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암 정구복 씀
닭 키우기(3)
생활이야기 란의 ‘닭 키위기’1(-1098번 글)과 2(1101번 글)에 이는 세 번 째 이야기이다. 1)에서는 닭 네 마리를 키우는 일, 2)에서는 암탁 세 마리를 키우는 일까지 썼다.
그런데 7월 3일 아침 닭장에 올라갔더니 닭 한 마리가 더위에 못 이겨 문 앞에서 죽어버렸음을 발견했다. 당시 온도는 30도 정도였다.
그 순간 나는 그에 대해 내 책임이 큼을 곧바로 느꼈다. 겨울철 추위를 막기 위해 우리의 아랫단에 둘러 쳐준 프라스틱 판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앞 뒤로 쳐 놓았던 깔판을 제거해주었다. 바람이 술술 통했다.
그랬더니 그 후 장마가 들어 닭장 안에 비가 뿌려 바닥이 엉망이었다.
나는 바닥에 깔아 놓은 텐트 용자를 송곳으로 뚫어 물을 빼내고 비가 올 때는 뜯어 놓은 프라스틱 판을 둘러주었으나 우리 안의 습기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우리 안에 널빤지를 깔아주었다. 겨우 우리 안의 습기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7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기온이 33도를 넘어서고 아침 햇볕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서
닭들이 더위를 이기지 못해 헉헉 한다.
우리는 병아리 때 키우던 작은 우리를 시원한 그늘이 있는 옥상의 엘리베이터실 옆 골목으로 옮겨 놓고
낮에는 이곳에서 지내게 하였다
밤에는 넓은 본 우리로 옮긴다. 알을 낳기 때문에 알집도 만들어주고 물을 매일 줌에 신경을 쓴다. 물도 여름철이라 반드시 소금을 넣어 준다. 닭들이 모이판 물도 쏟아 붓기에 넘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경을 써야 한다.
새로 옮긴 닭우리는 10미터 정도 떨어져 다른 곳이다. 맨처음에는 닭을 붙들어 옮겼다. 그러나 다음부터는 모이를 가지고 인도하여 우리를 바꾸어 넣게 되었다. 낮에는 서쪽 우리, 밤에는 동쪽 본 우리로 옮기며 살게 했다.
마치 원나라와 청나라 황제가 북경의 수도를 놓아두고 여름 한 철은 북방 500리 떨어진 곳에 여름 궁전을 이용하는 것과 유사함을 생각했다. 닭우리를 궁전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철에 따라 옮겨 사는 것과는 달리 초라하지만 밤 낮으로 우리를 바꾸어 키우고 있다.
내가 닭을 키우면서 과일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거의 없다. 수박 껍집을 넣어주면 시원하다고 하는 듯이 쪼아 먹는다. 참외, 오이, 양배추 등은 집식구와 내가 번갈아 칼로 잘게 썰어 복합사료와 섞여 먹인다. 그래서 과일껍질이 전혀 배출되지 않는다. 나는 닭의 식사를 조리해주는 조리사인 듯한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가 두 마리 닭을 위해서 그처럼 신경을 쓰는 것은 계란을 낳는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다. 물론 어린 손자 손녀가 왔을 때 그들에게 옛날 농부가 닭을 키워서 알을 냈고 이 계란은 육류를 먹을 수 없는 농촌 사람들에게 중요한 영양 보충원이었고, 닭을 키워서 팔아 염소를 바꾸고 염소를 키워서 송아지로 바꾸면 큰 소를 팔아 논밭을 산다는 이야기를 해주니 할아버지 그 이야기 다 알고 있지만 할아버지 이야기를 나니 더 실감이 나네요, 하여 흐뭇함을 느꼈다.
닭은 축생 중의 하나이다. 그 생사여탈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선뜻하기가 어렵다. 이는 나의 자비심의 발동이 아니라 우리의 생사를 그 닭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침 저녁으로 닭을 우리 밖으로 내 놓고 동서남북으로 옮기면서 모이를 준다. 이 때 우리 안의 닭똥을 치우는 일, 물을 채워주는 일을 한다. 닭들은 좋다고 나를 듯 달려 나보다 먼저 도착한다. 북쪽 벽면과 남쪽 벽면 아래에서 먹이를 주면서 맛있게 쪼아 먹은 닭을 보면서 나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 동포를 생각했다. 그들이 식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처지, 더위와 혹심한 추위에 힘든 삶을 살면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스스로 칭하는 북한 동포의 처지를 생각하곤 했다. 왜 이 문명천지의 세상에 그들은 그런 생활을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2023.08.03)
첫댓글 지난번 '닭키우기 두번째' 이야기에서 건강한 닭 세마리가 모이를 다정하게 쪼아 먹는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이번 폭염에 죽었다니,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닭을 키우면서 많은 생각을 담으셨습니다.
먹이를 주고, 배설물을 치우고, 청소를 하고...일련의 모든 생명 키우기 노력이 쉽지 않습니다.
저도 아이들과 함께 개도 키워 봤고, 토끼도 키워 봤고, 닭도 키워 봐서 그 수고로움을 이해합니다.
수고로움을 감수하고 가축을 보살피는 것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정성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키우던 닭이나 토끼를 잡아 먹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을 준 만큼 동물도 죽음을 보게될 때는 마음이 안 좋습니다.
저는 그래서 집에서 동물을 더 이상 키우지 않습니다. 도시 주거 여건도 동물을 키우기엔 부적합하니까요.
삼복 무더위에 키우시던 닭이 안타깝게 죽었다는 대목에서 댓글 소감을 쓰게 합니다.
낙암선생의 글을 읽으니 여러가지로 공감하게 됩니다.
닭이라는 가금은 한국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몸소 그것을 기르는 경험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도 흘러서 주거환경이 많이 변화하고 도시화가 촉진되어 가축을 기르는 경험도
거의 어렵게 되었으니 아쉽기도 합니다.
글 가운데 "저 멀리 북한동포를 생각한다"는 글귀는 매우 뜻이 깊습니다.
인류역사에서는 첫째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 , 둘째로 기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현대의 모든 국가는 그것을 최고의 가치요 이상으로 삼고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고있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불행이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백성은 "이식위천"이라고 하였는데 아직도 그 참뜻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참담하고 비통한 일입니다.
온 세상에 "배고픈 설어움"이 하루속히 종식되기를 바라며 북한돌포를 생각하게 됩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청계산 - 고림)
장천 선생과 고림 선생이 제 글을 다 읽으시고 정성껏 댓글을 달아 주신 점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천 선생! 제가 닭을 기름에 그 수고로움을 격려해주셨습니다.
닭은 길러보니 그렇게 둔하거나 고집 센 동물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두 마리만 남으니 이제 싸우지 않습니다.
이제 왕따를 당하던 '튀기닭'이 항상 선두를 섭니다. 두 마리가 정답게 지냅니다.
닭을 기르면서 그리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나는 신이 아니면서 단지 주인으로서의 처분권을 가졌을 뿐인데 이를 어떻게 처분할 가 궁리 중입니다.
고림선생님! 언제 이들과 굳바이를 할 가 생각해봅니다. 말씀하신대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먹는 게 가장 기본인데
김정은은 인민을 고난의 행군을 시키면서 백성을 굶주리게 하며, 외부 세계와의 정보를 차단하니 그게 국가입니까?
그 죄과는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동아일보 기고란에 북조선, 서조선, 러시아 대조선이란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독재자들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3 조선이 앞으로 어데가 먼저 화산이 터져 변할지
금년을 두고 보겠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