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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차 수원교구 성경잔치 - < 말씀 체험 수기 공모> 수상작
제 안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
묵상 성경구절: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일에 감사하십시오. (1태살 5, 16~18)
최우수상 광교2동 성당 신동매 안젤라
준비되지 않은 이별
유난히도 무더위가 한창이던 3년 전 어느 날, 남편의 잠자는 모습이 이상하 게 느껴져 얼굴을 흔들며 “여보! 정신 차려요. 왜이래요. 일어나요. 눈을 떠 봐요. 눈을 뜨라고요·····소리쳐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벌떡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황급히 병원 응급실로 갔지만, 잠시 후 의사는 사망하셨다며 하얀 천을 들어 남편 얼굴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가면 안돼 요. 어떻게 우리를 두고 당신이 떠날 수 있어, 그럴 순 없어요. 난 당신 못 보내요. 하느님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잖아요. 하느님 고생만 한 제 남편 살려 주세요” 주저앉아 소리쳐 울어도 대답 없이 남편은 향년63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고야 말았습니다. 전날 밤에도 평소와 같았는데, “내일 병원 예약 있어 진료 받은 후 사우나 하고 저녁모임 갔다 올 테니 당 신도 저녁 먹고 오라고” 가 마지막 말이 되다니····· 하느님 너무하십니다. 정 말 너무하십니다. 좋은 사람을 이렇게 빨리 데려 가시다니요. 도저히 믿어지 지 않아 멍하니 있다가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을 장례미사로 해야겠다는 생 각에 냉담중임에도 성당에 전화를 했습니다. 연령회 회장님이 한 걸음에 달 려 오셨고 빈소가 차려지는 등 장례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해야 하는 우리가족에게 매사 정성 가득하신 신부님과 교우들은 천 사 같았습니다. 가는 이의 죄악을 씻어 주시고 영원한 안식을 청하는 위령기 도가 구구절절 울려 퍼질 때 비로소 남편의 떠남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영 정사진을 바라보며 고생만하다가 떠나는 남편이 불쌍해서 밤낮으로 울었습 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여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남편을 보낸 후 깊은 실의에 빠졌고 삶이 싫어졌습니다.
시어머니의 치매로 점점 더 멀리하게 된 신앙생활
직장생활하며 이런저런 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던 저와는 달리 시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신심이 깊은 시어머니가 치매진단을 받으며 우리가정의 일상생활은 어머니 중심으로 맞춰져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효심 깊은 남편은 가족이 돌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어 머니 케어 하는 일을 우선으로 하였습니다. 퇴직 후, 손수 어머니 기저귀 갈 아 드리는 일부터 식사 챙겨 드리는 일까지 정성을 다했습니다. 제게 주말은 어머니 목욕시켜 드리는 일부터 빨래, 인지기능 향상을 위한 놀이, 산책 등 어머니 증상이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몰두해야만 했기에 신앙생활은 점점 더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족은 정성으로 어머니를 위해 헌신했 지만 어머니의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휠체어를 타셔야 하고 수시로 배변처리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음에도 성당에 가시길 희망하시는 어머니 께는 성당에 못가도 하느님은 이해하신다며 매일 미사 책을 읽어드리는 것 으로 대신했습니다.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케어 하던 남편은 기저귀를 갈아 드릴 때마다 역겨 운 냄새로 인해 속이 뒤집어져서 식욕도 저하되고 흡연횟수가 증가한다며, 점점 야위어져 갔습니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고 제안 했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생하는 아들을 더 이상 못 보시겠다며 어머니가 요양원 입소를 계속 주장하셨습니다. 자주 찾아뵙고 주 말에 집으로 모셔오자며 남편을 설득한 후 동서와 함께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요양원에 가는 길은 왜 그리도 슬픈지·····입소절차를 밟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제게 담 당자는 딸이냐며 잘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며느 리라고 하자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요양원복으로 갈아입으신 어머니는 잘 있을 테니 빨리 가라고 손짓을 하셨습니다. 멀어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 하고 돌아오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3년간 어머니를 집에서 케어 하던 남 편은 수시로 면회를 가고 주말에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저의 주 말은 어머니 보양(補陽)해 드리는 일이 추가 되었지만 남편이 친구들도 만 나고 운동도 하며 아이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길어지는 등 여유 있는 모습으 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며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어머니를 안심하고 돌봐 주시는 곳이 있으니 제가 퇴직하면 크루즈 세계 여행을 해야겠다며 계획을 세웠습니다. 우선 가까운 곳부터 가기 시작 해서 먼 곳에 있는 아프리카까지 꼭 가고야 말겠다며 설레는 마음으로 지구 촌 곳곳을 검색했습니다. 당신 가고 싶은 곳 말해 보라며 제일 먼저 데리고 가겠다던 음성이 생생하게 귓전에 맴도는데·····효자이며 든든한 남편, 자상 한 아빠는 너무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짧은 생을 살다 갈 줄 이야·····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크루즈 세계여행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저는 진즉에 일을 그만두고 남편과 함께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후회로 긴 세월 괴로워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
짝 잃은 외기러기가 된 제게 친·인척, 친구, 직장동료, 교우들은 수시로 안 부전화를 하며 저의 일상을 묻곤 하였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성당에 잘 다 니고 있다고 안심시켰지만 남편의 부재가 가장 큰 충격임을 실감하며 몸과 마음은 쇠약해져 갔습니다.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았습니다. 말만 하면 남편이 척척 해 주었었는데 이젠 스스로 해야 하니 모든 것이 힘겹고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남편의 사망신고를 하던 날은 온 몸이 쳐지고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루 종일 울기만 했습니다. 바람소리, 발자국 소리 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무서움과 두려움에 한없이 작아지던 때 주변사람들의 관심이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부부가 교우인 친구 내외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며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느껴서 내 안에 신앙이 자리 잡아야 됨을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열일마다하고 시간을 내어 1 주일에 한 번씩 전국에 있는 성지를 순회하며 신앙의 깊이를 일깨워 주었습 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떳떳하게 죽음을 택했던 신자들의 신앙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성지마다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고 특징이 있었 습니다. 느낌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멀리했던 신앙이 조금씩 뿌리 내릴 수 있었고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런 경험들이 초석이 되어 성가, 성경, 기도서를 늘 가까이 하면서 주님의 은 총이 함께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 시오. 모든 일에 감사 하십시오”라는 성구가 제 마음속에 와 닿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성구를 깊이 묵상하니 감사할 일들은 너무도 많 았습니다.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고해소에서 펑펑 울던 저를 격려해 주신 신부님이 계셔서 감사하고,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하며 치매 가 있지만 아들을 기억하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사 청하시 는 시어머니가 계셔서 감사하며, 올곧게 성장한 자녀들이 있어 감사하고, 주 변에 좋은 교우들과 지인들이 있어 감사하며, 무엇보다도 남편의 마지막을 장례미사로 떠날 수 있게 한 점 또한 감사하며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함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사함은 커져가고 기쁨은 배가 되었습니 다. 성당에 부임해 오신 신부님의 첫 번째 장례미사로 남편과 이별을 한 후 다시 찾은 성전은 우리가족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셨습니다. 점점 더 하느님 의 자비하심과 신앙의 신비를 알게 되었고 미사참례로 내 안에 주님을 모심은 큰 기쁨이요 축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냉담신자에서 열심신자로 변화 되었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견진성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와 딸에 게 신심이 깊고 포용력이 있는 견진대모님을 만날 수 있음 또한 주님의 은 총이라고 생각하며 다시는 주님 곁을 떠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날이 갈 수록 하느님 계신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워졌습니다. 성전을 찾아 조 용히 기도하면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놀랍게도 좋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느 님 계신 이 좋은 성전을 찾도록 이끌어 주신 주님! 주님 계신 성전을 찾을 수 있음에 행복해할 때, 오랫동안 지켜보시던 견진대모님은 신자로서 해야 할 일이라며 지난 가을, 봉사활동 참여를 권유하셨습니다. 자신이 없어 극구 사양했지만, 도와주시겠다며 추천하시어 작년 11월 신부님으로부터 임명장 (교육분과장)을 받았습니다. 설렘으로 임명장을 받던 날 저는 하느님과 약속 했습니다. “이타적인 자세로 친절한 봉사자가 되겠습니다” 라고·····이후 새 성 전으로의 입당기념 전 신자 성경필사 봉사, 교구성경잔치와 관련된 봉사 등 크고 작은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교우들과 각종 매체에서 하는 성경공부,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기쁨이요 행복이기 에 이 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제안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
오랫동안 주님 곁을 떠났다가 큰 슬픔을 겪은 후 주님 곁으로 돌아온 죄인 을 내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제안에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 “하 느님! 너무 하십니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원망하던, 용서받지 못할 자를 용 서하시어 “언제나 기뻐하며 끊임없는 기도로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해 주신 주 님! 주님의 은혜는 참으로 깊고도 넓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굳게 믿으며 새 삶을 살게 해주신 주님!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기에 우리가족은 아쉬울 것 없 이 주님만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은총이 언제나 저희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 니다. 이승을 떠난 남편도, 남아 있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언제나 주님 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다가 영원한 천상가정에 들 수 있기를 기도하 며 응원하리라 확신합니다. 여보! 우리가족은 당신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십사 청하며 하느님 안에서 잘 살고 있어요. 당신도 우리처럼 잘사세요. 안녕.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성경묵상구절: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 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로마 8,24-25)
우수상 광교2동 성당 강현경 소화데레사
작년 10월에 있었던 딸 아이의 교통사고는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쿨존 사고였고, 덤프트럭에 치여 생명과 두 다리의 보존이 달린 큰 사고였다.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었고, 아이와 우리 가정뿐만 아니라 학 교 공동체, 성당 공동체, 지역 사회 공동체에도 큰 아픔을 주게 된 사건이었다.
나는 출근을 했었고 점심시간 이후 공강시간이었는데 아이가 교통사고가 났 다고 급박하게 온 전화를 받았지만 아이와 전화통화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 에 그 정도로 크게 다친 것인 줄을 몰랐었다. ‘엄마 나 교통사고 났어.’ 또랑또 랑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누워있는 상태였었고 구급차에 타지 않은 상 황이었는데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시 한번 놀랍기도 하고, 전화를 연결해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주신 아주머니의 지혜도 놀랍다. 어 쩌면 그것이 마지막 통화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거기에 있는 여러 목격자들과 구급대원들의 지혜로 빠른 대 처가 되었고,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아 대학병원 외상센터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고, 수술도 강의를 하다 말고 뛰어 내려오신 지금의 주치의 교수님 덕분에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우리 본당 주일학교 선생님의 사고 확인 전화에 “우리 애 맞고, 너무 비참해” 라고 소리쳤던 생각이 난다. 아이는 다쳐서 누워있는데 내가 걸어 다니고 있다 는 것이 너무 황당하고 비참했다. 아이의 생명이 위독했고, 양쪽 다리가 다쳤 는데 특히 왼쪽 다리는 처참하게 다 부서졌다고 했으며 그것을 사진으로 확인 하였다. 왼쪽 다리는 발목부터 골반 아래까지 다 열려있었고, 뼈, 근육, 근막이 다 으깨져 있었다. 그때 수술장에 들어갔던 정형외과 의사선생님들, 전공의 선 생님들, 인턴 선생님들도 다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이거 어떡하냐’ 너무 처참 하고 안타까운데 앞이 캄캄한거다.
교수님께서 수술 전에 말씀하시기를 생명과 두 다리 보존을 해야 하는데, 잘 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고 가능성 0%에서 시작하며 다리를 보존하려다가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다리를 절단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발목 쪽은 살릴 수 있는데 가장 안좋은 쪽은 골반 밑이라서 절 단이 이뤄지면 골반 밑부터 한다고 했다.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급한 불 끄는 치료는 수개월이 걸릴 텐데 그동안 엄마는 아이 앞에서 절대로 울거 나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성격, 기질도 중요 하며 교감신경으로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치료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이 아이는 기도가 필요한 아 이입니다.” 교수님은 천주교인은 아니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제부 터 엄마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도하고 기다리고 옆에 있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살면서 인연이 있었던 지인들, 친구 들, 성당의 형제, 자매님들께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 부탁을 드리는 카톡메 시지를 보냈다. 새로 만난 십자가, 나의 십자가, 우리 가정의 십자가뿐만 아니 라 나의 딸의 인생의 큰 십자가 앞에서, 그 큰 고통을 나는 혼자 견뎌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기도해달라고 매달리는 거였다. 우리 본당 신부님뿐만 아니라 청년시절 인연이 있었던 신부님, 수녀님, 함께 공부하는 신부님, 함께 봉사했 던 자매님들, 언니들, 친구들, 학교 엄마들께 연락을 드리니 저녁때쯤 대략 기 도군단 2,000명 정도는 만들지 않았을까 예상이 되었다. 그리고 원목실 예수 님 성체 앞에 엎드려 있었다.
‘주님 당신께서 이렇게 오셨습니까? 주님, 죄인이 여기 있사오니 자비를 베풀 어주십시오. 제 딸이 아니고 당신의 딸이며, 데려가신다면 주님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 제가 할 건 다 했으니 이제 주님께 맡깁니다.’
그동안 살면서 만난 십자가 앞에서는 그 고통이 싫어서 감추고, 마치 십자가 가 없는 척 외면도 하고, 불평불만도 하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열이 받아서 부르르 떠는 나였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딸의 생명이 걸린 십자가 앞에서는 그저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그날 병원 원목실 책장에서 만난 책이 ‘나의 멘토, 나의 성인’이었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자비의 예수님’ 상본 기도문이 있었다. 원목실 수녀님의 허락도 없이 들고 올라와서 아이 침대에 아이 시야에 아주 잘 보이는 곳에 딱 붙여놨 다. 그리고 사고가 있었던 걸 몰랐던 친구가 ‘파티마 성모님 그림’을 메시지로 보내주었고, 다음날 또 다른 친구가 보내준 ‘주님을 찬양합니다.’ 악보가 집에 도착하였다. 또한 10월30일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필리 1,8)이었기 때문에 뭔가 하느님께서 아이를 지켜주실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앞이 캄캄해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믿음으로! 그리고 이 큰 고통 속에서 내가 해 야할 것이 기도하는 것, 곧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4) 와 같이 고통 앞에서 내가 붙들 수 있는 끈은 살아계신 하느님 말씀 과 신앙이었다.
‘뼈, 근육, 근막’을 봉합하는 첫 번째 큰 수술을 마치고 독방으로 올라와 지내 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밤의 침묵 속에서 딸 아이의 왼쪽 다리의 살 썩는 냄새 를 맡으며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그 상황 속에서 돌아가신 아빠의 얼굴이 불현 듯 보였다. 내 어린시절 아빠도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치셨었고, 그것이 우리 원가정의 십자가였다. 돌아가신 건 나중에 뇌출혈이었지만. 아무튼 천상 에 영혼이 살아있기에 이렇게 갑자기 꿈결인지 현실인지 모르게 보여지는걸 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지켜주실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1월2일에 내 게 다가온 말씀은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 님을 보리라’(욥 19, 26)였다.
그리고 낮에는 우리 본당 자매님들과 전 본당 자매님들, 친구들의 전화를 받 았는데 내가 모르는 신자분들이 엄청 많이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데 ‘뭔가 느 낌이 좋다, 잘 될거다, 다리가 보이는데 뼈가 곧다.’ 기도의 응답들을 받았다면 서 계속해서 잘 될거니까 앞으로 나아가라는 응원의 메시지들을 받았다. 병원 현장에서 아이는 수십 번의 전신마취와 수술을 했고, 벗겨진 피부를 살려내기 위해 다리가 썩지 않도록 매일 소독치료를 했고, 이후에는 오른쪽 다리의 피부 를 떼서 왼쪽으로 붙이는 피부이식 수술도 수차례 했는데, 이 고통이 실로 말 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내가 대신 아플수도 없고 그저 가슴만 찢어질 뿐이었다. 소독치료를 할 때는 진짜 현실로 ‘피와 물’을 계속 보는 거였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천주교 공동체 기도에 힘입어서 그 믿음의 힘을 가지고 성모님과 함께 ‘고통의 신비’를 열심히 바치고 주님의 수 난을 묵상하며 그 고통을 이겨내는거였다. 그저 비참한 내가 이겨낸다라는 말 이 우습지만 아이의 고통을 보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 3시에는 ‘예수님, 저는 당신께 의탁합니다.’ 하느님 자비를 비는 기도를 바치며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을 떠올렸다. 아이가 두 발로 처음 일어나던 날은 성탄절이었다. 그날은 기쁘기도 했지만 슬펐던 것이 같은 병동에서 1살짜리 아기가 하늘로 떠났던 것이다. 소아병동 장기 투숙객으로 있다보니 많은 아기 들이 병원에 와서 수술하고 퇴원하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정말 많은 아기들, 아이들이 아프다. 대체적으로 머리 수술을 하는 것을 보았다. 아픈 곳, 고통받는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성탄선물로 누군가 병이 낫는다 면 또 누군가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월말에서 3월까지 의 목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아이가 걸어서 새로 지어진 우리 본당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간 재활병원에 있으면서 피부이식 후 전과는 다른 상황에서 소독치료를 해야 했고, 4인실 공동체 생활에서 겪는 인간적인 갈등 상황들도 겪어가며, 특히 아이는 두 발로 걷기까지 눈물로 힘겨운 재활치 료를 해냈다. 드디어 부활에 맞춰 아이가 걸어서 우리 본당 새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던 날에 생명의 은인도 만나고, 교구장 주교님께서 주신 ‘교황님 십자 가’도 목에 걸 수 있었고, 그간 성전 지으시느라 고생하시는데 우리 가정의 아 픔으로 마음고생 하셨을 신부님의 눈물로 우리 공동체 신자들이 함께 울었던 그 감격의 순간이 떠오른다. 신앙 안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 기도, 그 믿음의 힘과 주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얻어 우리 아이가 고통을 이겨내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갚지도 못할 만큼 큰 사랑과 은혜를 입었기에 앞으로 나는 어 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기도로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기도가 막히면 죽는다, 또 한 번의 기적을 위해 기도도 마라톤으로, 용기 잃 지 말고 늘 함께 있을게요, 하느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사막에서는 길을 묻지 않는 거래요” 라고 일일이 다 쓰지 못하지만 이렇게 말씀해주신 신부님 들, “네 인생 때문에! 성모님 발 잡고 예수님 무릎 잡고 울면서 기도한다” 하신 수녀님, 평소 기도할 때 쓰셨던 귀한 묵주와 교황님 피규어, 성모님 상본 주신 자매님들, 수술 때마다 100단씩 기도 바쳐주신 레지오 자매님들, 직접 위 로해주러 오신 반주자님들, 성인호칭기도 매일 바쳐주신 주일학교 선생님들, 병원에서 만난 가브리엘라, 라파엘라 천사들,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밤새 주 님의 기도 100단 바친 옆 침대 아녜스 자매님, 만날 때마다 기도해주신 원목 실 수녀님, 매번 수술장에 프란치스코 목걸이를 하고 오신 전공의 선생님, 그 분들이 모두 예수님, 성모님의 얼굴이었고, 천사들이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 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 립니다.’(로마 8,24-25). 라는 말씀이 늘 우리와 함께 했고, ‘고통 속에서도 십 자가의 길을 따랐던 순교의 삶을 본받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함께 나아가 는 천주교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음에 감사드리며, 그 아픔의 시간들은 모두 은총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해본다.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 아이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주신 분들과 지금 이 시간에도 병으로 인해 아파하고 고통으로 희생하 고 계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사는 길이 은혜를 갚은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은총의 삶
성경묵상구절: 보라 내가 문앞에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우수상 범계성당 이정숙 마리아
▶ 라오디케이아에서 바람결에 들려온 주님의 말씀
라오디케이아 교회 터
2019년 5월 신학원 졸업 기념으로 ‘사도 바오 로의 발자취를 따라서’ 터키와 그리스 성지순례 를 떠났다. 사도 바오로의 1, 2, 3차 선교 여행 과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찾아 떠나는 길이었기 에 출발 전부터 설레었다. 요한 묵시록 2장과 3 장에는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티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이 있다.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였기에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이 라오디케이아 교회 유적지였다.
콜로사이 교회 중 하나인 이곳은 사도 바오로의 제자 콜로사이 출신 에파 프라스가 세웠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 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 람입니다.”(콜로 1,7-8)
주님의 사랑과 칭찬을 받았던 교회가 어찌하여 다음과 같이 혹독한 책망 을 듣고 징계를 받게 되었는가?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 어 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을 것을 깨닫지 못한다.” (묵시 3,15-17)
그러나 참회와 회복을 촉구하시며 애원하는 주님을 만난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라오디케이아는 자원이 풍부하고 번창한 상업도시였다. 히에라폴리스의 파묵칼레 온천물이 9km 떨어진 이곳까지 흘러오고, 금광이 있었으며, ‘후루기아’ 라는 안약 원료의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당시 사도 바오로가 콜로사이에 있는 교회들을 얼마나 사랑하였지? 콜로새서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의 번영과 영광은 다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아 초대 교회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5월의 양귀비 향기가 바람에 실려 코끝을 간지럽히는데..., 첫사랑의 열정을 잃고 기계적으로 무덤덤해진 신앙과 이만 하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교만하고 느슨한 마음을 책망하는 주님의 음성이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신앙을 회개하지 않으면 입에서 뱉어 버 리겠다.’
▶ 주님은 당신의 몸을 주려고 33년 동안 마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즈음부터 가끔 나에게 물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 디로 가는가?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참된 행복이란 무엇일까? 성공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세상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공 부를 열심히 하여 직장을 얻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면 성공한 삶일까?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 가는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결혼하여 서울로 왔다. 낯선 곳 서울살이는 쉽지 않았다. 직장생활과 육아에 힘이 들었는지 30대 초반에 심 장병과 요통과 악성빈혈을 심하게 앓았다. 병원에서도 치료 방법이 없고 신 경성이라니 암담했다. 마음마저 늘 갈팡질팡하였으니 삶이 행복할 수가 없 다. 남편과의 종교 갈등, 먹고사는 문제,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대가족의 인 간관계 등은 늘 무거운 짐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삶의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천주교회에 입문하였다.
예비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받는 날 새벽 꿈속에서 주님은 커다란 성체를 들고 오셨다. “마리아야, 내가 너에게 나의 몸과 피를 주려고 33년을 기다렸다. 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날마다 나의 몸을 받아먹고 나의 피를 받아 마셔라.” 잠에서 깨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라오디케이아 유적지
이른 새벽부터 몸을 단장하며 세례받을 준비를 하였다. 새 영세자 대표로 둘 째 독서를 낭독하게 되어 앞자리에 앉았다. 세례성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유 없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드디어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순간이다. 꿈 속에서 보았던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 하며 사제의 손에서 나의 손으로 옮 겨졌다. 얼마나 모시고 싶었던 성체인가? 심장이 뛰면서 온몸이 뜨거워서 성 체가 어떻게 목 안으로 내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시작된 미사와 영 성체는 나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성체 앞으로 나아갈수록 꼬리를 물 던 질문의 답을 찾게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치가 달라졌다.
▶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에 매일 미사를 드렸다. 세례 후 3년 동안은 성체를 모실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착한 목자 예수님은 비 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죄 많은 딸을 당신의 몸과 피로 양육하셨다. 생명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주시고 죽어가던 몸에 생기를 불어넣 으며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되찾아 주었다. 말씀과 미사와 기도가 삶의 중심 이 되면서 시나브로 창조주 하느님 구세주 예수님 거룩한 성령님의 사랑에 빠져들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 는 부활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 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 다.”(갈라 2,20)라는 말씀이 심장에 새겨졌다.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은 총의 삶은 날마다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하였다. 힘들었던 타향살이 직장생활 가정생활 신앙생활은 점점 질서가 잡혔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상 생하여 갔다.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삶을 혼자서 누릴 수는 없었다. 남편, 자 녀들, 시댁, 친정, 동료, 이웃, 친구들에게 주님의 현존을 증언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교우들과의 친교는 물론 다양한 신심 행위와 단체 활동과 봉사활 동도 무척 즐거웠다.
물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세상만사가 평탄한 것은 아니다. 갑자기 불어닥치는 예상치 못한 풍파도 적지 않았다. 남편은 사기를 당하여 잘 다니 던 직장을 잃고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다. 크고 작은 병마가 가족들 사이 에서 떠나지 않았다. 주택 구매로 생긴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하여 밤잠을 설 치기도 하였다. 사랑하고 아끼는 시동생이 외국 출장 중에 횡사를 당하였고, 뜻밖의 교통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적도 있다. 우리에겐 아니겠지 하던 몹쓸 암이 찾아와 홀연히 남편을 하늘나라로 데려갔다. 고난이 클수록 고통 이 심할수록 눈물 콧물 흘리며 십자가를 붙들었다.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며 성체 앞으로 나아가 풀리지 않는 일들을 놓고 탄원하였다. 주님은 그 눈물과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고난을 극복할 믿음과 용기를 주셨다. 시련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으면 주님은 친정 부모님처럼 다독이며 지혜와 해결 방법을 찾 아 주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격적 만남이 이뤄지면서 주님의 자녀로서 견책과 징계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수없이 많은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셨다.
▶ 승리하는 사람은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드린 것뿐인데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동안 죄와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한 답을 주 셨다.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께 풀리지 않는 인생의 해법, 참된 행복, 영 원한 기쁨이 있다. 이미 시작된 구원 그러나 아직은 완성되지 않는 구원을 향해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신랑이 올 때까지 등불을 밝혀 들고 깨어 기도하 고 있다.
믿음(信), 소망(望), 사랑(愛)의 향주삼덕과 지덕(智德), 의덕(義德), 용덕 (勇德), 절덕(節德)의 네 가지 덕을 가치 기준으로 삼고 정결(淨潔), 청빈 (淸貧), 순명(順命)의 복음 삼덕을 살고 있다. 나의 가장 큰 신앙의 모델은 성모마리아 어머니시다.
주님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선교사로서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 한다. 때론 버겁게 들려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외면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 안의 파라오와 모세는 늘 영적 결투를 벌인다. 결국은 모세가 승 리할 것이 자명하지만 파라오의 완고함과 고집이 언제나 하느님의 길을 가 로막는다. 가장 좋은 핑계 ‘이제는 나이도 들었고 능력도 없고 그만하면 되 지 않습니까?’라고 하지만 주님은 “아브라함은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났 고, 모세는 80세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시며 전진을 명하신다.
말씀 체험 수기를 쓰게 하여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시고 미지근한 신앙을 일으켜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 어좌에 함께 앉 게 될 그 날까지 복음을 전파하는데 남은 생애를 불태워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