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보령문학 제21호 시5편-[비 오는 날이면],[해뜨는 둥구봉],[어머니, 오늘은],[사랑스럽고, 귀여워서],[도깨비 둠벙]
비 오는 날이면
김윤자
철학자의 무게로
나를 내려놓고
낮은 영토에서 비와 하나 된다.
비는 나를 데리고
소홀히 했던 것들에게로
방울져 들어가서
고운 과녁의 꽃불로
나를 녹인다.
비 오는 날이면-보령문학 2023년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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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둥구봉
김윤자
둥구봉을 아시나요, 들어는 보셨나요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내가 나고 자란 그 터전에 둥그러니 솟아올라
유년의 꿈을 키워줬어요
집앞에, 해를 품고 우뚝 서서
드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날개를
어린 소녀에게 달아줬어요
조석으로 높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큰 산이 되어야지, 소망을 걸곤 했어요
해 뜨는 둥구봉에서 걸어걸어, 날아날아
어느새 해 지는 서녘 언덕까지 왔어요
눈 감으면 늘 떠오르는
꿈을 주던 둥구봉에게 부끄럽진 않았는지
삶의 마디마디를 조명해 보곤 해요
그럴 때마다 둥구봉은 여전히
해를 밀어 올리며 그날의 사랑을 보내요
내 마음 속 둥구봉은 지금도 해 뜨는 큰 산입니다.
이제는 생각만 해도
남은 여정을 따사로이 보듬어주는
넉넉한 산입니다.
둥구봉을 아시나요, 들어는 보셨나요
거기, 둥구봉에 가 보시어요
길을 모르시면
장현리 은행마을을 찾아 가시면 돼요
아랫장밭, 은행나무 자락에서
둥구봉을 외치시면, 잘 오시었다고
눈부신 태양을 선사할 것입니다.
제가 받았던 그 꿈과 사랑을 흠뻑 받아오시어요
해 뜨는 둥구봉, 찬란한 둥구봉에서
해뜨는 둥구봉-보령문학 2023년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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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오늘은
김윤자
어머니, 오늘은 왜 구슬피 우셔요
깊은 산속 저세상에도 아픔이 있던가요
병마가 그곳까지 따라갔던가요
어머니, 오늘은 좀 밝아지셨네요
아버지와 손잡고 나들이라도 하셨나요
생시에 못 가본 따뜻한 세상 가 보셨나요
어머니, 오늘은 마을잔치가 열렸나요
산 초입에서부터 어머니 소식을 물고 온
한 떼의 새들이 흥겹게 노래해요
오 남매 기르시느라 어디 잔치 한번 즐기셨을까요
우리 집 마당에도 친구분들 초청하셔서
덩실덩실 춤추며 기쁨만 나누셔요
술을 사 갈까요, 부침개를 해 갈까요
어머니 좋아하시던 감자를 쪄 갈까요
아버지 좋아하시던 해물찌개를 끓여 갈까요
어머니, 오늘은 왜 아니 오셔요
두고 온 자식들 부르다, 부르다
그것도 짐이 될까 오시던 걸음 접으셨나요
어머니, 새만 보면 어머니 안부 묻는
딸자식의 애타는 심정 아시나요
어머니, 오늘은-보령문학 2023년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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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김윤자
저는 할머니가
고맙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참 좋아요
노을 젖어 시들어가는 할미꽃에게
누가 이런 사랑을 줄까
여섯 살 손자는
눈시울 적시는 시를 쓴다.
할머니는
가장 크고 좋은 것 먹어야 해요
가벼운 손으로 걸어야 해요
무거운 건 내가 들어요
우리 할머니
아프지 않게 해드려야지
내가 지켜드려야지
가슴 절절이
붉은 카네이션으로 넘실거린다.
사랑스럽고, 귀여워서-보령문협 2023년 감성시화전,보령예술 2023년 21호,보령문학 2023년 제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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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둠벙
김윤자
무서웠지요, 도깨비가 사는 연못
청라 옥계 초등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장현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곳을 지날 때면
도깨비에게 안 잡히려고 마구 달렸지요
늦은 밤, 갑자기 동생이 아파
엄마 등에 엎혀
옥계 하의원 의사에게 갈 때는
엄마도 무서웠는지
어린 딸아이에게 가자 하고, 뒤 따라 가노라면
어김없이 만나는 도깨비 둠벙, 그 길
온 머리카락이 솟구쳐
도깨비 바늘로 다가와 머리팍을 무섭게 찔렀지요
달려도 달려도 따라오던 하얀 걸음
멀리서 바라보면 오히려
번개치듯 휙휙 지나가던 섬광 칼빛 빛줄기
유년시절, 청년시절까지도, 그랬어요
어른이 되어 고향 떠난 어느 날
그곳에 다다르니
도깨비 둠벙의 전설은 사라졌어요
그 길, 그 연못은 조금 변했지만
그 자리엔 여전히 도깨비 둠벙이 있는데
도깨비는 간 곳이 없어요
어른이 되어서야 사라진 도깨비는
썪은 나무의 진액이 호수의 빛을 받아 반사한
인광이었던 것을
아, 돌아보니 그건 고향길에 곱게 새겨진
한 편의 소설입니다.
도깨비 둠벙-보령문학 2023년 제2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