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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밀려나 은거하던 곳인 독락당 계정 전경. 이곳에 걸린 ‘계정’ 편액은 석봉 한호 글씨다. |
속세와 등진 선비의 마음을 읽다
회재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살았던 ‘독락당’
옥산서원 부근에 있는 독락당(獨樂堂)은 회재가 살던 집의 사랑채로, 보물 제413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벼슬길에서 밀려나 고향으로 내려온 회재는 옥산계곡에서 자연과 책을 벗 삼으며 수도(修道)하는 은둔자의 삶을 살았다. 독락당을 지은 것은 그의 나이 42세가 되던 해인 1532년. 회재는 자신이 기거할 사랑채를 지어 ‘독락당(獨樂堂)’이라 이름 붙였다. 이듬해 독락당의 별당으로 ‘계정(溪亭)’을 지었다.
주변의 청산과 계곡을 사랑했던 그는 독락당에 살면서 경관이 뛰어난 곳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른바 ‘사산오대(四山五臺)’이다. 마을을 둘러싼 네 개의 산을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무학산(舞鶴山), 도덕산(道德山)이라 부르고, 계곡 주변의 넓직한 암반석들이 품고 있는 수려한 경관들은 세심대(洗心臺), 관어대(觀漁臺), 탁영대(擢纓臺), 징심대(澄心臺), 영귀대(詠歸臺)라 불렀다.
자옥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따라 자리 잡고 있는 독락당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복잡하게 되어 있는 구조다.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는 선비의 의지를 보여주듯 바깥의 사람들은 집 안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고, 출입도 어렵게 한 것인 듯하다.
여기에도 퇴계와 아계, 석봉 등의 글씨 편액이 곳곳에 걸려 있다. ‘옥산정사(玉山精舍)’와 ‘양진암(養眞庵)’은 퇴계의 글씨이고, ‘독락당’은 아계의 글씨다. 정자에 걸린 ‘계정’은 석봉의 글씨다.
[양동마을]
경주시 안강읍 양동리에서 5백년 동안 여주이씨와 월성손씨가 세거해온 집성촌으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는 유서깊은 전통마을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요 동방5현의 한분이신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선생과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선생의 고향이다. 회재선생의 어머니가 우재선생의 부친인 손소(孫昭)의 따님으로 회재선생은 외가인 손소의 집, 지금의 월성손씨의 종택인 서백당(書百堂)에서 태어나셨다.
양동에는 수많은 고택과 누정(樓亭)들이 있지만, 그 중에도 무첨당(無忝堂)과 향단(香壇), 서백당(書百堂)과 관가정(觀稼亭)은 꼭 둘러보길 권한다.
무첨당(無忝堂, 보물 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番)공이 살던 집으로 1460경에 지은 여강(驪江) 이씨(李氏)의 종가집인데,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회재선생의 장손의 호를 따 당호가 되었으며, 무첨(無忝)이란 뜻은, 『시경』의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 (夙興夜寢 無忝爾所生)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향단(香壇, 보물 412호)
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려한 지붕구조를 가진 아름다운 건물로 회재 이언적(晦齎 李彦迪, 1491-553) 선생이 1543년경에 경상감사로 부임할 때 중종 임금이 그의 모친의 병환을 돌볼수 있도록 배려해서 지어 준 집이다.
서백당(書白堂, 중요민속자료 23호)
안골 중심지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이 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月城) 손씨(孫氏)의 종가이다. 서백당(書白堂)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白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442호)
청백리로서 조선 성종(1469-1494)~중종(1506-1529)때 우재 손중돈(1463-1529)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이며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기타 여주이씨 문중의 건물유산으로는 경산서당(景山書堂, 향토문화재),강학당(講學堂, 중요민속자료 83호),이향정(二香亭, 중요민속자료 79호),대성헌(對聖軒),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81호),수졸당(守拙堂, 중요민속자료 78호) ,근암고택(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76호) ,상춘헌(賞春軒, 중요민속자료 75호), 사호당(沙湖堂, 중요민속자료 74호),두곡고택(杜谷古宅, 중요민속자료 77호),영당(影堂, 향토문화재) ,양졸정(養拙亭) 등이 있고,
월성손씨 문중의 건물유산으로는,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자료 73호) ,수운정(水蕓亭, 중요민속자료 80호) ,안락정(安樂亭, 중요민속자료 82호) 등이 있다.
[달빛 신라역사 기행코스]
http://guide.gyeongju.go.kr/deploy/
① 경주 동궁과 월지(舊 임해전지,안압지) → ② 월성(0.2km) → ③ 계림(2.04km) → ④ 첨성대(0.1km) → ⑤ 대릉원(0.64km) → ⑥ 경주 대릉원 일원(舊 경주노서리고분군)(0.74km) ⑦ 경주 대릉원 일원(舊 경주노동리고분군)(0.74km)
달빛 신라역사 기행코스는 총 3.62km 거리에 이동거리만 보면 약 1시간 정도 (도보), 20분(자동차)이 소요된다. 특히 주간에는 경주 왕경의 도심 속에서 일상생활하는 지역주민과 함께 어울릴 수 있고, 여름철에는 자전거로 이 코스를 살펴볼 수 있어, 젊은 연인에게는 더욱 좋을 것이다. 특히 수도권에서 가족과 함께 온 관광객이라면 경주에 1박 이상 머물면서 경주 동궁과 월지의 주변 공연 행사를 운 좋게 볼 수 있다면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품격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 인근에 있는 연꽃 단지에서 사진촬영, 유채꽃 핀 첨성대 주변에서 연인들과 함께 산책한다면 경주의 색다른 매력에 흠뻑 빠질 것이다. 주된 코스는 수학여행 코스와 비슷한데, 이만큼 주변에 관광명소가 밀집되어 이 코스만 둘러보아도 경주 관광의 절반을 마쳤다고 할 수 있다.
달빛 신라역사 기행코스의 주 주제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 천 년 전 서라벌의 밤을 상상할 수 있는 감성을 자극하는 데 있다.
첫 방문지인 경주 동궁과 월지(임해전지)에서 너무 밝은 대낮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만나게 되지만, 어둠은 적당히 문명의 흔적을 가려주고 관광객의 감성을 꽃피우게 한다. 경주여행에서 또 하나의 이력은 야경에 있다. 비록 도시의 LED 조명의 루미나르에의 빛 거리보다는 소박하고 한적한 느림의 여행이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자녀와 함께 재미있는 야간공연과 첨성대 주변의 녹색 광장에서 아이들을 풀어놓고, 인근 커피숍에서 부부간의 낭만을 동시에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 첨성대, 대릉원 등은 밤이 되면 은은한 경관조명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천 년의 세월을 이어온 고도 경주가 옛 모습 그대로 떠오르는 감격스런 순간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시작해 월성, 계림을 거쳐 첨성대, 대릉원, 노서, 노동동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길을 자연스럽게 걸어보는 산책로의 운치가 빼어나다.
특히 경주 동궁과 월지는 신라 옛 궁궐이다. 야간에 물 위로 비치는 신라시대의 풍경이 절정을 자아낸다. 사진 마니아라면 작품사진을 기대해도 경관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경주 동궁과 월지를 나오면 연꽃 단지. 여름이면 화분 홍색 연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나 밤길을 연등으로 밝혀 주는 듯하다. 신라 옛 성터 월성, 봄이면 벚꽃과 노란 유채꽃이 환상의 명콤비를 이룬다. 그다음은 첨성대, 신라인들은 정말 이곳에서 밤하늘을 관측했을까. 그 대답은 첨성대가 알려줄 것이다.
첨성대를 나와서 대릉원으로, 엄마의 젖가슴처럼, 그 품을 못 잊어 죽어서도 흙살로 지어내 평생 잠을 청한다.
이승, 저승 따로 없이 친하게 지낸다. 대릉원 후문으로 나와 길을 건너면 왼쪽이 노서동, 오른쪽이 노동동이다. 여기에 또 신라의 옛 무덤들이 있다. 단 분으로는 봉황대가 가장 크다.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금관총.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던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에게 직접 발굴하도록 배려해 스웨덴의 ‘서(瑞)’자를 따고, 무덤에서 나온 금관장식의 봉황에서 ‘봉(鳳)’자를 따서 이름 붙인 서봉총, 금방울이 나와서 금령총,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이라는 명문이 있는 호우가 나와서 이름 붙인 호우총 등이 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차별화 된 주제가 있는 거리로 조성된 금관총 가는 길로 1900년 초까지 있었던 3문의 홍살문을 설치해 눈길을 끌고 있다. 신라시대의 생활상과 신라인의 희로애락까지 엿볼 수 있는 거리에는 전통조각 기법으로 투박한 신라 토우를 소재로 한 동물 토우 12개, 인물 토우 4개를 도로변에 배치하였다.
달빛 신라역사 기행코스는 비교적 짧지만, 번잡한 길에서 벗어나 신라의 달밤을 걷는 길은 경주여행의 백미다. 도심의 소음과 불빛이 멀어질수록 천 년 전 서라벌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특히 야간 볼거리가 부족한 경주 관광에 있어 추천할 만한 관광명소들을 모두 관광할 수 있어 하룻밤을 경주에서 지낸다면 꼭 방문하기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안압지(雁鴨池) -09:00~21:30 @1,600원, 10인 단체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인접하였다. 《삼국사기》 674년(문무왕 14) 조(條)를 보면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花草)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하였는데, 안압지는 바로 그때 판 못이며 임해전(臨海殿)에 딸린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이래의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여 주목할 만한 유구(遺構)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동서 200m, 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조성되었는데,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護岸工事)는 정교하고 도수로(導水路)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연못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와전류(瓦塼類)로서는 신라 특유의 우미(優美)한 무늬가 있는 것이 많은데, ‘儀鳳四年(679)’ 또는 ‘調露二年(680)’의 당나라 연호명(年號銘)이 있는 와전은 중요한 자료이다. 불교 예술품으로서 판상(板狀)의 금동여래삼존상(金銅如來三尊像)과 금동보살상(金銅菩薩像) 등의 우수한 작품이 있고, 유존(遺存)하는 예가 드문 목조의 배, 건축 부재, 목간(木簡) 등의 채취와 그 보존에 성공한 일은 귀중한 공적이다.
첨성대 (瞻星臺)
높이 약 9.5m. 국보 제31호. 위치는 옛날에는 경주부(慶州府) 남쪽 월남리(月南里)라고 하였던 곳이고, 계림(鷄林)의 북방 약 150∼200m, 내물왕릉 동북방 약 300m 되는 곳이다. 이 근방을 속칭 비두골이라고도 한다.
구조는 아래의 기단부(基壇部), 그 위의 술병형의 원통부(圓筒部), 다시 그 위의 정자석 정상부(井字石頂上部)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땅속에는 잡석(雜石)과 목침(木枕) 크기의 받침돌, 그리고 기단부 서쪽으로는 일렬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이 기초를 다진 돌 위에 2단으로 된 기단석이 놓여 있다. 기단부는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가 하단은 5.36m, 상단은 5.18m이며, 두 단이 다 높이가 39.5㎝로서 두 단을 합쳐서 79㎝의 높이가 된다. 이 기단부는 남쪽 변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돌아서 있다. 기단 위의 원통부는 높이 약 30㎝인 부채꼴의 돌로 27단을 쌓아올렸는데, 27단의 높이는 8.08m이며, 최하단의 원둘레는 16m, 제14단의 둘레는 11.7m, 최상부인 제27단의 둘레는 9.2m이다.
제13∼15단에 걸쳐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가 되는 방향을 향하여 한 변이 약 95㎝인 정방형의 창구(窓口)가 나 있다. 이 창구의 아랫변의 돌은 대형의 평판석(平板石)으로 되어 있어서 내부의 면적을 크게 차지하고 있다. 창구의 내부 아래쪽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 위쪽은 정상까지 뚫려서 속이 비어 있는 형태이다. 그 내벽은 선형석(扇形石)의 꼭지 부분이 삐죽삐죽 나와 있다.
원통부의 제19단과 제20단에는 각각 남북·동서로 2개씩의 장대석이 걸쳐 있어 네 개가 ‘井’자를 이루는데, 그 장대석의 끝은 원통부의 바깥까지 뚫고 나와 있다. 같은 구조가 제25단과 제26단에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래의 것이 동서, 위의 것이 남북으로 걸쳐서 井자를 이룬다.
맨 위인 제27단에는 동쪽 절반이 평판석으로 막혀 있다. 이 평판석은 그 아래의 장대석에 놓여 있는데, 윗면이 둘레의 제27단보다 약 6㎝가 낮게 되어 있다. 그리고 평판석이 없이 환하게 뚫린 서쪽 절반의 공간으로 나온 제27단의 선형석의 끝에는 3개에 걸쳐서 일직선으로 인턱이 패어 있다. 두께 6㎝ 정도의 나무판[木板]을 동반부의 평판석과 이 인턱에 걸치면 중앙에서 위로 뚫린 공간이 막히고 상부에는 井자석 안에 네모난 방이 형성된다.
제27단의 원통부 위에는 각 네 개씩으로 짜인 井자석이 두 단에 걸쳐서 놓여 있어서, 사각형의 정상부를 이룬다. 이 井자석의 길이는 306㎝, 높이와 너비는 각각 32㎝, 두 단의 높이를 합치면 64㎝, 井자석이 이루는 내부 정방형의 한 변은 220㎝로서 재래의 한옥방 한 칸의 넓이가 된다.
이‘井’자석은 민족항일기와 광복 후에 자리를 바로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수리를 하였다고 한다. 수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때 방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남쪽면이 정남에 대하여 서쪽으로 약 8°가 돌아간 방향을 향하고 있다.
첨성대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인데 표면에 노출된 부분은 모두 다듬어져 있다. 석재의 개수는 종래 365개라고 하였으나 기단석까지 포함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정확히 365개는 아니다.
이와 같은 구조로 총 높이가 9.51m가 되는데, 홍사준(洪思俊)은 사다리 세 개를 마련하여 한 개는 지상에서 중앙 창구까지, 한 개는 중앙 창구 안에서 내부의 제19·20단의 井자석까지, 나머지 한 개는 제19·20단에서 제25·26단의 井자석까지 걸쳐서 정상의 井자석 안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오르내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상부에 서거나 앉거나 또는 누워서 하늘을 관찰하는 데 매우 편리하였다고 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권2의 별기(別記)에 “이 왕대(王代)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같은 책 왕력(王曆) 제1에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이야기 끝에 “능은 점성대(占星臺) 서남에 있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현재의 내물왕릉과 첨성대의 위치관계와 잘 부합된다. 이 기록에서 첨성대가 별명으로 점성대라고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후 민족항일기까지도 천문대(天文臺),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광복 이후에 갑자기 이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며, 제단(祭壇)·기념물·불교관계 건축물 등의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되었다. 물론,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천문대로 해석하고 이에 맞서는 편도 많다. 이러한 이설들이 나온 이유의 하나는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平地)에 있다는 것,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인데, 당시의 역사적 환경은 나라마다 첨성대 또는 점성대를 가졌던 것이다.
고대천문학은 크게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으로 양분된다. 중국의 사서(史書)에도 ≪역지 曆志≫ 또는 ≪율력지 律曆志≫와 ≪천문지 天文志≫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기재되어 있다. 천문관측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째는 역법을 만들기 위한 태양·달·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점성(占星)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항성(恒星)의 배치로 정해진 별자리[星座]를 지방 또는 국가로 분배하였다.
그 분야에서 일어나는 제반 천문현상을 관찰하여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다. 이러한 점성은 조선시대 말까지도 계속되었는데, 고대로 올라갈수록 그 비중이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또는 고대인의 자연철학적인 천문관측이 국가나 왕조에는 매우 중요하였으며, 되도록이면 왕궁에 가까워야 하였음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성적인 것이 제사(祭祀)나 점복(占卜)과 가까울 수도 있음직한 것이다.
대릉원지구로 부른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왕(味鄒王)을 대릉(大陵:竹長陵)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 딴 것이다. 총면적은 12만 5400평으로, 신라시대의 왕·왕비·귀족 등의 무덤 23기가 모여 있다. 고분은 모두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시대만의 독특한 무덤군(群)으로, 크게 다음과 같은 7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① 신라미추왕릉(사적 175) ② 경주 황남리 고분군(皇南里古墳群:사적 40) ③ 경주 노서리 고분군(路西里古墳群:사적 39) ④ 신라 오릉(五陵:사적 172) ⑤ 경주 동부사적지대(東部史蹟地帶:사적 161) ⑥ 경주 노동리 고분군(路東里古墳群:사적 38) ⑦ 재매정(財買井:사적 246) 등이다.
무덤을 발굴·조사할 때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금관·천마도(天馬圖)·유리잔 및 각종 토기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출토된 문화재의 보고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에 있다.
대릉원지구 외에 나머지 4개의 경주역사유적지구는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신라 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王京) 방어시설인 산성지구 등이다. 대릉원지구를 포함해 총 52개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토함산지구로 가는 길목에 입지해 있으며, 보문호수를 중심으로 관광휴양지와 문화레저시설 등을 갖춘 명실상부한 국제관광휴양단지이다. 1971년 정부에서 수립한 경주종합개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종합휴양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개발된 보문관광단지는 신라의 역사적 전통과 최첨단의 현대적 시설이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어있고, 전 지역이 또한 온천지구 및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특급호텔과 국제회의시설, 다양한 레저 및 휴양시설, 각종 기반시설 등 세계의 관광객들이 편안하게 체류할 수 있도록 관광인프라가 구비되어 있다.
보문관광단지는 경주시 동부 명활산 옛성터 인근에서 보문호를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경주 관광을 위한 각종 숙박·편의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 ‘경주의 사랑방’이라고도 불린다. 보문호수를 중심으로 국제적 규모의 특급호텔 5개소 등 수많은 숙박시설과 2개의 골프장, 쇼핑센터 등이 들어서 있고, 보문 야외 공연장, 선재 현대미술관, 경주월드, 유람선 선착장 등 휴양 문화시설도 갖춰져 있다. 또한 전 지역이 온천지구라 거의 모든 숙소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2010년 보문단지를 찾은 관광객은 803만명으로 이는 경주시 관광객의 89%를 차지하고 있다.
경주에서 동해안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함월산 불교 유적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서역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약반전산에 12개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온 인공 석굴사원이다. 응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으로 한국의 둔황석굴[敦煌石窟]이라 불린다.
함월산 응회암 절벽에는 석굴로 여겨지는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는데, 맨 꼭대기에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보물 제581호로 지정된 이 불상은 높이 4m, 폭 2.2m 정도의 크기로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세련되지 못한 옷주름 때문에 삼국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하며, 평면적인 신체와 수평적인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V자형 옷주름이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철원 도피안사와 장흥 보림사의 불상과 비슷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법당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은 탓에 앞에서 보면 집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 정도가 심해 비닐하우스 같은 투명 보호막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법당굴을 비롯한 다른 굴은 그 크기가 다양한데, 귀여운 동자승부터 근엄한 노승려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불상을 모셔 놓았다.
[기림사 (祇林寺)]
경주시 양북면 함월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로서 16동의 건물로 불국사 다음 가는 규모다. 이 절은 신라 초기에 천축국의 사문 광유성인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처음에는 임정사라 불리다가 원효가 도량을 확장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길이 없다. 기림사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고색 창연한 대적광전을 비롯, 수령 500년 이상 된 큰 보리수 나무와 목탑터가 있는 지역과 성보 박물관. 삼성각, 명부전, 관음전 등이 있는 지역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처음 지은후 6차례나 다시 지어졌다는 대적광전은 배흘림 기둥의 다포식 단층맞배지붕의 건물로 단아하고 웅장하다.
기림사는 또 다섯 가지 맛을 내는 물로 유명하다. 오종수라고 불리는데 차를 끓여 마시면 맛이 으뜸이라는 감로수와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하다는 화정수, 기골이 장대해진다는 장군수, 눈이 맑아진다는 명안수,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오탁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장군이 태어날까 두려워 물길을 막아버렸다는 장군수를 제외하곤 다른 네 곳은 지금도 각기 다른 물맛을 내며 물이 솟아나오고 있다. 기림사로 가는 도중에 12개의 석굴로 이뤄진 골굴사가 있다. 원래는 기림사 산내 암자였으나 독립 사찰이 된 후 선무도의 본산이 돼 전국에 선무도를 보급하고 있다.
기림사 건칠 보살좌상(보물 제415호), 대적광전(보물제833), 소조비로자나3존불(보물 제958), 부처님 진신사리(부처님 복장안 보관), 비로자나불복장전적(보물 제959) 등 200여점의 문화재가 있다.
[임고서원 (臨皐書院)]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3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王+居) 등의 사람들을 창솔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 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齋), 서재는 함육재(涵育齋),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공민왕 9년(1360)에 과거에 급제하여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정승 자리에까지 오른 문신이다.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긴장상태에 있던 명나라에 건너가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기도 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탁월했다. 특히 시조 단심가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의 충절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걱정하며 고려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이방원(조선 태종)이 살해하였다.
[이방원의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장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을 누리리라.
[포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포은선생의 단심가를 가슴에 새기며, 나라가 망할 때 백성들이 어떻게 도탄에 빠지는 지,
우리같은 노수들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