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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요동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래도 너무 쳐진 시간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나 봅니다. 개나리 진달래가 여기저기 비집고 나왔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요. 그래 우리처럼 너희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하였나보다 싶었습니다. 어쨌거나 3월도 다 지나가기 전에 나왔으니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미세먼지도 모자라 황사까지 뒤집어쓰면서 활짝 핀 얼굴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꽃샘추위, 미세먼지 그리고 황사까지 범벅으로 보내는 한 달입니다. 아쉽지도 않네요. 비록 잔인하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어서 4월아 오너라 하고 싶습니다. 하기는 다 왔습니다. 이 주말이 종착역이니 말입니다. ㅋㅋ
하늘은 그렇다 치고 뭐 살맛나는 일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국과의 한판이 그래도 좀 위로가 되었지만 요즘 아무리 둘러봐도 속이 확 뚫리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늘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황사로 뒤덮인 듯하니까요. 이 선거판 지나면 좀 나아지려나, 그저 희망사항인가 모르겠습니다. 행여 홧병으로 쓰러지는 백성이 없다는 것도 기적이고 참 다행스럽다 싶습니다. 하기야 이것도 방심위를 통과해야 보도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우리 민족 한을 이겨내는 데는 도사들입니다. 이겨야지요.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먼저 쓰러지는 것들을 보아야 맘 편히 땅에 누울 것입니다. ㅋㅋ 뭔 얘긴지 거 참! 아무튼 건강해야 살아남습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ㅎㅎ
4월이 옵니다. 축제의 날들이 옵니다. 세상 뒤집어져도 꽃은 피어납니다. 그리고 지나가기 전에 즐겨야지요.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4년 3월 30일 김종우 목사 드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1 : 8)
<가여운 것들>
‘나’라는 존재는 몸으로 나타납니까, 뇌로 나타납니까? 자의식이 없는 나는 나입니까, 아닙니까? 함부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치매에 걸려 자신도 가족도 몰라보는 사람은 본래의 그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기야 이게 사람인가 싶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지요? 그렇다고 물건처럼 내다버릴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마주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봅니다. 앞의 그 사람이 전에 마주했던 사람이 아니니 말입니다. 몸은 맞는데 마음과 정신은 아닙니다.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대놓고 폭력을 가합니다. 어쩌지요?
경험이 나를 만듭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되는 경험도 있습니다. 예컨대 전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겠다고 아이에게 철사 줄 두 개를 주며 콘센트에 집어넣으라고 하면 됩니까? 사람들을 알기 위해 이 사람 저 사람과 육체관계를 맺으면 되겠습니까? 내가 나로서 산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유를 누리는 것, 복이라고 하는데 어쩌면 기본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를 누리려고 약혼자를 내두고 다른 남자와 해외여행을 떠난다면 용납이 됩니까? 다녀와서 결혼하자고요? 믿고 기다립니까?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의 주체를 모릅니다. 부모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다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의사이며 과학자입니다.
한 여인이 강으로 투신하였습니다. 구조를 하였는데 인사불성입니다. 숨은 멎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명의 불씨가 남아있습니다. 임신 중인 여인이었습니다. 의사이며 과학자인 ‘갓윈 백스터’가 발견하였습니다. 백스터 의사는 여인의 몸에 태중의 아기의 뇌를 이식합니다. 몸은 성인인데 정신은 아이입니다. 백스터가 키웁니다. 아기 짓을 하며 자랍니다. 사람의 성장과정을 밟는 듯합니다. 몸이 원하는 쾌락을 발견합니다. 몸은 이미 성인이니 성장 호르몬만 시기에 맞게 자라면 아마도 쉽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그만큼 자랐으니 혼자서 감당하기도 벅찹니다. 그래서 백스터 의사는 청년 조수를 한 사람 기용합니다.
하는 짓은 어린아이 같은데 몸은 성인이고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러니 청년 조수가 그만 사랑에 빠집니다. 이을 하면서 그리고 함께 지내면서 둘 사이가 괜찮아집니다. 백스터도 눈치 채고 이해합니다. 이 청년은 이 예쁜 아가씨 ‘벨라’를 좋아하면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벨라는 어디서 왔으며 부모는 누구이며 여기에 어떻게 왔고 백스터가 아비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알고 나니 백스터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먼저 좋아하고 같이 몸 비비며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백스터는 나름의 안타까운 비밀이 있습니다. 내 작품이기는 하지만 내 소유가 될 수는 없다, 일단 맞는 말입니다. 또 다른 인격체를 어떻게 개인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답니까?
사실 그런 도덕적 이유보다는 어쩌면 현실적 이유가 더 타당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백스터는 성기능 상실자입니다. 원한다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 청년은 벨라와 약혼까지 합니다. 그런데 웬 이방인 하나가 등장합니다. 역시 벨라에게 빠진 ‘덩컨 웨더번’이란 사람이 찾아와서는 벨라를 유혹합니다. 호기심 많고 새로운 것을 찾는 이 예쁜 여자를 자기가 데리고 가고 싶은 것이지요. 맘껏 세상을 구경하고 즐기라고 유혹합니다. 벨라는 약혼자에게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웨더번과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을 여행합니다. 물론 둘이서 육체의 쾌락을 즐기면서 말이지요. 둘이 모두 서로를 탐닉합니다. 너 좋고 나 좋고 지요. 벨라는 맘껏 자유를 누립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쾌락 중에서 아마도 성적인 쾌락이 가장 강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벨라가 한 번 빠지고 나서는 거의 주체를 하지 못합니다. 문제는 윤리적 의식이 없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죄책감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왜 내가 즐기는 이 일에 방해를 받아야 하고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지 기본적 질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것으로 남자를 즐겁게 해주고 돈까지 벌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큰 보람(?)까지 가집니다. 그런데 함께 다니던 웨더번 입장에서는 기절할 일입니다. 자기하고만 다니며 자기와만 즐기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이 되었지만 벨라는 새로운 것이라면 누구든 무엇이든 상대하려 합니다. 내가 왜 당신에게 매여 있어야하지요? 벨라의 생각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옵니다. 약혼자는 벨라가 어떻게 지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벨라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이서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런데 식장에 전 남편이 등장해서 결혼을 막습니다. 남편이 있다는 사실에 두 사람 모두 놀랍니다. 알고 보니 벨라의 몸의 남편입니다. 어떻게 하지요? 벨라가 전 남편을 따라갑니다. 그의 부와 권력에 넘어갔는지도 모릅니다.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이 남편이 벨라를 독점하고 자기 소유처럼 다루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태 그래왔지만 그렇게 매여 살 사람이 아닙니다. 벨라는 자신이 아버지를 뒤따라 의학을 공부하고 스승 과학자에게 잘 배운 약혼자와 협력하여 전 남편에게 확실한 복수를 해줍니다. 영화 ‘가여운 것들’(Poor Things)을 보았습니다. 생각하게 만듭니다.
무슨 지혜를 구하십니까?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재물을 구하고 명예를 구하고 사랑을 구하고 믿음을 구하고 지식을 구합니다. 일일이 다 언급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또 때가 되면 흔히 기업마다 사업장마다 사람을 구하고 인재를 구합니다. 경기가 불투명하여 올해의 인력 수급난도 계속될 전망이라고 합니다. 매년 배출되는 졸업생들과 여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지체되어있는 인력과 합해져서 청년 실업자 문제가 국가적 숙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직장을 찾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을 찾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찾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며 만족시켜 가며 사는 것입니다. 만약 1년 열두 달 하나도 채워지는 것이 없다면 살맛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특히 연말연시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망을 새롭게 갖습니다. 무엇인가를 구한다는 것이지요. 여태 손에 넣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새롭게 얻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구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얻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하기야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구하고 찾으며 살아갑니다. 기본적으로 먹을 것을 매일 찾고 구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 기본적인 것을 채우고 나면 좀 더 다른 것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처럼 배부르다고 그늘에서 다시 배고플 때까지 한가히 노닥거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습니다. 생물학적 욕구보다 좀 더 높은 것, 수준이 다른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을 보다 아름답게 또는 의미 있게, 나아가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보다 살기 좋게 또는 행복하게 꾸미려고 합니다. 그래서 구하는 것이 더 많은지도 모릅니다. 자 금년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옛날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고 나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꿈을 꾸며 하나님을 만납니다. 왕상 3 :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우리 같으면 무엇을 구할까요? 어쩌면 구할 것이 너무 많아가지고 생각만 하다가 시간 다 흘려보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친구가 요트 항해를 하다가 조난을 당하여 간신히 조그만 무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셋 중에 조금 모자란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말 잘 듣고 일은 끝내주게 잘합니다. 사실 그래서 끼워준 겁니다. 아무튼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데 어느 날 이상한 호리병이 물결에 둥둥 떠왔습니다. 주어다가 셋이 앉아 궁리했습니다. 병은 마개가 닫혀있었고 속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시 나쁜 것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폭발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 그러다가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런 무인도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도 없는 건데 아무렴은 이보다 더 나빠지겠느냐? 열자! 그래서 호기심 반 걱정과 두려움 반 가지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연기와 함께 이상한 거인이 나타나 무릎을 꿇더니 세 친구에게 절을 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저를 해방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보답으로 제가 한 사람 앞에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씩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한 친구가 대뜸 나서더니 나는 하와이 해변에 3층짜리 큰 별장을 가지고 그 앞에서 예쁜 애인과 나란히 칵테일을 마시고 싶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인이 휭 하고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잠깐 후에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 친구가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명동 한복판에 20층 건물을 가진 사업가로서 100평짜리 사무실에 있고 싶어요. 그 친구를 데리고는 휭 하고 사라졌습니다. 다시 돌아왔습니다. 자 이제 조금 모자란 친구만 남았습니다. 거인이 말합니다. 주인님은 무엇을 원하시나요? 이 친구가 대답합니다. 아니 친구들 다 가면 나 혼자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그 친구들 다 불러주세요. 무엇을 구하는가, 그것을 통하여서도 우리 자신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시자 솔로몬이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왕상 3 : 7 - 9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아멘! 솔로몬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뭐라 하시지요? 11 - 12절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그리하여 솔로몬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지혜로운 왕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린 왕이 됩니다. 솔로몬이 실제 구한 것 외에 하나님이 보너스로 주신 것이지요. 우리에게도 금년 한 해 살아가는 동안 이와 같은 복이 임한다면 참 좋겠습니다.
1. 이 세상의 지혜가 있습니다.
고전 1 :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즉 헬라인이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방인이 찾는 것은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20절에서 말씀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여기에 이 세상의 지혜를 대표하는 말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지혜 있는 자 곧 선비와 변사를 말하는데 선비는 학자라는 말이고 변사는 달변가입니다. 당시 지혜 있는 자란 많이 배우고 말 잘하는 사람을 가리켰습니다. 하기야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에 든 것이 많고 말만 잘하여도 어디에 가든 환영받습니다. 정치가가 될 수도 있지요. 언론인 또는 대학 교수가 될 수도 있지요. 여기 저기 다니면서 강의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재미있고 유익하게 알려줍니다. 인기 짱 되는 거죠.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많이 가지는 것, 남보다 빨리 가지는 것, 남보다 잘 사는 것 등등입니다. 세상의 지혜 속에는 거의 대부분 경쟁과 비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어느 사회 속에서든 대부분 추구하고 있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보다 빨리’ ‘보다 많이’ ‘보다 잘’ 그래서 국가 간 경쟁하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경쟁합니다. 서로 나은 학교에 가려고 하고, 서로가 더 많이 배우려 하고, 서로가 더 빨리 습득하려고 애씁니다. 내가 먼저 가지고 내가 먼저 배워야 써먹을 수 있고 남보다 우위에 앉을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쳐지면 어리석은 자가 되고 그것이 발전되면 왕따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익이 앞설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기가 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보다 빨리 잘 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딤후 3장에 말씀하는 말세의 나타나는 현상이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뭐라 말씀합니까? 딤후 3 : 1 - 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행여 이 가운데 몇 가지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니면 오히려 그래서 스스로 자기가 지혜롭다고 자처합니다. 결과는 롬 1 : 22 - 23절 말씀대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의 마음이 비워져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소위 정신 나간 사람이 됩니다. 무엇인가가 자리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없으면 세상 생각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으면 썩어질 우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영원은 없고 땅에서의 순간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분명 당신의 형상으로 영원을 바라보게 지었건만 하나님 백성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썩어질 땅에다 코를 박고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 :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우리 지혜로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남들이 미련하다 생각하는 바로 그것,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지혜
다시 보겠습니다. 고전 1 :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멘! 오직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골 2 : 2절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3절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가? 등등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지혜는 여기서만 사용되겠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고 여기를 떠나 하나님 나라에서도 사용될 것이기에 더욱 중요합니다.
간단히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십니다. 요 1 : 2 - 3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습니다. 고전 8 : 6절에서도 똑같이 증거합니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구세주이십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당할 것이 예정되어있던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 하나님이 보내주신 약속의 메시야이십니다. 사 53 :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오셨습니까? 갈 4 :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 모든 말씀들을 요 3 : 16절에서 요약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왜 예수 그리스도 뿐인가? 다른 길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 4 :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도 친히 선포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이 많다고 우길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길은 오직 하나 곧 예수입니다. 알고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그 분을 만날 수 있는가? 지금은 유대 땅에 가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이미 이 땅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계십니다. 물론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미 늦습니다. 그 전에 만나야 하고 그 전에 알아야 하고 그 전에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날 왜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가까이 하며 때마다 말씀을 듣고 읽으며 사는가,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고 구원과 영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계십니다. 언제라도 함께 하십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필요한 온갖 지혜와 지식을 얻습니다. 가장 중요한 지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지식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끝나는 제한적인 지혜와 지식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는 여기서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온갖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그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깨닫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영생의 길을 제시하고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원과 더불어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그것입니다. 요 10 : 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 누가 누릴 수 있습니까?
고전 1 :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짓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그러면 그게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게 힘없고 초라한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나를 믿겠다, 하는 것이 그들의 태도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들이 주장한 대로 신성모독이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입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21절에 말씀하기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그 놀랍고도 깊은 지혜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은혜를 누가 누립니까?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24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유대인들 중에도 있을 것이요 이방인들 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롬 1 :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에게 나타나고 누구에게 해당됩니까? 유대인이든 헬라인 즉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믿는 자에게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하여진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입었으니 또한 빚진 자 되어 이 복음을 전하는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딤전 2 :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 오히려 미련하다는 그것으로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을 전합니다. 고전 1 :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고전 1 :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렇습니다. 유대인 즉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다닌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이 찾는 것이 무엇입니까? 놀라운 은혜를 구합니다. 기적과 같은 은혜를 구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거의 모두 자기 생활에 일어나야 할 복입니다. 자기 병이 낫고, 자기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취직을 해야 하고, 남편의 사업이 번창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헬라인 즉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세상 사람들도 지혜를 구합니다. 그 지혜 역시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에서 남보다 잘살기 위한 지혜입니다. 신자이든 불신자나 무신자이든 따지고 보면 구하는 것이 같다는 말입니다. 모두 세상 것이고 땅의 것입니다. 그럴진대 도대체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차이는 교회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전합니까?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바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 때는 그리스도를 몰랐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하늘의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땅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땅의 것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를 깨웁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받아 말씀하신 것은 영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육으로 가르치고 육으로 배우고 육으로 믿습니다. 이 육의 세상 곧 우리들 사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일로 생각하고 따라가려 합니다. 그들을 깨워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리낀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려고 하면 들으려 합니까? 자기는 교회 다닌답니다. 그러니 다른 데 가서 전하라고 하지요. 자기가 처한 상태를 모릅니다. 아니면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일로 바빠서 하나님 말씀에 신경 쓸 시간이 없습니다. 답답하지요.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24절에 보면 누가 나옵니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24절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읽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23절)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방인은 고사하고 유대인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재림 때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지혜란 뜻입니다. 초림 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지 못해 버림받은 신자들과 오늘날 재림 때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믿지 못해 버림받을 신자들과 입장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날짜는 몰라도 징조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혼자 오신답니까? 누가 함께 오는지 아십니까? 어디에 오시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오시는지 아십니까? 무엇을 가지고 오시는지 아십니까? 왜 오시는지 아십니까? 도대체 어떤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탄식이 똑같을 것입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망하지 않으려면 구해야 합니다.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무식한 교회에 가만 앉아 있으면 같이 망하는 것입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경고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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