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한옥 고택 경주에 재현하는 이재호 씨
요즘은 콘크리트로 세워진 아파트가 대부분이지만, 우리 고유의 숨결이 깃든 한옥을 생각하면 정겹기만 하다. 한옥을 보존하자는 운동도 있지만, 콘크리트에 밀려 한옥이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우리네 역사와 문화가 담긴 한옥 고택은 더욱 그렇다. 시간이 오래돼 허물어져가는 전국의 한옥 고택을 모아 경주에서 재현하는 사람이 있다. 이재호 씨(61). 신라 당시 56개의 왕릉을 돌아보며 왕릉과 왕릉을 연결하는 길의 문화유적을 답사하기도 하는 그를, 경북 경주에서 만났다. 글 김문(인터뷰 작가) 사진 고승범(사진가)
온도는 꽤 낮았지만 한낮의 햇빛은 따사로웠다. 그래서 왕릉 잔디밭에 누워버렸다. 두둥실, 하늘 구름이 오갔다. 눈을 감았다. 멀리서 강아지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뜰에 있는 소나무 밭에서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에라, 자버리자. 꿈을 꾼다. 인생을 살면서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해 벌어지는 일은 얼마나 많을까. 나를 오롯이 지켜내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기나 할까.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수오재守吾齋’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수오재는 나의 큰형님 정약현께서 당신이 사시는 집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이름을 붙인 데 대해 의심을 했다. 내가 장기로 귀양 온 이후 홀로 지내면서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어렴풋이 그 이름의 의문점에 대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스스로 말했다. 대체로 천하의 물건은 모두 지킬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마음만은 지켜야 한다. 나의 밭을 지고 도망갈 자가 있겠는가? 밭은 지킬 만한 것이 못 된다. 내 집을 이고 달아날 자가 있겠는가? 집은 지킬 만한 것이 못 된다. 나의 원림園林에 있는 꽃나무, 과일나무 등 여러 나무를 뽑아 갈 수 있겠는가? 그 뿌리는 땅에 깊이 박혀 있다. (중략) 그런데 마음은 어떤가. 이익과 작록(관직과 봉록)이 유혹하면 그리로 가고 위엄과 재화가 위협하면 그리로 간다. 유독 나의 큰형님만은 당신의 마음을 잃지 않고 수오재에 편안히 앉아 계시니 본디 부터 지킴이 있어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이것이 큰형님께서 당신의 집 이름을 그렇게 붙인 까닭이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나吾를 지키지 못해’ 자신이 귀양살이하고 있다는 뜻을 내비친다.
[신라 문화유산 세상에 알리려고 경주에 터전 마련] 경북 경주시 배반동 효공왕릉 앞 한적한 동산 자락에 ‘수오재’라는 한옥 고택 4채가 있다. 이 수오재의 주인장이 바로 이재호 씨다. 그는 기행작가이면서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 동국대 인문대 객원교수, 울산문화재연구원 이사, 반구대사랑시민연대, ‘경주길’ 대표 등의 직함도 가지고 있다. 그는 원래 서울에서 살았다. 1987년부터 유홍준 교수와 전국의 문화유산을 함께 오랫동안 답사했다. 그러던 중 1994년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세상을 전하기 위해 경주에 터전을 마련했다. 경주를 택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저녁노을을 볼 수 있는 곳, 둘째 주변에 문화유산이 있어야 할 것, 셋째 영원히 개발되지 않을 곳 등이다. 그래서 신라 52대 임금의 능, 효공왕릉이 있는 곳으로 정했다. 그는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공단과 도로개발 등으로 방치된 한옥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를 살려보자는 마음으로 그는 그동안 경남북(칠곡·영천·경주·마산·거창), 전남북(김제·영광·함평) 등지에서 한옥 13채를 옮겨왔다. 이 중 4채를 원래대로 ?살려 짓고, 나머지 9채는 새로 짓기 위해 준비 중이다. 한옥을 옮기는 방법은 방치된 한옥을 분리해 트럭에 싣고 수오재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 중에는 10년 전에 복원한, 지은 지 200년 된 김제의 만경고택이 있다. 이 무렵에 재현한 마산의 황 부잣집은 거의 문화재급에 해당하는 소중한 것들이다. 옮겨온 것 중에는 지을 돈이 없어 시간이 지나다 보니 썩어버리는 것도 더러 있다. 고택 재현은 그가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사연들로 수오재는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됐다. 국내 유명 인사들은 물론 터키 대?, 슬로바키아 대사 등 외국인도 많이 다녀갔다.
“대부분의 사람은 집을 한 채 짓고 나면 다시는 안 지으려고 합니다. 여윳돈이 많든 적든 대개가 인부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행하는 것들은 지나고 나면 실체가 없고 잔영과 추억만 남지만 집은 공간과 실체가 남는 최고의 공간예술이고 즐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제가 고택들을 옮겨와 집을 짓는 이유이지요.” 미친듯이 20년 동안 전국의 사라져가는 고택을 옮겨짓는 일은 그에게 어떤 필연적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 의령에서 태어날 때부터 그는 고택 기와집에서 살았다. 자연스럽게 한옥의 따뜻한 구들방과 다용도 목적의 공간인 청마루를 체험했던 것이다. 집 뒤에는 아주 큰 대밭이 있었고 밤나무밭은 그림처럼 산으로 연결돼 있었다. 청마루는 지금의 아파트 거실 역할을 했는데, 밀폐된 아파트와 달리 자연과 얼마든지 교감할 수 있었다.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마음이 울렁거렸고 연노란 감잎이 돋아나면 새로운 만물을 잉태하는 대자연의 순리를 체득할 수 있었다.
“저의 집 마당은 온 하늘을 안고 온 눈비를 맞으며 온 바람과 색깔을 담은 거대한 우주의 그릇이었습니다.
아무리 춥고 지치고 고단해도 군불 지펴 등을 방바닥에 대고 드러누우면 참으로 따뜻한 행복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릴 때의 정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 역시 어릴 때 한옥에서 자란 자양분이 제 인생의 나침반이 돼 30대부터 한옥을 옮겨 짓는 인연으로 연결된 것이지요.” 결국 한옥은 자신에게 따뜻한 정과 아늑한 휴식을 제공했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알게 했다고 추억한다.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것, 그것이 이씨를 한옥에 미치게 했다는 것이다. 하여 어른이 되면서 ‘세상에 감동을 주는 것’을 구체화하게 됐을 때 그는 자연과 인간, 문화유산에서 받은 감동을 세상에 전해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사라져가는 고택, 방치된 한옥을 다시 짓는 일이 그랬다.
이어 그가 화제를 한옥의 수난사로 돌린다.
“우리나라가 조국 근대화의 물결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힐 때 흙과 나무 등 천연재료로 지은 우리의 한옥들은 모진 수난을 겪게 됩니다. 특히 1971~1977년 사이에 초가집에서 슬레이트로 바뀐 집이 자그마치 240만 채였습니다. 기와집이 아니고 양옥도 아닌 이상한 집들로 변했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2000년대를 시점으로 서울의 북촌 등지에서 한옥 살리기 붐이 조성되면서 이제는 한옥에 사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 되는 현상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만은 않는다.
“거의 모두가 새 나무로 지어진 새 한옥이라 느낌이 없다. 새로 지어진 한옥촌, 한옥호텔 등을 보노라면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는다”면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사업적인 머리를 쓰는 사람은 고택을 옮겨 짓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라고 말한다. 만약 자신이 고택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고택을 옮겨 짓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즘 들어 자신이 하고 싶었던 꿈과 가치관을 실현하면서 현실에서 무릉도원을 만들고 싶은 열정이 갈수록 더 많이 생겨난다고 했다.
“지금도 좋은 고택이 있다면 마음이 흥분되고 벌써 머리로 집을 다 지어버립니다. 사라져가는 한옥을 살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제가 살아 있는 당대에 고택의 맛을 즐기고 싶은 것이 가장 큰 욕심입니다. 고택은 최하 50년이 지나야 그 엷은 맛이 나려 하고, 100년은 지나야 고색의 맛이 풍기고, 150년은 지나야 고색창연한 깊은 향기가 풍겨오는 것입니다.” [삼 정승과도 바꾸지 않을, 그의 건축철학 고스란히 담긴 수오재] 그의 이런 철학은 수오재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옮겨 지은 전체 고택 한옥은 시멘트를 쓰지 않고 천연재료로만 지었다. 그렇다 보니 천장이 낮거나 반듯하지 못해 찾아오는 이들에게 미안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고택의 맛과 건강을 선사하고자 한결같이 흙을 고집해왔다.
“사람은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말 원해서 그렇게 살기보다는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근원적인 회귀본능은 자연입니다. 오히려 첨단화할수록 세상은 더 각박해져 자연을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단원 김홍도의 ‘삼공불환도三公不換圖’를 예로 든다. 이 그림은 김홍도가 완숙기에 들어선 57세에 그린 것인데, 삼 정승과도 안바꾼다고 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씨는 삼공불환도를 연상하면서 나름대로 수오재에 대한 정경을 읊조린다. ‘수목이 우거진 정원 속에 대나무가 청아한 바람을 일으키고, 별당 아씨는 바람을 안고 그네를 타고, 선비는 담소하다 책을 읽고 누워 휴식을 취하네. 안채 마당에서는 베틀 위에서 베를 짜고 마당에서는 닭들이 한가롭게 노닐며 개들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다. 여러채의 기와집들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주고받으며 주인과 손님의 품격을 살려준다. 하늘은 고요한데 바람은 일렁이고 정겨운 삶이 그저 한가롭다.’ 이씨는 언제부터인가 수오재 역시 삼 정승과도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생각에 ‘삼공불환 수오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왕의 길을 걷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펴냈다. 천년 경주 문화 길잡이로 활동하면서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황금의 나라 신라, 아름다운 경주’ ‘한국 민화 컬러링북’ 등에 이어 나온 책이다. 그가 왕릉문화 답사가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처 전원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