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루카 14,1.7-14)
When you are invited, go and take the lowest place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참지혜가 무엇인지 서술하고 있다. 지혜는 주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말씀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제1독서). 시나이 계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현존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새 계약을 맺은 우리는 천상 예루살렘 안에서 하느님을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서 사람들이 윗자리를 탐하는 것을 보시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는 이가 높아진다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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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잔치에 초대되었을 때에 윗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끝자리’가 단순히 공간적인 뜻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앉고 싶지 않은 자리라면 거기가 바로 끝자리입니다. 이를테면 주일인데도 성당에 가기 싫다면 성당 좌석이 곧 끝자리입니다. 제삿날이지만 시댁에 가기 싫다면 시댁이 곧 끝자리입니다. 교회 활동으로 어려운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데, 갈 때마다 불편하게 느껴지면 바로 그 집이 끝자리입니다. 보좌 신부 때에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회식 자리가 잦았습니다. 스무 명이 넘게 모이는데, 보통 친한 이들끼리 가까이 앉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안에서 다소 소외되는 이들은 한쪽 구석으로 몰립니다. 결국 한쪽에는 인기가 좋은 이들이, 다른 쪽에는 소외되는 이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보좌 신부인 저는 어디에 앉아야 했겠습니까? 마음으로는 좀 더 매력 있는 청년들 쪽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청년들에게서 “우리 신부님은 청년들을 편애하지 않는 것 같아.”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가기 싫은 자리, 하기 싫은 일, 선택하고 싶지 않은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끝자리’에 앉는 것이고, 겸손을 향한 지름길입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면, 앉고 싶은 자리만 앉으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려고 하면 겸손을 배우지 못합니다. 겸손을 배우려면 ‘끝자리’에 앉는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천국의 열쇠
-손희송신부-
조선 시대의 순교자 황일광 시몬(1757~1802년)은 백정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된 후에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신분의 벽이 높았던 당시, 사회에서 천민인 자신을 형제처럼 여겨주는 신자 공동체를 지상의 천국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천국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서 거기에는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제2독서) 하느님을 직접 뵙고 예수님과 완전한 친교를 이루면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은 죽음 다음에 가는 곳이지만, 이미 이세상에서 교회와 함께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보이지 않게 교회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당신과의 친교에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미사와 다른 성사들을 통해 필요한 은총을 선사해 주시며, 신자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모임에 함께 계십니다. 교회가 예수님과의 친교 안에서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의 씨앗이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천주교회를 황일광 순교자처럼 지상의 천국으로 느끼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처럼 보잘것없는 이들을 감싸안고 보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세속의 논리에 편승하여 크고 화려하고 힘센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기꺼이 낮아지셨는데, 잔치 석상에서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던 이들처럼(복음) 자리다툼을 하고, 위상 높이기에 연연하지는 않는지요?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는 욕심’(창세 3,5 참조) 때문에 순명하지 않아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교만은 천국 문을 닫아거는 빗장입니다. 반면에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지 않고 주님께 순종하는 겸손은 하느님의 큰 권능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제1독서)이고, 천국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일꾼이요 도구일 뿐입니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 각자의 처지에 맞게 겸손하게 주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교회는 천국의 맛과 분위기를 낼 것입니다.
현대에는 자신을 앞세우고, 자아실현과 개인의 자유를 거의 절대시하는 풍조가 매우 강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과 영광을 우선시하는 겸손은 남에게 뒤처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순교자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위해 재산과 명예는 물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세속의 기준으로는 정말 바보 같은 길이었지만, 실상은 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시고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겸손이 천국의 열쇠다!’ 그 열쇠를 받아 천국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렉시오 다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박병규신부-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함께 더불어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닫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초대받은 자와 초대한 자가 등장한다. 초대받은 사람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초대받은 사람은 초대한 사람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하는 사람 또한 초대받는 사람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초대라는 말마디는 이렇게 서로의 의존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되는 말마디가 초대라는 것이다. 비유에 나타나는 초대의 자리 또한 나와 너가 어우러지는 혼인잔치의 자리였다. 예수시대의 혼인잔치는 먹고 즐기는 잔치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사건’이었다.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먹거리를 두고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말 잔치였다. 나 혼자의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였고, ‘우리’ 속에 나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 그런 잔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8절) 예수님이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윗자리’는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함을 말해 주는 자리다.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음을 자각해야 할 자리다. 초대받은 자가 스스로 윗자리에 앉고자 한다면 더 높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고, 이 무시가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든다.(9절) 스스로 윗자리에 앉으려 하는 사람은 초대라는 말마디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함께 더불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자신만의 자리를 찾는 닫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윗자리와 상반된 ‘끝자리’에 대해 말씀하신다. 끝자리는 흔히 생각하듯 자기 낮춤, 겸손 또는 자기비하의 자리가 아니다. 비교우위에 근거하여 남보다 더 못한 자리가 아니라 남에게 영광을 받을 자리이기 때문이다.(10절) 끝자리는 내가 아니라 상대를 통해 내 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는 자리다. 끝자리는 상대로 인해 만들어지는 내 자리의 시작이다. 내가 찾아나서는 자리가 아니라 남이 나를 위해 무언가 해줄 수 있는 자리, 이 ‘끝자리’는 나와 너가 만나는 ‘우리’의 자리가 된다.
묵상(Meditatio) 세상이 자꾸만 더, 더, 더 좋은 것에 빠져들고 있다. 남보다 더 배워야 하고, 남보다 더 벌어야 하고, 남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고 자꾸만 세뇌시키는 것 같다. 경쟁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이 당연한 것이라 말들 하겠지만, 왜 경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경쟁을 통해 내가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얻어 누리게 되었다면, 타인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사회적 책임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백 원을 벌면, 그 백 원을 벌 수 있게 한 공동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제 능력이 뛰어나도 무인도에서 백 원을 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루카복음은 특별히 우리에게 사회적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촉구하는 복음이다. 내가 살아가는 곳은 공동체의 자리다. 공동체는 더불어 살아가야 할 자리이지 나 혼자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너를 희생시키는 자리가 아니다.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싸워야 할 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감사해야 할 내 삶의 은인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도(Oratio)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 !(시편 133,1)
누구를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 것인가?
-하춘수신부-
요즘 권력자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뻔뻔할 수 있을 까!’ 하는 것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적반하장賊反荷杖, 인면수심人面獸心, 파렴치破廉恥 따위의 한자성어가 눈앞에 겹칩니다. 권력자는 아무나 하 는 것이 아니구나! 거짓말 정도는 얼굴 하나 일그러짐 없이 할 수 있어야, 윤리니 도덕이니 예의니 제 이익 제출세를 위해서라면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는 배짱 정도는 있 어야 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겸손’謙遜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로운 스승들은 한결같이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쳤건만, 오늘날 미련스런 통치자들은 왜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사전에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라틴어로는 ‘humilitas’후밀리따스라고 하는데 이 말의 어원은 바로, ‘흙’ humus입니다. 아무 귀할 것도 없는 ‘흙’, 가장 낮은 자리를 메우고 있는 ‘흙’이 겸손이라는 말의 뿌리입니다.
창세기 2장 ‘인간창조’에 관한 말씀을 떠올려 봅시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 당신 입김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흙’과 ‘하느님의 입김’은 인간의 두 뿌리입니다. ‘흙’은 인간의 ‘비천함’을, ‘하느님의 입김’은 인간의 ‘고귀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서에서 겸손이란, 인간의 존재의 한 뿌리가‘흙’(비천함)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흙의 속성인, 낮음으로 귀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은 인간의 다른 뿌리인 ‘하느님’(고귀함)이라는 속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 돋보이게 해줍니다.
반대로 ‘교만’은 인간이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느님 높으심을 넘보는 탐욕으로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복음 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교만한 모습도 불쾌하게 여기시지만, 초대한 이에게도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하고 분부하십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습니까? 아니, 잔치까지는 아니더라고 누구와 이웃하며 친구하며 지내고 있습니까?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낮은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덜 가진 사람과 친하고자 합니까? 주위에 둘러보면 우리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분명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난데없이 해고당한 노동자도 있고,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 북녘의 우리 동포들, 몸이 불편하신분,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사시는 분 등…. 우리가 이웃하며 지내야 할 분들,
우리의 잔치에 초대해야 할 분들입니다.
-서공석신부-
복음서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고 가르쳤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도 그분으로부터 배워,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 식탁에 앉은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초대 받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윗자리에 앉으려고 신경 쓰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은 교훈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식탁에 앉은 이들을 둘러보십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경제적 수준이 집주인과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그들이 초대를 받았지만, 그들은 후일 언젠가 집주인을 초대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행입니다. 결혼식에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부의금을 낼 때, 우리는 혼주(婚主)나 상주(喪主)로부터 과거에 받았던 것, 혹은 후에 우리가 받을 것을 고려하여 액수를 정합니다. 사람을 초대하는 사람은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되돌려 받을 것을 염두에 둡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일에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를 존중합니다.
잔치에서는 윗자리가 좋고, 남에게 베풀 때는 그만큼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 하는 우리 세상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십니다.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잔치에 초대할 때는 되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잔치가 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고, 그들에게 베풀어서 그들이 행복한 우리의 이웃이 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우리의 관행과 예수님의 권고 말씀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인간관계에 대한 평가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합니다. 우리는 이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이 대우를 받고, 우리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포장 하고자 합니다. 입은 옷으로, 가진 자격증으로, 주어진 지위로, 혹은 가진 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베푼 만큼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것이 손해 보지 않고 현명하게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사정을 고려하는 데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우리 자신만을 확대해서 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나타나는 하느님 자녀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우리의 관행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사랑하는 분이라고 믿었고,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자비와 사랑은 자기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하지 않습니다. 자비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이웃의 입장에서 이웃을 보고 그를 이해하며 보살핍니다.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고 높이시면, 인간은 소신껏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일을 위해 우리는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며, 그분의 노예, 혹은 그분을 위한 기쁨조가 되어 살 것입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도 오로지 지도자동지를 위해 모든 것을 하는 북한 동포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사람 하나가 자기 스스로를 과대포장 하여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비참하게 되는데, 하느님이 당신 스스로의 영광을 찾으시면, 우리에게는 자유도, 소신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기쁨조는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대들은 나의 벗”(요한 15,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은 벗을 자유롭게 해주고 그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스스로를 낮추셔서 세상에는 자연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절 따라 자연은 변하고, 계절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실천하는 사랑이 있어서 우리에게는 감동이 있습니다. 감동과 행복은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가능합니다. 순종을 요구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짓밟는 일은 오늘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삶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하느님이 그 중심에 살아계십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베푸는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고 남을 지배하고 순종시키겠다는 마음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을 극복해야 하는 경쟁자로만 생각하는 맹수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더 높은 지위와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렸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씁쓸함과 살벌함입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생명들을 짓밟고 죽여버린 메마른 사막의 씁쓸함입니다.
우리는 가진 이에게는 관대하고, 못 가진 이에게는 인색합니다. 생색이 나는 일에는 관대하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에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도 나 한 사람 잘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길이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돈 바치는 이를 좋아하고, 바친 만큼 은혜를 베푸신다고 상상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람들도 돈을 바쳐야 하느님이 더 잘 고쳐주신다고 말합니다. 많이 바치면, 많이 치유된다고도 말합니다. 어느 특정의 곳에 가서 헌금하고 기도하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모두가 이해타산(利害打算) 하는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질서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근성(根性)에서 해방된 자유를 가르쳤습니다. 자유는 우리가 한 번 깨달아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를 무릅쓰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자유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추는 일도, 되돌려 받지 않고 베푸는 일도, 많은 실패를 겪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질서입니다. 나 자신을 높이고 과시하고 싶은 마음, 준만큼 받아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의 살과 피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새로운 살과 새로운 피가 예수님으로부터 우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실천이 우리를 비추어야 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게 하는 성체성사가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
-조명연신부-
얼마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방에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무작정 밖으로 나가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군다나 비까지 부슬부슬 오는 것입니다. 괜히 기분이 더 안 좋아지더군요. 부슬부슬 오는 비가 마치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면서 거의 1시간 가까이를 걷다가 다시 사제관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었습니다. 교구청에서 우연히 어떤 자매님을 만났는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어제 낮에 산책하시는 신부님을 봤어요. 우산을 쓰고 깊은 사색에 잠겨서 홀로이 산책하는 모습이 정말로 멋있었어요.”저는 힘들고 어려워서 그 복잡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산책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런 내가 오히려 멋있게 보였나 봅니다.어렵고 힘든 순간은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다른 사람의 눈에서는 멋있게 보이고 부러워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스스로가 힘들어 할 뿐이지, 엉망진창의 시간도 아니었고 최악의 순간도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미워하셔서 그런 시간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부러워할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는데,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주님께서 가장 좋은 시간을 주셨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들을 내세워서 어렵고 힘들다고 불평불만 속에 빠지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 뜻은 자신을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세상의 기준들에 있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추는 것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부유한 이웃들만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 보답을 하느님께서 직접 해주신다고 하시지요. 인간의 품위는 오로지 주님만이 높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직접 높여 주시는 그 보답을 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주님의 기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큰 꽃은 단지 클 뿐이고 작은 꽃은 단지 작을 뿐이다. 오래 피어 있는 꽃은 오래 피어 있을 뿐이고 일찍 지는 꽃은 일찍 질뿐이다. 그것은 차이이고 다양성일 뿐 우열이 아니다(이승헌). .
첫 마음(정채봉)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고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라는 시입니다. 이처럼 첫 마음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만났던 그 첫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
-김대열신부-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루카14,14) ---- 대가를 바라지 않는 베풂. 이를 봉사라고도 하고 선행이라고도 하고 사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감동한다.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살만한 세상임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전염병 아닌 전염병에 감염되고 만다.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사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운 우리네 삶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단계 넘어서야 한다.
선(善) 자체가 주는 선물이 있다. 아름다운 일을 하는 동시에 그 대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선물이자 대가는 행복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의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순간 그 행복감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좋은 마음이 서운함을 넘어 미움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냥 좋아서 하는 우리여야 한다. 그것이 옳기에 하는 우리여야 한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우리여야 한다. ‘주고 받는다(Give-and-take)’란 말이 너무도 귀에 익숙한 세상이다. 능력이 되면 그냥 주면 된다. 그것이 행복한 일이다.
순수하게 주어야 한다. 세상이 바보라고 해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우리여야 한다.
사랑에도 정의에도 평화에도 계산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그 안에서 어떻게 진정한 행복을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보여주신 길을 걸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여러분은 행복해야만 하는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답변이다.
< "끝자리" >
-전삼용신부-
우리는 모두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오리가 태어났는데 형제들과는 너무 모양세가 달라 형제들은 물론 부모님께도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이에 시름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침 자신과 비슷한 모양과 목소리를 지닌 새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백조들입니다. 이에 삶의 활기를 찾아 백조의 삶을 기쁘게 살아간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안합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지만 누구도 그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다만 부모님만이 ‘우리가 서로 사랑해서 너를 낳았단다!’하며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열심히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 느끼며 갖는 마음이 ‘자아존중감(自尊感)’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마음이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자존감은 내 스스로가 아닌 어떤 대상을 통하여 얻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마치 강아지를 사람취급하면 그것이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운오리새끼에서 보듯이 이 자존감, 즉 나도 귀한 존재의 이유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갖지 못하게 되면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스스로 자신이 귀중한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직 자존감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은 아직 불안한 어린이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어른이 되어도 스스로 자신이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어 할까요? 그 이유는 부모님의 사랑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해서 만들어 준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나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시 만들어 줄 수 없는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때는 더 원초적인 나의 근원, 즉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분이 나를 존재하게 해 주셨음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 영원한 불안감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시대의 탈옥자 신창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른 많은 범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책임은 부모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 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빠져 삶을 자포자기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육성회비와 급식비를 가져오라고 독촉했고 그것이 싫어 학교를 빠지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아들을 때렸고 나중에는 아이들에겐 전혀 관심 없는 젊은 새엄마까지 들어왔습니다. 새엄마는 신창원의 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결국 가출을 했다가 갈 데가 없어 돌아와서는 또 맞고, 학교도 집으로도 세상에서도 자신을 받아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대한 증오, 아버지에 대한 증오, 새엄마에 대한 증오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입니다. 미운오리새끼 신창원은 작은 도둑질과 싸움으로 시작하여 남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살아가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죽지 못해서 살게 되더라도 폭력과 쾌락, 재물 등을 삶의 의미로 붙들게 됩니다. 그런 것들의 집착이 커지게 되면 범죄자까지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나의 존재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극도의 불안함 속에 죽지 못해 그것들이라도 붙들고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창원이 요즘 조금 변했습니다. 사실 많이 변했습니다. 바로 이해인 수녀님과의 ‘만남’을 통해서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은 사랑과 종교의 의미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해요, 창원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죠? 우리 모두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이해인 수녀님을 이모라 부르며 둘은 여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과 이해인 수녀님의 암투병 소식도 알게 되었고, 그렇게 증오하던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자신도 죽고 싶을 정도로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녀님께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수녀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렇게 썼습니다.
“새장 같은 공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나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절망하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삐 날아온 사랑이 있었습니다. 35년이 흘러 지금은 희미해져 버린 어머니의 향기 그리고 요람 같은 포근한 가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홍역을 앓듯 마음의 몸살을 앓을 때면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한 걸음에 달려오셨지요. 이모님은 때론 어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의 공간을 방문하여 손을 내미셨습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내리사랑만 베푸시다 지금은 알을 품은 펭귄의 헤진 가슴으로 홀로 추운 겨울을 맞고 계시는군요. 처음 이모님의 병상소식을 접했을 땐 눈물뿐이었습니다.”
자아존중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챙겨줄 여유가 없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해 주기만을 바랄 뿐인 것입니다. 바로 윗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입니다. 남을 높여주기 보다는 남들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창원은 이제 아버지의 마음도, 수녀님의 마음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은 좀처럼 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범죄를 저지를 때는 남의 고통에 대해서는 극히 무감각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전에는 남의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젠 자신이 남의 감정을 알아주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일생을 둘로 나눈다면 아이와 어른일 것입니다. 아이 때는 사랑을 받으며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느껴야 할 때입니다. 그 때는 부모로부터 왕 대접을 받습니다. 그런데 신창원은 이렇게 대접만 바라는 아이였다가 어떤 한 사람의 사랑으로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나게 해 준 어른, 그 분이 이해인 수녀님인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택한 자리가 바로 남들이 원하지 않는 가장 ‘아랫자리’, 즉 가장 ‘끝자리’인 것입니다. 이 자리를 다른 말로 하면 ‘희생’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을 위해 택하는 자리, 그것이 희생인 것과 같습니다. 이 끝자리를 택할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고 자녀에게도 삶의 의미를 심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끝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마구간이었고, 성가정이었으며, 차디찬 십자나무의 멸시와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귀중하고 사랑받을만한 존재인지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얻게 된 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이 사라져도 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십자가, 멸시, 고통, 죽음을 내 이웃을 위한 제물로 바칠 줄 알 때 하늘나라에서 커다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제물이 되는 단계입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제물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온 것처럼, 우리 존재의 궁극적 의미는 바로 이 끝자리, 즉 십자가의 희생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 겸손
-양승국신부-
잔치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참 못 볼꼴을 보셨습니다. 초대받는 손님들이 서로 상석에 앉으려고 기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생애가 겸손과 낮춤 그 자체였던 예수님이셨기에 그런 모습을 견디기가 정말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덕행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행인 겸손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모든 덕행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덕이 바로 겸손입니다.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이 또한 겸손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영성생활을 해나가셨던 신앙의 모델들, 모든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덕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열등감에 의해,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나는 잘 못합니다.’ ‘나는 안 됩니다.’ ‘나는 모릅니다’ 라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갖출 것 다 갖췄으며, 내가 상대방보다 다방면에 우월하면서도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양의 덕이 바로 참된 겸손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욱 요구됩니다. 크신 하느님, 관대하신 하느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나였습니다. 정말이지 나는 티끌 같은 존재, 먼지 같은 존재, 한 마디로 무(無)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생명으로 나를 초대해주셨고,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봉헌생활자로 초대해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느님 앞에는 한 나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의 첫걸음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시간에 종속된 유한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필연이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느님 앞에 유한한 우리들입니다.
채무자이신 하느님 앞에 채권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죄한 하느님 앞에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심판관이신 하느님 앞에 피고인들인 우리들입니다. 순수한 존재 앞에 선 불순자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태도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지만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덕분에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맨 끝자리라도 감지덕지하면서, 늘 기뻐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는 아침마다 묵묵히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집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는 저녁 시간이 오면 낙타는 또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조용히 기다립니다.
언제나 주인 앞에 고분고분 무릎을 꿇는 낙타 모습에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매 순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주인 앞에 말없이 무릎 꿇는 모습, 매일 자신의 의무를 기꺼이 행하는 모습, 주인이 매일 얹어주는 짐을 아무 불평 없이 지고 가는 모습에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낙타는 자신이 지고 가는 짐으로 인해 의미가 있습니다. 낙타에게 짐은 무거우나 짐으로 인해 낙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고통과 십자가는 언제나 부담스러운 그 무엇이나 그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로 인해 더욱 겸손해지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진리는 생각할수록 역설적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가장 약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가장 약하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우리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그 순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가장 강해지는 것입니다.
겸손은 약자이기에, 또는 무지하기에 뒤로 물러서는 나약함이나 비굴함이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는 일입니다.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어놓은 그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는 일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밑으로 밑으로 한없이 내려만 갑니다. 계속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심연의 밑바닥 거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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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