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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13-16 이같이 너희 빛을 비추어라
주님이 기독교인은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입니다.
주는 그분의 말씀을 실제로 듣고 있던 사람들과 모든 시대 모든 기독교인들에
대한 열망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이 우리를 만드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사도 베드로의 진술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2장에서 기독교인들을 세상의 '빛들'로 서술하며,
그들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혹은 붙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빛과 어두움의 대조법을 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요약한 말씀을 봅시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주가 이 점을 강조하신 사실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어째서 소금과 빛처럼 되어야 하는가,
우리 주는 여기에 세 가지 요지를 갖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1.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짜게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소금의 특성은 짠 것입니다.
이것은 빛의 경우에서도 똑같습니다.
빛의 기능과 목적은 빛을 주는 일입니다.
등불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기 위해 켜집니다.
불을 붙이는 목적은 그 빛이 그 특정 지역 안에 퍼지고 발산되기 위해서입니다.
등에 불을 붙이는 것은 이 목적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정의는 기독교인에 있어 본질적인 것, 곧 '소금'과 '빛'인 것입니다.
빛은 실체이고 어둠은 실체가 아닙니다.
어둠은 실체가 아니므로 실체인 빛을 절대 이길 수는 없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한 발작도 발붙이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이 있는 곳에 악인은 절대 발붙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을 경우 빛과소금이 아니다.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되어야 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환언하면,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대조는 아주 자명하고 완벽할 정도로 명료합니다.
등에 불을 켜는 목적은 빛을 비취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를 빛과 같은 것으로, 숨겨질 수 없는, 산 위에 서 있는 동네처럼 만들었다. 너희는 이것을 일부러 숨기려고 하는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소금의 주요 자질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짠맛입니다.
소금이 짠맛이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꽃을 봅시다. 꽃은 살아있을 때에 매우 아름답고, 향기를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꽃이 죽었다 해서 무용지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꽃을 퇴비 무더기에 던져 비료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소금에 특이한 일은 소금이 소금기를 잃는 순간 아주 무용지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짠맛을 잃은 소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알기 힘듭니다.
퇴비 무더기에 던질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맛 잃은 소금은 아무 역할도 가치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처리 방법이 있는데, 제거하는 방법뿐입니다.
소금이 일단 그 본질과, 만들어진 목적을 잃으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특성은 그것이 빛이라는 것과 빛을 준다는 점입니다.
이외에 다른 기능은 없습니다. 환언하면 빛은 빛으로 행하지 못하는 순간 모든 가치를 잃습니다.
빛의 본질은 비친다는 자질 하나뿐입니다.
빛의 자질을 일단 잃으면 아예 무용지물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이름은 가졌으나 기독교인의 자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잃어버렸다'고 하셨을 때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 같으나 실제는 아닙니다.
그들이 기독교인으로 나타나고 싶어 하면서도 기독교인의 역할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맛 잃은 소금이요, 빛 잃은 빛이라 하겠습니다.
말 아래 숨겨진 빛을 상상해 보면 기독교에 어떤 적극적 가치가 있음을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참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생명의 풍요를 얻을 만큼 기독교를 소유하고 있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용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속물의 기능도,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능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소금도 빛도 아니요,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면 그들은 던지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에서도 교회에서도 던져버림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세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한편 기독교적 삶에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그것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항상 벽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소외된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전적으로 세속인이며 신앙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소외되어 있습니다.
비기독교인은 최소한 자기 나름의 사회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이 사람들은 가장 비참하고 가장 비극적인 인간들입니다.
주의 엄숙한 경고를 봅니다. 이 경고는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들로 강화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런 사람들이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최종적으로 쫓겨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마침내 문 밖으로 쫓겨나 사람들에게 밟히우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역사에 맛을 잃어버렸거나 참 빛을 주지 못하므로 문자 그대로 발에 밟히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는 한 때 강력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성 어거스틴을 포함하여 많은 거물들을 배출해 낸 번창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맛과 빛을 잃고 그 교회는 글자 그대로 발에 밟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다른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셔서 이 엄숙한 경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명목상의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숨겨질 수가 없으며 세상의 주시를 피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눈에 뜨이기 마련입니다.
그는 소금과 같습니다.
그는 산 위에 선 동네와 같고, 등경 위의 등불과 같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자기의 빛을 숨기게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19세기 랍비 이스로엘 살란테르는 리투아니아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제자들을 급히 소집해놓고 이렇게 질책합니다.
“이런 망신을 당하도록 방치한 게 너희들이 아니냐!” 이에 제자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랍비 이스로엘에게 “왜 자신들을 탓하십니까?”라고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 살란테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들이 계명을 잘 지켰더라면 대중들이 감히 안식일을 더럽힐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참으로 알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는 까닭은 그가 '궁극적으로 이 모든 것의 목적과 목표는 내가 이렇게 작용할 수 있기 위함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소금과 빛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해서 확실히 할 수 있는가?
등잔에 필요한 것은 기름입니다.
이은 항상 함께 붙어 다닙니다.
기름 없이는 빛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열 처녀 비유는 우리가 이것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기름은 절대 중요합니다. 기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름 없이는 빛의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인 것은 '세상의 빛'이신 이가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첫째로 물어야 할 질문은 내가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내 속에 거하심을 나는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충만히 거하실 수 있도록,
그들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도록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목적은 생명과 성령의 은사들을 주시는 일인데, 기름 곧 생명,
하나님의 성령께서만 내게 주실 수 있는 생명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까?
그러므로 첫 번째 권면은 우리가 이것을 늘 변함없이 구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음 물론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것을 받으려는 행동인 셈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생명수를 원하면 '내게로 오라' '너희가 생명의 떡을 원하면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번에 영원히 주님께로 왔으며, 그 후로는 이것을 한꺼번에 영원히 다 받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늘 다시 되풀이해야 할 공급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접촉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이 생명을 변함없이 늘 받을 때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쉬임없는 기도를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 주께서 말씀하신바 '의에 주리고 목마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앞에서 해석한 일이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채워집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더 원합니다. 우리는 결코 정지해 있지 않습니다.
배의 노 젓는 일을 쉬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원히 단번에(Once and for all)'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는 일을 계속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이 생명의 공급과 그가 주셔야 할 모든 것이 영원히 필요함을 계속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분과 그분이 주시는 이 생명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읽습니다.
기름을 공급받는 일은 절대 중요합니다.
산 위에 서 있어 사람들에게 숨기워질 수 없는 동네와 같은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 보십시오.
'그들은 기도와 성경연구와 묵상으로 몇 시간씩 보내야 할 필요가 절대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름 공급을 받는 일을 중단한 일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의 영향력이 이 나라에서 쇠퇴하고 있으므로 사회의 풍조도 점점 거칠고 조잡해지고 있습니다. 예의범절, 조그만 품위마저도 점점 눈에 띄지 않고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지원 ;연애인 -경쟁력은 아버지 시간, 인사. -항상 30분 전, 안녕하세요]
기독교인이 이런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요새 와서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거나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멋진 일이(wonderful)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도 지저분하고 지각없이 사는 경향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선언해 주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몸가짐을 봐서 그 사람을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말에서나 품행에서나 겸손하고 화평하고, 화평케 해야 하며 특히 다른 사람들의 품행에 대한 반응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지난 세기들 보다 오늘에 더 큰 기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세계와 사회상태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끈 화를 냅니까? 비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그러해도 기독교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3. 이상의 모든 것을 올바로 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에서 '이같이'는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삶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자아는 하나님을 위하여,
그의 영광을 위하여 비워지고 세미 한데까지 산산이 부스러져야 합니다.
* 세상이 힘든 이유? 욕심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하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들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귀결이 이것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이 다른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심중에 큰 슬픔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로 유도됩니다.
그들이 어둠 속에 있으며 오염된 상태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면 끌어낼수록 하나님을 더욱더 닮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크게 연민하셨습니다.
# 연민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
하나님은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하여 심중에 큰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창세기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수6;19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마26;40-41]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하나님은 자기에 관심 갖지 않으시고 무리들에게 연민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과 기독교인의 삶에서 이 세 가지가 항상 우선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항상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의 기초를 그들을 위한 사랑에,
버림받은 상태에 있는 그들을 연민하는 것에 두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시고 있는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주께서 이적을 베푸신 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보게 됩니까? 그들은 '우리가 전에는 이런 일들을 본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우리가 그들에게 의문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은 무엇일까?
이 사람들은 어째서 매사에 그처럼 다른가?
행동과 품행과 반응은 어째서 그처럼 다른가?
그들에게는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한 가지 해석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 해석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 곧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반사체요.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이신 것같이 우리도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