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東文選 제106권
첩(牒)
의(議)
가. 첩(牒)
1.초주 자사 장웅 장군(楚州刺史張雄將軍)
2.고패에게 권지 강주군 주사를 전수한다[授高霸權知江州軍州事]
3.허경의 아내 유씨에게 팽성군을 봉한다[許勍妻劉氏封彭城郡君]
4.절도 판관 이관 대부를 부사에 충당하기를 청함[請節度判官李綰大夫充副使]
5.부사 이 대부에게 유후를 맡기기를 청함[請副使李大夫知留後]
6.고언휴 소부에게 염철 순관을 맡기기를 청함[請高彦休少府充鹽鐵巡官]
7.사주 우상서를 도지휘사에 충당하기를 청함[請泗州于尙書充都指揮使]
8.우사마 왕계단공에게 염전 출사 순관을 섭직함[右司馬王棨端公攝鹽錢出使巡官]
9.전 소주 녹사 참군 고현부에게 동성 현령을 섭직함[前邵州錄事參軍顧玄夫攝桐城縣令]
10.정기를 해릉 현령에 섭직하기를 청함[海陵縣令鄭杞]
11.전 선주 당도현령 왕고 섭 양자 현령(前宣州當塗縣令王翶攝楊子縣令)
12.유효양 섭 저주 청류 현령(柳孝讓攝滁州淸流縣令)
13.제갈은 지 각주무(諸葛殷知榷酒務)
14.이소망 충 봉국 순관(李昭望充奉國巡官)
15.시암 충 홍택 우당 순관 초주 영전(柴巖充洪澤雨塘巡官楚州營田)
16.허권 섭관찰아추 충 홍택순관(許權攝觀察衙推充洪澤巡官)
17.장한 지 염성 감사(臧澣知鹽城監事)
18.조사 섭 화주 자사(趙詞攝和州刺史)
19.송재웅 차충 수군 도지병마사(宋再雄差充水軍都知兵馬使)
20.허경 수 여주 자사(許勍授盧州刺史)
21.손 단 권지 서주군 주사(孫端權知舒州軍州事)
22.왕처순 충 염성진사(王處順充鹽城鎭使)
23.장안 충 여주군 전 최진사(張晏充盧州軍前催陣使)
24.안재영 관 임회도(安再榮管臨淮都)
25.여용지 겸관 산양도(呂用之兼管山陽都)
26.해치도장(獬豸都將)
27.숙 송현령 이민지 충 초토도 지 병마사(宿松縣令李敏之充招討都知兵馬使)
28.장웅 충 백사진장(張雄充白沙鎭將)
29.안재영 충 행영 도지휘사(安再榮充行營都指揮使)
30.조붕 지 행재 진주 보충 절도압아(曹鵬知行在進奏補充節度押衙)
31.주축대부 기복(朱祝大夫起復)
32.상 도호천관(上都昊天觀)
33.화주답 대 경진주 첩(和州答對境鎭州牒)
가.첩(牒)
1.초주 자사 장웅 장군(楚州刺史張雄將軍)
최치원(崔致遠)
조칙(詔勅)에 의거해서 보면, 공이 있게 되면, 반드시 상주는 것은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특수한 은전이요, 임금의 말씀을 받들어 의심없이 하였음은 등사공(鄧司空)이 한 일이다. 전건관(前件官)은 재표(材標)가 낙락하고 운품(韻稟)이 쟁쟁하다. 자사로 있을 때부터 이미 정적(政績)을 날려서, 고굉(股肱)같이 이름난 고을을 다스렸고, 임금의 이목이 될만한 높은 벼슬에 올라서, 신의가 서로 따르고, 공명이 더욱 떨치었다. 외대(外臺)에서 맡긴 일을 마음대로 하려면, 마땅히 대장의 계급에 올려야 하니, 그대는 더욱 충성스러운 계획을 격려하고 내린 명령을 잘 지켜, 유홍(劉弘)을 잘 천거한 것에 맞게 하고, 이광(李廣)처럼 봉후가 되기 어려운 한탄이 없게 하라. 일은 반드시 조서의 말씀에 의거하여 행할 것이며, 묵칙(墨勅)으로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으로 전수한다.
2.고패에게 권지 강주군 주사를 전수한다[授高霸權知江州軍州事]
최치원(崔致遠)
조서에 의거하여 통첩한다. “모든 주(州)의 자사가 만일 군공(軍功)이 있거든, 경이 요량하여 작상(爵賞)을 주고, 만일 범죄가 있거든 경이 마땅히 벌을 기록하여 별도로 지주(知州)를 보내고 계장을 갖추어서 아뢰라.” 하였으니, 대원수(大元帥)의 권세는 천자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옛 제후같은 중임을 맡기려면, 마땅히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여 맡겨야 할 것이다. 먼저의 관직을 근거하면 고패라는 사람은 그 기상이 교룡(蛟龍)이 못 가운데서 뛰고, 범이 언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의(義)로써 군사를 부리고, 충성으로, 절개를 지켜 칼날의 위태로움도 사양하지 않고, 여러번 황건적(黃巾賊)의 무리를 꺾었다. 어떤 때는 약한 군사로 용감히 싸웠고, 어떤 때는 둥근 진을 만들어 기이한 계책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움직이면 반드시 이루었고, 가면 반드시 이롭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구강(九江)의 수령(守令)이 없으므로 온 고을이 수령을 기다리니,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능력 있는 관리들에 의지해야 할 것이므로, 그대에게 권자 강주군 주사를 제수하니, 그대가 강한 이를 막고 약한 이를 어루만져서 폐단을 없애고, 가혹한 것을 덜어 버려야 한다. 공연히 유량(庾亮)같이 누(樓)에 올라서 달 구경만 하지 말고 원굉(袁宏)같이 부채를 품고 사회의 풍속을 순화하게 한 것같이 해야 한다. 조금 정성(政聲)을 펴서 은명(恩命)을 입도록 하고, 마땅히 조서의 묵칙에 의거해서 강주군 주사를 제수하고, 인하여 사유를 갖추어 임금께 아뢰고, 아울러 통첩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3.허경의 아내 유씨에게 팽성군을 봉한다[許勍妻劉氏封彭城郡君]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옛날에는 벼슬이 대부에 이르게 되면, 그 아내는 명부(命婦)라고 한다. 그리하여 남편을 따라서 귀인이 되고,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게 한다. 하물며 고요할 때는 능히 내언(內言)을 삼가고, 움직일 때는 능히 외역(外役)에 종사하여, 몸에 갑주를 두르고, 뜻은 눈이나 서리를 능가하여, 이미 공명이 보통 무리와 다름에야 어찌 관직을 봉하고 제수함을 범례에 구애되겠는가.
저주 자사(滁州刺史) 허경의 아내 유씨의 뛰어난 재주는 하늘이 주었고, 그 정절(貞節)은 날로 드러났다. 평소에 그는 후위장군(後魏將軍)이 낙양(洛陽)에서 실수한 것을 업신여기고, 성조(聖朝 당나라)의 공주가 사죽(司竹) 땅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을 앙모하였다. 전날에 임금께서 그의 남편에게 명하여 반란병을 토벌하라고 할 때에, 그도 문득 단충(丹衷)을 가지고 굳이 함께 치러 가기를 원하여서 손으로 훈련된 군사를 몰아 멀리 성루(城壘)를 공격하고, 몸소 여자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오래 전진(戰塵)을 무릅쓰고 싸웠으니, 사덕(四德)이 남음이 있고, 육도(六韜)를 시험하였으니, 어찌 가정에서만 빛이 났을 뿐이리오. 실로 나라의 어진 여사이다.
남편이 이미 고관이 되었으니, 아내도 의당 석교(石窌)의 영화를 누려야 할 것이다. 어찌 송표준영(松標埈影 남편)에게는 일찍 구름을 능가할 높은 지위에 앉게 하였는데, 나포유자(蘿抱柔姿)한 아내는 낮게 버려두리요. 우선 성대한 상을 베풀어 전공(前功)을 보답해야 할 것이다. 군중의 사작책훈(舍爵策勳)은 사람들에게 그 하고 싶은 바를 베풀어주는 것이오. 천상의 금전전축(錦牋鈿軸 임금의 조서)은 봉황이 물고 오기를 기다린다. 마땅히 묵칙(墨勅)을 행한 조서에 의거하여 팽성군군(彭城郡君)을 봉하고, 따라서 표문(表文)을 하여 이런 사유를 임금께 아뢰고 아울러 통첩하여 알게 한다.
4.절도 판관 이관 대부를 부사에 충당하기를 청함[請節度判官李綰大夫充副使]
최치원(崔致遠)
대부에게 통첩한다. 지초같이 특수한 정기를 타고났고, 계수나무같이 곧은 절개를 품었다. 우뚝한 재략은 매양 화(和)를 중하게 여기고, 늠연(凜然)히 곧은 기운은 마침내 악한 것을 원수같이 미워하니, 진실로 현량하여 실로 민폐를 구제할 것을 아노라. 앞서 두 번이나 한 고을의 정사를 맡았을 때에 일찍이 세 가지 특이한 이름을 나타내어 이미 현화(縣花)를 피게 하였으니, 의당 군죽(郡竹)을 주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여 상달의 길이 막혀 한산한 지위를 좇아 거야(鉅野)라는 곳에서 낮게 깃들여 있었고, 검천(劍川)에 원역(遠役)을 하여도 그 곳 풍속을 잘 순화시키고, 풍부하게 호군(犒軍)한 결과, 들어와서는 임금께 아뢰고, 나가서는 금인(金印)을 차게 되었다. 그리고 모(某)가 잠시 강륙(江陸)에 있다가, 그뒤에는 해문(海門)을 지키며, 길이 이절(移節)하기가 어려우므로, 모두 이리저리 묘한 꾀를 빌렸으며, 지금은 회전(淮甸)에 온 지가 4년이 지났다.
판관 이 대부는 덕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본래의 책임으로 삼고, 은혜로 능히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일은 실상 번거로웠으되, 공무를 수행하는 데는 게으르지 않았다. 붓이 곧기 때문에 아전이 많이들 두려워하였고, 형벌은 가벼웠기 때문에 옥에는 원성이 끊어졌다. 군자가 진심(盡心)하는 것을 보니, 실로 고인의 용심(用心)과 같았다. 12년 동안 그 공익이 날로 꽃다웠고, 천만 리를 추종하며 길이 마음에 흡족하게 여겼다. 비록 서탑(徐榻)을 가지고 특별한 대접을 하였으나, 연대(燕臺)가 높지 않음을 두려워하며, 지금 소질종(小秩宗)을 빌려 대사헌을 겸임하니, 직위를 옮기지 아니하였는데, 벼슬이 어찌 영화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부거(副車 판관)에 굴적(屈跡)하여서 위엄을 수막(戍幕)에 떨치기 바란다. 진총(陳寵)이 이 조서의 조목을 실수 없이 행한 것은 일찍이 공조(功曹)에 의뢰함이었고, 여건(呂虔)이 고을 풍속을 길이 편안하게 한 것은, 역시 별가(別駕)를 의뢰한 것이었다. 만일 오늘날 대부를 말한다면, 저들 진총과 여건은 이 사람 밑에 있게 될 것이다. 일은 모름지기 절도부사(節度副使)를 대행함을 청하고 표문으로 써서 아뢴다.
5.부사 이 대부에게 유후를 맡기기를 청함[請副使李大夫知留後]
최치원(崔致遠)
대부에게 통첩한다. 이 대부는 기상이 칼이 하늘 밖에 비낀 것과 같고, 구슬이 물 가운데 잠긴 것과 같다. 그 웅릉(雄稜)한 것은 위로 뜬구름을 결렬시킬 만하고, 온윤한 것은 곁에 마른 풀이 없을 정도이거늘, 깊숙이 이기(利器)를 품고 오래 먼 변방에 보좌하여, 매양 부드러운 계책을 베풀어서 어리석은 백성의 풍속을 순화시켰으니, 5진(鎭)이 서로 대부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 일기(一紀 12년)나 되었다. 일찍이 옥사를 맡아 형을 심문할 때에는, 오직 곧은 도를 따랐고, 비록 휴가중이라도 공문(公門)을 떠나지 않았다.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감히 말하리오. 실상 사람을 성취하는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미 3년 간 도둑을 치지 않아 도둑이 도리어 마음대로 날뛰고, 10도(道)에 징병을 하니 군사가 번갈아 동요되니, 만약 전력하여 치지 않으면, 적을 타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드디어 양용(養勇)한 군사를 몰고 간악한 적굴을 깨뜨리기를 바라노라. 그러니 졸정(拙政)을 대행하도록 장재(長才)에게 위탁을 해야 할 것이다. 대부는 8군 백성의 피곤함을 위로하고, 사방 이웃에 뺏기고 무너진 것을 살펴서, 원굉(袁宏)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금 영가(詠歌)를 알게 하고, 도간(陶侃)의 관리로 하여금 일없이 다만 놀게 하지를 말게 해야 할 것이다. 수년을 아무 일 없이 쉽게 다스리다가 오늘날 출행하게 되니 보조하는 자로 하여금 다행히 시종여일한 은혜를 보존하게 하라. 지관찰 유후(知觀察留後)를 청하는 것이다.
6.고언휴 소부에게 염철 순관을 맡기기를 청함[請高彦休少府充鹽鐵巡官]
최치원(崔致遠)
소부에게 통첩한다. 소부의 학문은 기린이 뿔을 이루었고, 사(詞)는 봉황이 털을 전할 만하였다. 우연히 계객(桂客)의 놀이를 경시하고, 잠시 매선(梅仙)의 소임을 즐거워한다. 그러므로 학(鶴)이 울어 달이 찬 들에[寒野] 가득하니, 만리에 학의 맑은 소리요, 붕새가 나니, 구름이 긴 하늘에 흩어져서 구소(九霄)에 높은 자취이다. 고병(高騈)은 다행히 종당(宗黨)인 관계로 아름다운 상관의 빛을 보고 감히 만류할 생각이 나서 아뢰니, 이 사람을 얽매지[絆驥] 말라. 말하지 말고 조금 종횡술(縱橫術)을 빌려주면, 마침내 정사를 잘 운용해 나갈 것이다. 비록 연(燕)나라의 금대(金臺)에는 비길 수 없다 하더라도, 사씨(謝氏) 집의 옥수(玉樹)에는 거의 가까울 것이다. 동성(同姓)이 반드시 이성(異姓)보다는 친하니, 지금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옛 사람보다 못하겠는가. 청컨대, 염철 순관을 섭직하고 표문을 지어 아뢴다.
7.사주 우상서를 도지휘사에 충당하기를 청함[請泗州于尙書充都指揮使]
최치원(崔致遠)
통첩한다. 상서(尙書)는 유경(儒經)을 통달하였고, 한편으로 병서를 널리 탐구하였다. 앞길이 만리같이 먼 희망을 가지고 3년동안 먼 고을의 원이 되었다. 기(旗)에는 나는 새 깃이 그려져 있었고, 수레에는 사슴 가죽이 둘러져 있었다. 피곤한 백성들을 인정(仁政)으로 위로하고, 도둑을 지모(智謀)로 막았으며 능히 합포(合浦)의 보물을 잘 돌려 왔고, 또 일찍이 곡제(曲堤)의 민중을 잘 흩어버렸다.
지금 서융(徐戎)들의 남은 도당이 함부로 방자하게 침노하는 이때에 초나라 군사의 날카로운 병기로 이를 소탕하고자 결심하여 결국 신포서(申包胥)의 울음과 같이 구원을 청하지도 않고, 또 진비(晉鄙)의 군사를 억지로 빼앗는 짓도 하지 않으며, 다만 응견(鷹犬)같은 날랜 군사로 공을 드러내고, 웅비(熊羆)같은 장수로 항오(行伍)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응당 이 사람의 지휘하는 명령을 기다려야, 치고 물고 뜯는 능력을 펼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권위를 이 사람에게 맡겨서 통섭(統攝)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군사들로 하여금 이 사람의 말머리를 보고 모두 진퇴의 마땅한 것을 알게 하고, 길이 적을 멸망시켜 옳고 그른 규율을 살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충당하니, 그 응원할 모든 도(都)와 영회(寧淮)ㆍ우이(盱眙)ㆍ회음(淮陰) 등 3진의 장사들도 다 지휘를 받게 한다.
8.우사마 왕계단공에게 염전 출사 순관을 섭직함[右司馬王棨端公攝鹽錢出使巡官]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권관(權筦)을 설치한 것은, 본래 군사의 일에 이바지하고 군수(軍須)를 넉넉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기관은 용병할 때를 당해서 실로 수송을 고르게 하는 편리를 적은 것이니, 능히 이런 중책을 이루자면, 진실로 훌륭한 인재를 뽑아야 할 것이다. 단공(端公)은 사람의 운치가 유산(維山)을 떨치고 경사(慶事)는 회수(淮水)에 흘렀다. 고요히 오상(五常)의 역(域)에 처하여 공부는 육의(六義)의 문을 부지런히 찾았다. 매양 실정대로 해나간 것을 보고 수절(守節)을 잘한 것을 알았고, 이어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기니, 모두 능한 관리라 이름을 전하였다. 이미 어려운 일을 역력히 시험하였으니, 천하의 일에도 능함이 많다고 할 것이다.
지금 와서 국가의 용도를 도우며 한편으로 군량을 마련했으니 이루어진 성과가 한참 성하여 상고하기가 쉽지 않다. 벼슬이 전오(典午 사마(司馬)를 말함)에 있으니, 그 일은 이미 넉넉히 잘하고 뜻이 공가(公家)에 있으니, 천하고 소소한 일도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막직(幕職)에 두고 보면 계책을 잘 써나갈 것이니, 비록 왕희(王晞)의 마음은 저 외방(外方 세상 밖)에 있지마는, 배해(裵楷)가 잠깐의 힘을 들여 이 속중(俗中)에 수고한들 어찌 방해될 것이리오. 청컨대 염철출사순관(鹽鐵出使巡官)을 겸직하여 거기의 전물(錢物)을 감담할 것이다.
9.전 소주 녹사 참군 고현부에게 동성 현령을 섭직함[前邵州錄事參軍顧玄夫攝桐城縣令]
최치원(崔致遠)
전건 관(前件官)에 통첩한다. 좋은 물은[善水] 막힘이 없이 흐르고, 장엄한 산은[謙山] 스스로 높은 것과 같으며, 시서(詩書)에 만족[腹飽]하고, 봉인(鋒刃)을 머금었다. 오직 경도(耕道)에 부지런하여, 그 이익이 두텁고, 본래 이름을 구하는 데 게을러서 그 정이 한가하였다. 벼슬을 구하러 다니는 데 소홀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낮은 지위에 깃들어 있었다.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있으니, 어찌 남을 사랑함을 아끼리오. 고을 주부(主簿)로서 해야 할 요령을 전부터 유의하고 있었으니, 고을 대부의 제금(制禁)에는 지금 공을 나타낼 만하다. 길이 근로를 꺼리지 아니하니, 결원된 현령(縣令)의 자리를 능히 이을 만하다. 조금 시기가 위태할까 염려되니 삼가 지킬 것이요, 풍속 퇴폐한 것을 그가 제거하기 어려우리라 말하지 말라. 그의 집안에는 뛰어난 시재가 많으니 모두가 유림(儒林)의 경사라고 추장하고, 백 리 고을에 상뢰(象雷)의 정치를 바라니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이 떨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마땅히 서주 동성 현령(舒州桐城縣令)을 섭직하기를 청한다.
10.정기를 해릉 현령에 섭직하기를 청함[海陵縣令鄭杞]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는 관리로서 어려운 일이니 앞으로 3년을 기다려서 성과가 있게 하려면, 진실로 오늘 하루에 그 토대를 닦아 두어야 하고, 길게 위임하려면 반드시 현능(賢能)한 이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전건(前件)의 정기는 시에 조예가 깊고 행실이 민첩해서, 유여(劉輿)같이 지조 없는 짓은 하지 않고, 오직 사비(謝朏)같이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여러번 백 리(百里) 고을을 대행하고 있을 때, 세 가지 착한 일이 드러났다. 저 동오(東吳)의 근경을 보니, 실로 남연(南兗)의 중심이로다. 옛날 그 고을 현령의 자리를 맡았을 때에 부지런히 정사하여 그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 마음속에 늘 그의 생각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옛 영윤(令尹)의 정사를 들어서, 참된 군자의 정성을 닦을 수가 있다. 정형(政刑)을 고르게 조정하여 두루 백성을 위로할 것이니, 비유하자면 기마(驥馬)의 걸음은 결국 좋은 길을 얻어야 하고, 닭을 잡는 데도 잘드는 칼이 있어야 한다. 거기에 가서 공경하여 모든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해릉 현령을 섭직하기를 청한다.
11.전 선주 당도현령 왕고 섭 양자 현령(前宣州當塗縣令王翶攝楊子縣令)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원이 되어 백성을 사랑하는 기술은 닭의 무리를 모는 것과 같으니, 느슨히 하면 흩어지고, 급하게 하면 어지러워진다.” 하였으니, 이 말이 비록 사소한 말이나, 그 이치는 딱 들어맞는 것이다.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요,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양자(楊子)는 수성(隋城)에 가까운 고을이요, 초안(楚岸)에 나루가 통해 있어 곡식은 황충(蝗虫)이 제거되기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어류들은 잘 길러주기를 늘 생각하고 있다. 전건의 이 왕고라는 사람은 정승 자손으로 경사가 겹친 집안이요, 유가(儒家)에서 어질다고 추대하는 사람이다. 일찍이 효렴과(孝廉科)에 올라서 구계(句稽)의 임무를 역임하였으며, 비록 낮은 자리에 있었으나 착한 이름은 추락시키지 않았다. 다행히 연수(連帥 절도사)에게 알려져 두 번이나 현령을 대행하고 있었다. 꿩을 누가 차마 잡으리오, 까치도 지저귐을 스스로 멈추었으며, 도잠(陶潛)이 허리를 잠깐 굽히니, 공분(孔奮)의 은혜를 아래 백성들에게 입히게 되었다.
지금 양자(楊子)를 두고 말하면 백리[一同]의 번잡한 고을이요, 사방의 요충지로 항상 사신들이 내왕하니, 실상 그 원들이[宰僚] 부지런하고 재주가 있어야 한다. 책임 완수에 대한 부탁이 무거운데다 더욱이 일이 많은 때를 만났다. 지금 이 고을 영(令)이 병이 들어서 휴직하고 있는 지가 한 달이 넘었으니, 만약 전례를 상고해 본다면 교체하는 것이 역시 합당하니, 진실로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여 궐정(闕政)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이다. 위로는 두려운 마음이 있고, 아래로는 조심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의당 혼자 수고하는 것을 꺼리지 않을 것이요, 경험에서 오는 성사가 있을 것이다. 정말 ‘1년 내내 술에만 취하게 되면, 반드시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할 것이요, 만약 저녁 내내 청담(淸談)만 하게 된다면, 역시 때를 잘 보아 다스리는 수완을 잃을 것이다.’ 이상의 두 말에 힘을 써서 삼가 스스로 세 번을 생각할 것이며, 마땅히 양자 현령을 섭직하라.
12.유효양 섭 저주 청류 현령(柳孝讓攝滁州淸流縣令)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지금 세상에서 수령을 장려할 때에 하양(河陽)의 꽃과 팽택(彭澤)의 버들같은 이를 아름다운 선비라고 하나, 지극한 이치로 말한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니, 오직 모(某)가 있다고 하겠다. 모는 백성을 가엾게 여기고, 몸을 깨끗이 하여 벼슬한다. 청결한 지조를 가져, 멀리 화류(花柳)의 이름을 덮어버릴 것이니, 실상 그러한 재주가 어려워서 나의 뜻에 맞는 것이다.
전건의 유효양은 전금(殿禽 유하혜(柳下惠)를 말함)의 자손으로 자유(子游)와 같은 정치 능력이 있다. 일찍이 제음(濟陰)의 원이 되어서, 속읍(屬邑)을 능히 편하게 하였고, 오래 강요(江徼)에서 남에게 의지하여 있으면서 고요히 곤궁한 것을 견디었다. 수년간 심히 가난하게 지냈으나 곧게 도를 지켜 일찍이 절개를 고치지 않았다. 지금 시험을 거쳐서 그에게 결원된 자리를 대행하게 하여, 까치가 지저귀는 기롱[喧鵲之譏]이 없게 하고, 닭을 잘 몰아내는 기술[驅鷄之術]을 이루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마땅히 저주 청류 현령을 섭직하라.
13.제갈은 지 각주무(諸葛殷知榷酒務)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술을 전매하는 권리는 한(漢)나라 때 생겼고, 회계(會計)의 이익은 주(周)나라 글에 나타나 있다. 이미 결원이 생긴 고을에는 마땅히 예비하여야 할 것이니, 그 자리에 사람을 새로 충당해야 한다. 그리하여 앞으로 무거운 책무를 이루려면, 진실로 훌륭한 인재를 뽑아야 하는 것이다. 전건의 제갈은 숨은 표범이 문채(文采)를 가지고, 엎드린 용이 상서를 지닌 것과 같아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수후(隋侯)의 구슬은 티가 없는 것과 같으며, 공무에 힘쓰는 것은 포정(疱丁)의 칼이 여유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전에는 옛날 공근(孔僅)이 맡았던 그런 중책을 맡아서 경험을 많이 쌓았고, 이제는 옛날 노광(魯匡)의 양책(良策)을 좇고 있으니, 어찌 자리를 전담해서 하는 것을 꺼리리오. 정역(鄭驛)처럼 낮은 벼슬에 깃들이고 있으면서도 이를 사양하지 않고, 탁로(卓爐)가 일찍이 여유 있는 이익을 이룬 것처럼 해나갈 것이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녹으로 반드시 많은 군사를 넉넉히 잘 먹일 것이다. 백성이 아무 원성이 없고 삼군(三軍)이 취(醉)하도록 기대하니 마땅히 관역 순관(館驛巡官)을 섭직하고, 각 주무를 전담하게 하라.
14.이소망 충 봉국 순관(李昭望充奉國巡官)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옛날에 공자가 백어(伯魚)에게 학문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그 선조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고, 그 족성(族姓)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는데, 크게 성망이 뒷세상에 흐르는 것은 어찌 학문의 이룬 바가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선조와 족성은 오직 세속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길 뿐만 아니라, 성인 역시 중하게 여긴 것이다. 전건의 이소망은 그 조상이 진신(搢紳) 중의 상품이요, 중종조(中宗朝)에 벼슬하여 막 조상이 벼슬하던 비서성직[芸香閣]을 계승하려 하다가, 갑자기 타향에 유리(流離)되었다. 멀리 가서 위험한 처지는 면하였으나, 그래도 천리마가 말굽을 묶인 것처럼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지금 한마디로 말해서, 이 사람이 어질다고 하겠으며, 또 3대를 통해 훌륭한 분을 셀 수 있고 또 혁혁한 그 외가(外家)의 관작은 중한 이름을 떨쳤다. 그는 회요(淮徼)에 표류되어 있다가 돌아와 조그마한 직을 구하니, 드디어 향응해 주어 재능을 시험하게 되었다. 이미 각기의 직무를 알게 되니 오직 그 덕을 닦는 데에 있다. 마땅히 초주 영전 봉국 순관(楚州營田奉國巡官)에 보충하라.
15.시암 충 홍택 우당 순관 초주 영전(柴巖充洪澤雨塘巡官楚州營田)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삼농이 풍년을 맡게 되는 것은 한번 관개(灌漑)하는 공에 있는 것이다. 진실로 빗물이 내리는 내를 잘 맡고 있지 않으면, 어찌 구름같이 많은 곡식을 얻을 수 있으리오. 이 관개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정말 전담해서 일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전건의 시암은 그 의지를 변하지 않고, 공무의 재주가 있어서 맡길 만한 인물이다. 군사 일을 맡아서는 참모를 잘하였고, 언제나 조심하여 관리의 재능을 더욱 나타냈다. 지금 볼 때 홍택(洪澤) 고을은 서울에 가까운 고을이요, 우당(雨塘)이란 좋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작은 것을 징험해 보면 큰 것을 알 수 있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부터 시작ㅎ는 법이다. 그대는 고요하고 맑은 마음으로 잠잠히 수맥(水脈)을 엿볼 것이다. 공승(龔勝)과 황패(黃覇)같은 명관들의 명령을 잘 받들어서 멀리 옛날 전조(田曹)들의 일을 이을 것이요, 정거(鄭渠) 백거(白渠)같이 지리(地利)를 훼손시키는 부끄러움은 없게 할 것이다. 높이 상벌을 걸어놓고 잘하고 못하는 것을 시험해 볼 일이다. 마땅히 이 사람을 초주 영전원 홍택 우당 전지관(楚州營田院洪澤雨塘專知官)에 충당하라.
16.허권 섭관찰아추 충 홍택순관(許權攝觀察衙推充洪澤巡官)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풍속을 순화시키는 데 먼저 할 것은 권농(勸農)이다. 그러므로 옛날에 정혼(鄭渾)은 사냥하는 기구를 빼앗았으며, 온교(溫嶠)는 전조(田曹 밭 관리자)를 두라고 청하였다. 위로는 천시(天時)에 순하고 아래로는 일력(日力)에 징험하여 농부의 업을 독려하려면, 반드시 유능한 관리의 재주에 의지해야 한다. 전건의 허권은 경험이 이미 많고, 충성스러우며 부지런함은 가히 장려할 만하다. 옛 영윤(令尹)처럼 그 공적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기를 이루었고, 독우(督郵)처럼 그 정사는 능히 요령을 잘 잡았다. 그가 전에 결원된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모두 잘 다스린다는 칭찬이 있었다.
지금 산양(山陽)의 비옥한 땅과 회반(淮畔)의 안골을 두고 말한다면, 땅은 삼순(三巡)을 점령하였고, 밭은 만경(萬頃)이 넘는다. 그런데 내를 터놓아 전답에 물은 부족함이 없으나 많은 곡식이 생산되지 않는 것은 대개 백성들이 김매기에 부지런하지 못해서, 비록 풍년을 당한다 해도 곡식의 수익을 모두 잃게 되어 그런 것이다. 공사를 받드는 것은 백성들에게 농사에 힘쓰도록 권고하는 것임을 알았다. 만약 백성들로 하여금 전답에 김을 매어 잘 가꾸게 한다면, 반드시 공이 있을 것이므로 농시(農時)를 맡기고 사직(使職)을 주니, 길이 정사를 좇으려면 반드시 이 사람에게 그 권도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토지가 비옥해져셔, 구차하게 추호의 사욕이라도 따르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하도록 힘써서 널리 민중의 마음을 깨우쳐야 한다. 마땅히 관찰 아추를 섭직하고 홍택 순관에 충당하며, 겸해서 도순감(都巡勘)으로 봉국(奉國), 사양(謝陽) 등 순무(巡務)를 지휘하도록 한다.
17.장한 지 염성 감사(臧澣知鹽城監事)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만약 관리가 정직한 도(道)가 없다면, 이익이 나가는 문이 많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고을[牢盆]에 경험이 있고, 혹 가정을 윤택하게[潤屋]하는 데에 바탕을 이루어야 곧 매우 번잡하고 일이 많은 고을에 나아가도, 그 결렴(潔廉)을 지켜서, 구슬같이 맑은 마음은 지고(脂膏)에 이끌리지 아니하고, 칼날같이 예리한 지혜는 능히 관비(髖髀 뼈가 얽맺힌 곳)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일찍이 듣기는 하였으나, 이에 해당하는 사람을 보기는 드물었다.
전건의 장한은 아담한 마음을 가졌고, 맑고 부지런히 일을 처리하였다. 일찍이 유권(由拳)의 권매[榷課]를 잡았을 때에도, 오직 지족(止足)할 줄 아는 규모를 지켰다. 지금 휴직한 지가 멀지 아니하니, 공로를 가히 알 수 있다. 다시 경험을 힘입으면 반드시 어려운 일을 해낼 것이다. 그리하여 소금 나는 땅 가까운 고을에서 재주를 펴고, 소금기 있는[作鹹] 곳에서도 깨끗한 절개를 지킬 것이니, 그는 공중의 눈을 보고 사랑(謝娘)의 시를 읊는 일이 없을 것이요, 말하자면 바닷물을 끓이라는 장융(張融)의 부(賦)를 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마땅히 권조사순관(權糶使巡官)에 보충하고 염성 감사를 맡기도록 한다.
18.조사 섭 화주 자사(趙詞攝和州刺史)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옛날에 장서(張緖)의 아들 충(充)이 젊었을 때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오른 팔에 매[鷹]를 얹고, 왼손에 개를 이끌고 사냥하러 나가니 장서가 보고 말하기를, “한 몸으로 두 일을 하니, 괴롭지 않겠나.” 하였다. 충이 꿇어앉아 답하기를, “장부가 30세에 자립을 합니다. 금년에 제 나이 29세인데, 내년에 가서는 사냥을 그만두고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장서가 다시 말하기를, “허물이 있으면, 능히 고치는 것은 안씨자(顔氏子)이다.” 하였다. 그뒤에 자기의 행실을 고치고 몸을 닦아서 마침내 현달한 사람이 되었으니, 옛날에 호준(豪儁)한 사람들을 지금 가히 모범할 만하다.
전건(前件)의 조사는 미로(迷路)에서 벗어나 옳은 길에 몸을 던져서 길이 의혹된 뜻을 버렸으니, 정말 그 회개하는 표정은 장려할 만하다. 부모에게 하는 효도로써 임금을 섬겼으니, 이것으로 벼슬하게 되면 공무를 잘 다스릴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상좌(上佐)에 참여시켜 충성을 시험할 것이다. 더욱이 부모를 봉양할 때 안거지락(安居之樂)을 방종하였다. 뒤에 잘한 것으로 그 전의 잘못한 것을 보충한다면 구족(九族)의 근심을 없애고, 일조(一朝)의 분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화주 자사를 섭직하라.
19.송재웅 차충 수군 도지병마사(宋再雄差充水軍都知兵馬使)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배로써 이익을 베풀며, 병기로써 위엄을 떨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움이 되니, 지금은 이것이 시급한 문제이다. 정말 훌륭한 도략(圖略)이 있는 사람에게 위탁해야 비로소 방어의 공을 이룰 것이다. 전건의 송재웅은 검술을 배워 이루었고, 활쏘기도 스스로 잘한다고 한다. 돼지 온 다리를 한 입에 물어삼키는 준걸한 용맹이요, 황소를 끌고 용기를 다툰다. 군문의 높은 자리에 앉아 오직 옳은 길만을 따랐으며, 오래 강수자리[江戍]에 있어 수군에 능숙하였다. 지금 사상(泗上)에 재앙이 일고, 회중(淮中)에 도둑이 모여서 이미 관풍(觀風)의 경지에까지 침범해 와서, 영월(暎月)의 청류를 어둡게 하니, 그대는 웅병을 장악하여 멀리 신비한 계책을 펴서 육지에선 사시(蛇豕)같은 적들을 죽이고, 물에선 교리(蛟螭)같은 적들을 꺾어 없애 빨리 도둑의 진을 다 평정하고, 성난 파도가 길이 일지 않게 하되, 관물(官物)로써 관적(官賊)을 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마는, 범의 굴에 들어가서 범의 새끼를 잡아오는 것은 그대가 마땅히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마땅히 수군 도지병마사에 충당해서 모든 병마를 거느려 회내(淮內)의 도둑떼들을 토벌하게 하라.
20.허경 수 여주 자사(許勍授盧州刺史)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어진 태수란 옛날부터 적임자를 얻기 힘들었다. 우리 관할에 속해 있는 고을에서 이런 이를 시험해 본 바, 부지런히 닦고 조용히 다스리는 사람을 지금 얻게 되었다. 전건의 허경은 스스로 수령 6조(條)를 들어 정치한 지가 벌써 4년이 지났다. 고을에는 도둑이 없어 개짓는 소리가 없고, 경내에는 황충도 날지 아니하여, 밖으로 마을이 편안하고, 안으로 집안이 엄숙하고 화목하다. 정차 잘한다는 명성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구가되며, 인자하다는 칭송은 날개가 없어도 사방으로 날아 퍼졌다. 그리하여 멀리 임금의 귀에까지 들려서 특수한 총애를 입어 아름다운 벼슬 이름이 용검(龍劍)에 쓰이고, 웅대한 위엄은 더욱더 깃발에 떨치었다. 그는 이미 저수(滁水)의 재앙을 제거하고, 길이 여강(盧江)의 복을 이루었다. 나라의 근심을 나누어서 많은 폐단을 구제하여 성주(聖主)의 마음에 들게 하였으니, 홍패(紅旆)와 벽당(碧幢)이 어찌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지겠는가. 마땅히 조서에 의거하여 여주 자사를 제수하노라.
21.손 단 권지 서주군 주사(孫端權知舒州軍州事)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옛날 이필(李弼)의 말에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마땅히 칼날을 밟아서 공명을 취해야 할 것인데, 어찌 녹록하게 품계에 따라 벼슬을 구하리오.” 하였다. 이것은 곧 웅장하게 하여 큰 뜻을 쌓아 몸의 성공을 도모한 것이다. 갑자기 선비 옷을 벗고 무사가 되어 나갔으니 선철(先哲)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건(前件)의 손단은 가문으로는 흥공(興公)을 이었고, 병술로는 손무자(孫武子)를 전해 받아, 능히 준걸한 기운을 떨치고, 오래 웅대한 군사를 조련시켰다. 항상 용맹스러운 무리를 안집(安集)하니, 과연 순순(循循)한 교유(敎誘)에도 잘 나아갔다. 지금 와서는 군정(郡政)을 맡겨 공무의 재재를 시험받게 하니, 표변(豹變)할 만한 좋은 때를 만나 용서(龍舒)의 땅을 잘 지켰다. 고을을 잘 다스려 3년 만에 이룸을 성취하여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백성들에게 근심을 없도록 힘썼다. 그리하여 즉시 임금의 상(賞)을 맞이하였고 다시 영화로운 벼슬로 높게 한다. 마땅히 그에게 서주군 주사를 권지(權知)하도록 한다.
22.왕처순 충 염성진사(王處順充鹽城鎭使)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큰 번진(藩鎭)은 그 제도는 안에는 정예한 군사로 둔(屯)을 치고, 밖에는 여러 위수병을 벌여 놓는데, 내부[腹心]의 근심을 막으려면, 진실로 용맹한 무장을 얻어야 할 것이다. 전건의 왕처순은 깊이 장한 꾀를 쌓아두었고, 뛰어난 용기를 가졌다. 강유(姜維)가 만약 있더라도 어린아이로 취급할 수 없고, 초도(焦度)와 서로 만났으면, 응당 건장한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그는 매양 보은(報恩)의 절개를 펴서, 여러번 반도(叛徒)를 친 공을 이루었다. 저 염성(鹽城)을 보니, 해안에 있어서 정말 그 한 고을이 다스려지지 못하면 실로 사방의 걱정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처순을 불러서 간악한 적을 막는 책임을 지게 하노니, 그대는 용부(勇夫)의 무거운 태도를 본받아 위태로운 풍속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봉강(封壃)을 견고히 하기 위해서 만기(滿期)를 생각하지 말 것이요, 오직 도적을 만나면 여지없이 격파하는 데 힘을 다할 것이다. 마땅히 그를 염성진사에 충당한다.
23.장안 충 여주군 전 최진사(張晏充盧州軍前催陣使)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군사가 이기는 것은 인화(人和)에 있고, 병술의 귀한 것은 신속함에 있다. 만약 그 좋은 진(陣)을 늦추게 허락하면, 정말 저 예리한 칼날을 좌절시킬 것이다. 나라에서 쓰게 되면, 곧 행할 것이니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건의 장안은 뜻은 삼략(三略)을 전할 만하고, 이름은 백성의 울음을 그치게 할 만하다. 복잡하게 얽힌 어려운 경우를 만나면, 종횡술(縱橫術)을 펴려고 원하였다. 지금은 서(舒)의 고을이 초(楚)나라에 반(叛)했고, 위(衛)나라가 형(邢)나라를 치는 형세이니, 비처럼 군사를 일으켰는데도 구름같은 진(陣)이 아직 멸소되지 않았기에, 드디어 고기떼같은 용맹스러운 세력으로 전진을 소탕하게 되면, 개미같이 모인 완악한 무리가 어찌 그 굴혈(窟穴)을 편하게 하고 있겠는가. 그대가 말채찍으로 군대를 몰고 병서[豹篇]로써 군사를 훈련시킨다면 일은 오직 한 깃발에 위탁하여 공은 반드시 백승(百勝)에 이를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군상(軍賞)을 받을 것이다. 첩서(捷書)가 이르기를 기다린다. 그를 여주군 전 최진사(盧州軍前催陣使)에 충당하노라.
24.안재영 관 임회도(安再榮管臨淮都)
최치원(崔致遠)
처분(處分)을 받들어 통첩한다. 서위(西魏)의 왕비(王羆)가 군중을 거느리고 도적을 막을 때에, 흰 몽둥이를 들고 크게 고함치기를, “큰 곰[光羆]이 길 가운데 누웠으니, 오소리 새끼가 어찌 감히 지나갈 수 있겠냐.” 하니 적이 그 위용을 보고 과연 스스로 놀라 달아났다. 이것을 보니 맹장의 이름이 반도들의 혼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겠다. 전건(前件)의 안재영은 육도삼략(六韜三略)을 숙련하고 기모(機謀)를 많이 써서, 적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군중 속에서 헤치고 나와 홀로 잘 싸웠으니, 실로 신출귀몰이라고 하겠다. 어찌 좌선우추(左旋右抽 장군이 수레를 타고서 왼쪽에 있는 호위는 수레를 돌리고 오른쪽 호위는 칼을 뽑아 찌르는 현상)만으로만 현혹시켰다고 하겠는가. 지금 와서 이 사람은 무력은 비록 쇠하였다고 하더라도, 장한 마음은 오히려 더욱 격렬하다. 일을 당하면, 오히려 억지로라도 밥을 먹는 것이, 싸움터에 나아가서 어찌 공밥을 먹으려 하겠는가. 준동(蠢動)하는 저 완악한 흉적들이 요란스럽게 침범해 오니, 비록 뭇 군사들을 징발해서 쳐도 기공(奇功)을 세우지 못하였다. 저 임회(臨淮)를 보니, 요지(要地)에 처해 있으므로 삼령(三令)으로 훈련을 시키고, 일호(一呼)로써 격려하여서 적의 힘이 다 되고 우리 힘이 왕성할 때를 잘 살펴 선난후획(先難後獲)으로 성취해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늙은 천리마가 마굿간에 엎드려 있는 슬픔을 면하게 하여, 노둔(駑鈍)한 말로 앞질러 가는 일이 없도록 하고, 가을 매[鷹]가 팔찌에 이미 내려왔으니, 요사한 여우가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마땅히 그에게 임회도를 거느리게 하라.
25.여용지 겸관 산양도(呂用之兼管山陽都)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중니(仲尼 공자)의 말에, “마음이 너그러우면 무리를 얻고, 믿음성이 있으면 사람이 신임을 한다.” 하였으니, 전에 이 말을 들었는데,
지금 그러한 사람을 보았노라. 전건의 여용지는 그 경사로움을 말하면 옥황(玉璜)을 세습하여 내려왔고, 공부를 말하면 금판(金版)을 정밀하게 익혔다. 곧은 도를 지켜서 가는 곳마다 이로움이 있고, 공무를 하면서 알고서는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므로 진(晉)나라가 신군(新軍)을 창설할 적에 권세가 우군(右軍)을 힘입었고, 제(齊)나라가 용작(勇爵)을 시행할 적에 뭇 사람이 자기들보다 용기가 낫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풍속을 살피는 일을 도우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꾀에 들어맞아 마침내 새벽 양(羊)이 물 마심을 그만두고, 저녁 개가 짖지 아니하였다. 간악하고 함부로 하는 근원을 길이 제거하고, 깊이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는 도를 얻었다. 지금 보니 이 경내에 딸린 성은 어려움이 많아, 흩어진 군사가 의지할 곳이 없다. 마치 궁한 원숭이가 숲속으로 갈 마음이 간절하고, 나는 새가 나무를 가려서 앉을 마음이 간절한 것과 같다. 군중들의 심정이 이 사람에게 붙이려고 하니, 그 융략(戎略)이 가상하다. 무지한 백성들이 몰려오는 것을 편안하게 하려면, 실로 많을수록 일을 잘 처리하는 역량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한 몸이 두 일 함을 사양하지 말고, 훌륭한 재주를 펼 것이다. 마땅히 산양군도 지 병마사(山陽軍都知兵馬使)를 겸임으로 충원한다.
26.해치도장(獬豸都將)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대개 군사의 수(數)를 표시함은 모름지기 군중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만약 가르쳐 깨우침이 마땅하지 않으면, 어떻게 훈련이 일제히 되겠는가. 하물며 좋은 벼슬을 살고 함께 특수한 은혜를 입게 되었음에랴. 몸은 비록 군영에 머물러 있으나, 벼슬은 어사대(御史臺)에 올라 있는데, 마땅히 1등을 더 올려, 삼행(三行) 중에서 다름이 있게 할 것이다. 전건의 여용지는 장한 기운이 특출하고 충성이 높이 섰다. 활을 당기면 앞에 강한 대적이 없고, 창을 메고 나가면 매양 공을 이루었다. 여러번 무공을 세워서, 마침내 작상(爵賞)의 혜택을 입었다. 지금 보니, 낭성(狼星 난리별)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큰 물결이 일어나니 앞으로 포악한 것을 죽이는 능력을 펴고, 간사한 것을 떠받는 호령을 보일 것이다 그대는 힘써 한 뿔[一角]로 두 마음 먹는 자를 영원히 잠재울 것을 생각하여 큰 돼지와 같은 도적의 재앙을 소멸시킬 것을 바라노니, 신양(神羊 간사한 놈을 떠받드는 양〈羊〉)의 성격을 잃지 말지어다. 해치군도 지 병마사(獬豸軍都知兵馬使)에 충원한다.
27.숙 송현령 이민지 충 초토도 지 병마사(宿松縣令李敏之充招討都知兵馬使)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옛날에 내호(來護)란 사람은 성격이 탁월하여, 처음 《시경(詩經)》을 읽을 적에, “둥둥 북을 치며 날뛰어 병기를 휘두르는구나. 양피 갖옷을 입고 표피 갖옷을 장식하니, 매우 무위(武威)스럽고 용력이 있도다.” 하는 구절에 이르러서, 책을 놓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진실로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기회를 얻어 적을 멸해서 공명을 취해야 할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필연(筆硯)에만 종사하리오.” 하더니, 그후에 과연 장한 뜻을 펴서 여러번 수훈을 세웠으니, 기이한 재주로서 이렇게 하는 일이 어느 때라도 있을 것이다.
전건의 이민지는 관리의 도리를 자세히 알고, 한편으로 무예를 익혀서, 한 고을을 맡았을 때는 피곤한 백성이 힘을 입었고, 장수가 되었을 때에는 의용군이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마침내 고을이 엄숙하고 맑아졌으며, 이웃 고을도 이의 힘을 입었다. 기춘(蘄春)에 있는 교활한 도적떼의 소굴을 깨뜨리기 위해서, 강하(江夏)의 병권을 분담함으로써 현령의 직위를 그만두고, 장수의 지위를 잇게 한다. 관직으로 상을 주어서 군대의 명성을 떨치게 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장부(丈夫)의 웅비(雄飛)요, 군자의 표변(豹變)이다. 통신[羽書]에 의해서 군사를 몰고 적을 토벌하러 가게 하라. 전에 다른 고을에 응원을 잘한 일이 있으니, 반드시 우리 주위도 보안(保安)을 잘할 것이다. 절도아전 병마사(節度衙前兵馬使)에 충원하여 서남초토도 지 병마사(西南招討都知兵馬使)를 겸임하게 하라.
28.장웅 충 백사진장(張雄充白沙鎭將)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군자가 이 때문에 본래의 뜻을 힘쓰고, 큰 것을 사양하며 작은 것에 나아가는 것이다. 옛날 사람이 이 때문에 훌륭한 이름을 전하였는데, 오직 절개를 잘 지켜서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때를 잘 알아 움직이는 데 있는 것이다. 전건의 장웅은 가만히 의용(義勇)을 품고 깊이 겸손하며 화(和)한 것을 쌓아서, 정치의 조목을 펴매 정사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군중을 잘 거느리매 군사가 성낸 기색이 없었다. 지금에 새로운 은혜가 내려지지 아니하면, 날랜 군사가 어찌 편안하리오. 저 고진(古津)을 보니 실상 요로(要路)가로서 이는 진(鎭)의 사무를 이룩하는 일이 바로 강 언덕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것은 또 사부(使府)의 요충에 위치하여 있으니, 마땅히 공무에 재능이 있는 자로써 관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이 여기는 시장을 겸하고 있으므로, 군수(軍須)를 넉넉하게 할 수 있으니, 표도(豹韜)를 가지고 함께 도적을 무찌르는 용맹을 길러야 할 것이다. 임금의 조서를 맞이하여 특별히 장수가 되는 영화에 영전시킨다. 마땅히 백사진무 겸 지 장사공사(白沙鎭兼知場司公事)를 맡게 하라.
29.안재영 충 행영 도지휘사(安再榮充行營都指揮使)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옛날에 조공(曹公)이 악부가(樂府歌)를 짓기를, “늙은 천리마가 마굿간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리에 있고, 열사(烈士)는 늙어도 장한 마음은 그치지 않고 그대로 있다.” 하였으니, 지금도 옛날과 같아서 내가 그러한 사람을 얻었도다. 전건(前件)의 안재영은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이루었고, 한 깃발로 나가 지켜 해변의 풍속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명성을 떨치었다. 그런데, 이에 다시 호부(虎符 장수인)를 잡으려고는 하지 않으나, 그래도 오직 표략(豹略)만은 펴려고 하여, 늙어도 늙은 줄을 모르고 한번 쓰이기를 기다렸다. 지금 큰 도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외방에 어려움이 많다. 모든 고을에 임명된 장수들은 모두 죽간(竹間)에 이름을 탐내고, 먼 길에 징병한 군사들은 혹 규구(葵丘) 대신 수자리 가니, 만약 충용한 자가 적으면 어떻게 흉악한 자들을 소탕하리오. 그러므로 이 사람에게 중한 권력을 주어서, 기이한 계책을 보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항오(行伍)에서 먼저 나서서, 군병을 지휘하여 확삭(矍鑠)한 이름을 떨치게 하고, 천연(遷延)한 행역(行役)을 없게 할 것이니, 때를 잃지 말고 가서 조심할지어다. 마땅히 행영 도지휘사(行營都指揮使)에 충원하니, 수주(壽州)의 서쪽으로 가서 황소(黃巢) 도당(徒黨)을 방어하여 토벌하라.
30.조붕 지 행재 진주 보충 절도압아(曹鵬知行在進奏補充節度押衙)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번후(藩侯)의 소임은 저리(邸吏) 노릇이 먼저이다. 능히 만리의 소식을 잘 전하고 천자의 명령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되므로, 유능한 사람에게 의지하여 바야흐로 그 중책을 맡길 것이다. 전건의 조붕은 노귀(魯劌) 같은 훌륭한 재목이요, 위인(魏仁)같은 좋은 집안이다. 비록 무신의 반열에 있으나, 일찍부터 도필(刀筆)의 재능에도 익숙하다. 마침내 멀리 임금이 행차하는 데 따라가서, 오로지 통신 사무를 맡아보게 한다. 천자의 행차를 보고 매양 그 순유(巡遊)하는 데를 살피고, 천자의 명령을 전해서, 막히는 일이 없었다. 이런 것으로 여러번 시험해 보았으나 매우 칭찬할 만하다. 지금 그는 벼슬 품위가 헌경(憲卿) 다음이요, 관(官)이 전오(典午 사마(司馬))에 올랐는데, 몸소 연로(輦路 임금의 수레가 왕래하는 길)에 따라다니나, 작은 원문(轅門 군문)에 적당하지 못하다. 그에게 아장(牙璋 장수 인(印))을 주어서 멀리 군사 일을 하니, 임금의 뜻을 삼가 전달하고, 외지의 민심을 안정시키라. 이리하여 그대가 능히 정성을 다하게 되면, 따라서 내가 상을 아끼지 않으리라. 마땅히 현재의 직을 고쳐서, 절도압아(節度押衙)에 충원하여 섭직(攝職)하고, 종전대로 행재진주(行在進奏)를 맡긴다.
31.주축대부 기복(朱祝大夫起復)
최치원(崔致遠)
처분을 받들어 통첩한다. 전쟁이 일어나 일이 번잡할 때는, 예(禮)가 저마(苴麻 상복〈喪服〉)를 빼앗으니, 이 제도는 전에 노공(魯公)이 만들었고, 진후(晉侯)가 그뒤에 시행하였다. 대개 권도(權道)에 좇아서 순변(順變)해 나가는 것으로, 이것은 효도를 옮겨서 충성에 나아가는 것이다. 진실로 집을 잊지 않으면 장차 어찌 나라에 보답하리오. 전건의 주축대부는 그 전에 병역(兵役)에 종사할 적에 매양 공직에 있었는데, 갑자기 어버이가 돌아가시는 슬픔을 만나, 영원히 부모 봉양하는 길을 어겼다. 그래서 언제나 피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오직 나라에서 사정(私情)을 빼앗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뭇 도적을 다 잡지 못함으로써 여러 번진(藩鎭)에 일이 많으니, 여기에 3년의 집상을 고집하게 되면,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하물며, 칙명(勅命)이 이미 그에게 군전(軍前)에 나와서 일을 하라고 하였음에랴. 임금의 교지(敎旨)가 이러한 것은 성공을 기다리는 것이다. “비단 옷을 입고 상복을 벗어서는 안 된다.”는 공자의 말씀과는 그 때가 다르고 일이 다르니, 이것을 잘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이름을 떨쳐서 부모를 드러나게 하고, 힘을 다하여 임금의 명을 좇는 것이 효도의 완성이니, 가서 조심해서 할지어다. 마땅히 그를 기복(起復)시켜 오령(五嶺)에 가서 군전공사(軍前公事)를 맡게 하라.
32.상 도호천관(上都昊天觀)
최치원(崔致遠)
대덕관(大德觀)에 통첩한다. 좋은 박옥(璞玉)은 혼돈 속에서 형성되고 좋은 샘물은 넓게 멀리 적시듯 속태(俗態)는 심수(心水)로 씻어버렸고 신선같은 모습은 청아함이 얼음같도다. 봉래산(蓬萊山) 신선들은 응당 그대와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는 즐거움을 기다릴 것이로되, 속세의 형제는 그대와 감히 소매를 잡고 놀기가 어렵구나. 그래도 그대는 오히려 이 세상 사람들의 고초를 구원해 주려고 하는데, 내가 미처 만나보지 못하였도다. 요사이 진사(陣蛇)가 구멍에 나와 물외(物外)에 가서 설치고, 병마(兵馬)가 들에 날뛰어 세상이 시끄럽도다. 그래서 나는 매양 재계(齋戒)하는 마음이 부지런하여 깊이 두호하여 줄 힘을 빌리기 위해 임금에게 아뢰고, 초례(醮禮)를 베풀어 결손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마치 진령(秦嶺)에 연기가 어두우니, 사로(四老)를 찾기 어렵고, 초회(梵淮)에 달이 밝으니, 다행히도 팔공(八公)을 짝하였다. 그러나 다만, 계원(桂苑)의 번화와 양도(楊都)의 화려함이나 성단(星壇)과 월전(月殿)이 곳곳이 황폐되어, 학가(鶴駕)와 예정(霓旌)이 때때로 내려오기를 바라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정엄(精嚴)한 예를 갖추어 통섭(統攝)하는 권리를 빌리려 하니, 옛날 백마장군(白馬將軍)도 천조(天朝)의 원수(元帥)로 역사(役事)하고, 청우도사(靑牛道士)도 잠깐 하계의 선관(仙官)이 되었으니, 이때에 그대가 여기에 유하게 되면, 훗날 나도 반드시 그대와 함께 가볍게 갈 것이다. 청컨대, 마땅히 회남(淮南) 관내의 위의(威儀)를 맡고 겸해서, 모든 궁관(宮觀)과 그 장전(莊田)들의 업무를 지휘하도록 하라.
33.화주답 대 경진주 첩(和州答對境鎭州牒)
이규보(李奎報)
목래(沐來)의 글에, “요사이 도망한 자가 월경(越境)한 것 때문에, 사람을 시켜 뒤를 쫓게 했더니, 연해(沿海)에 이르러 길가는 행인을 만나 의류를 빼앗아 돌아왔기에, 이에 사유를 갖추어 상사에게 알리고, 본인에게는 죄를 다스려 벌을 주고, 지금 뺏아온 의류와 아울러 그 밖의 장물값까지 사람을 뽑아 보낸다.”한, 그 내용에 대해 즉시 사유를 조정에 알리고, 조정 지휘를 받아서 귀국에 사람을 보낸 것은 귀국의 그 은의(恩義)에 감사해서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보내온 의류는 응당 본인을 찾아서 돌려준다면 될 것이다. 그런데, 다만 그곳에서 보내온 장물값은, 이것이 본인의 의복 이외에 더 부쳐온 것이니, 받으면 의리가 아니고, 의리가 아니면 하나라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받게 되면 나라가 서로 왕래하여 화친하는 그 의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므로 돌려보내니, 마땅히 그 사람에게 지체 없이 돌려주라. 우리 조정의 의사가 이러하기에 지금 사람을 시켜서 보내오니, 삼가 청하건대 잘 영수하시오.
…………………………………………………………………….
나.의(議)
1.대 외조의(待外祖議)
2.당서 두보전 사신 찬의(唐書杜甫傳史臣贊議)
3.당서 불립 최치원 열전 의(唐書不立崔致遠列傳議)
4.왕문공 국시 의(王文公菊詩議)
5.이산보 시 의(李山甫詩議)
6.승 오사 의(承誤事議)
7.대부 사 묘제 의(大夫士廟祭議)
나.의(議)
1.대 외조의(待外祖議)
김부식(金富軾)
한 고조(漢高祖)가 처음으로 천하를 평정하고서, 5일마다 한번씩 태공(太公 고조의 부)을 조회하니, 태공의 가령(家令)이 태공을 달래기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임금이 둘이 없습니다. 황제(皇帝 한 고조)가 비록 아들이라고 해도 임금이요, 태공이 비록 아버지라고 해도 신하입니다. 어찌 임금으로 하여금 신하에게 절을 하게 하리오.” 하니, 한고조가 가령의 말을 옳게 여기고 조서를 내려, “사람에 있어서 지극히 친한 것으로 부자 이상이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천하를 소유하면, 그 전함이 아들에게 돌아가고, 아들이 천하를 소유하면 아버지를 높이는 것은 인도(人道)의 극진한 것이다. 이제 왕후 경대부가 나를 높여 황제로 삼았는데, 태공은 존호(尊號)가 없으니, 이제 태공을 높여서 태상황(太上皇)이라고 한다.” 하였다.
이것에 의해 논의를 할 것같으면, 비록 천자의 아버지라고 해도 만일 존호가 없다면, 임금으로 하여금 절을 하게 할 수 없다. 불기후(不其侯)인 복완(伏完)은 헌제(獻帝) 황후의 아버지인데, 정현(鄭玄)이 논하기를, “불기후가 서울에 있으면서, 자기 딸(황후)을 볼 때는 응당 신하의 예로써 해야 하고, 만약에 황후가 이궁(離宮)에 나와 쉴 때나, 자기 부모 집에 돌아가서 문안할 때는, 아들의 예를 따라야 한다.” 하였다. 그러므로, 복완이 조정에 조회할 때는 뭇 신하와 같이하고, 또 황후가 궁내에 있으면서 사적으로 볼 때는, 아버지 복완에게 자식같이 절하였다. 그리고, 동진(東晉)의 군신들이 목제(穆帝)의 어머니 저태후(褚太后)가, 그 아버지를 보는 예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데 대하여, 의논이 분분하여, 일치되지 아니하니, 박사 서선(徐禪)이 정현의 이론에 의거해서 말하기를, “조정에서 볼 때는 군신의 예로써 하고, 사적으로 볼 때는 부자의 친(親)으로써 해야 하니, 이것이 크게 순하는 도이다.” 하였다. 또 위제(魏帝)의 아버지 연왕 우(燕王宇)가 표(表)를 올릴 때에 자기를 신하라고 일컬었으니, 비록 지극히 가까운 부자간이라 하더라도, 예수(禮數)가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외조(外祖)에 있어서랴.
살피건대 의례(儀禮)의 오복 제도(五服制度)를 상고해 본다면, 어머니의 부모는 복(服)이 소공(小功) 다섯 달뿐이니, 자기 부모에 비해 높고 친한 것이 까마득하다. 어찌 임금의 외손이라고 해서 예를 거스리겠는가. 마땅히 표를 올릴 때는 신하라 하고, 조정에 있을 때는 군신의 예를 하며, 궁내에서 사적으로 볼 때는 집안 사람의 예로 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공의(公義)와 사은(私恩)이 둘 다 서로 순하다 하였다.
재상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근신을 보내어 자겸(資謙)에게 물으매, 자겸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아는 것은 없사오나, 지금 김부식의 의논을 보니, 실로 천하의 공론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노신이 거의 불의(不義)에 빠질 뻔하였습니다. 원컨대, 그 이론을 좆아서 의심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조서를 내려 그 이론이 옳다고 하였다.
2.당서 두보전 사신 찬의(唐書杜甫傳史臣贊議)
이규보(李奎報)
내가 《당서》의 두보전을 읽으니, 사신(史臣)이 찬(贊)을 지어서, 그 시의 왕함 만상(汪涵萬狀)한 것을 극구 찬미하였다. 그런데, 그 찬하는 글 끝에 이어서 말하기를, “한유(韓愈)가 다른 사람 문장에 대해서 잘한다고 칭찬하는 것을 삼가고, 좀처럼 칭찬하지 않았는데 가시(歌詩)에 있어서 오직 이백(李白)과 두보만을 추대하여, ‘이두(李杜)의 문장은 그 광염(光焰)이 만장(萬丈)이나 길다고 하더라.’하는, 이 말에 나는 그렇게 칭찬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비가 잠덕(潛德)이 안으로만 맑고, 밖으로 세상에 크게 빛나지 아니한 이가 있다면, 사신이 직필(直筆)로 평가할 때에, 그를 발양시켜 뒷세상에 믿음직하게 하고 싶더라도 남이 너무 과하게 칭찬한다고 할까 두려워서, 명현(名賢)의 말을 인용하여 거기에 빙증해서 자기의 말을 굳히는 것은 가하지마는, 이ㆍ두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그 시가 웅번(熊膰)과 표태(豹胎) 같아서, 사람들의 입에 맞지 않음이 없고, 그 이름이 진실로 뇌정(雷霆)과 성두(星斗)같아서, 세상에서는 그 빛을 바라보고 그 소리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으니, 반드시 창려(昌黎 한유의 호)의 이 한 구(句)를 기다린 뒤에라야 더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송공(宋公 사관(史官))은 무엇 때문에 한유의 그 한 구를 빙증(憑證)해서 스스로 자기 사필의 약한 것을 보였는가. 혹 또 그 한 구를 인용하여 평가한 것은 가하다고 치고라도, ‘한유가 다른 사람 문장에 대해서 좀처럼 잘한다고 칭찬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심한 말이다. 대개 누구든지 아무개가, 평생에 다른 사람은 좀처럼 칭찬을 하지 않고, 오직 아무만을 칭찬해 준다고 말을 하게 되면, 칭찬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부족한 뜻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니, 한유가 만일 이ㆍ두를 칭찬하지 아니하여 이러한 한 구절이 없었다면, 사관도 이ㆍ두를 칭찬하지 아니하겠는가.
아, 슬프다. 사관의 말이 약하구나. 이 찬하는 글에 또 원진(元稹)이 말한 바 있는, ‘시인이 있은 뒤로는 두자미(杜子美)같은 이가 없었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이것은 미지(微之 원진의 자)가 직접 두보에 대해서 평론한 것이기 때문에, 설혹 이 말을 인용한다 하여도 가하다고 하겠으나, 퇴지(退之 한유의 호)의 그 한 구절은 그가 자기 부인에게 주는 시에 우연히 한 말이요, 특별히 두공(杜公 두보를 말함)을 논평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유는 큰 선비이기 때문에, 비록 한 구라 하더라도 망발은 없으니, 이것을 인용하는 것도 가하지마는, 여기에 다른 사람 문장에 대해서는 좀처럼 잘한다고 칭찬하지 않는다는 말만 않았더라면, 송공의 말이 약한 것을 면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3.당서 불립 최치원 열전 의(唐書不立崔致遠列傳議)
이규보(李奎報)
《당서》 예문지(藝文志)를 상고해 보니, 최치원 사륙문(四六文) 1권과 또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실렸다. 최치원에 대한 그 예문지의 주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고려(高麗) 사람인데, 빈공급제(賓貢及第)로 고병(高騈)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하였다. 내가 이것을 읽어보고, 과연 중국인은 흉회(胸懷)가 넓다고 칭찬하였다. 그 이유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고, 이미 문집을 발간하여 세상에 반포하였고, 또 사기에 이렇게 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예 열전(文藝列傳)에 최치원을 위해서 전(傳)을 지어 넣지 아니한 것은, 내가 그 의도를 모르겠다. 만일 최치원의 그 행사가 전에 써넣을 것이 못 된다면, 최고운(崔孤雲 고운은 호)이 나이 12세에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유학을 하여 한번 과거 보아 급제를 하고 잇달아 고병의 종사관이 되었고, 황소(黃巢)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황소가 기운이 저상(沮喪)하게 되었고, 뒤에 벼슬이 도통 순관시어사(都統巡官侍御使)에 이르렀으며, 그리고 본국에 돌아올 때에 같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지어서 주었는데, 그 노래에 대략 이르기를, “나이 12세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이 중국을 감동시켰다.” 하였다. 그 자취가 이와 같이 뚜렷이 드러나니, 이것을 가지고 전에 써넣으면, 진실로 문예 열전에 소재된 심전기(沈佺期)ㆍ유병(柳倂)ㆍ최원한(崔元翰)ㆍ이빈(李頻) 등의 반장(半張)밖에 안 되는 열전(熱傳)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만약에, 외국인이라고 해서 전에 써 넣지 않았다면, 예문지에 이미 최고운의 이름이 나타나 있고 또 번진(藩鎭) 호용(虎勇)의 열전에 있어서는이정기(李正己)ㆍ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다 고려 사람인데, 각각 그 전(傳)에 열거해서 그 일을 소소하게 기재하였으니, 어찌 문예 열전에만 유독 최고운의 열전을 쓰지 않았는가. 내가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볼 때, 옛날 사람들은 문장에 있어서 서로 시기가 있었는데, 하물며 최치원이 외국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가서 당시의 명인들을 짓밟았으니, 이런 것이 중국 사람들의 꺼리는 것이라 하겠다. 만약 전에 써넣어서 그 사실을 직필하면, 중국 사람들이 꺼릴까 두려워서 빼어버린 것일까. 이에 대하여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4.왕문공 국시 의(王文公菊詩議)
이규보(李奎報)
내가 서청시화(西淸詩話)를 상고해 보니, 왕문공(王文公 왕안석(王安石)의 시호)의 시가 실려 있었다. 그 시에, “황혼에 비바람이 원림(圓林)을 어둡게 하니, 쇠잔한 국화가 떨어져서 땅에 금빛이 가득 찼도다.”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구양수(歐陽修)가 이것을 보고, “백화가 다 떨어지되, 홀로 국화만은 가지 위에 붙어서 마르니 어찌 떨어진다고 하리요.”라고 평하였다. 구양수의 평한 말이 크게 그르지는 아니한데, 왕문공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초사(楚辭)에, ‘저녁에 가을 국화 떨어진 꽃송이를 먹는다.’하는, 말을 모르니, 구양수가 배우지 못한 과실이다.” 하였다. 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론한다. “시라는 것은 본 것을 일으켜서 짓는 것인데, 나는 옛날에 바람이 크게 불고 비가 몹시 내리는 가운데 누런 국화가 떨어지는 것을 역시 보았다. 왕문공의 시에 이미, ‘황혼에 비바람이 원림을 어둡게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본 것을 일으켜서 지은 것이기 때문에 구공(歐公 구양수)의 말을 배격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으로 억지스럽게 초사를 인용할 바에는, ‘구양수가 어떻게 이것을 보지 못했는가.’ 하였으면, 괜찮을 것을. 이에 배우지 못했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왜 그렇게도 편협한가. 구양수가 비록 박학흡문(博學洽聞)은 아니라 하더라도, 초사가 무슨 유경 벽설(幽經僻說)이기에, 그가 보지 못했겠는가. 더욱 그는 일대의 명유(名儒)인데, 배우지 못했다고까지 지목을 하였으니, 어찌 이렇게도 심하게 말을 하는고. 나는 왕개보(王介甫 개보는 왕안석의 자)를 점잖은 사람으로 기대하지는 못하겠다.” 하였다.
5.이산보 시 의(李山甫詩議)
이규보(李奎報)
시화(詩話)에 또 이산보가 한사(漢史)를 보고 지은 시가 실렸다. 그 시에, “왕망(王莽)이 희롱해 옴에 절반이 없어졌고, 조공(曹公 조조를 말함)이 가져감에 모두 다 없어졌도다.”라는 구절이 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아름다운 구절이라고 여겼는데, 고영수(高英秀)란 사람은 이것을 나무라면서, “이 시는 파손된 배에 대한 시이지, 영사시(詠史詩)라고는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대체 시에는 물 그 자체를 말하는 수도 있고 혹은 물 그 자체는 말하지 않고 그 용(用)을 말하는 수도 있으니, 이산보의 우의(寓意)는 응당 한(漢)나라를 배에 비유해서 그 용을 말하여, 절반이 없어졌느니, 모두 없어졌느니 한 것이다.
만약, 고영수가 나무랄 때에 이산보가 거기에 있다가 “자네가 내 시를 파선시(破船詩)라고 한 것은 사실 그렇다. 내가 한 나라를 배에 비유하여 말한 것을 자네가 잘도 알아주니 다행이구나.”라고 말하였다면 고영수는 무슨 말을 가지고 답을 하였을까. 시화에 고영수는 악한 주둥아리이요, 경박한 무리라고 하였으니, 고영수가 시에 대해 평한 말은 신용할 만한 것이 안 된다. 다만 시화에서 이러한 논의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6.승 오사 의(承誤事議)
이규보(李奎報)
대개 보면, 옛 사람이 고사(故事)를 잘못 인용하였는데, 뒷사람이 이것을 그대로 인습하여 쓰고, 또 뒷사람이 이런 것에 대하여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인습하는 줄 알면서 심히 허물되게 여기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다. 이백(李白)이 황정(黃庭)이라고 한 것과, 두목(杜牧)이 일휘(一麾)라고 한, 이런 것들이 곧 그것인데, 나는 이것을 그르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사람이 실수가 없을 수 없으니, 비록 대가라 하더라도, 간혹 실수가 있는 법이고, 실수가 있으면 이것으로 경계를 삼으면 된다. 그런데 또 그대로 인습하여 쓰니, 이것이 어찌 허물인 줄 알면서 본받는 것과 다르겠는가. 이런 것은 단지 작은 실수지만, 만약에 보다 더 큰 실수가 있어도 또 이것이 옛 어진이가 쓰던 것이라고 해서,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인습하겠는가. 그른 것을 인습하는 것은, 옛 사람이 혹 긍정했더라도 나는 취하지 않는다.
7.대부 사 묘제 의(大夫士廟祭議)
이숭인(李崇仁)
옛날에 천자는 7묘(廟)를 제사 지냈다. 처음에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 태조(太祖)가 되어서 그 묘가 중앙에 있고, 그 다음에 동쪽에 3소(昭), 서쪽에 3목(穆), 6묘가 있다. 동과 서의 남쪽에 있는 2묘는, 하나는 부(父)의 묘요, 하나는 조부의 묘이며, 동과 서의 중앙에 있는 2묘는, 하나는 고조의 묘요, 하나는 증조의 묘이다. 이것을 4친(四親)의 묘라고 하고, 동과 서의 북쪽에 있는 2묘는 고조의 부(父)와 고조의 조부를 제사 지내니, 이것은 2조묘(祧廟)가 된다. 친묘(親廟) 넷과 조묘 둘을 합하여 3소(昭)와 3목(穆)이 되고, 이 밖에 공덕이 있는 왕에게는 친진(親盡 4대가 넘는 것)이 되어 만약에 묘를 헐게 되면, 별도로 한 묘를 소와 목의 북묘 북쪽에 세워서 종(宗)이라고 하여, 백세가 되도록 헐지 않고 태조와 더불어 같이 해 놓으니, 주(周)나라 문왕세실(文王世室)과 무왕세실(武王世室)이 바로 이것이다. 태조와 이종(二宗 문ㆍ무 이 세실〈文武二世室〉)과 3소와 3목을 합쳐서 9묘라고 하니, 이것이 천자의 제도이다.
제후에 있어서는, 처음 봉한 군(君)이 태묘(太廟)가 되고, 고조ㆍ증조ㆍ조ㆍ부의 묘가 4친묘가 된다. 이 4친묘를 이소(二昭) 이목(二穆)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이외에는 두 조묘도 없으며, 공덕이 있다고 해서, 따로 세우는 그런 종(宗)도 없다. 그러므로, 협제(祫祭)를 지낼 때는, 다만 시협(時祫)만 있고 대협(大祫)은 없다. 시협은 2소와 2목의 신주를 대묘에 옮겨서 합제하는 것이요, 대협은 3소와 3목과 2종과 그 밖에 모든 헐어버린 묘까지도 다 태조의 묘에 합제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부는 묘가 3묘이니, 처음 대부된 이가 중앙에 있어서 이것이 태묘이며, 1소와 1목은 조(祖)와 부(父)의 묘이다. 그 다음에 상사(上士)는 묘가 2묘이니, 오직 조와 부의 묘뿐이며, 대묘가 없다. 그 아래 중사(中士)와 하사(下士)는 묘가 1묘이니, 오직 부의 묘뿐이며, 조의 묘도 없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민은 묘가 없고, 부친을 그 정침에서 제사 지낼 뿐이다. 중사와 하사가 보통 지내는 제사는 부친의 제사뿐이니, 만약 조부를 제사 지낼 때는 부친의 묘에서 제사 지내고, 상사가 고조와 증조를 제사 지낼 때는 조부의 묘에서 제사 지내고, 대부가 조부 이상을 제사 지낼 때에는 태묘에 가서 제사 지낸다.
옛날에는 오직 천자와 제후만이 신주가 있고, 대부와 사(士)는 신주가 없었으니, 제사를 지낼 때는 자리를 펴고 신을 의지하게 할 뿐이다. 이천(伊川)이 만든 예제(禮制)에는, 대부와 사에 다 신주가 있고, 고조까지 제사를 지내니, 이것은 제후의 예를 참람하게 채용한 것이며, 또 동지에 시조를 제사 지내고, 입춘에 이름 있는 선조를 제사 지내는 것은 천자 체협(諦祫)의 예를 참람하게 채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처음에는 이천의 예를 따라서 동지와 입춘에 이 두 제사를 지내다가, 뒤에 그것이 참람한 것이라고 깨닫고, 마침내 그대로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지금 와서는 더군다나 봉건제도가 없어졌으니, 고금에서 그 합당한 것을 잘 참작해야 한다.
그래서 3품 이상은 옛 제후와 같이 하여 제사를 4대까지 지내되, 다만 나라에서 봉한 것이 없으니 마땅히 신주가 없어야 하고, 6품 이상은 대부의 예와 같이 하고, 7품은 상사의 예와 같이 하고, 8품과 9품은 중사ㆍ하사의 예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게 되면, 거의 이치에 맞을 것같다. 주자가 소위, “신주가 둘이다.” 하는 것은, 이것은 아버지를 이은 종자(宗子)가 그 아버지와 어머니 양위의 신주를 싣고 간다는 말이요, 또 주자의 소위 “두 신주가 항상 서로 의지하면, 정신이 분산되지 않는다.” 하는 것은, 그 아버지와 어머니 양위의 정신이 항상 신주에 서로 의지해서 별도로 사판(祠板)을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요, 또 주자가 “우협(于祫)은 그 고조까지 미친다.” 하는 것은, 우(于)가 아래로부터 위에 통달한다는 말이니, 고조는 본래 예가 없으나 만약 나라에 공을 세워서 임금이 총석(寵錫)하였다면, 4대를 합제하여, 위로 고조까지 지낼 수 있으니, 대부는 그 대묘에 가서 지내고, 상사는 그 조묘(祖廟)에 가서 지내고, 중사ㆍ하사는 그 부묘(父廟)에 가서 지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상은, 그 대강만을 들어 말한 것이요, 상세한 것까지에는 언급하지 아니하였다. 어떤 이는, “예는 시대에 적합하도록 제정하므로, 반드시 줄이는 것도 있고, 보태는 것도 있으니, 대부와 사가 신주가 있는 것은, 이천(伊川)이 정한 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역시 의리상으로는 해가 없다. 그러나 다면 묘가 있으면, 신주가 있는 법이요, 묘(廟)가 없으면 신주를 묘(墓) 속에 묻는 법이다. 그리하여 만약 묘 속에 묻은 신주를 추제(追祭)하고 싶으면, 자리를 베풀어 신이 의지하게 하고, 신주 있는 묘(廟)에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인즉, 더구나 지금은 묘제(廟制)가 다 옛 제도 그대로가 아니니, 응당 이천이 정한 예를 따라서 행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
제106권 끝.
첫댓글 오늘도 좋은 자료 잘 가져 가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좋은 자료와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주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