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方[3618]王守仁(왕수인)7율-龍潭夜坐(용담야좌)
<낙관글>
王守仁詩一首時在癸卯初夏仲維亮(왕수인 시 일수 시재 계묘 초하 중유량)
왕수인의 시 한 수를 계묘년 초여름에 중유량이 쓰다.
작가 중유량(仲維亮)
약력 · 산동성 서예가협회 회원
· 일조시 서예가협회 회원
· 일조시 청년서예가협회 이사
龍潭夜坐(용담야좌)
용담에서 밤에 앉아
龍潭(용담:滁州, 龙池(저주, 용지) 별칭은 柏子潭(박자담)
-王守仁(왕수인)
何處花香入夜清(하처화향입야청)
어느 곳 꽃향기 밤이 되니 더욱 맑은가?
石林茅屋隔溪聲(석림모옥격계성)
석림 초가는 계곡물 소리에 막혀있네.
茅屋(모옥): 초가집. 띠풀로 엮은 집
幽人月出每孤往(유인월출매고왕)
은사는 달이 돋자 매양 홀로 나다니고
幽人(유인): 은사(隱士;은둔하여 사는 사람)
棲鳥山空時一鳴(서조산공시일명)
텅 빈 산에 자던 새 때때로 우짖네.
草露不辭芒屨濕(초로불사망구습)
이슬에 짚신이 젖는 걸 마다하지 않고
芒屨(망구): (≒芒鞋 망혜) 짚신
松風偏與葛衣輕(송풍편여갈의경)
솔바람 때마침 부니 갈옷도 가뿐하네.
偏(편): 마침
葛衣(갈의): 갈포(葛布)로 만든 옷
臨流欲寫猗蘭意(림류욕사의란의)
물가에 임해 의란의 뜻 배우고자 하나니
寫(사): 여기서는 배우다의 뜻
猗蘭(의란): 아름다운 난초
(≒猗蘭操 의란조; 공자가 노래한 거문고 곡조명으로 아름다운 난초의 지조라는 의미).
※空谷幽蘭(공곡유란)
텅 빈 골짜기에서 그윽한 난초의 향기를 (맡는다는) 뜻으로,
공자가 인적 없는 골짜기에서 운명적으로 난을 만나 크게
깨달음을 얻으며 거문고를 들어 거문고 가락으로
의란조라는 거문고 시를 지은 것에서 유래함.
江北江南無限情(강북강남무한정)
강·남북에서도 그 마음은 끝이 없네.
<작가 소개>
명나라 절강(浙江) 여요(餘姚) 사람. 호는 양명이고,
이름은 수인(守仁)이며, 자는 백안(伯安)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초명은 운(雲)이다. 관직에 나간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서 자랐고,
28살 때인 홍치(弘治) 12년(1499)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병법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고, 활쏘기에도 능했다.
형부주사(刑部主事)에 임명되었다. 35살 되던 정덕(正德) 초에 유근(劉瑾)의
눈 밖에 나서 정장(廷杖)을 당하고 귀주용장(貴州龍場)의
역승(驛丞)으로 좌천되었다가 유근이 죽자 여릉지현(廬陵知縣)이 되었다.
역승(驛丞)으로 지내면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밤 석관 속에서
깨친 것이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였다.
11년(1516) 우첨도어사(右僉都御使)와 남감순무(南贛巡撫)를 지냈고,
대모산(大帽山)과 이두(浰頭), 횡수(橫水) 등지의 산채(山寨) 등 84곳에서
일어난 민변(民變)을 진압한 뒤 숭의(崇義)와 화평(和平) 두 현(縣)을 설치했다.
14년(1519)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의 반란을 진압했다.
세종(世宗) 때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졌다.
가정(嘉靖) 6년(1527) 양광총독(兩廣總督) 겸 순무로
등협(藤峽) 요민(瑤民, 苗族)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펼친 작전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병에 걸려 돌아오는 도중에 과로와 고열로 남안(南安)에서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관학이었던 주자학을 배웠지만 만족하지 않았고
선(禪)이나 노장의 설에 심취한 때도 있었는데, 담감천(湛甘泉)을 만난 뒤부터
성현(聖賢)의 학문을 지향하게 되었다. 49살 때 처음으로 치양지(致良知)의 설을
제창하고 강학에 힘써 문하 제자가 더욱 융성해졌다.
제자와의 토론을 모은 『전습록(傳習錄)』 3권이 있고,
시문과 주소(奏疏), 연보 등을 더한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38권이 전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중국역대인명사전)
[출처] 龍潭夜坐|작성자 farh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