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어귀에 내려서 일단 민박집을 찾아든다. 방바닥에 몸을 부리고 좀 쉬다 보면, 어느 순간 밖에서 무언가가 나를 부르는 듯하다. 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쑤신다. 등산화의 끈을 조이고, 허정거리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걷기 시작한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방천지 초록이거나, 알록달록한 단풍이거나, 아니면 눈 덮여 눈부신 풍경 사이로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죽죽 벋어 있을 수도 있다. 그 풍경 속을 그저 느릿느릿 걷는다. 어느 겨를에 머리카락 가닥 사이로 바람의 손길이 느껴지고, 돌멩이가 들어찬 듯 무겁던 머리가 거뿐해진다. 내 몸에 들어앉아 마구 들쑤시고 조이고 헤집던 질병도 천지의 고요에 저절로 숨을 죽이는 듯 가라앉는다. 허정거리던 다리도 제법 힘이 붙은 듯 제 리듬을 찾는다. 걷다가 지치면 길섶이나 벤치에 앉아 보온병에 든 차를 마시고, 다시 걷다가 이제 되었다 싶으면 민박집으로 들어와 설핏한 잠에 들고, 그러다 다시 깨어나면 나가서 걷고... 그렇게 1박 2일 또는 2박 3일쯤 지내고 나면 몸 안의 탁하고 오래 묵은 기운들이 빠져 나가서 산바람처럼 맑은 무엇이 들어찬 듯하다. 다시 도시로 돌아가 살아낼 힘을 얻은 듯하다.
(이혜경. <그냥 걷다가, 문득>)
-<이토록 멋진 문장이라면>(장석주 쓰고 엮음)
꽃 성숙상은 꽃 또는 꽃 부분들의 발생 시기에 대한 것이다. 개화시기는 일반적으로 꽃이 피는 시기로, 수분이 가능하도록 꽃 부분들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수꽃 대 암꽃 또는 꽃의 부분들 사이의 상대적인 발생 시기는 생식생물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웅성선숙은 심피나 주두가 꽃가루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하기 전에 수술이 발생하거나 꽃가루가 방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성선숙은 웅성선숙과는 반대로, 수술이 성숙하거나 꽃가루가 방출되기 전에 심피 또는 주두가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웅성선숙과 자성선숙은 모두 한 종내의 개체들 사이에 외교배를 촉진시키는(따라서 자가수정을 억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 <식물계통학>(9장 식물형태학)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다음 문장을 보자.
“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쑤신다.”
이렇게 써본다.
“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충동질한다.”
다음 문장을 보자.
“허정거리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걷기 시작한다.”
이렇게 써본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느릿느릿 걷기 시작한다.”
다음 문장을 보자.
“헐벗은 나뭇가지들이 죽죽 벋어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써본다.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죽죽 벋어 있을 수도 있다.”
다음 문장을 보자.
“돌멩이가 들어찬 듯 무겁던 머리가 거뿐해진다.”
이렇게 써본다.
“돌멩이가 들어찬 듯 무겁던 머리가 가뿐해진다.”
다음 문장을 보자.
“이제 되었다 싶으면 민박집으로 들어와 설핏한 잠에 들고”
이렇게 써본다.
“이제 되었다 싶으면 민박집으로 들어와 성긴 잠에 들고”
다음 문장을 보자.
“오래 묵은 기운들이 빠져 나가서 산바람처럼 맑은 무엇이 들어찬 듯하다.”
이렇게 써본다.
“오래 묵은 기운들이 빠져 나가서 재넘이처럼 맑은 무엇이 들어찬 듯하다.”
‘이렇게 써본다’는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면서 유의어를 골라 다시 채워 넣어본 것이다. 무슨 차이가 느껴질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간단하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다양한 단어를 골라 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판단도 빠르게 할 수 있다. 즉 국어사전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시대가 아니라 검색을 통해 최적의 언어를 찾아낼 수 있다. 오류도 검증해가면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런한 자들이 더 이색적인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문장이 돋보이고 안 돋보이고는 전적으로 관점에 달려 있지만 말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개화시기는 일반적으로 꽃이 피는 시기로, 수분이 가능하도록 꽃 부분들이 열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써본다.
“산천에 꽃이 피고 있다. 겨우내 아껴둔 영양분이 울긋불긋 자태를 뽐내며 벌, 나비, 곤충을 유인하는 봄이다. 열매를 준비하기 위한 개화가 시작된 것이다.”
써놓고 보니 글을 참 못 쓴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럴까? 보여주기 위한 의식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그럼 만족하는 글은 뭘까?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을 쭉쭉 써나가는 것이다. 쓰는 자도 판단하는 자도 나이기에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늘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독자와의 공감을 중요시 여긴다. 늘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럴 때면 내가 쓴 글 공개하지 말고 그냥 혼자 쓰고 혼자 보고 싶지만, 그러면 너무 심심하다. 성찰을 글로 쓰는 순간 그 촉수는 이미 외부로 향하고 있다. 늘 정리해내기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