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나는 이미 가졌다'는 것을 몰랐을 때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제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을 나 자신이 처절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정의하신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제 자신이 가장 잘 알았습니다. 또한 그 사랑으로 누굴 사랑한다는 것은 정말 나를 깎고 깎는, 불교의 수도승, 라마교 수도승의 고행보다 더 힘든 길인 듯 보였습니다. 특히 사랑하기가 너무 힘든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땐 더욱 그랬지요.
당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니,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구나'하는 정도는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부분에서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남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었겠습니까? 게다가 당시 저는 일 년에 대략 천 명 정도의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수많은 학생들이 가까이 하기 원하는 토익강사였기에 참으로 인간관계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인기'가 힘든 내향인) 다들 저에게 뭔가를 바라고, 질문하고, 부탁하고 그럴 뿐, 나에게 뭘 주려고 하는 사람이나 사주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이니까 항상 학생들에게 뭘 줘야 하는 입장 이였죠.
그러던 시기에 내 안에는 이미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것이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아, 이제는 죽어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의 뜻은 진짜 죽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 뭐 그런 심정의 표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말씀이었던 거죠. 그랬으니 내 안에 사랑이 이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젠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내 안에 이미 있는 것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를 순복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지만 내가 사랑을 생산해 내야 한다고 믿었을 때 보단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까!
그 진리를 알게 해 주시고 저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