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커피
나는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이다. 투썸플레이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을 사치며 허영이라고 손사래 치며 살았다. 맛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물 한 잔에 거금을 들인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아서이다. 식사는 된장찌개를 먹고 디저트는 브랜드 커피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던 내가, 느닷없이 커피를 예찬하려니 얼굴이 간지럽고 부끄럽다.
내 생일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후배가 커피를 사겠다고 연락이 왔다. 같이 저녁이나 먹고 동네 카페에서 한 잔 마시리라 가볍게 생각했다. 영천에서 경산까지 찾아온 후배는 대구까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아주 특별한 ‘게이샤 커피’를 사겠단다. 게이샤?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카페라테, 에스프레소 이 정도가 다인 줄 알았다.
고개만 갸웃거리는 나를 보면서 후배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거기다가 손가락 다섯 개를 벌리더니 한 잔에 ‘오만 원’이라고 했다. 오천 원짜리 커피도 돈이 아까워 마시지 않는데 열 배의 커피를 마시다니! 한마디로 거절했다. 씹을 것도 건더기도 없는 시커먼 물을 거금을 주고 마신다는 것은 조상님이 욕한다고 소리 질렀다.
후배가 나를 어르고 달랬다. 능글능글하기까지 했다. 비싸서 일 년에 단 한 번 사주는 거니까 생일 선물로 받으라고 했다. 선물보다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싶어서 작정하고 올라왔다니 내가 질 수밖에 없었다. 내친 김에 호기심도 생겼다. 동네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시간 맞춰 시내로 갔다.
남산동 어디쯤 커피클럽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구부러진 골목 안, 동네 한복판에 어두운 잿빛 건물이었다. 누가 이곳에 커피 볶는 가게가 있다고 생각할까. 또 한 번 놀랐다. 주인장은 자유롭게 살기 때문에 신명나면 문을 닫고 어디든지 발길 닿는 대로 여행도 떠난다고 했다. 그 집 커피를 마시려면 약속을 해야 한단다. 마침 우리가 도착할 때쯤 기다리겠다고 했다. 후배는 게이샤 커피를 마실 행운이 내게 왔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커피클럽 대표는 건축사 출신으로 사는 건물도 손수 설계하여 지었단다. 가게 앞에서 전화했더니 그가 나타났다. 아이보리 색깔 니트에 피카소의 추상화가 그려진, 아무나 소화할 수 없는 셔츠에 스카프를 맨 차림이었다. 비니 모자를 쓰고 깡마른 체격에 뭔가 남다른 포스가 느껴졌다. 그는 커피 칼럼을 수년째 연재하고 있다. 케냐, 에디오피아, 파나마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커피의 맛을 연구하고 개발한단다.
그가 내리는 커피를 눈으로 보면서 마주앉았다. 해외여행에서 사온 고급 커피잔을 진열해놓고 선택할 기회도 주었다. 청색 무늬가 있는 잔을 가리켰더니 생각이 진취적이라고 했다. 그는 고객의 선택에 맞춤형 립서비스까지 곁들였다.
“실례지만 게이샤가 무슨 말인지요? 일본의 접대부를 게이샤라고 하지 않나요?”
“네, 맞아요.” 그는, 전혀 생뚱맞은 질문이 아니라고 하면서 빙긋이 웃었다.
커피를 점, 점, 점. 드립을 하면서 인문학 강의가 펼쳐졌다. 그의 커피 사랑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커피를 뽑아내듯 보글거리며 끝없는 향기를 퍼뜨렸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농장의 게이샤는 신이 내린 커피라고 했다. 영국 황실의 잔에, 드립한 커피를 내 앞으로 정성껏 내밀었다. 게이샤를 받아들일 최상의 분위기를 만드는 그는 진정한 프로다. 나 역시 고가의 몸값을 자랑하는 게이샤에 압도되었다.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를 그가 눈치챌까 조심스러웠다.
커피향을 맡으면서 한 모금 혀끝에 적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 안으로 받아들였다. 완벽한 입맞춤이었다. 상큼한 신맛과 은근슬쩍 달달함. 눈을 지그시 감았다. 성적 쾌감만이 오르가즘은 아닐 것이다. 게이샤의 포로가 되었다. 은은한 향이 온몸을 휘감아, 발가락 끝까지 짜릿함이라니! 커피에 취하고 커피내리는 남자의 이야기에,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잔을 비우면 채워주고, 마시면 또 한 잔.
놀라운 가격의 기대치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게이샤와의 조우. 계산하면서 후배가 놀라는 표정이다. 왜 커피값이 싸냐고 커피클럽 대표에게 물었다. 리필은 덤이며 한 잔에 삼만 원이란다. 이 정도면 일 년에 두어 번은 호사를 누려도 되리라.
첫댓글 아가다님. 덕분에 게이샤 커피를 듣게 되었지만 감이 잘 안오네요.
나는 2년전부터 젊은 때로 되돌아가 다방커피를
주로 마십니다. 커피집에 갔을 때는 핫한 아메리카노만 마시고요. 만일에 내가 게이샤 커피를 마신다해도 아가다님같은
느낌은 못받지 싶습니다. 세상사가 아는 만큼
보인다드니 커피 세계도
마찬가지 겠지요.
아가다님과 그 커피집을
함께 다녀 온것같은 느낌을 갖게 글을 썼으니
좋은 수필입니다. 이른
아침에 커피 한 잔 잘
마셨습니다. 댕큐.
선생님 감사합니다.
기회되면 모시겠습니다. 그것도 궂은비 오는 날. ㅎ
저는 커피메니아입니다. 집에서도 비싼 커피기계에 좋은 커피를 내려 즐길 정도지요. 게이샤커피는 선생님 작품만큼 맛날지 궁금하네요.
쉽게 접하지 못하는 고가이며
사람마다 다르지만 신맛이 독특하지요.
묽게 아주 연하게
ㅎ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커피 한 잔에 삼만 원이 뭐꼬, 삼만 원이!
평소에는 요렇게 생각하며 살던 사람들도
가끔은 전혀 딴판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참인데
그까짓 삼만 원이 대수랴!
게이샤 커피가 아니라
그대 발 씻은 물이라도 기꺼이 마시겠어요...
세상에는 이러다가 망한 사람들도 더러 있는 듯합니다.
선생님 그렇지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 까페는 손님이 어쩌다 한 두명
자리도 몇 개 되지 않고요, 그런데 들어오면 금방 나가는 사람이 없대요.
바에 앉아 쥔장과 마주하여 사람 사는 이야기 몇 시간 씩 풀어내다가
속이 시원해지면 간대요.
아가다씨가 게이샤커피집을 차리면 어떨까?
소진 캠프에서 맨날맨날 불 켤텐데. ㅎ
우와~~멋진 생각입니다. ㅎ
아가다 선생님이 커피집을 차린다면,
그 상호는 '아가다방'이 좋겠고요.
소진 박기옥 선생님이 '에이,나도 차리자.' 하면,
그 상호는 '스타박씨'가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