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역驛
이병연
사라져가는 꼬리를 놓지 않으려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훌쩍거렸다
당신이 있던 텅 빈 자리
당신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웅덩이처럼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함께한 결 고운 한때를 떠올리다가
나는 또 젖어 든다
고개를 저을수록 항복할 줄 모르는
내 안의 역
당신이 떠난 역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미련한 애인처럼 젖어 있고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꽃이 산다
----이병연 시집, {바위를 낚다}(근간)에서
오르페우스를 시인으로 만든 것도 그의 연인이었던 에우리디케에 대한 사람의 힘이었고, 줄리에트를 만인의 연인으로 만든 것도 그의 연인이었던 로미오에 대한 사랑의 힘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로마의 황제로 만든 것도 영원한 숙적이었던 신나를 용서해주라는 그의 아내인 리비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오딧세우스가 요정 칼립소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의 조국인 이타카로 돌아간 것도 그의 아내인 페넬로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자여 여사, 즉, 일개 기생이었던 김영한이 그녀의 전재산을 ‘길상사’에 시주한 것도 그녀의 연인이었던 백석 시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사랑이고, 이 사랑만큼 전지전능한 것은 없다. 모든 시인과 황제를 만든 것도 사랑의 힘이고, 모든 성자와 세기의 연인을 만든 것도 사랑의 힘이다. 사랑은 자연의 텃밭과도 같고, 우리가 씨앗을 뿌리고 가꾼 만큼 그 수확을 얻고 살아간다. 사랑은 자기 자신의 순결을 허락하고, 사랑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다. 사랑은 어질고 예의 바르고, 사랑은 거룩하고 고귀하다. 언제, 어느 때나 더없이 선량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랑은 그러나 돈과 명예와 권력 등, 그 어떠한 외부의 압력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지혜롭고, 사랑하는 자는 고통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에 용기가 있다. 사랑하는 자는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기 때문에, 타인의 말을 따르거나 한 눈 팔지를 않는다.
인생은 사랑의 길, 이 사랑의 길을 누구나 갈 수 있지만, 그러나 이 사랑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길은 말의 절제와 행동의 절제로 이루어진 길이며, 이 ‘절제의 미학’은 그의 예술품 자체가 된 삶을 말해준다. ‘절제의 미학’, 즉, ‘예술품 자체의 삶은 그의 지혜와 용기와 성실함의 산물이며, 그의 입신入神의 경지를 말해준다.
[내 안의 역驛]은 사랑의 역, [내 안의 역驛]은 그리움의 역, [내 안의 역驛]은 당신이 떠난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미련한 애인처럼 젖어 있고//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꽃이” 사는 역----. 청순 가련한 꽃, 지조와 정절의 꽃,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완벽한 [내 안의 역驛]에 피는 꽃----. 사랑의 향기와 그리움의 향기로, 페넬로페가 낮에는 수의를 짜고 밤에는 도로 풀면서 오딧세우스를 기다렸듯이,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못잊어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며 살다 갔듯이, 오직 단 한 사람의 ‘당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 안의 역驛]----.
당신이 있던 텅 빈 자리에 영원히 어린아이처럼 훌쩍이고 있는 꽃, “당신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웅덩이처럼 물이 고이기 시작”하면 “함께한 결 고운 한때를 떠올리다가” “또 젖어”드는 꽃, “고개를 저을수록 항복할 줄 모르는/ 내 안의 역”에 피는 꽃, “당신이 떠난 역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미련한 애인처럼 젖어 있고” “그곳에는 마르지 않는 꽃이” 피는 [내 안의 역驛]----.
이병연 시인의 [내 안의 역驛]은 미련한 여인의 시대착오적인 애상과 그 사랑이 주조를 이루는 것 같지만, “함께한 결 고운 한때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을수록 항복할 줄 모르는” ‘비극의 주인공’과도 같은 너무나도 확고한 신념과 그 결기가 배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사랑에는 수많은 샛길과 오솔길도 있을 수가 있고, 사랑에는 수많은 배신과 음모와 우회의 길도 있을 수가 있다. 이병연 시인의 [내 안의 역驛]의 ‘사랑의 길’은 만인들의 길이 아닌 자기 자신의 길이며, 미련하기 때문에 더욱더 순수하고 성스러운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의 사랑과 그 믿음을 따라 가는 길이기 때문에, 수많은 샛길과 오솔길도 모르고, 언제, 어느 때나 천하의 대로를 걸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단어 하나, 토씨 하나에도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듯이, 비록,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약삭 빠른 삶을 살지 못했을 지라도, 이 성스러울 정도로 촌스럽고 때묻지 않은 사랑의 꽃을 피웠다는 것은 이병연 시인의 [내 안의 역驛]이 자야 여사의 마음을 사로잡은 백석의 시 한 편만도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수천 억대의 재산이나 천하제일의 권력보다도 더 낫고 더 영원한 시----, [내 안의 역驛]은 만인들의 텃밭이고 만인들의 행복의 보금자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귀하고 거룩한 것은 고귀하고 거룩한 인간을 위해 있고, 더럽고 추한 것은 더럽고 추한 인간을 위해 있다. 진정한 시인은 비겁하지 않고 굴종을 모르며, 진정한 시인은 촌스러울 정도로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만인들의 존경과 찬양을 받는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훌륭하고, 누가 가장 부자인가?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고 성스러운 길을 가며, 이병연 시인과도 같은 [내 안의 역驛]을 창시한 사람일 것이다. 오직 단 한 사람뿐인 당신을 떠나 보낸 슬픔의 토대 위에서 사랑의 꽃을 피우고, 그 그리움의 향기로 만인들을 불러모으며, 영원불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예술가 중의 최고급의 예술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