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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 살의 젊은 지도자, 리콴유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부유한 중국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1950년 싱가포르에 돌아와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어요. 그는 1954년 인민행동당 창당을 이끌며 정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5년 뒤 싱가포르 초대 총리가 됐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어요. 아주 젊은 지도자였던 거죠.
총리가 된 리콴유는 싱가포르 발전을 무엇보다 우선시했어요. 국민투표를 통해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을 결정해요. 싱가포르는 작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였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생존을 위해 말레이시아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는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러나 말레이계와 중국계의 충돌, 경제 정책 입장 차이 등으로 싱가포르는 2년 만에 연방에서 쫓겨나듯 탈퇴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싱가포르 개발에 더욱 힘을 쏟아요. 수준 높은 교육 확대, 빈민가 철거, 새로운 공공 주택 건설, 여성 해방 등에 주력합니다. 기업 친화적인 정책으로 외국 기업과 세계 유수 은행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했습니다.
경제 정책에서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 반대로 엄격한 법치주의를 확립하기도 했어요. 싱가포르는 마약과 총기를 강하게 규제하는 법률을 갖고 있어요. 싱가포르에서 헤로인 15g 이상, 대마초 500g 이상을 밀매할 경우 최고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어요. 또 태형이 아직도 이뤄지고 있죠.
리콴유는 반대 의견을 좋아하지 않는 면모도 갖고 있었어요. 식민지 시절부터 있었던 보안법을 더욱 강화해 야당 인물과 비판적 언론인들을 괴롭혔다고 해요. 이처럼 리콴유의 리더십에는 명암이 있어요. 하지만 1965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00달러 수준이었던 작은 나라가 2022년 8만달러를 돌파하는 등 부유한 국가가 되기까지 리콴유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총리 임기 제한 없어
싱가포르는 '잘사는 북한'이라는 별명이 있어요. 총리 임기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여당이 선거에서 계속 승리하면 여당 대표인 총리가 계속 직무를 수행할 수 있죠. 또 여당 대표는 투표로 뽑는 게 아니라, 재임 중인 총리와 지도부가 논의해서 뽑아요. 리콴유가 창당한 인민행동당은 싱가포르 독립 초기부터 빠른 경제 발전 등을 이룩하며 유권자들에게 강한 지지를 받았고, 지금까지 집권 여당의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민행동당 소속 의원이자 대표였던 리콴유가 31년, 그의 장남 리셴룽이 20년간 총리로 일할 수 있었던 거예요.
또 싱가포르만의 독특한 선거 제도도 인민행동당의 장기 집권에 영향을 줬어요. 싱가포르 국회의원은 지역구 의원, 무선거구 의원, 지명직 의원으로 나뉩니다. 지역구 의원은 의원 1명을 뽑는 단일선거구와 의원 4~6명을 뽑는 집단선거구를 통해 구성돼요. 유권자들은 집단선거구 선거에서 정당에 투표를 하는데요, 이때 최다 득표한 정당이 해당 집단선거구 의석을 독식합니다. 인재풀이 빈약하고 지지 기반이 약한 군소 정당에 불리하고 큰 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구조예요.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