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형통을 원한다면 이렇게 해보라 다니엘 6:28
(설교자: 마경훈 목사 비전교회)
불통 같은 형통이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부산 성0교회 정0헌 목사님의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아이들과 태국에 갔는데 공항에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출국카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걸 몰라서 못나가셨습니다. 결국 선교사님이 안으로 들어온 후에야 밖으로 나갔습니다. 많이 당황 했을 것 같고 많이 창피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번은 미국에 가서 디즈니랜드를 갔습니다. 놀이동산에서 논 후에 선교사님하고 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출입문이 많아서 엄청나게 헤맸습니다. 목사님께서 손짓발짓을 해서 겨우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를 형통이라고 생각합니까? 불통이라고 생각합니까? 불통처럼 보이는 형통입니다. 그 때 목사님의 아이들이 도전을 받아서 결심을 하고 영어 공부를 해서 지금은 영어를 아주 잘합니다. 아들은 서울 대학교까지 들어갔습니다. 이런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니엘은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특별히 뛰어난 지혜를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젊은 시절부터 무려 69년을 왕궁에서 살았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국가 서열 2위로 살았습니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왕조시대에 신하 중에 최고우두머리인 영의정을 일컫는 말입니다. 영의정 위로는 왕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인지하, 한 사람 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의정 밑으로는 모든 신하와 백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인지상입니다. 모든 사람 위에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야 말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평생을 엄청난 권세자로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평생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형통하십니까? 불통하십니까? 다른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형통하기를 원합니까? 불통하기를 원합니까? 물어보나마나 형통을 원하시죠. 어느 누가 불통하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 ‘아~ 난 항상 형통해’라는 생각보다는 ‘아~ 나는 왜 하는 일마다 안 될까? 나는 왜 불통하지?’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형통하게 살고 있습니까? 불통하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설교는 형통이 주제입니다. 형통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경적인 형통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형통이라는 단어는 ‘온갖 일이 뜻대로 됨’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가 있습니다. 온갖 일이 뜻대로 되는데 누구 뜻대로 되느냐가 열쇠입니다. 세상적인 형통은 온갖 일이 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적인 형통은 온갖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엄청난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 못하면 형통을 묵상할수록 영적인 침체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형통의 개념을 이해하고 보면 인간적으로 볼 때 불통이 형통인 경우가 있고 형통이 불통인 경우도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다시스로 갔는데 마침 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보기에는 형통 같지만 사실은 불통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상인에게 인신매매가 되었고 종으로 팔려갔고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이건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확실한 불통 같으나 사실은 형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감옥에서 요셉이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셨고, 그의 꿈을 해석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바로 왕 앞에 서게 하셨고, 바로의 꿈을 해몽하므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7년 흉년 기간 동안 히브리민족을 보전하는 귀한 일에 쓰임 받았습니다. 요나의 형통은 불통이었고, 요셉의 불통은 형통이었습니다.
의롭게 산다고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롭게 살기 때문에 악한 마귀의 공격을 받아서 불통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짐을 져야하기 때문에 불통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불통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같이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매를 맞기도 했고, 병이 들기도 했고, 강도를 만나기도 했고, 배를 타고 파선을 당하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배신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만사형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고,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이 편만하게 하셨고, 로마에도 복음이 전파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바울은 형통했던 것입니다.
성경 잠언 23:17을 봅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세상에는 불합리한 일들이 많습니다. 죄인인데 형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도 악한 길을 선택해서라도 인간적으로 형통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형통, 세상적인 성공을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진짜 형통을 사모해야 합니다. 김천에서 설렁탕 집을 운영하고 있는 집사님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접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설렁탕을 끓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재료만 씁니다. 모두 제일 좋은 것만 삽니다. 그런데 어느 날, 뼈를 끓이는데 뽀얀 국물이 아니라 누런 국물이 우러나오더랍니다. 야단났다 싶어서 거래처에 급히 전화를 하니 뼈가 바뀐 것 같다며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사장님, 오늘만 커피 프림을 타시죠?” 프림을 타면 설렁탕 국물이 진국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 내외분이 그날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끓이던 설렁탕 국물을 죄다 내다버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가게 앞에 이런 글을 써 붙였습니다. “오늘은 설렁탕 재료가 좋지 않아 장사를 못합니다.” 이건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불통입니다. 큰 손해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불통이 아니라 형통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날 이후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부터는 하나님 보실 때 형통하는 비결을 나누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과 동행하라.
창세기 39장에 보면 요셉이 형통했다는 말이 3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3구절에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찾아보세요. 창세기 39:2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세기 39:3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23입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이 구절들의 공통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요셉이 형통했는데 어떻게 해서 형통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시며 모든 일을 관여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하나님과 함께 하고 누구나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동행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려면 세 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➀간절히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잠언 8:17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0:21을 봅니다.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예레미야 당시의 상황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들판에서 양을 치는 목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영적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불통의 원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래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➁마음을 청결하게 하십시오. 마태복음 5:8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청결해질 수 있을까요? 죄를 범한 경우에 하나님께 숨기지 말고 자신이 죄인 것을 인정하고 죄를 자복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시고 그 결과 하나님과 동행하고 형통하는 것입니다. 잠언 28:13입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형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사해주시고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8:29입니다.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하지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리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통하게 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들의 불통을 맹인이 어두운 데에서 더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8장 전체를 보면 그들이 이렇게 불통하게 되는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죄를 고백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➂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이사야 48:15입니다.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져 형통하게 됩니다.
한 고래잡이 선장이 고래가 잘 잡히는 남쪽으로 가려고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역풍이 세게 몰아쳐 아무래도 갈 수 없게 되자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남쪽으로 가야 고래를 잡을 수 있는데 바람 때문에 갈 수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기도하는 중에 ‘고래를 잡는 것이 목적이지, 남쪽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지 않느냐? 바람이 이렇게 북쪽으로 부는 것을 보니 혹 북쪽에 고래가 있을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배를 몰고 갔습니다. 한 시간쯤 가니 배 한 척이 뒤집혀 있고 열네 명의 선원이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네 명을 모두 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열네 명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배를 그곳으로 보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그 움직임을 따라서 함께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4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성령의 움직임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늘 성령의 터치하심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간절히 성령님을 불러야 합니다.
내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형통의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
여호수아 1:7-8을 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 두 구절에서는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형통하게 하시겠다는 약속하셨습니다.
역대하 20:20입니다.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이 말씀은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들이 연합군을 이루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여호사밧 왕이 백성들에게 한 말입니다. 여호사밧은 두 가지를 권면했습니다. ➀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면 견고히 설 것입니다. ➁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러면 형통할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를 신뢰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말씀하셨고 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고 그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형통하십니다.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을 아시죠? 나누려 해도 나눌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말씀과 형통이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말씀 없이 형통은 없습니다. 말씀대로 살 때 형통합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하게 됩니다. 다윗의 삶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두 구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입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윗의 삶은 그만큼 형통했습니다. 사도행전 13:36입니다.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다윗의 일생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든 인생입니다. 정말 훌륭한 인생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복되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형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형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을 위하여 자신과 싸우십시오.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십시오. 옛자아를 부인하십시오.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는 사람이 성경대로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기 때문에 형통하는 것입니다.
3. 교회를 사랑하라
강원도 신흥교회에서 모네기철에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한 집사님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집사님이 교회 건축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면 농사를 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말씀을 의지해서 농사일을 뒤로 하고 교회 건축현장에서 밤낮 없이 봉사를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저, 미친놈. 지금 모네기를 하지 않으면 1년 농사 망치는데...”라며 욕을 했습니다. 집사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는 것을 알았지만 교회 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에 그 동네에 병충해가 많아서 제 때에 모네기를 한 사람들의 벼는 모조리 죽었는데 모네기 철이 지난 후에 모네기를 한 집사님의 벼는 잘 자랐고, 벼 수확이 다른 해 보다 2배나 많았습니다. 집사님은 현실을 핑계로 말씀에 불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돌아보는 것보다 농사일이 급하다고 핑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손해를 감수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더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편 122:6입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여기에 또 한 가지 형통의 비결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이 형통의 비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루살렘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이스라엘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합니다.
예루살렘을 신약적인 관점으로 보면 교회입니다. 갈라디아서 4:26을 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말씀은 사라와 하갈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사라를 통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았습니다. 하갈은 여종이고 사라는 자유자입니다. 하갈은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고 사라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하갈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보여주고 사라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천상의 교회입니다. 천상의 교회의 지점은 지상의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면 형통합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에서 교회를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말했습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인 것은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영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뿐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주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늘에 그 기원이 있고 믿음으로 거기에 거하는 하늘의 예루살렘은 신자들의 어머니이다.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거듭나게 되었고, 계속하여 자라는 데에 필요한 젖과 양식을 거기서 공급받았다.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교회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모시기를 원하여도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신동식 목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신자는 교회를 통하여 생명을 얻었고, 성장 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공급을 받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교회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교회가 없이 우리는 존재할 수 없고, 교회가 없이 우리는 자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의 선배들이 교회를 우리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천상의 교회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형통의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부천에 있는 감리교회 중에 기둥교회라고 있습니다. 고신일목사님께서 담임이십니다. 이 교회에서 연말이 되면 교회에 새로운 임원을 뽑는 당회를 준비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부목사님들과 심방 전도사님들에게 당회에 추천할 각 교구에서 집사후보와 권사후보를 뽑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뽑아온 명단을 보니 부목사님들이 너무 많이 뽑았더랍니다. 전교인을 권사화 하려는지 권사후보를 150~200여명을 뽑았답니다. 그래서 고목사님이 부목사님들에게 “권사가 되려면 저녁예배도 드려야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십일조생활도 철저히 해야 하고, 기도회에 잘 참석하고, 전도하는 사람으로 세워야지 막 뽑아오면 어떡하느냐”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목사님들이 “먼저 권사 된 사람들이 저녁예배도 안 드리고, 기도회도 참석하지 않고, 성경공부도 안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직분 맡아 일하는 사람들은 아예 접어놓고 새 임원부터는 제대로 뽑자고 했답니다. 직분이 믿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니 에배 드리기를 힘쓰고, 봉사하기를 기뻐하고, 전도에 힘을 씁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몸에는 수많은 세포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몸에는 약 20조개의 세포가 있고, 장성한 사람의 몸에는 약 60조에서 100조개의 세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포가 죽을 때까지 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부 세포는 수명이 2~4주 정도 됩니다. 적혈구는 120일 정도, 뼈의 세포는 10년 정도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는 계속해서 새로 생기고 또 죽고 또 새로 생기고를 반복합니다. 만약 새로운 세포가 생기지 않는다면 사람은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100년을 한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드뭅니다. 몇 십 년을 한 교회 다니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세포와 같은 새신자들이 들어와야 합니다. 교회에 새로운 신자들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우리나라 대표선수들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선수들이 골을 넣고 나서 잔디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경기가 끝난 후에 선수들이 손에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브라질 선수들도 우승한 뒤에 셔츠를 들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포퍼먼스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드러냈고 또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며 사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면 전도합니다. 성령 받았으면 전도합니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형통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 보실 때 형통하는 비결을 나누었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1.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어떻게 동행할 수 있습니까? ➀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➁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➂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충만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3.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형통할 것입니다.
성경을 들고 고백합시다. “하나님 저를 형통하게 하소서.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나는 교회를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형통하게 하십니다. 나를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