무인지 뭔지 작은 나무를 심고 지지대를 설치한게 보인다. 나무를 언제 심은건지는 몰라도 이미 죽었거나, 아직 살았다 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하겠다. 이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 눈에 보이는것이, 이런 울창한 소나무 숲에 햇볕도 제대로 받지 못할뿐더러 저렇게 조밀하게 심어놓으면 무슨 수로 살겠노. 필경, 보나마나 돈 빼먹기 위한 사업임이 뻔하게 보인다.
30분만에 300m를 올리는 작업. 아파트로 치면 110층쯤 된다. (한 층의 높이 2.7m)
계성면계를 접하는 ×540.9봉에서 첫 오름이 다하고 잠깐 평탄하게 가다가 다시 오름이고, 100m 더 올려야 신선봉이다.
×630.5m(신선봉)
땀방울 쥐어짜면서 오른 보상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최고의 조망대. 지도에는 없는 이름이지만 이정표에 [신선봉]이 적혀있다. 속세를 손바닥 보듯 내려다볼 수 있으니 여기 오른 사람은 누구나 신선이 되는 것이다. 뿌연 하늘이 아쉽긴 하지만 발 아래 영산면에서 낙동강 너머로는 함안, 대산면의 낮은 산 그리메가 일렁인다.
잠깐 앉은 동안 여러사람 올라온다. 그 중 대장님으로 불리는 양반이 우리더러 어디가느냐 묻길래, 건너편 함박산으로 내려올꺼라 했더니 최소한 아홉시간은 잡아야 하니 못갈거라 한다. 가보지 않은 마당이라 언뜻 대꾸도 못하고 과연그럴까 싶기만 했는데, 결과를 보면 일곱시간이 채 안걸렸다. "선수 제대로 파악도 몬하고 오지랖이라니..."
건너편 함박산 자락이 끝나는 영산면 한 가운데 작은 연못은 연지라 하는데, 사연이 있다.
옛부터 영산 고을의 진산인 영축산은 불덩어리의 형상을 띈 산이므로 고을에 화재가 자주 일어날 수 있다하여 "불은 물로 다스린다"는 오행 사상에 의거 화재를 예방하고 또 농사에도 이로운 치수구(治水口)로 벼루모양의 못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연지(硯池)라 하였다. 그러나 오랜세월동안 가꾸지 않아 못의 구실을 못하다가 1889년 신관조 현감이 다시 파고 막아 개울물을 끌어들이고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따 다섯개의 섬을 만들고, 그 중 큰섬에다 여섯기풍과 굽은 난간에 한칸의 초가 정자를 세우고 현판을 항미정(抗眉亭)이라 하였다.
영산면
화왕산
바로 앞봉은 화왕지맥 구현산, 뒤로 화왕산성, 우측이 관룡산이다.
왼쪽 영취산.... 가운데 646.1봉..... 우측 뒤로 뾰쪽한 병봉
신선봉을 내려와 다음봉(646.1m) 사이의 안부에 영산향교에서 올라 온 길과 만난다. 능선상에 이어지는 돌 축대가 산성터였음을 말해주는데, 지형도에는 646.1봉 남쪽 사면에 '영축산성'이 있다. 등산로는 산성쪽으로는 기웃거릴 여유도 없이 왼쪽 사면으로 돌아간다.
×646.1m
우측 '영축산성'쪽으로는 접근조차 어렵고, 등산로는 왼쪽으로 스쳐간다.
영취산 만물상이라해도 손색이 없겠다.
유식하게 '트레바스(traverse)'라 하더라
영취산
이 지역 산 봉우리가 전부 헐벗은 모습인데 산불 때문이란다.
송이가 꽤나 나는 지역으로 대부분이 군유림이다. 매년 낙찰을 받아 송이를 채취하게 되는데, 어느 해, 낙찰에 떨어진 소가지 못된 인사가 앙심을 품고 산불을 놓았다는 카씀아푼 전설이 전한다.
영취산(靈鷲山 681.3m △창원302)
영취산 정상부는 올랐다가 도로 내려와야 하는 형태라. 바위가 뒤엉켜 있어 점잖은 자세로는 오를 수 없고 네발로 기어야 된다. 돌무더기에 꽂힌 정상석이 끄떡거린다. 지나 온 신선봉은 역광으로 눈이부셔 제대로 보이지 않고 뒤로 나가 바위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훤하게 열리고 발 아래 벼랑에 구봉사가 있다.
화왕산
구봉사
영취산에서 내려와 [구봉사0.3km] 갈림길을 지나고, 좁은 바위 틈새를 지나면 [충효사0.6km] 이정표가 있다. 코스를 길게 잡지않는 동네산악회는 거의 이쪽으로 내려가는 모양이다. 연이어 [사리마을], [청련사1.6km]를 지나면 665.4봉이다.
바위가 엉켜있어 정상부를 생략하고 지나치려 하는데, 한 아저씨 앉았다가 올라오란다. ×665.4봉에 올라서니 한쪽 바위에 비석이 붙어있다. [김한출 추모비]
인사를 나누고 몇마디 오고가니, 익히 아는 '천립산방' 이다. 오늘은 원로분 셋이서 속닥하게 나왔다는데 모두가 상당한 구력(!)의 노익장들이시다.
관룡산 아래 옥천리
점심
병봉
하늘을 찌를 듯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았다. 550쯤 되는 안부에서 120m 를 올린다.
병봉(屛峰 673.7m)
병봉(屛峰 673.7m)
현 지도에는 병풍 병(屛) 병봉이나, 조선지형도에는 辨峰(분별한 변) 변봉이다. 이정표에는 [병봉(꼬깔봉)]으로 되어 있는데 고깔봉에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엽까지 지금의 구계리 보림골에는 보림사(寶林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그 당시 보림사라는 절에서는 끼니때 마다 쌀을 씻는 뿌연 뜨물이 영산(靈山)읍 남쪽 시내를 거쳐 장장 십리, 죽전(竹田)동네 앞까지 미쳤다 하니, 절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는 가히 짐작할 만했다.
그런데 보림사 뒤에 높이 솟아 있는 지금의 '고깔봉' 아래 기슭에는 천하의 명당자리가 있다고 지리풍수 도사들이 입을 모아, 명당자리로 일렀기 때문에 멀리까지 소문이 난 자리였다. 누구든지 그 자리에 무덤을 들이면 자손이 부귀할 것이라 전해져 왔다. 그러나 대사찰의 바로 뒷꼭지라, 자리는 탐이 났지만 아무도 차지할 뜻을 내지 못했다.
밀양 고을 어느 벌족에 초상이 났는데 문벌의 힘을 믿고 보림사 뒤 명지에 장사를 지내기로 작정했다. 행상은 대단해서 상제 백관만도 수백 명에 달하고 많은 호상객이 뒤따랐으며 상여 조기도 호화찬란해서 보기만 해도 세력이 있는 가문의 장례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미리 알아차린 보림사 측에서는 온 사찰의 스님들을 총동원해서 보림골로 접어드는 길목에 진을 치고 대비했다. 절 바로 뒷줄기에다 묘를 들이면 지기(地氣)를 빼앗겨서 절이 망한다는 이유로 보림사 측에서는 한사코 그 자리에 장사를 못하도록 방해하기로 한 것이다.
행상은 보림재를 넘어서 큰골로 접어들었다. 결사적인 스님들의 저항에는 문벌의 행상도 별 도리가 없었는지 저녁때가 못 되어 되돌아서고 말았다. 그러나 밀양고을의 행상은 그로부터 십 여일이 지난 뒤 권토중래(捲土重來), 다시 보림골을 향해서 오는데, 이번에는 방향을 바꿔 영산(靈山)읍을 거쳐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는 밀양 벌족의 속임수로 헛상여 였고, 진짜 상여는 보림재를 넘어 알송장을 들것으로 운반을 해서 절 뒤쪽 명당자리에 장례를 지냈다.
보림사 측은 밀양골 벌족의 전략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예전에는 일단 하관만 하고 나면 그 무덤을 다시 파 들어내는 일은 하지 못했다. 그런 풍습을 하나의 법도처럼 누구나가 지켰기 때문에 패거리가 많은 스님들도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속아 넘어간 보림사 측에서는 한 가지 묘한 일을 생각해냈다. 보림사가 망할 거면 그놈의 가문도 같이 망쳐버리자는 심보로 십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많은 스님들이 보림사 뒷산, 즉 새 무덤이 든 산의 상봉으로 올라갔다. 뾰족하게 높은 뒷산 봉우리에다 세상에서도 제일 크고 아름다운 고깔을 씌운 것이다. 큰 꽃송이가 많이 달린 아름다운 고깔이 산봉우리에 보기 좋게 씌워진 것이다.
산 꼭지 모양은 정말 고깔을 쓴 것 같이 달라졌다. "고깔은 스님이 쓰는 것이므로 스님은 결혼을 하지 않으니 아들 딸이 없다. 이제는 밀양 고을 벌족의 무덤은 고깔 밑에 있으니 정녕코 무자손 할 것이다. 자아, 모두 저 높은 산을 고깔봉이라 부르기로 하자." "고깔봉! 고깔봉!"
마침내 보림사 뒷산은 고깔을 쓴 채로 고깔봉이라 세상에서 불리게 됐다. 고깔봉 밑의 그 무덤은 결국 그 후대가 끊어졌다. 수백 년을 번성했던 보림사도 차츰 허물어져서 하늘 높이 솟았던 대가람이 자취를 감추고 은은했던 북소리도 멎어 버렸다. 지금의 보림골에는 수백년 동안 벌초 한번 안한 무후(無後)의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고깔봉 높은 산이 그 무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구계리 건너편 함박산(우측)
병봉인지 고깔봉인지, 내려서면 이제 암릉은 끝이다. 산행 마치는 함박약수까지 폭신한 산길. 골산(骨)과 대비되는 육산(肉)이다.
구계리에서 올라 온 넓은 길을 만나고 움막이 있었던지 내려앉은 함석지붕 잔해가 있는걸보니 송이 집하소쯤 되는 모양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옥천저수지로 내려가는 골짜기인데,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철조망을 쳐놓아 계곡에 접근이 안되어 찢어진 울타리로 기어 들어가 목욕한 기억이 있다.
구계리 갈림길
임도에 올라서고, 앞 630.5봉으로 올라간 리본들도 보이나 우리가 오늘 지맥 마루금산행 하는것도 아니라, -설사 지맥한다 하더라도 임도를 외면하진 않겠지만 - 임도따라 간다. 전에 한번 차를 몰고 올라보기도 했지만 이 임도는 상태가 아주 양호해 승용차도 문제없다.
옥천-구계임도
보름고개
보름고개(396m)
종전 지형도에는 보름고개, 보림고개 두 개 지명이 함께 표기되었다가 올해 나온 새지도에는 보름고개만 표기되었다. 고깔봉(병봉) 유래에 '보림재를 넘어...', ‘구계리 보림골에 보림사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1916년 조선지형도에도 寶林峴 표기가 있으니 보름고개가 아니라 보림고개가 맞는데, 이 또한 지도가 바뀌면서 은연중에 보름고개로 변한다. 장차 “이 고개를 넘으려면 보름이 걸린다고 보름고개라...”는 유래가 생기지나 않을까.
열왕지맥
지나 온 길 (좌 병산, 우 열왕산)
종암산
종암산(宗岩山 546.6m)
[부곡온천 가는 길] 이정표와 팻말이 있듯이 창녕군에서 신경 좀 썼구만. 지맥 할 때는 없던 마루판이 새로 깔렸는데, 정작 [종암산]을 알리는 정상석이나 팻말이 없는게 아쉽다.
정상부를 지나 몇발 내려오면 좌우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왼쪽은 부곡온천행이고, 함박산은 우측이다.
[부곡온천2.4km, 함박산3.1km]
종암산에서 바로 내리꽂히듯이 고도를 떨군다. 더군다나 산행도 후반부에 들어가는데, 길은 병봉 만큼이나 요동을 친다.
부곡칸트리클럽
×472봉에 [불조심] 간판
조망도 없는 산길, 오르내림은 반복된다. 저 앞에 보이는게 함박산인가... 택도 없는 소리였다. 종암산에서 함박산까지 발딱 솟구친 봉우리가 네 개다.
×489.9
직진은 덕곡리로 떨어지고 함박산은 우측 내림길이다
붙었다, 떨어졌다가, 다시 붙은...
남은거리 2.46km, 목적지도착시간 17:17
신선봉....영취산...병봉
489.9봉에서 떨어지면 오늘의 최대고비인 512.2봉 오름이다. 380쯤 되는 안부에서 고도 130을 올리는 비탈이지만 다리씸이 거의 소진된 상태라 그 힘은 배로 든다. 한 발 한 발 걸음수를 세며 꾸역꾸역 올라가니 함박산보다 쪼매 더 높은 512.2봉이다.
79번 국도. 덕곡저수지
×512.2m봉에는 남쪽으로 바위 테라스가 있다.
영산에서 부곡온천으로 넘어가는 79번 국도와 덕곡저수지. 저수지 뒷봉은 도덕봉(373m)이다. 여기서도 함박산으로 그대로 순탄하게 가지 않고 80m 가량 내려 앉은 후에야 올라간다.
함박산
함박산(×500.6m)
정상부는 넓은 헬기장이나 풀만 잔뜩 우거졌다. 조선지형도에는 작약산(芍藥山)인데 우리말 함박으로 바꿨다. 산 아래 약수터 유래에도 함박꽃 이야기가 나오는걸 보면 원래부터 함박산이었던 모양이다.
헬기장 치고는 아주 큰 헬기장이었다
通仕郞行義禁府都事金海金公
통사랑(通仕郞)은 조선시대 정팔품(正八品)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는 의금부(義禁府)에 두어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하던 의금부의 종육품(從六品) 관직이다.
품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는다. 즉, 품계보다 관직이 높은 경우인데, 行守法을 따르자면 行이 아니라 守를 써야 한다.
영산호국공원 갈림
영산호국공원(靈山護國公園)
3대 국란호국의 성지(聖地)로서, 임진왜란, 3·1운동, 6·25전쟁 기념비 및 충혼탑이 있다. 공원 입구의 무지개형 다리는 보물 제564호인 만년교(萬年橋)로서,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홍예교(虹霓橋) 구축기술을 보인다고 하여 학술적 가치가 크다.
약수사
함박산 약수
전국 약수 중에서 첫번째라 하는데, 진짜 조은 약숫물은 가물 때나 장마 때나 그 나오는 양이 일정해야 하는데 여기 약수는 비가오면 많이 나오고 가물 때는 겨우 졸졸 나온다하니 청정약수는 아닌기라...
영산면에는 겨울에도 개나리가 핀다.
그만큼 터가 좋다는 얘긴지, 개나리가 미친건지...
신선봉... 태자산
태자산(×478.9m)
태자봉은 영축산 기슭에서 뻗어 나와 영산읍 쪽으로 쑤욱 내밀은 모양이 지사(地師)가 아니더라도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옛말에 '태자봉에 묘(墓)를 써면 비가 안 온다.'는 말이 있어서, 간혹 문제가 일어나고 난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산 사람들은 날씨가 좀 가물고 비가 안 와서 기다려지면, "또 어느 놈이 태자봉에 묘를 썼구만, 다른 곳에는 비가 다 왔는데 우리 영산만 가문단 말이야."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면 농민들은 태자봉을 샅샅이 뒤져 은장(隱葬)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수색은 번번이 헛됨이 없이 태자봉 어느 한 구석에라도 평장(平葬)의 해골 두 세구쯤을 파내기가 일쑤였다. 그러면 여지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렇게 해서 태자봉을 영험 있는 명당으로 모시게 되었다.
태자봉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은 1995년에 있었던 사건이다. 이때는 두 해 연달아 한발이 들었는데 영산 사람들 뿐 아니라 이웃 면 여러 동네에서 조직적인 방법으로 8월 16일을 기해 2만 군중이 참가했다. 태자봉에 지은 집을 헐고 은장을 모조리 뒤져 해골을 찾아내자 마자 남쪽 하늘에서 비가 묻어오는 것이다. 그러자 2만 군중은 환호를 올리고 춤을 추면서 일대 희우제전을 벌였다.
이 희우제는 사흘 동안이나 계속됐고, 찾아낸 은장(隱葬)의 해골들은 더러는 임자가 찾아가고 일부는 성내 동사(洞舍)에 몇 날 동안 달아매어져 백골곤욕(白骨困辱)을 면치 못하는 참상을 자아내기까지 했다. 또한 이 사건은 그 후 10여 년 동안 법적 문제가 되어 많은 후유증을 남기기도 하였다
석빙고
조선시대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로, 창녕읍에도 있는데 창녕에는 창녕석빙고, 여기는 '영산석빙고'라 한다.
경주, 안동, 창녕, 현풍, 청도, 영산 밖에 없나...
광복동에도 석빙고가 있는디~? 아이쓰케끼 파는 석빙고.
빙고~!!
산행 끝.
약수터(약수사)가 꽤 높게 보인다.
만년교는 장막을 친 채 공사중이라 그림으로만...
영산시장쪽에 있는 목욕탕 매일탕을 찾아 갔더니, 아무도 없어 텅빈 탕에 우리가 전세를 낸 듯하다. 나중에 들어 온 원주민 아저씨한테 자문(!)을 구하여 '시래기밥상'을 찾았다. 영산톨게이트 앞 사거리에서 부곡쪽으로 좌회전하자말자 왼쪽에 보인다.
입구에 무씨래기를 잔뜩 걸어놓은 꽤나 유명한지 주차장이 꽉 찼고 손님이 줄을 잇는다. 노무현대통령도 다녀가신 모양이라.
부산시내에도 통상 소고기 100g에 1만원 안팎인데, 600g에 2만원하는 '한우 한접시'. 두 개 시켰더니 다섯이서 배가 부르다.
시래기밥상
600g에 2만원
기분 조타꼬, 소고기 꾸버묵었재.
시래기밥상
첫댓글 소고기 꾸버 묵으믄.. 기분 조켔네...ㅎㅎ
싸고 맛있는 괴기도 한입할 겸 가봐야겠습니더..
지는 창녕쪽 산행하면 도천면 일리 순대집만 찾았는데.. 영산면이 한우가 유명하지요.. 수고했습니더...^^
문화 와 지명 유래 산행기가 아니라 한편의 역사를 읽고 가는 기분입니다 글솜씨가 일품입니다 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좋은 산행 하셨네요...
즐감 하고 갑니다...
은퇴하시면 국제신문이나 부일 산행대장 하셔도 되겠습니다. 다식하심이 스며든 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 경치와 좋은글 잘 보았네요 많은 도움이 될거 같네요 감사합니다
조망이 멋지네요






^^
암릉도 간간히 있고요
조은산님 반갑습니다!
평소에 지리구구를 통해서 존암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질문있는데요... 산행기코스 맵상에 트랙을 입힌 것에 대한 궁금한 점입니다.
제가 하는 방법은 GTM상에서 온맵_25k 지도상에 트랙을 올려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해상도가
좋게 하려면 확대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 코스전체를 표현 할 수가 없어 어떤 경우엔 부분부분
짤라서 하고 있답니다. 이런 작업을 어디서 한 것인지요. 올려진 지도가 큰데... GTM 상에서 확대해서
짤라내기가 안될텐데... 혹시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지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GTM에서는 그림으로 저장하면 지도 이미지만 저장이 되고, Ozi에서는 트랙을 포함한 지도 이미지가 저장됩니다
(1) GTM상에서 보기에 적당한 큰 사이즈로 맞춰놓고 - 화면캡쳐 - 그림저장, GTM화면 이동해서 또 캡쳐- 또 저장... 포토샵에서 이어붙이기(짜집기)
(2) Ozi Explorer에서 트랙 띄워놓고 - Save map to Image - 적당 사이즈로 잘라내기
위 그림은 (2) 작업입니다
@조은산 감사드립니다!
감(^^) 잡았습니다!
화질을 볼 때 (1)번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는데... 역시나 노우하우가 있었군요!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