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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골수도(孟骨水道) 죽도 등대
죽도 등대 |
위 치 :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리 12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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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락 처 : 죽도항로표지관리소 ☎ 061-542-1500 홈페이지 : www.seantour.com > 등대정보 개 요 : 1800년경에 최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죽도"라고 부르 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 서남해역의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조도지구에 위치한 50만㎡의 섬으로 거친 파도와 풍파에 씻겨 이루어진 기암괴석과 바다안개에 쌓여 아름다운 자태를 숨 기고 있는 병풍도가 근해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도군도의 대표적인 절경의 집산지인 관매도는 빼 놓을 수 없는 주변 관광지이다. 서남해의 끝단에 있는 많은 다도해들 중 가장 외해에 위치한 거차군도를 막지나면 마치 바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거북이 등같이 보이는 노출된 암초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진도 일원의 섬들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부산,인천으 로 향하는 대형선박들은 거차군도와 맹골군도 사이의 맹골수도로 통항한다. 그리고 목포항에 서 만선의 꿈을 실은 어선이 동지나해 및 흑산제도 해역으로 출어하는 길목이기도하다. 이 해역을 통항하는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위한 이정표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죽도(竹島)등대 이다. 1907년 12월에 초점등하여 점차 그 규모가 확대되어 무선전신과 방향탐지기등이 설치 되어 고유의 업무수행중, 태평양전쟁으로 시설물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나, 해방후 다시 복구 되어 현재는 광파표지(회전식등명기), 음파표지(에어싸이렌), 전파표지(RACON)을 운영하고 있다. 맹골군도를 이루고 있는 가장 큰섬은 맹골도이고 북방의 섬이 죽도등대가 위치한 죽도 이다. * 최초점등일 : 1907.12 * 구 조 : 백원형콘크리트(8.5m) * 등 질 : 백10초1섬광(광달거리21해리) * 특 징 : 남해서부 연안의 끝자락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맹골군도에 위치한 등대이며 맹골수도를 통과하는 선박 및 대형선박의 육지 초인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 교통정보 : * 목포 터미널(1시간 소요)→진도행 직행버스 탑승(1시간 간격으로 운행) →진도버스터미널 도착(1시간30분 소요)→팽목행 군내버스 승차(40~50분 소요) →팽목항 하차 * 팽목항→하조도(09:20출발 철부선/30분 소요)→섬사랑2호 (낙도보조 항로/오전11:10 경 하조도 출항)→죽도(1시간40분 소요) 주변명소 : 죽도재넘취, 관매도해수욕장, 병풍도수정바위 정보제공 : 해산수산부 [바다여행] www.seantour.com |
맹골수도(孟骨水道)
세월호 침몰사고 발생 지점은 맹골수도(孟骨水道)입니다.
맹골수도의 주요 세 섬은 맹골도와 서거차도, 병풍도입니다.
세월호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의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의 뱃길을 따라 내려가 병풍도를 오른쪽으로 보고 내려가야 했습니다.
세월호 침몰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섬은 병풍도입니다.
사고 현장은 병풍도 정북방 3㎞ 지점이고, 동거차도에서 보면 정남방 4㎞ 지점입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병풍도는 해양기상이나 해상위치의 서남해 기점처럼 쓰입니다.
병풍도는 무인도이고, 행정구역상 동거차리 산16번지(상도·면적 28㏊)와 산17번지(하도·면적 27㏊)입니다.
이 섬의 주인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주소를 둔 H(58)씨입니다.
H씨는 2005년 동거차 사람들로부터 5억5000만원을 주고 샀다고 전해집니다.
병풍도는 다도해국립해상공원에 있습니다.
1981년 국립다도해해상공원으로 지정되며 개발행위가 제한됐고, 1997년에는 ‘생태계보존에 관한 법률’에 의해 생태보전 섬으로
지정되어 출입도 제한되고 있습니다.
섬주인 H씨는 동거차도 육동 동네에 별장을 짓고 이 섬을 드나든다고 주민들은 말했습니다.
맹골수도 가장 남쪽 섬인 병풍도 근해는 어족자원이 풍부하고 산란장으로 이용되어 예부터 풍어 이루는 고기 구덕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안강망 어선 300여척이 몰려와 삼치잡이로 재미를 봤습니다.
이 해역에서 피항(避港)하기 좋은 서거차도에는 파시(波市)가 섰고 일본인 정착이 시작되었으며 1급요리점도 들어섰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35년 서거차항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대피시설이 건설되던 1939년 태풍이 몰아쳐 20여척의 어선이 부서졌습니다.
1960년 12월에는 목포∼제주행 경주호가 친북자들에게 납치된 적이 있습니다.
경주호 선장 이계룡씨는 안개 낀 이 해역의 특징 이용해 병풍도 해역 빙글빙글 돌았고 기관이 고장난 것처럼 위장, 결국 납치범
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습니다.
1968년 12월 15일 이 해역서 부산에서 인천으로 향하던 유조선 천지호(524t)가 좌초해 선원 7명 죽고 벙커C유가 유출되 병풍도
해안선은 기름범벅이 되었습니다.
이때 거차도 사람들은 해조류피해보상금으로 5600만원을 받았습니다.
2008년 경우, 이 지역 기상은 1년 중 37%가량인 135일이 안개가 피어오르고, 비 오는 날이 121일이었습니다.
맑은 날은 67일뿐이었습니다.
궂은날이 많고 흙탕물인 데다 물 밑바닥이 모래층이라 고기가 산란하러 몰려듭니다.
이 해역의 전복은 천적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고 먹이도 많아 국내에서 가장 크고 살찐 전복이 생산됩니다.
거차군도와 맹골군도는 거센 물길이 지나는 곳이라 질 좋은 미역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맹골군도 중의 곽도는 옛날부터 미역섬으로 불리는 미역 주산지입니다.
한자로 ‘미역 곽’ 자를 써서 곽도(藿島)입니다.
병풍도에서 멀지 않은 남쪽이 동중국해 어장의 중심입니다.
병풍도는 남해안과 서해안 중간목에 있어서 난류성어족이나 서해어족이 뒤섞여 해조류 116종, 게만 17종이 채집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황금어장의 중심입니다.
병풍도는 갯바위 낚시터로도 유명합니다.
1년에 1000명 이상의 낚시꾼이 드나듭니다.
진도의 서망항과 팽목항에서 병풍도까지 배를 태워주고 한 사람당 7만원씩을 받습니다.
맹골군도 3개 유인도(맹골도, 곽도, 죽도)와 서거차군도를 도는 섬사랑9호(149t·시속 12노트)는 짝수날이면 출항통제가 없는 한
어김없이 이 해역을 운항합니다.
이 배 선장 강수영(64)씨는 이 해역 여객선만 31년째를 맡고 있으나 사고 한 번 난 적 없다고 했습니다.
팽목항과 서거차도를 한일해운 소속 한림페리호(100t·시속 12노트)가 매일 왕복 운항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해역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집앞 마당이며 생활터전입니다.
1969년 서거차항에는 해군기지대가 설치되고 고속정이 배치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수산업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정부는 1972년 서거차항을 제3종어항으로 지정하고 어업전진기지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인구 200여명에 불과했던 서거차도는 고깃배에 물만 팔아도 살만한 섬으로 알려졌고, 1973년 669명 몰려와 사는 풍요 누렸습니다.
목포∼서거차항 직항 여객선이 운행되기도 했습니다.
점차 어선장비가 발전하고 고속화하면서 진도내륙의 서방항이 이 해역 어선들의 물양장(物揚場·소형 선박이 접안하는 부두)으로
쓰이자 서거차도는 쇠락하기 시작, 오늘날 47가구 130여명이 사는 폐항(廢港)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이었던지 1992년 해군기지대마저 철수했습니다.
서거차도에서 5㎞ 정도 남서쪽으로 떨어진 맹골군도에는, 맹골도(1.15㎢)와 죽도(0.2㎢), 곽도(0.15㎢)의 3개 유인도가 있습니다.
죽도는 맹골도 북쪽으로 200m 거리에 있고 곽도는 맹골도에서 서남쪽 1㎞ 거리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진도 팽목항 곁 남도포에 남도만호 수군진이 있던 시절, 맹골도와 서거차도는 이 해역의 봉화를 담당하던 연대(煙臺)로
쓰였습니다.
맹골 세 섬은 17세기 초 이후 300년간이나 해남 연동에 살던 고산 윤선도 집안 소유였습니다.
맹골도는 목포해역에서 동중국해나 제주, 소흑산도 해역으로 나가려면 거쳐야 하는 물목에 있습니다.
죽도에서 병풍도 지나가는 물목은 시속 7∼8노트의 물이 흘러, 그 중심 섬은 예부터 물이 거친 바다라 하여 ‘거친 섬’이란 뜻으로
‘거추섬’이라 불렸습니다.
거추섬을 한자로 거차도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847년 청해진 장보고 선단의 도움으로 당나라 여행을 끝내고 일본에 돌아간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기(入唐求法巡禮記)’에도
이 물목의 성을 구초도(丘草島)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897년 목포항 개항해 호남 물산의 중심을 삼은 일본은 1907년 맹골군도 북쪽 대섬(竹島)을 등대기지로 정하고 석유백열등 등대를
세웠습니다.
인천 앞바다 팔미도등대보다는 4년이 늦었지만 목포해역에서는 맨 처음 생긴 유인(有人)등대입니다.
이 등대는 대한제국 탁지부세관 공사부 등대국 죽도등대라 불렀습니다.
서해의 찬물과 남해 난류가 합류하는 물목이라 안개가 잦기 때문에 등대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면 소리로 위험 알렸고 타종시설도
갖췄습니다.
이 시설들은 광복 직전 미군 폭격으로 파괴됐습니다.
본디 이 물목은 거차수도라 불러야 옳은 이름이지만 맹골도 부속섬인 죽도에 등대 있기 때문에, 해도상 등대 있는 섬을 중심으로
맹골수도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죽도는 유인등대가 생긴 뒤 등대 주유선 드나들어 다른 섬보다 교통편 좋아 1973년 15가구 130여명 살았지만 지금은 주민등록만
9가구일 뿐입니다.
겨울이면 여자 전도사 한 명과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한때 죽도등대에는 7명의 직원이 근무했으나 2009년 무인등대로 바뀌었습니다.
죽도나 맹골도 곽도 세 섬에서 나는 미역은 한 뭇(1뭇=10장) 20가닥에 50만원 이상 받고 여름 한철 공동채취 때 같이 일하면 집집
마다 1000만원 안팎의 수입을 올리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가구는 아홉 집입니다.
미역 공동채취와 분배권한 가지려면 두 달 사이에 며칠씩 이 섬에 들어와 생활해야 하고 주민등록상 주민이어야 합니다.
죽도보다 더 외진 곽도도 주민등록으로는 9가구 15명이 살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4가구만 섬을 지킵니다.
가장 큰 동네섬이라 할 맹골도 인구는 1970년 말 200여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17가구 60여명이 살고 있습니다.
근래 방파제 시설이 갖춰져 어선이 14척, 자동차도 있고 민박 겸 낚싯배 운영자도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 수역이 조력발전 후보지로 지정되어 답사해 갔다면서 조력발전소가 생기면 다시 활기를 찾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습니다.
죽도유인등대를 대신하도록 세워진 시설이 서망항의 진도선박관제소입니다.
관제소 관할수역 내 항해선박은 안개속에서 레이더로 알 수 있고 무선송수신전화로 해양기상이나 위험 알릴 수 있어 유인등대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지나치게 첨단장비만을 믿고 관리와 통제를 소홀히 하다가 재앙을 불렀습니다.
서거차해군기지만 철수하지 않았더라도 사고 20분 내에 긴급구호가 이뤄졌을 터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해양시대에 해군기지나 해양경찰이 해역서 먼 내륙으로 후퇴하며 맹골수역이 오명의 해역이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조선닷컴>
♬ Any Dream Will Do 연주곡
<여객선 세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