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ription of the Concerto for Two Violins in D minor,
BWV 1043

안토니오 장니그로(Antonio Janigro) - Cello & Conductor
위대한 첼리스트 안토니오 장니그로(Antonio Janigro)는 1918년 이태리 밀라노 Guido
d'Arezzo에서 2월 21일 이태리와 유고슬라비아 혈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뛰어난 바이올리스트이었다. 1988년
오레스테 보시니(Oreste Bossini)와 인터뷰에서 "나는 음악적이고, 비극적인 환경속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하셨다.
그러나 전쟁중에 저격병으로 활약하다가 왼쪽 팔을 잃으셨다."고 밝힌바 있다.
장니그로는 6살때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926년 그가 8살이 되던 해에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장니그로에게 "너는 헌신적인 예술가 되면 너의 이름을 남겨야 하고, 그렇지 않고 너의 할버지들처럼 변호사가 되는 경우에 아마츄어 음악가
으로서 너 자신의 위안을 위해서 연주를 하거라, 장니그로, 너는 이것을 너무 늦지 않게 지금 결정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지오반니 베르띠(Giovanni Berti)에게 첼로를 선물받았고, 가끔 그에게 첼로 교습을 받았다.
그때부터 장니그로는 첼로를 좋아하게 되었다. 일년도 되지도 않아 그는 밀란노 베르디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고,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인 길버토 크레팩스(Gilberto Crepax)에게 첼로 교육을 받게 된다.
장니그로가 11살 되던 해인 1929년 그의 어머니 니콜라의 노력으로 파블로 카잘스의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카잘스를 그의 연주를 들어보고 장니그로를 1921년부터 1937년까지 파리에 있는 Ecole Normale 학교에
카잘스의 학생들 가르치는 다이란 알렉산니안(Diran Alexanian)에게 추천해준다. 카잘스는 장니그로의 추천서에 다음과 같이 추천을
해주었다.
"순수한 감각의 스타일 가진 총명한 연주자이고, 나는 충분한 결정을 내렸네. 장니그로는 우리가 선택한
연주자중에 빛나는 연주가가 될 것이네."
장니그로는 1934년까지 입학허가를 기다려야만 하였다. 16살이 되었을 때 바로 Ecole
Normale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는 YMCA에서 거주하였고 2년 동안 끊임없이 연습을 계속하였다. 카잘스와 알렌산니안과 함께 그는
다른 위대한 첼리스트들과 음악가들을 만나게 되는데, 코르토, 티보, 파울 뒤카, 나디아 블랑제, 스트라빈스키 등이 장니그로에게 많은 깨우쳐
주었다. 장니그로는 비운의 신동들인 디누 리파띠(Dinu Lipatti)와 지네뜨 느뵈(Genette Neveu)와 동급생이 된다.
장니그로는 이태리와 프랑스 음악학교에서 최고의 첼로 수재들에 뽑히게 된다. 그는 이태리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게 되지만 반파시스트이었던 그는 파리에 남기로 한다. 1937년 그는 졸업을 하고 재능있는 피아니스트들이었던 디누 리파띠와 파울
바두라-스코다(Paul Badura-Skoda)와 함께 솔리스트로서 리사이틀 갖게 된다. 그는 주로 파리와 밀라노로 기차여행을 다녔고, 기차의
빈칸막이 칸을 찾아 첼로 연습을 했었다. 한번은 그가 기차안에서 첼로연습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어느 음악 매니저가 들어와서 그의 연주를
듣게 된다. 그 후 프랑스에서 장니그로의 연주회를 개최주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우아한 정장차림의 신사와 끽연가가 된다.(그의 음반 자켓
사진을 보면 항상 정장차림의 모습과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1939년 장니그로의 아버지가 죽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유일에 크로아티아로 피난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머물게 된다. 자그레브 음악원(Zagreb Conservatory)는 그를 실내악과 첼로과 교수로 임명한다. 이곳에서 그는 행운을 얻게
되는데, 장니그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현대적인 첼로 연주법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게 되고, 개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들을 찾게 된다. 그는
유명한 첼리스트인 루돌프 매츠(Rudolf Matz)을 자그레이브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첼로 클럽을 결성하여 2개의 첼로 대회를 조직하게
된다.
종전 후 그는 솔리스트로서 국제적인 경력을 쌓게 되는데, 남아메리카에서 아시아까지 순회 공연을 하게 된다.
또한 피아니스트 바두라-스코다와 바이올리스트 장 프루니에(Jean Fournier)와 트리오를 결성하게 된다. 1953년 그는 크로아티아 출신
작가의 딸인 네다 네하에브(Neda Nehajev)와 결혼하게 되고 슬하 2명을 자식을 두게 된다. 위대한 첼리스트로서, 장니그로는 위험한
스포츠를 즐기었는데, 스키를 무척 좋아했었다. 일년 동안 녹음 작업을 하고 스키를 즐기곤 하였다.
장니그로는 지휘자로 유명해지게 되는데, 1954년 자그레이브 방송국은 그에게 자그레이브 오케스트라를
맡아주길 간청한다. 그리곤 유럽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성공적인 연주회를 개최하게 된다. 그의 지휘자로서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어 유럽
여러 오케스트라들을 객원 지휘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자그레이브 방송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들을 따로 모아서 미국의 Westminster,
그리고 Vanguard 레이블에서 70여종의 녹음들(트리오 음반, 독주 음반)을 남긴다. 장니그로가 솔리스트로서 가장 잘 알려진 음반은
1959년 RCA레이블에서 녹음된 시카고 심포니와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의 지휘로 협연한 "Don Quixote"이다. 또한
미국 Vanguard Cardinal 시리즈로 발매된 "Antonio Janigro Favarites" 소품집과 Westminster 레이블에서
바두라-스코다, 푸르넷과 트리오 협연으로 남긴 베토벤,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소나타, 그리고 솔리스트로서 남긴 바하의 무반주 첼로 조곡,
베토벤 첼로소나타가 유명하고, 협연 음반으로는 보케리니와 생상의 첼로협주곡이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니그로는 시카고, 보스톤, 비엔나, 기타 세계적인 유명 오케스트라들을 지휘해왔다. 1967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할 때, 갑자기 심작 발작을 일으켜 병환이 악화되었다. 그는 지휘대로 다시 돌아왔지만 증세가 좋아지지 않아
1965년이후 밀라노 엔젤리컴 오케스트라(Angelicum Orchestra)를 지휘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르(Saar),
그리고 I Solisti 오케스트라와 함께 활동하게 되고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 음악원과 슈튜가르트 Hochschule, 그리고 잘즈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후배양성을 위해서 노력한다. 안토니오 장니그로는 1989년 5월 1일 이태리 밀라노 그의 집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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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 듣고 싶을 때 들어봐야쥐!~~~~~~~점 찍어놨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