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5
7월3일 [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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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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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BPcKTzluvA (김우진 바오로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5557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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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복음선포 여행을 떠나는 72 제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떠나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때로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사람이 일단 삼시 세끼 든든히 먹어줘야 복음을 선포하든 뭐든 할 텐데, 지갑에 단 몇십만 원이라도 있어야 장거리 여행길에 숙소도 잡고 씻기라도 할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냥 맨땅에 헤딩하라 시니, 제자들입장에서 참으로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의 배경에는 하느님 나라 도래와 관련된 긴박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 그리고 공생활과 더불어 이제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말씀과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인생 최고의 가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강생하셨고, 생명의 말씀이 시시각각으로 선포되고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대상들, 비본질적이고 부차적인 대상들을 초스피드로 내려놓고,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긴박함과 시급함의 결론이 곧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인 것입니다.
2세기 중엽 한 익명의 신앙인에 의해 쓰인 글귀는 ‘진정한 나그네’로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고향이 있으면서도 마치 타향살이 나그네와 같이 삽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수행하지만, 나그네와 같이 모든 것은 참아 받습니다. 타향 땅이 고향 같고 고향이 다 타향과 같습니다. 그들은 지상에 살고 있으나 하늘의 시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란 사명을 제자들을 부여하고 나서 세상으로 파견하십니다. 파견에 앞서 간단한 당부를 하시는데, 그 핵심이 어느 한 곳에 연연해하지 말고 ‘무심한 나그네’처럼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복음선포에 매진하려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무소유’, ‘집착으로부터의 탈피’, ‘버림’, ‘떠남’을 강조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보다 영원한 가치관, 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 그래서 인생과 목숨을 걸어 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작고 부차적인 것을 과감히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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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zUBj20Y_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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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을 들어가든지 먼저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엄청 중요한 말씀입니다. 선교의 본질을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강형욱 훈련사는 개들에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실제로 동물 보호단체에서 강 훈련사가 심한 학대를 한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행복과 평화를 주어야 하는데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개는 훌륭하다'에 어미로부터 애정을 한 달밖에 받지 못하고 데려온 천둥이가 나왔습니다. 집에 오는 손님은 물론 주인까지 자주 무는 개입니다. 교만이 하늘까지 이른 상태입니다. 이런 개에게 어떻게 평화를 줄까요? 아무리 잘해주려고 해도 주인은 개가 무서워 두려움에 떱니다.
이런 개에게는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주인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파견하시는 제자들이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처럼 먹고 마시고 잠을 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누가 갑인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생존욕구에 필요한 모든 것입니다. 생명이 보장되면 평화가 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며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평화입니다. 부모가 평화입니다. 이 평화를 주는 부모에게 자녀들은 순종합니다. 길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부모가 사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참 평화를 주어야만 누군가를 길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는 존재가 두려운 존재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를 잃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싫어할까 봐 가장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힘이 강하면 자기가 부모에게 무언가 해 주는 것처럼 여기고 부모가 평화를 주는 존재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는 자녀를 통제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은 두려운 것을 섬기는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보다 돈을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지배당하고 그것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에 내가 속하고 그것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향을 미치고 싶으면 내가 먼저 그것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주는 생명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디팩 초프라가 자녀에게 한 일이 이것입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먹고 살 것은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먼저 평화를 주지 못하면 “너희는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만 생각하며 살아라!”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집입니다. 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주인만이 그 집에 사는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진 것만을 줄 수 있습니다. 평화가 없는 사람이 평화를 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풍랑에 죽기 직전이었던 사도들을 배 위에서 안심시키시며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평화가 옵니다. 그 평화는 세상 어떤 것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차인표 씨는 모태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한 번만이라도 듣기를 원했습니다. 평화를 갈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돈 한 푼 안 받고 ‘지저스, 지저스’란 뮤지컬에서 예수님 역할을 무려 4년이나 했어도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컴패션이란 단체에서 인도 콜카타에 봉사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시달릴까 봐 차인표 씨는 1등석을 타고 갔습니다. 왕처럼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것 자체가 이미 자기 평화는 자기가 책임져 하느님을 평화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도에 도착해서 목사님이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너희는 소중한 존재다. 너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말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한 지저분한 아이가 먼저 다가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소중한 존재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그분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그분이 주시는 평화가 필요 없는 사람이었음을 그때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평화를 돈이나 명예, 사람들에게서 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 평화를 주시는 당신께 길들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평화를 줄 수 없으면 길들일 수 없습니다. 먼저 평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집에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 곧 죽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에게 평화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평화이신 분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평화가 필요한 사람이 되고 이웃을 평화가 필요한 사람으로 만듭시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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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12.17-20: 일흔 두 제자의 파견
오늘은 기쁨이라는 것이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귀양살이 후에 예루살렘의 중흥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구원의 사명을 위해 파견하시지만 우선 기쁨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양”(3절)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마쳤을 때 기쁨의 환호성이 나오고, 예수께서는 흥분한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아마 그 기쁨은 복음이 전하는 사람에게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보내셨다.”(1절)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시기 위하여 열두제자를 파견하셨다고 모든 복음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열두제자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협력자와 소실전달자들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신다. 72라는 숫자는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바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추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요엘 4,13 참조) 이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당신의 제자들을 결합하시는 모습이다. 즉 주님뿐 아니라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사명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다.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 선포자들을 세워주실 수 있고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켜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선교라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그를 파견하신 분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그것을 거절하라고 하신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그런데 복음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는데 인간적 도구의 부족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그 복음 선포자들은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기 때문에, 이리떼 가운데서 지켜주실 수 있는 그분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를 통해서 매일 양식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7절)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보물(사도직)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이러한 삶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shalôm)를 전해줄 수 있다. 이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인류에게 주는 생명과 쇄신의 표지이다. 루카는 평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기에 평화의 건설자이다. 항상 평화를 기원해주며 순교자의 삶으로 그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와 그간의 활동을 스승님께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이 주님께 보고하는 것은 전교활동의 성공에 대한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보여주신 능력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17-20절).
성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만해질 수 있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사탄을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이사 14,12; 묵시 12,8)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 오직 공동 이익(1코린 12,7)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 기쁨은 하느님께 다시 영광을 돌리며 느끼는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드는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선교이다. 그래서 교회와 일치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은 선교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세례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두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으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언제나 견지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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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17-20)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말씀만 있고(9절),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힘과 권한’을 열두 제자에게 주신 것처럼(루카 9,1) 일흔두 제자에게도 주셨습니다(19절). 여기서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는 말은,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활동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서 기뻐하고 있고, ‘주님의 이름’의 위력을 체험해서 기뻐하고 있는데, 그들의 ‘기쁨의 가장 큰 원인’은 마귀들이 떠나라는 명령에 복종해서 떠났다는 것, 즉 자기들이 마귀들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귀들은 ‘주님의 이름’에 복종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런데도 제자들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귀들이 ‘주님의 이름’에 복종했다는 것을 제자들도 모르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그들은 자기들이 마귀들을 복종시켰다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 자체를 탓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라는 말씀은, “마귀들을 쫓아낸 것에만 만족하지 말고”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마귀들이 너희에게 복종했다고 착각하지 마라.”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말씀은, “너희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뜻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생명의 책’은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묵시 3,5; 묵시 20,12).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유력한 ‘구원 후보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확정되는 것은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그 책에서 이름이 지워집니다. 따라서 “이름이 하늘에(생명의 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말씀은, “구원에 좀 더 가까이 가게 된 것을 기뻐하여라.”, 또 “너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여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을 도와드리기 위해서, 또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일하지만, 그 활동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바로 제자들 자신들입니다. 이 말은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은 전부 다, 또 이웃을 위해서 하는 일들은 전부 다,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도, 이웃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는 일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선교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2ㄴ-23)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6-27) 바오로 사도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의 첫 번째 목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실격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선교활동을 했으면서도 실격자가 될 수도 있다고 두려워한 것은, 그 활동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로 위험한 것은 ‘교만’입니다. 자신의 선교활동 실적을 내세우고 자랑하다가는 ‘교만죄’에 빠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 위험한 것은 ‘위선’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정말로 열심히 해도, 그 자신이 복음대로 살지 않으면 ‘위선죄’만 계속 짓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대로 살아서 구원을 받는데, 전해 준 사람 자신은 ‘교만’과 ‘위선’ 때문에 구원을 못 받고......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억울하다.’, ‘불공평하다.’고 주님께 항의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자신이 잘못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책’에 이름을 기록하거나,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지우는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씀은, 사탄의 패배를(당신의 승리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자’는 주님이십니다.(묵시 20,10)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은 마귀들을 쫓아내고 악의 세력을 물리는 힘과 권한입니다. 그런데 그 힘과 권한을 받았다고 해서 자신의 힘으로 마귀들과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 일은 오직 ‘주님의 이름의 힘’으로만 할 수 있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만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믿음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사도 19,13-16)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인데, 이 보호도 무조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또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인들만 받을 수 있는 보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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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저는 아버지의 체질과 어머니의 성격을 닮았습니다. 아버지는 혈압이 높았고, 머리카락이 일직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판단력이 좋았고, 결단력도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혈압도 정상이고, 머리카락도 검었고, 치아가 좋았습니다. 어머니는 부드러웠고,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체질과 아버지의 성격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사제가 되면서 아버지의 판단력과 결단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체질을 닮아서 혈압도 높았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되었고, 치아도 좋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성격을 닮아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31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체질을 닮은 것도,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도 모두 감사 할 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압이 높기 때문에 건강에 유의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매일 걷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아직도 혈압은 높은 편이지만 건강에 큰 무리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염색을 했지만 코로나를 겪으면서 하얀 머리카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염색하는 번거로움도 없고, 하얀 머리카락도 나름 좋았습니다. 치아도 치과에 자주 다니고, 신경을 썼기 때문에 아직도 큰 이상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체질을 바꿀 수 없다면 잘 관리하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어머니의 성격을 닮은 것이 본당 생활에 도움이 되 때도 많았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가 다양하듯이 본당에서 지내면 다양한 은사를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결단력과 추진력으로 끌고 가는 것도 좋겠지만 부드러움과 유순함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았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십자가는 세상의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장애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도 있습니다. 나의 뜻과 나의 행동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은데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가난한 경우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을 가지고 싶은데 실직한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의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 고통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모두 십자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연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고난의 잔을 기꺼이 마시려는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은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이러한 십자가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주변을 보면 구원의 십자가를 힘차게 지고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웃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나에게도 십자가가 주어진다면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이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여라.” 양들이 이리 떼 가운데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야 할지 모릅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 세상이 주는 기쁨, 세상이 주는 행복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 명예,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는 손을 움켜쥐고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손을 편다고 합니다. 내가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하면서 내가 놓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한 주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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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지명하시어 당신께서 가시려는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힘겨울 때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며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효율면에서나, 신자들에게 주는 부담의 차원에서나 혼자가 낫지 않을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둘씩 짝지어 보내신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는 심부름꾼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전달만 하거나, 마술사처럼 그럴듯한 기적을 보여 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동료와 나누는 관계 안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군중은 제자들의 행동과 말투뿐 아니라 그 둘이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느낍니다.
혼자 있을 때는 빛이 나지만 둘이 있을 때 빛을 내지 못한다면,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서 활력과 생명력이 넘친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더 큰 진정성을 얻게 됩니다. 복음은 화려한 말이나 신기한 행동이 아니라 내 곁에 있는 이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일상의 작은 사랑을 통하여 선포되는 것입니다.
‘성인 옆에 순교자 나고, 신심 깊은 부인 옆에 냉담한 남편이, 열심인 사제와 수도자 옆에 빈자리만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둘씩 짝지어 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리며 부부와 동료, 본당 공동체 모두 저마다 함께 묶여 파견된 제자임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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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오늘복음을 묵상하며 선교(missio)의 본래적인 의미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또한 ‘열심한 신자들’에게서 전교(傳敎)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교의(dogma) 아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개종(改宗)시켜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라는 개선주의적 교회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선교의 주도권은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선교의 본질적 내용인 복음 선포(κƞρυγμα) 안에는 이미 하느님의 구원 위업이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이 모든 인간의 마음과 온 세상 안에 약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통하여 이룩하신 이 구원을 모든 인간에게 무상의 선물로 나누어 줄 당신의 일꾼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다.…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요한 4,35-38)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도로서 실존은 ‘나는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되었다.’는 신원 의식입니다.
사도(使徒)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의 삶은 그리스도의 대리자(in persona Christi)라고 하겠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는 사제가 집전하는 미사성제 안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잘 드러납니다. 모든 성사 거행을 보이지 않게 주재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주교나 사제는 그분을 대신하여 모임을 주재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1348항)
제가 잘 아는 방송작가님을 통하여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연극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관람할 때 우리의 주된 관심은 아마도 탤런트 같은 배우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기자들은 작가가 쓴 희곡 대본을 잘 이해하고 소화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신의 몸과 전 존재 안에서 온전히 체현(體現)할 때 훌륭한 주인공이 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의 높고 고상한 이데아와 배우의 연기가 하나가 될 때 불후의 명작이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진정한 나’를 담고 드러내는 것이 인격(persona)인데 신약성서의 언어인 희랍어는 이를 휘포스타시스(ׯπנστασιօ)로 쓰며 그 뜻은 연극배우가 쓰는 가면(假面)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함은 하느님의 광대무변한 사랑과 구세경륜이 우리를 재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오늘 제1독서에서 잘 보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갓난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돌보시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기에 말입니다!(이사 6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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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여 늘 사람이리라>
마태오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늘 사람이리라>
사람을 살리시는 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살리시는 분을 닮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지만
사람을 죽이려는 사람을
늘 조심하되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결코 물러서지 않으며
사람을 살리시는 분의 영에 힘입어
사람을 살리시는 분과 끝까지 함께
그리하여 늘 사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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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 아침기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를 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파견받는 제자는 파견된 곳에 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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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토마스 길로비치라는 심리학자가 한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한 실험 참가자에게 오래전에 큰 인기를 가지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크게 들어가 있는 티셔츠를 입게 한 뒤, 다수의 다른 참가자들이 모여 있는 방 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티셔츠 입은 참가자에게 다른 참가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 예측해 보라고 했지요.
그는 사람들이 옛날 가수의 얼굴이 크게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그의 티셔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사람은 실험자 중에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이 나에 대해 관심을 두고 바라볼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떤지, 피부가 어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신경 쓰는 사람은 높이 잡아도 1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었어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내게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기준과 잣대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약한 ‘나’가 늘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지, 남들의 시선 때문에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닌,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지금보다 훨씬 위험과 고난이 따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조금 이상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편안한 여행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입고 먹는 것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오로지 하느님 나라 전파에만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는 것도 인사하느라 긴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교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집 떠나면 고생이라면서, 너무 힘들다고 불평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들까지 복종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으며, 동시에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남들의 시선, 세상의 관점에 신경 쓰고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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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에서 천국의 삶>
-꿈꾸라, 사랑하라, 선포하라-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콜로3,15.16)
성인답게 살고 있습니까?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런 성인답게 살고 싶은,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싶은 깨끗한 욕심, 청정욕은 얼마든 좋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각자 고유의 참나의 성인이 되라고,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라고 불림받은 우리들입니다.
저는 요즘 이런분들을 만났습니다. 먼저 우리 교황 프란치스코입니다. 어제 읽은 인터뷰 기사를 일부 인용합니다. 기자는 교황이란 명칭을 부르지 않고 그냥 프란치스라 불렀습니다.
-“프란치스, 당신은 보통 우리 시대의 세가지 악을 자기도취narcissism, 허무감despondency, 염세주의pessimism로 묘사한다. 이들과 우리는 어떻게 싸울 수 있나?”
나는 빛나는 미소로 가득한 얼굴의 교황에게 물었다.
“실제로 이 셋과 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게 하나있으니 유머 감각이다. 나는 40년 이상을 날마다 해온 기도가 성 토마스 모어의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름다운 기도이다. ‘오, 주님, 저에게 어느 것이든 잘 소화하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유머 감각을 주십시오. 저에게 웃음을 일으킬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해 주십시오.’ 유머 감각은 모든 것을 조망할 수 있게 배치하며, 우리에게 너무나 좋고, 비관하거나 비탄하는 정신에는 최고의 처방이다.”-
바쁘거나 힘들기로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보다 더한 분 없을 것이나, 제가 볼 때 지상에서 천국을 살고 계신 살아 있는 성인입니다. 어제부터 배열매 봉지싸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일하는 어머니들이 흡사 하늘에 별들을 다는 주님의 전사처럼 느껴져 예전에 느꼈던 생각이 떠올라 소감을 시로 적었습니다.
“하늘에 별들을 다는구나
사다리 부지런히 오르내리며
배나무 가지 배열매들마다
하얀 봉지를 쌀 때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하얀 별들이다.
낮에도 환히 떠오른 하얀 별들
하늘에 별들을 다는 어머니들이다.
몸은 고단해도
얼굴은, 눈은 별처럼 빛나는
배봉지를 싸는 ‘주님의 전사’인 어머니들이다.”
자매보다 빛나는 명칭인 ‘어머니’라 부릅니다. 배봉지를 싸며 하늘에 하얀 별들을 다는 어머니들 역시 저는 과감하게, 주저함 없이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녀들이라 부릅니다.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지상에서 천국을 살라고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죽어서 성인이 아니라, 죽어서 천국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살아서 성인으로,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그 방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꿈꾸라!”입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예언자나 성인들은 예외없이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희망있는 곳이 천국이요, 희망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꿈이라 다 참꿈이 아니며 희망이라 다 참희망이 아니며 비전이라 다 참비전이 아닙니다.
궁극의 꿈이나 희망은, 비전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하느님이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서 끝부분으로 예루살렘의 구원이 아름답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우리 궁극의 꿈과 희망 비전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고마운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그를 두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 하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얼마나 고무적이고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이런 예루살렘의 꿈을, 희망을, 비전을 고스란히 앞당겨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도대체 미사전례가 아니라면 어디서 예루살렘 하느님 나라의 체험을 할 수 있겠는지요.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입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이 바로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중 모시어 하나되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첫째로 강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성규4,72)
“그리스도보다 더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무엇보다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빛나는 성인으로 사신 분이 바로 오늘 제2독서 갈라티아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된 바오로 역시 새 예루살렘 꿈의 실현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목박혔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여러분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되어 사는 우리들 역시 바오로처럼 하느님께 속한 새 창조물인 예루살렘입니다. 하늘나라 꿈의 실현인 새 예루살렘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새 창조물이 되어 살 때 우리 삶의 자리가 하늘나라 예루살렘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우리 역시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열렬히 하늘의 예루살렘,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생 창조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선포하라!”입니다.
“꿈꾸라”, 1/3일뿐이라 불완전합니다. 이에 더하여 “사랑하라!”실천하면 2/3가 되고, 마침내 “선포하라!”가 추가되면 3/3 완전한 하느님 나라, 예루살렘의 실현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성인들이 됩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꿈꾸고 사랑하는 관상만으로는 반쪽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복음선포의 사도로, 선교사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똑같은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각자 삶의 자리가 복음 선포의 장이 됩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 청할 것 없이 우리 하나하나 주님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우리의 현재 실상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이렇게 최소한의 소유로 평화를 선사하며 이리떼 세상에서 자유롭게 ‘존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인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는 충만한 삶인데 무엇이 아쉽고 두렵겠는지요.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결정적 구원의 말씀입니다. 용기백배하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옛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는, 하느님께 속한 새 창조물입니다. 바로 하늘에 기록된 우리 이름을 새롭게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지상에서 천국의 삶을, 성인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다음 당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1.궁극의 꿈이자 희망인 하늘나라 예루살렘을 꿈꾸며 앞당겨 사십시오.
2.새 예루살렘의 실현이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한결같이,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3.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3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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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새 창조인 부활의 삶!>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험난한 세상 안으로 파견되어진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18.20)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끝장(66장)의 말씀인데, 예루살렘의 구원, 충실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66,12) 장차 우리의 궁극적 목적인 영원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있는 '천상예루살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인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은, 그곳에 이르게 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6,14.15.17)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낙인(인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새 창조인 부활의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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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동채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예수님의 낙인>
저는 사회복지 관련 본당 외 사목에 파견된 지 여섯 해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아닌 사회복지사나 원장으로서 클라이언트이건, 보호자이건, 직원이건, 공무원이건 신자가 아닌 사회의 많은 이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파견하십니다. 열두 사도가 교회 주교들의 활동을 예시한다면 일흔두 제자는 사제들을 나타냅니다.
열두 사도와 일흔두 제자들을 합친 수(84)는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는 12라는 숫자와 완전성을 의미하는 7이라는 숫자가 곱해진 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84는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을 상징합니다. 곧 오늘 당부하시는 모든 말씀들은 성직자들에게만이 아닌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문득 복음 선포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지금의 복음 선포자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성직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 온 세상은 코로나-19로 인해 황당한 상황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말들인 사회적 거리두기, 영업 제한, 온라인 수업, 코호트 격리 등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지난 2년 반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는 지쳤습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다 보니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결국 하느님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 선포를 이야기하기보다는 먼저 스스로 복음을 읽고, 듣고, 느끼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복음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지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2독서에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참으로 와 닿습니다. 원래 낙인이라는 단어는 옛날 희랍어인 스티그마(Στίγμα)에서 유래된 것으로 소유권을 표시하기 위해 인두로 가축의 몸에 찍은 도장을 의미합니다.
조금은 무섭고 부정적인 단어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심리학에서 낙인효과(stigma effect)라는 말은 한 번 나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조금 바꿔서 생각해보면 다른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을 낙인으로 찍고 살아간다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현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 안에 모시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님의 낙인을 뛰어넘어 예수님 자체를 몸에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신자인 것을 드러내는 것조차도 부끄러워서 식당에서 성호경을 긋지 않고 밥을 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주 성호경을 긋고, 성경을 읽고, 좋은 일도 하다 보면 우리는 계속해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보다는 예수님의 소유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을 직접 말로 전하지 않아도 행동과 느낌으로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도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면 별로 힘들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더욱 복음을 살아가고 성령이 역동하시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그분의 지체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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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재호 마티아 신부님]
<부끄러운 자랑>
지인들이나 동료 신부님들과 대화를 할 때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 이야기나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 군 생활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가 오갈 때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제생활하면서 참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동기 신부들도 저에게 다양한 사목 경험을 한 신부라고 이야기해 주기도 합니다.
사제 생활을 한 지 이제 20년이 막 지났습니다. 군종 사목을 하면서 남들은 잘 해볼 수 없었던 이라크 파병 생활도 해 보았고, 성전 건축을 하면서 여러 성당에 모금활동을 다녔던 경험, 중국 교포사목을 하면서 지냈던 생활들, 그 모든 생활과 경험들이 저에게는 하나의 자랑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본당신부가 아닌 2대리구 사무국장으로서 또 하나의 경험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들을 자랑거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럽기도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라고 말씀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그저 묵묵히 응답하며 살아가는 많은 신부님들과 수도자, 평신도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세상으로 파견되어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돌아와 기뻐하는 모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했고, 보았고, 이루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방법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고 거기에서 기쁨을 얻어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들께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이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갈라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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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학율 사바 신부님]
이학율 사바 신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예언자 이사야가 보고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언자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예언자는 보고 또 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이제 겨우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할 무렵, 여전히 이스라엘의 미래는 깜깜한 어두운 밤과 같은 상황이었을 그때, 예언자는 희망에 가득 찬 예루살렘의 미래를 내다보며, 기뻐하라고 오늘 1독서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예언자는 보고 있는 것, 어쩌면 예언자마저도 뚜렷하게 보지를 못하고 희미하게 보고 있는 것, 왜냐하면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서 제대로 바라보기 어려운 것, 그것이 오늘 복음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복구와 이스라엘 나라의 재건을 두고 기뻐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즐거움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다스림,’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라고 당신 제자들을 사방으로 보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다스림을 방해하거나 거부하는 모든 것을 물리칠 수 있는 권한과 힘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힘입어 자신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다음, 돌아와서는 기쁨에 들떠 예수님께 이렇게 보고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는 가운데 경험한 수많은 기적들로 인해 기뻐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곧 예수님께서 밝혀주신 ‘참행복’(마태 5,3-12)을 맛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일흔두 제자와 바오로 사도가 맛보았던 기쁨과 참행복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일꾼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하느님의 선물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우리 삶과 인격 더 깊은 곳에까지 미칠 수 있는 더 나은 길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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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오늘 주님께서는 어디 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시는데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머물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평화가 아닌 우리 평화가 머물 것이라는 얘긴데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을 주제로 나눔을 하고자 하는데 현실을 보면 평화를 선사하기는커녕 분란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는 사람이 많고, 평화를 깨는 이유는 그 자신에게 평화가 없기 때문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자기 안에 평화가 없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평화가 없기에 불화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제는 상반기 공동체 공동 피정을 위해 피정의 집을 갔는데 옆 집 개가 아침부터 계속 짖어대 제 마음의 평화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저 개는 왜 계속 짖어댈까?'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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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를 이해하고자 마음 먹고 관찰하고 생각해 보니 까치나 새들 한테는 짖지 않고 누군가 대상에게 짖어대는데 그 개의 경우 주인이거나 주변의 사람들에게 짖어대는 거였습니다.
말하자면 호소하거나 토로하는 거였습니다. 배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거나 똥 누고 싶으니 풀어달라거나
외롭거나 편치 않으니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없는 듯이 있으면 모두 평화롭게 되는데 이 개의 경우처럼 뭔가 불편하거나 결핍이 있거나 괴롭거나 하면 없는 듯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을 불평의 형태로, 요구나 주장의 형태로, 짜증이나 분노의 형태로 토로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이나 공동체의 평화를 깨고 불화체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내 배 부르고, 등 따습고, 만족하고, 평안하면
남에게 요구하거나 시비걸지 않고 없는 듯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교의 가르침처럼 안빈낙도할 수 있으면 가난해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처럼 욕심과 집착이 없으면 부유해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도가의 가르침처럼 없는 듯이 있으면 많은 사람 가운데 있어도 싸우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무엇이고 어떤 것입니까?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하셨고 오늘 제1독서에서도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고 하셨으며, 복음 환호성에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고 하심으로 우리의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되게 하라고 하셨지요.
그러므로 우리의 평화는 받아 지니는 평화입니다. 받지 않으면 없는 평화입니다.
나의 평화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지니는 평화요, 또 우리가 전하는 평화도 받을 사람이 있어야 전해지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도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제대로 우리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주님의 평화를 갈망하고 그런 다음 주시는 대로 받아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게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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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vgbrQJv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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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 2)
곡식은 계절을
탓하지 않는다.
영글어가는
실천으로
계절을
따른다.
기도도 실천이고
일꾼들도 실천이다.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과 확신이다.
일꾼들은
가슴 설레는
새로운
일들을 통해
희망찬 기쁨을
몸소 체험한다.
진정한 삶의
가르침을
파견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전달하시는
주님이시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듯
예수님을
따르면서
공동체의
시각이 다시
열리게 된다.
만남의 깊이는
따름의 깊이이며
공동체의 깊이로
이어진다.
몸소 체험하는
것보다
더 힘찬 것은
없다.
파견의
시작과
돌아옴의
봉헌에는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어 주신다.
변화의
이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신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지를
우리들에게 몸소
제시하여 주신다.
제자들의
마음에
빛을 주시고
제자들의
생활에
따르는 기쁨과
보람을 알맞게
베풀어 주신다.
기도에서
기도로
실천에서
실천으로
전달되는
일꾼들의 참된
정체성이다.
실천 없는
정체성은
언제나
요란하다.
파견은
실천으로
결정된다.
소유가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이다.
좋으신
주님 안에
좋은 제자들이
뒤를 따른다.
기도로
영글어가는
제자들이다.
기도하는
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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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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