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스터스 토너먼트와 바비 존스 *

어느덧 2017년 4월이 돌아 왔다. 매년 4월의 둘째주에는 온통 신경이 마스터스 토너
먼트(Masters Tournament)에 가있는 듯 하다. 언제 부터인지 한국도 많은 방송매체
들이 연일 마스터스 소식을 쏟아내곤 한다. 그만큼 인기 있고 기사 거리가 된다는 것
이다. “마스터스 토너먼트” ,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 “바비 존스” 이 말들은
골프하면 늘 회자가 되는 단어들일 것이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마스터스 하면 꿈의 구장인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Augusta National Golf Club)
과 공동 창립자인 “가장 위대한 아마추어 골퍼” “골프의 성인”“골프의 구성(球聖)” 이
란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로버트 타이어 존스 주니어(Robert Tyre Jones Jr.: 1902~
1971 바비 존스의 본명), 바비 존스(bobby jones) 를 빼 놓을수가 없을 것이다. 오거
스타 GC는 골퍼인 바비존스와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자본가였던 클리퍼드 로버
츠(Clifford Roberts)가 함께 만들어낸 골프장으로서 1930년에 바비 존스는 4월초에
A CC(Augusta Country Club)에서 개최된 사우스이스턴오픈에서 우승을 차지 한다.
이 대회는 프로들로 구성 되어졌던 대회로 장래 마스터스 챔피언이 되는 호튼 스미스
와 진 사라센을 13타 차이로 꺾은 것이다. 그의 승리 행렬의 첫 2라운드는 A CC에
서 기록한 것이다.
http://blog.naver.com/k3565512/220975780716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 둘러 보기

A CC(Augusta Country Club)는 지금의 오거스타 내셔널 GC와 담 하나 두고 있는
골프장으로서 오거스타 내셔널 GC보다 35년 전인 1899년에 지어지고 파인허스트
CC의 설계가인 미국 코스의 거장 도널드 로스(Donald Ross)가 코스의 틀을 잡은 만
큼 이곳 역시 역사적인 명소중 한 곳이다. 처음에는 컨트리클럽오브오거스타였으나,
1921년에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오거스타내셔널과 함께 구릉 지형과 높은 소
나무를 공유하고 있으며 오거스타내셔널GC 중에 11번부터 13번 홀까지는 ‘아멘
코너’라 불리는 난이도 높은 3개의 호중에서 12번 홀 그린 앞을 흐르는 래(rae)의
개울물은 이웃한 A CC로 흘러간다고 한다. 바비 존스가 공동 창립자인 클리퍼드
로버츠와 20년대에 자주 A CC에서 라운드를 즐겼다고 한다. A CC는 오거스타
내셔널 GC와 많은것이 흡사하다고 한다. 1981년부터 1라운드 전에 샘 스니드와
함께 시타를 하던 바이런 넬슨은 마스터스에서 두 번 우승한 역사적인 골퍼이다.
바이런 넬슨은 마스터 스 주간이면 바로 이곳 A CC에서 시타를 위해 화, 수요일에
라운드를 했다.고 한다. 오거스타 내셔널 GC의 역사에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오거스타 CC를 빼놓고는 애기할수 없는 것이다. 간혹 우리는 흔히 오거스타
내셔널 GC를 오거스타 CC로 표현 할때가 많은데 오거스타 CC는 분명 다른
골프장이다.


<A CC(Augusta Country Club)
오거스타 내셔널 GC는 공동 창립자 클리프 로버츠가 애기한 공식적인 오거스타 내셔널
GC의 클럽 역사는 A CC의 친구인 토마스 배럿 주니어가 임원들에게 바비 존스의 꿈의
코스를 소개시켜 줬다고 밝히고 있지만 바비 존스가 사우스이스턴오픈을 치르며 9번 홀
을 향해 걸어 올라가던 중 어느 순간 래(rae)의 개울을 건너다 보았을 것이다. 현재의
오거스타 내셔널 GC의 11번과 13번 홀 사이의 페어웨이, 아주 적은 수의 소나무,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수원에서 살아남은 수십 그루의 꽃나무와 관목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건 아마 천국처럼 보였을 것이고 바비 존스와 클리프 로버츠, 그리고 친구들은
그해 가을 7만 달러(8천만원)을 들여 그 부지를 사들였다. 그런후에 캘리포니아주 폐블
비치에 있는 사이프러스 포인트 GC(1928년 개장)를 방문한 후에 당대의 골프 코스 최고
로 불리웟던 사이프러스 포인트 GC를 디자인한 영국의 알리스터 매켄지
(Alister Mackenzie)에게 의뢰하여 만들어진것이 바로 오늘날의 오거스타 내셔널 GC이다.

<1930년 The Open Championship, Royal Liverpool Golf Club에서 바비 존스>
골프 사가들이 이 세상 골퍼들 중 유일하게 ‘구성(球聖)’이라는 최고의 헌사를 올린
바비 존스(Bobby Jones)는 신화에 가까운 수많은 전설을 남긴 아마추어 골퍼다.
사가들이 골프가 태동한 이래 최고의 골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튀어나오는 이름이
바로 바비 존스이다. 당시 4대 메이저, 즉 미국과 영국의 오픈 및 아마선수권을 13
차례나 우승한 그에서 ‘골프의 성인’이라고 칭송하는 것은 그가 골퍼로서의 기량과
함께 최고의 지성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가 얼마나 위대한 골퍼였는지는 4대
메이저대회에 출전했던 기간은 겨우 13년, 그것도 9년은 고교와 대학시절로 평생
출전게임 52회 중 23회를 우승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특히 지성파 골퍼로도 유명했다. 1922년 미국 아마선수권 쟁취 후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 조지아공대에서 기계공학, 에모리대에서 법률을 전공해 변호사자격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영국사, 독일문학, 고대문화사, 비교문학 등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의 골프전성기는 학업에 열중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해 운동과 학문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탁월한 골프기량에 풍부한 학식, 뛰어난 유머감각과 겸손함을
겸비한 그에게 온갖 최상급의 찬사가 따라다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바비 존스는 다섯 살 때 부모와 함께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스튜어트 메이든(Stewart Maiden)
이라는 동네골프장의 프로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데, 그는 메이든을 만난 것을 골프인생
최대의 행운이라고 실토했다. 훗날 그는 7년간의 슬럼프에 빠진 뒤 “모든 행운은 자신만을 외면
하고 있다고 생각한 바 있었으나 그 후 이것을 반성하면서 인간은 패한 경기에서야말로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이긴 경기에서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는 명언을 남겼다.

또한 바비 존스는 11세 때 그는 골프에 대한 철학을 깨닫는다. 계기는 1913년 US오픈.
이 대회에는 ‘스윙의 시인’이란 명성을 듣고 있던 영국의 해리 바든(Harry Vardon), 그
리고 같은 영국의 테드 레이(Ted Ray)가 출전했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당시 19세의 미
국 아마추어 프란시스 위멧(Francis Ouimet)이 두 영국 프로와 동타가 되어 연장전에
들어가 우승을 차지했다. 어린 존스는 이 경기야말로 진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아름답고 부드러운 스윙에 견실한 플레이, 모든 홀을 파를 목표로 주변
과 초연한 자세로 플레이하는 해리 바든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린 존스의 눈
에는 바든은 경쟁자나 갤러리들을 잊은 채 다른 그 무엇과 플레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존스는 중얼거렸다. “골프란 어느 사람에 대해서가 아니고 어느 것에 대해서 플레이하
는 것이다.” ‘그 어느 것’이란 바로 파(PAR)였다. 홀마다의 파와 경쟁한다는 것인데 그는
그 무엇을 ‘올드 맨 파(Old man Par)’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의인화하고 외부의 경쟁자
가 아닌 내부의 ‘올드 맨 파’와 게임을 하는 철학과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1916년 14세 소년으로 처음 미국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 출전, 전국대회 첫 준우승을
하게 되는데 이때 결승에서 젊은 혈기와 흥분,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난
뒤 마음을 다스리는데 역점을 두게 된다. 이듬해에 그는 15세 나이에 챔피언이라는 이
름을 얻는다. 그러나 이후 2위 시대가 계속 이어지는 7년간의 길고 긴 슬럼프에 빠졌
다가 1923년 US오픈에서 우승하고 1925년 US 아마추어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전성기
를 맞는다.

1925년 US오픈에서 그는 골프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를 만들어낸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1타차 선두를 유지, 우승을 목전에 둔 존스는 러프에서 어드레스 하는 사이 볼이 저절로
움직이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지만 경기위원회에 자진 신고했다. 게임이 끝나 벌타 1점을
추가한 스코어카드를 제출한다. 동점으로 연장전까지 가며 상대방에 우승컵을 넘겨주었다.
바비 존스의 친구이자 언론인인 O.B 킬러 기자는 “나는 그가 우승하는 것보다 벌타를 스스로
부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한 타가 없었더라면 플레이오프는 없었을 것이고 존스
의 우승으로 끝났을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 하는 것보다 더 멋있는 것이 바로 존스의
이 신고사건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매스컴이 칭송하자 존스는 “당연한 것을
했을 뿐이다. 당신은 내가 은행 강도를 하지 않았다고 나를 칭찬하려는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프로 골프계에선 월트 헤이건이 ‘왕’으로, 존스는 ‘불세출의 아마 황제’로
불려 졌는데 1925년 둘만의 72홀 매치플레이 시범경기에서 존스가 완패했다. 골프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존스의 기술적인 패배라기보다는 올드 맨 파의 철학을 스스
로 망각, 처음부터 스코어카드 대신 헤이건과 대결한 실수를 했다”고 평했다.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바비 존스는 1930년에 영국 오픈과 영국 아마선수권, 미국 오픈과 미국 아마선수권을
독차지하는 사상 초유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데 US 아마 선수권대회에서 경기 중
한 레스토랑 주인으로부터 격려전보를 받았다. 거기에는 ‘E TONE, E PISTAS’라는
그리스어가 쓰여 있었다. 영어로 ‘With it or on it’(함께 아니면 그 위에)라는 뜻이다.
옛날 스파르타의 한 노모가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방패를 닦고 있는 아들에게 한 말로,
이겨서 방패와 함께 무사히 귀환하든지 아니면 전사하여 방패 위에 실려서 돌아오라는
뜻이다.

한 주말 골퍼가 바비 존스에 대한 일화 중 US 아마선수권대회 중에 받은 전보에 쓰인
‘E TONE, E PISTAS(With it or on it)’라는 말에 필이 꽂혔다. 이 골퍼는 이 뜻을 비장하게
받아들였다. 승리해서 돌아오든지 아니면 그 자리서 죽어라는 뜻으로 해석했
다. 속된 표현으로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받아들였다. 그는 전쟁터에 나가는 결연
한 마음자세로 필드로 달려 나갔다. 세 명의 동반자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반드시 승리
하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라운드에 임했다. 바비 존스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의 라운드
결과는 물으나마나다. 사상 최악의 라운드를 마친 그는 바비 존스와 얽힌 일화를 읽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 했다고 한다. 그 역시 ‘골프의 왕’ 월터 헤이건에게 완패한 바비 존스와
다름없이 ‘올드 맨 파’가 아닌 동반자들과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치명적 실수
를 범한 것이다. 이런 실수는 오늘도 수많은 주말 골퍼들이 되풀이해서 저지르는 고질병이다.

그렇게 바비 존스는 1930년 11월 28세의 나이에 은퇴했다. 미국 골프계는 그가 은퇴
선언을 하자 ‘존스 없는 골프는 파리가 없는 프랑스와 같다’는 말로 슬픔을 표했다고 한
다. 매년 4월 꿈의 제전이라는 마스터스 대회는 그가 은퇴 후 금융계의 친구 클리포드 로버츠와
함께 1934년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 오거스타 내셔널코스를 만들면서 탄생했다. 바비 존스는
미국 최초 그랜드 슬램 달성과 프로 전향을 하지 않았던 영원한 아마추어 골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