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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실파(寒實派)조철수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원영 조철수
나에게 기적을 (단편소설)
원영(原 詠)
“예수님과 동행한 너다.”
십자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금산이는 유아 때 세례명을 신부님으로부터 ‘야고보’라는 향나무교회 이름으로 받았다. 가족과 친척들, 믿음이 같은 형제와 자매들 보는 앞에서 십계명은 꼭 지켜야 한다며 강조하신 어른들-. 없이 살아가는 가정에서 산다는 것이 또한 가져보고 싶은 유혹의 눈이 또 지천이 따로 없다.
‘선 넘으면 죄짓는 것도 잊지 마라.’
유령으로부터 십자가 믿음이 흔들리는 나무들에게 같이 놀자는 말이 안 통할 때마다 대못 자국으로 세월처럼 물 흐르는 듯, 그런 일이 나에게 있었다. 스쳐 가는 뱀도 밟으면 꿈틀거리듯이 야고보를 통해서 그랬다. 모악산에 위치한 금동골짜기 몇 대부터 향나무십자가를 머리에 섬기면서 살아온 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산속으로 들어가 은둔 했다고 야고보는 그때 들었다. 혹시 문중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누가 될까 봐. 가문을 등 하시 하면서까지 기미 박해로 끌려가 천주 실록을 믿을래? 안 믿을래? 믿는다 하면 고문과 사형이 이루어져 가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누구나 그 시절은 책으로 TV를 통해서 알겠지만 고상과 상분 성경책들을 땅 속에다 파묻어 놓고 살아가다 발각되는 날엔 곧바로 현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이야기도-. 일부는 머릿속에 성경 글을 넣어두고 산에 가 살았으며 믿음의 골짜기 교회를 운영하시는 성직자께서 농작물까지 수작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에 믿음이 눈에 보이도록 야고보 눈에는 반짝거렸다. 매일같이 식사할 때마다 성호경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을 그린다. 그리고 돌아온 주일날에 가족들 하고 찾아간 기도실에서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운명하신 날에 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초상을 두고 밭둑을 오가다 길에 주저앉으셨다. 그런 몸으로 초상을 치르는데 윗동네 지관이신 이장님께서 하신 말에 의하면,
“아래쪽 밭에다 어르신을 모신다면 작은 아들네가 잘될걸.”
이 말을 들은 일가 어른들과 할머니 등쌀에 능선 너머다 할아버지 산소를 모셨으니 산밭을 두고 휴전선처럼 위쪽 땅은 며느리가 차지해서 작물을 이용했다. 해가 갈수록 어머니의 우환이 더욱 심해져서 울타리 너머로 선화 엄마가 찾아와 때로는 밥도 짓고 빨래도 해 주므로 그 값이 잡곡으로 대처했다.
“금산이 어머니, 대천 소시장 쪽에 가면 사주팔자를 잘 보는 한의원이 있는데 잘 맞힌데―. 거기 아저씨를 한번 데리고 가봤으면 해요. 그리고 족집게래~ 알았지.”
“고맙네. 선화 엄마.”
다음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께서 아픈 다리를 대신해 작대기를 의지해서 두 분은 버스를 타고 노을이들 무렵 오간 별빛 시골창호지에서 들려오는 말이었다.
“여보, 철학관에서의 말씀이 어때요?”
“잘 맞추던데. 본 것처럼.”
다급한 어머니의 목소리 앞에 묵묵 대답이신 아버지. 먼-옛날도 아닌 점술 이야기만 하면 노발대발했던 아버지였다.
이웃에서 굿판을 벌이는 날에는 돈과 쌀이 넘쳐난다. 굿하는 날이면 징소리와 장구소리가 마을 전체 농악놀이 잔치가 따로 없는 저녁 날처럼 늦은 밤까지 그 당당함은 어디로 가고 눈으로 확인한 아버지께서 그때서야 세상을 보는 듯 한두 분이 말씀하는 것을 토끼 귀 세우고 들은 야고보.
“너희 할아버지 모신 산소가 산송장 여럿이 나온다더라. 아빠도 들었다. 그때 매장한 곳에 홍수난 물처럼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 본 것처럼 말하더라.”
“아빠, 그것이 사실이에요.”
말이 없는 아버지께서 고개를 흔드셨다. 토정비결 속에 눈과 귀로 사주의 내용을 봤으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이 할아버지 산소를 옮겨요. 더 추워지기 전에 그렇지 않으면 산송장 여럿이 죽어 나간다잖아요.”
엄두가 안 난 아버지께서 그때까지 무응답으로―. 조부께서 흙으로 가신 지 6개월이 되었고 진송장이다.
“당신께서 실천을 못 내리시면 내가 산소를 옮길 테니 따라와만 줘요.”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적거렸다. 다음날이 밝아오자 찬바람이 살결을 도려 낸듯한 동지 바람과 눈이 사방 천지랄까? 어머니께서 동네 분들을 모셔 놓고 그동안 일어난 아픔에 대해서 터줏대감들에게 통사정을 하자 그런 일이-. 청진이 아저씨가 앞장을 서서 저울추 이장님 참석 하에 꽁꽁 언 산소를 곡괭이와 삽으로 파헤치자 대나무 관속까지 물 방죽이었다. 시신 쪽으로 다슬기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목격한 마을 사람들마다 다들 이럴 수가 있을까? 무덤자리와 이동거리는 얼마 안 떨어진 곳에다 시신을 옮기는데 그곳은 금 붉은 흙으로 보는 이들마다 좋은 땅이 이곳이야 입들을 모았다. 그 후로 어머니의 우환은 더는 심하지 않았고 그런 데로 작대기 하나로 몸을 지탱하면서 삶을 낚았다. 그때부터 십자가와 멀리해서랄까 믿음 하나로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삶까지 유식이가 그동안 따로 없이 아멘으로 그래도 일가 어른들은 그때 할머니 편이랄까? 그런 마음의 세월에 우환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한 어머니 생각이랄까? 틈나는 대로 점술 집을 찾아가 마음을 그쪽으로 의지하는 듯 야곱의 느낌으로 보였다. 어머니는 늘 친정집 넷째 오빠인 한쪽 팔을 못 쓴다는 이유로 묏자리 잘못 쓴 이유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숨이 머질 때 화장하라고 유언 아닌 유언이었다. 산자들이 좋지도 싫지도 안타나-. 당신 오빠도 어렸을 때 건강했으나 친정아버지 묏자리가 생긴 후 일이라면 함부로 이장도 할 수가 없는 것들이 묏자리라고 말을 늘어놓으셨다. 그 후로 대형병원과 한의원 또는 약국을 찾아 용하다는 곳마다 다 찾아 다녔지만 이상한 발견이 안 나왔다. 마의 힘이니 누가 알까? 당한 자들만 바보 되는 건데 금산사 근처에 사시는 넷째오빠께서 불쌍하다고 어머니는 날마다 주문을 외우듯 입버릇처럼 늘 팔뚝을 붙잡고 이런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살다 먼 곳으로 가신 삼촌을 통해 야고보가 두 눈으로 바라만 봤다.
어린 날 저학년 졸업장도 없이 가난으로 장항선 열차에 몸을 싣고 용산역에 내려 몇 푼의 돈으로 여인숙을 돌며 탕진으로 노숙자 아닌 노숙자로 세탁비누가 세숫비누 된 야고보 얼굴은 종 다방과 역전극장 등을 배회했다. 막 다른 골목에 중국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취직 하려고 왔어요.”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일할 수가 있는데.”
자크가방 속에서 꺼내서 드리자 담보로 붙잡고 없을 때에 일을 안 시킨단다. 혹시라도 배달사고가 나면 돈만 챙겨서 달아난다나. 나는 그 시간부터 몸을 쓰니 배불리 우동을 먹을 수가 있었고 잠도 궁전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세월 속에 가족을 두고도 고아 아닌 고아처럼 배움이 부족한 나 홀로 청소와 날짜가 지날수록 계급장이 올랐다. 긴 계단을 큰 철가방 두 손에 들고 오가다가 때로는 계단 모서리 부딪치는가 하면 사람과 자전거에도 어느 날인가 철가방 통째로 길거리다 덮었을 때 웃음이 반이요. 울음이 반으로 교차할 때마다 마음의 고향 하늘을 그리워했고 가게 주인한테 구박받을 때마다 생각나는 오금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해가 갈수록 주방 그릇도 닦는 당번이 되어 날마다 그늘 속에서 오래도록 장화랑 싸운 그 이면에 레이노드 증후군 모르는 상태로 생활했다. 그때의 질병도 까마득히 잊고 산 이후로 일할 때마다 괴로움이 그 시간마다 찾아올 때. 그 당시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으나 초기였던 그때를 잊고 푸른 병원과 소문난 약국을 찾아다니면 복용해도 잘 낫지 않았다. 서양의학 발달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직업을 바꿔볼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들기도 날짜가 갈수록 주방 대모도 일과로 질병이 더 악화되는 바람에 참을 수 없는 육신은 오직 직업을 버리고 떠나 나오는 눈앞이 앞날을 막았다. 15년이란 세월에 배운 기술을 하루아침에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날이 먹구름 같았고 이젠 어디로 가서 일하면서 살아가야 할까? 불규칙한 삶은 안 될까? 또한 산 입에 거미줄은 안 칠까? 그러면서도 배운 것이 도둑이라고- 한식자리로 옮겨간 곳은 서울역에 위치한 인력 소개소를 통해서 알선료는 1개월을 못 채울 경우 당사자 책임이라고 넘으면 업주가 대납함으로 목매어 끌려가듯 메뉴는 다르지만 주방자리에서 홀 서빙으로 직업전환을 해야만 했다. 갑자기 나의 몸에 이상한 현상이 왔다. 옛날보다 심하게 일을 하지 않아도 피곤하면서 짜증이 나면서까지 누구한테 매일 두들겨 맞은 것처럼 삭신이 무거워졌다. 그럴 때 더운 물로 샤워하고 나면 처음엔 나은 느낌과 약국에 가서 파스를 붙이면 낫는 듯 반복되다 보니 임시방편이었다. 이웃사촌이 된 믿음의 십자가를 통해서 치유 약을 복용해도 치유 병원에 가도 그런 나를 식솔들이 볼 때마다 사지가 멀쩡한데 이런 이야기가 오갈 때 고통으로 해와 달을 맞아 살아가는 구름이 낀 몸뚱어리 칼질하는 푸줏간 고깃덩어리 잘린 듯 그 아픈 세월도 만성적이랄까? 어느 날 누가 말만 걸어오면 사고나 칠까? 그런 나날이 혼자 죽자니 살아온 시간이 아깝고 그냥 짊어지고 가자니 세상이 원망스럽고 가는 삶을 두고 물색 중인 상태였다. 속으로 왜! 이런 영들이 나한테 들어왔을까? 그에 대해 의문까지 고민이 깊어만 갔다.
철모르던 시절, 어느 여성과 동거한지 얼마 안 되어 그 여성이 입덧을 4개월 째 하는데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께서 갑자기 창고 같은 방으로 찾아오셨다. 일하고 온 나를 밖으로 비밀스럽게 불러내어 말씀하셨다.
“야야 너. 애인 귀족이 말이다. 마당가에서 총소리가 나더라. 방문을 열어 봤다. 지랄병을 하더라. 그 병이 말이다. 영원히 못 낫는단다. 그러니 그 귀족이 모르게 비밀병원으로 데리고 가 유산을 시켜라. 만일 아기를 낳는다면 어떻게 할래? 엄마 말을 잘 들어라. 평생 두고 후회하지 말고 알았지?”
나는 의심 없이 대답했다. 어머니 말씀인지라 정답인 줄 알고 다음날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내 눈으로 안 봤으니 지랄병 하는 것을―. 순간의 판단이 하느님 앞에 죄를 만들었고 결과로 마음의 병까지 또는 영원한 상처였다. 그로 말미암아 가정을 못 지키게 한 어머니의 모습이 싫어졌다. 나의 삶을 가지고 쇠기름 짜기 하니 서글펐다. 이용가치 도구로 삼았으니 그럴만하다. 둘이서 살아가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짓을 하게 한 어머니 행동들이 옳은가? 내 속으로 의심하게 할 때 간호사 분께서 보호자 앞길을 스쳤다.
“성별이 뭔가요.”
“풋고추인데요.”
산모 실에서 귀족이가 걸어 나오는 눈빛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죄의식으로 나는 거짓 약속 1년 후 서울역 광장 시계탑에서 만나기로 했다. 누구 때문에 우리의 공든 탑도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나의 가슴마다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사이랄까? 이슬과 가난 타령으로 어둠의 세월을 담배연기로 강과 산까지 까마득히 그런 날을 잊으면서 산 터널이 20년이 갈 때, 어머니가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금산아, 점을 잘 보는 집이 있더라. 당장 정금마을로 가보자. 직업도 맞아야 좋다더라.”
약속이나 한 것처럼 때 마침 찾아와 당신은 늘 점쟁이라고 자청을 강조했다. 그날 따라 못 이긴 척하면서 마을버스에 몸을 싣고 따라가는 가을 햇살 아래 붉은 감들이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골목을 향해 두리번 두리번 할 때 저 멀리 기와집 한 채가 다가왔다. 벨을 누르자 무응답이랄까? 번개처럼 나타난 보살이었다.
“어떻게-.”
“점을 보러왔어요.”
“풀이 난 지붕 보살한테 여동생도 단골로 다닌다더라. 점순이 더러 보살님 하더라.”
밖에서 볼 때는 허름한 집이었으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촛불이며 금불상이 앞을 막았다. 신당에 앉자마자 보살께서 주문을 외우기 시작 하더니 “성씨가 어딘가?”
“황금 씨입니다.”
“아들이 택시를 살려고요.”
“괜찮아. 그런데 조상님께서 배가 고프데 객사한 사람이 둘이야. 운전직업도 잘 선택 했어. 어깨부위가 아플 거야.”
내 몸 상태를 어디서 들은 것처럼 족집게 같았으며 속으로 너무나 신기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면 혹시라도 낫게 해 주지 않을까? 물에 빠진 사람이 썩은 줄이라도 생각이라고 할까? 그때 말을 걸어왔다.
“많이 아파요. 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상차림을 하는데 2백만 원 들어.”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께서 수표 2장을 건넸다. 그분과 짜고 고스톱을 친 것처럼 보였다.
“금산이가 준비해 올 물건이 있는데.”
“그것이 뭔데요?”
“속옷이야. 될 수 있으면 상차림을 하는데 통돼지 한 마리 짊어지고 삼각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올려야 하는데.”
“저는 기독교 신자라 안 갈 테니―. 믿으니 알아서 해 주세요.”
“함께 갔으면 좋을 텐데.”
“보살님을 믿으니 잘 부탁해요.”
“걱정하지 마. 10월 15일 오후 3시 산신당 굿하니 그리 알아요.”
“예. 수고해 주세요.”
“음력 생일 연시가 언제더라.”
“59년 6월 00일 기해년 새벽 5시라고 들었어요.”
“아무 염려하지 마.”
모자는 점술 집을 빠져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어지럼증으로 불상과 장식품을 볼 때마다 무서움으로 오늘 따라 그곳 분위기는 참으로 황홀했다. 가던 길로 오갔으며 둥지로 돌아와 세탁한 속옷을 챙겨서 저녁 시간 때에 어머니 손에 들렸다. 한 달을 기다려야 할 그 날짜와 시간을 달력에다 동그라미 크레파스 칠하며 날을 보내는 심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대로써 그날이 일치되는 순간 푸줏간 살점 덩어리 도려낸 듯한 몸뚱이는 검은 독수리 하늘을 날 때 발톱자국이 어깨 부위 통증이랄까? 거짓말처럼 싹 낫는 순간 영원히 나을 수는 없을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 깊어만 갔다. 1년 9개월 동안 아름다운 삶을 편안하게 잘 지내는데 다시 사지가 무거우면서 옛날과 같이 그 부위에 아픔이 또 찾아오고 있었다. 걱정 속에 하루 이틀을 보내는데 귀신의 장난 짓이란 체력을 통해서 느꼈을 때 매일매일 방영된 ‘SBS 엑소시스트’ TV를 통해서 볼 때마다 촬영을 참 잘했구나. 현장 체험을-. 눈으로 확인하니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나아 행복하게 살아갈까? 고민이 거듭될수록 괴로움이 더 쌓이고 힘이 빠져 있던 나는 쉬는 날엔 집안일을 하면서까지 귀신과 싸우고 있었다. 밖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그때 조용한 밖에 외장치던 나 한복을 입은 아줌마들이 얼굴을 디밀었다.
“지나가는 사람인데 물 한잔 할까요?”
“그러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방 자리가 누추해서.”
“괜찮아요.”
둘이서 앉자마자 두리번 두리번거리더니 한 분께서 일어나서,
“설거지 좀 도울까요? “
“괜찮아요.”
“그릇을 쌓아 두면 아이들한테 위생상 그래요.”
“수세미가 어디 있더라. 퐁퐁도 있어야 하는데.”
친근감을 만들기 위해서 말도 장난삼아 사랑의 표현을 현실로 보이고 있었다.
“혹시 들어보셨나요. 진리교를.”
“TV에서 봤어요.”
“전국적으로 형성화 되었어요.”
“감금과 폭력으로 신도들도 죽어가는 것을―. 재산 분할 싸움하는 것을 봤어요.”
“반쪽 달처럼 갈라진 교회지요 보아하니 몸도 불편한 것 같아요.”
한 분은 이야기로 이어가고 한 분은 장단을 맞추며 두 분의 이야기로 나의 병주머니까지 싹 나은 듯했다. 날마다 돌아가면서 오늘은 빨강 치마와 파랑치마가 찾아오고 내일은 노랑 치마와 분홍 치마가 찾아오고 모래는 감색 치마와 일행 한 분을 포함해 올 때도 있었다.
“꿈 속에서 뱀을 봤어요.”
“안 봤는데요.”
“이상하다. 이 정성이면 나타나는데.”
“진리교회 입적하게 따라갑시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강나루 쪽에 있어요.”
내일 약속을 서두른 아침햇살이랄까? 치마 자락이 찾아와 길 안내 받으며 앞서보니 뒤서거니 송학 버스정류장에 이르러 버스를 타고 가다 전철로 갈아탔다. 시흥역에 내려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일행들 따라간 기도실엔 교주의 안내 받으며 차례비 350,000원을 들여서 음독 주를 나누고서야 남자는 외숙으로 여자는 내숙으로 그곳에서 불렀다. 이틀마다 한 번씩 기도실을 찾아가 하얀 겉옷을 입은 후 미륵상 앞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렇게 5개월이 흘러갔을까? 갑자기 호출이 와서 나무계단을 통해 건물3층으로 서둘러 달려갔더니 관리자의 안내를 받았다.
“오늘 낼 돈이 얼마인가.”
“1,000원 지폐 20,000원이요.”
“택시 기사가 그렇지 그것이라도 줘.”
‘만날 때마다 돈타령 하루건너 돈타령 하루 벌어 하루살이 사람한테 속으로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고쳐 준다던 병은 그대로 두고 내가 뭐하는 짓인가’ 교주 같은 분이 다가와서,
“될 수 있으면 전세 집을 빼 교회다 바치고 교당으로 들어와 아이들과 살았으면 어떤가.”
“그거는 안 됩니다.”
기도가 끝날 무렵이면 점심으로 국수 한 그릇 얻어 먹기 위해 빨랫줄을 붙들고 빨래가 떨어진 마룻바닥엔 신도들마다 잔치마당이 최고인양 자리를 메웠다. 내숙이란 지위자 있는 사람이 나의 얼굴 앞에 대놓고,
“국수 한 그릇이 얼만데―.”
듣는 귀가 열 그릇에 폭발할 지경에 이르러 정성으로 바친 이만 원에 국수 한 그릇이 되었다. 병주머니 차고 다닌 세월에는 물세는 돈이었다. 다음 날에는 한복 입은 여인네 둘이서 둥지로 또 찾아와 현관문을 두들겨 치유교회를 가자고 조르는데 안가겠다고 했더니,
“왜! 안 가느냐?”
“지금 갈 생각이 없어요.”
몇 번이고 찾아왔는데 현관문을 꼭 잠그고 다음으로 미루며 함께 가자고 통 사정을 했으나 나는 좋은 언변술로 돌려보냈다. 그때 전화가 울려서 받았더니 초등학교 반 짝꿍이었던 종환이었다.
“금산이냐?”
“그래, 왜!”
“시간이 좀 있느냐?”
“그럼, 시간 있지. 왜?”
“밥이라도 함께 먹을까? 만남이 오래됐잖니.”
“그래, 언제 만날까?”
“내일 개포동으로 와라. 점심은 내가 낼게.”
“알았다. 그쪽으로 가면서 전화할게.”
“내일 꼭 보자.”
“그래.”
밤을 지새우고 근무하는 날이지만 전화한 약속장소를 정확히 맞춰 찾아갔다. 여름이라서 햇살 그림자 속에서 친구와 상봉했다.
“야! 얼마만이냐.”
둘은 천계산 보리밥집으로 안내받으며 의자에 앉자마자.
“금산아, 말이다. 대순진리교회 다닌다며.”
“누구한테 들었느냐.”
“다 아는 수가 있다. 걸순이 말이다. 남묘개교 믿는다.”
“일본요 아니냐.”
“그래. 한동안 함께 종환이랑 다녔거든. 종교문제로 싸운 후 연락이 안 돼. 금산아 너는 연락이 되느냐?”
“누군데?”
“오촌에 사는 걸순이 말이다.”
“왜!”
“옛날 전화연락이 되었다 목소리가 땅으로 구르더라. 무슨 일인가.”
“그러냐.”
“지금 통화가 되느냐.”
“야. 해봐야지 안 해봤지만 될 거야.”
“그럼 우리 셋이서 만나자 통화되면.”
“그러자.”
“왜! 대순진리교를 물어 봤느냐.”
“종환이 아는 사람 말이다. 그곳에 믿음으로 들어간 사람들 다 못 빠져나온 다더라 병신이 되던가. 죽어서 나온다던데 혹시, 안 당했냐. 사이비 종교라던데.”
“왜! 당해.”
“야. 신기하다. 어떻게 빠져나왔느냐.”
“그냥 안 다닌다 했지.”
“그냥 놔줬어?”
“그럼. 자기들이 놔 주지 어떻게 해.”
“대단하다. 금산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종교에 부정적인 면이 있으면 속으로 삼키고 비판을 하지 않으면 해코지를 안 해.”
“그러냐.”
“처음 알았다.”
짧은 만남이 이루어진 점심밥 한 그릇으로 개포동 친구와 동심 세계가 있는 노을의 발길 된 현실 앞에 삶의 바람 따라 만남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쉬는 날이면 어머니 집을 찾아가 아니면 호랑이 할머니께서 나의 집으로 찾아오게 했다. 옛날 같았으면 다 같이 살아갈 가족사인데, 요즘 들어 핵가족이다. 각자가 떨어져 살아가는 시대의 벽 ‘386’ 어른 대접 없는 식솔과 대화하다 보면 옛날 일들이 떠올라 어머니 앞에 이야기하면 싫단다. 그러면서도 속내를 품어 내신다. 그 모진 세월을 짊어지고 오신 날들을 되살리기 싫어하는 광산 댁 엄마다.
“묻고 살아가면 안 되겠니?”
나는 아니다. 그 시대가 만들어 준 창작품이 아닌가. 아버지께서 조부를 따라 이사온 데는 친할머니 친정 동네였다. 당신 외삼촌을 통해서 개간할 산밭을 사 들여 고향인 금산사 인근 땅을 팔아 시외버스에 식솔들의 싣고 군산과 장항항구를 잇는 뱃길을 건너가 대천가는 열차를 탔다. 차창으로 스치는 눈밭을 지나 석탄 밭에 이르러 눈길버스로 갈아타고 그때의 유년 기억으로 사방천지가 동화 나라 눈꽃으로 안내했던 새들의 고향 땅이 떠오른다. 중학생 모자를 눌러쓰고 그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열아홉 살에 시집와 6남매를 낳았으나 솥단지에 풀죽도 제대로 못 끓이고 살았던 때였다. 입 하나라도 덜려는 아버지는 산판일을 떠났다. 그 후로 낮과 밤을 모르고 봄에는 달밤을 따라 산 나무 뜯어다가 시장에 팔았다. 가을에는 하늘 걷기와 날품을 팔았으며 시간이 나면 우리는 산밭에 가 식솔들과 수대에 고구마를 바작에 져 나르고 수십 번의 개미역사를 썼다. 매년마다 겨울이 돌아오면 고구마 치댄 밥에 멍석과 가마니 잠자리가 다였다. 매일 생솔가지와 솔잎, 솔방울, 썩은 나무뿌리와 삭정이를 해다가 허청에 쌓아 둔 걸 아이들이 잠든 사이로 징검다리 건너 야동 고갯마루 너머로 삶과 죽음으로 넘나드는 남포저수지 갓길 헛디딘 날에 고기밥이 될 그 상황을 무시하고 산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낭떠러지 위험을 저버리고 물길을 지나가야 땔감을 사는 양주장에 어머니께서 달밤을 새벽인 줄 착각하고 나뭇잎 한 동이를 머리에 이고 저수지 수문에 이르자 갑자기 개들이 모여들어 짖어 댔다. 왜! 이럴까? 그동안 이런 일이 없었는데, 길을 막을까? 돌멩이를 하나를 주어 던지는 시늉을 하자 떠나갔다. 막걸리 공장 나무 대문을 두드리자 문지기 사내가 나오더니 하품과 동시에,
“아직은 날 새려면 멀었는데.”
‘끙’ 자 섞인 목소리 아닌가.
“저기다 쌓아 놓고 가세요.”
그 시절은 시계도 없이 살아가니 달과 해로써 시간 측정하던 때였다. 가던 길도 물가에 이르자 낫으로 나뭇가지 꺾는 소리가 멀리서 어머니 귓가로 들려왔다. 38년 범띠 어머니께서 그때 담력이 강하셔서 남자였으면 큰 인물로 삶을-. 동네 남정네들의 입술로 오르내렸다. 혼잣말로 새벽같이 부지런한 사람이 나무하러 왔나 보다 의심 없이 다가선 자리 여름이라 피서 왔다가 혼령으로 돌아가는 낙엽송 아래 소용돌이 물결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발길에 붙들린 하얀 속옷 아가씨 귀신으로 멈춘 자리엔 동아줄처럼 긴 머릿결로 물방울과 마주치는 순간마다 나무 꺾는 소리로 사람을 유인했다. 어머니께서 두 눈으로 귀신의 장난이란 생각이 들어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갖고 있던 돌멩이 하나를 던지자 행동을 멈춰 버린 귀신의 형상이 다가오므로 다리야 나 살려라. 얼마나 숨바꼭질했던가. 저- 건너편 구름다리 철교에 이르자 그때도 소리는 여전했다. 그럴 때 안도의 한숨으로 이젠 령들이 안 따라올 거란 정신이 돌아와 보니 신발을 오간데도 없었다. 땀방울로 물걸레 된 옷자락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 아이들은 한밤중이 되였다. 그 후로는 나무 다발 장사하는 것을 때려치우고 몇 개월 동안 몸져누워서 마을 분마다 병문안을 올 때에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므로 막걸리 공장 가는 발길이 그렇게 끊겼다. 아버지는 산판에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오셨는데 빈 주머니가 다였다. 어머니께서 그렇다 하여도 나는 그럴까? 눈으로 안 봤으니 선의의 거짓말들을 틈틈이 훔쳐서 들었으니 잠자리에서 책 페이지 중간쯤 넘기는데 갑자기 꿈 속에서 갈라져 내려간 방골에는 그 푸른 물결 옆에 금빛 찬란한 백사장 한가운데 떠있는 하늘바다 예수님의 형상과 마주친 금빛백사장이 있어 나는 두 무릎과 합장으로 그렸다. 그때,
“야고보야 앞으로 걱정하지 마라. 잘 될 거다.”
이런 말씀을 남기고 승천길에 점점 작아짐으로 하늘과 한 몸이 되어서 깨어난 유년의 꿈, 세상으로부터 오염이 된 나는 황소처럼 나이가 들수록 술에 의해 취기가 오를 때마다 예수님과 하느님께서 안 보인다. 내 눈으로 봐야 믿을까? 바보처럼 사람들 앞에서도 읊었다. 배움이 부족해서 직장이라고 들어가면 1년도 못 다니고 회사를 나오기 일쑤였고 택시 운전기사 짝꿍인 진황이가 말 둑에다 불상의 목걸이를 걸어 놓았던가 내 눈으로 스쳐갈 무렵에 벌 쏘인 대가리였다.
“짝꿍 씨 일을 안 할 때는 염주를 걸어놓고 운전하지마세요. 타인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것이 좋겠다.” 했더니 오발대발하면서,
“함께 일을 못하겠네!”
구시랑 바람으로 차량 속에 있는 자신의 소지품을 꺼내어 배차실로 발길을 돌린 그였다. 오후 시간만 되면 신경세포가 둥지로 가 있는 나는 몇 해 전부터 기러기 아빠로 살아온 날이 길어져 끼니 때 되면 저학년 아이의 저녁 밥상을 챙겨 줘야 하므로 시간이 늦은 날은 잠자리에 떨어져 그냥 눕는다. 그럴 때마다 아내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삶을 되돌아보니 혼자 밥상을 뜬다는 것은 별밤의 안녕까지 하나님께 이야기꽃으로-. 아침이면 학교에 간 아이의 발자국 따라 택시를 끌고 고샅길을 나오는데 신체가 불편한 아줌마 그림자가 흔들었다. 창 밖에 겨울이라서 살결을 도려 낸 듯 찬 바람으로 정차하는 순간,
“빨리 오르지 못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찬찬히 오르세요.”
주행에 이르자 “옛날이 그립다. 공무원 생활할 때가 좋았다. 지금은 불편한 몸뚱어리 되니까 지나가는 개도 무시한다.”며 넋두리 타령을 늘어놓았다.
“어디로 갈까요.”
“나 좀 봐. 이화동 가톨릭 대학교로 가줘요. 성경 글을 배우러 다녀요.”
“몇 개월을 다녔나요.”
“벌써 6개월을 다녔어요.”
“좋은 공부를 하시네요, 세례를 받으셨나요.”
“그럼요. ‘안나’요.”
“저는 ‘야고보’요.”
“어느 동네 사시나요.”
“십자가 동네에 살아요.”
“같은 동네인데 구역기도 모임에 나오시나요?”
“이곳으로 이사 온 지가 2개월이 되었어요.”
“정 구역장님과 연락할 테니 달 모임에 꼭 나오세요.”
“네, 감사합니다. 저는 유아세례를 초등학교 3학년 때 받았는데 어느덧 마흔다섯 살이 되도록 견진성사를 안 받았어요.”
그리고 온몸이 아파서 골목 한의원도 수없이 가서 부황도 뜨고 침도 맞고 다 해 봐도 효능은 못 봤어요. 더운물로 샤워하면 그날은 낫은 듯이 하므로 또한 파스를 이용해도 그렇고 날마다 망치와 푸줏간 고깃덩어리 같으니 살아가는 의욕도 날이 갈수록 없었으며, 이런 이야기를 이웃한테 말을 할 때 믿지도 않을 뿐더러 보기엔 멀쩡하니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까지 그럴 때마다 나는 속마음이 터져가고 있었다. 영적으로 치질과 각종 질환 때문에 이름이 있는 병원과 약국을 이용했으나 효능 또한 없었으며 며칠마다 자동차 사고가 수시 적으로 터졌을 때도 사람들과 어떻게 하면 싸움의 대상자가 있을까?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우울증까지 찾아왔다. 견진성사를 통해서 이번엔 꼭 답을 찾을 거야.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10년 전에 경진교리 3개월 동안에 요셉 방에서 교리를 받았으나 고해소 안에서 신부께 성사를 고하다가 이혼한 지 2년이 되었다는 말에 문전박대 당한 전례가 있었다.
“조당이 걸려 더는 성사가 없다.”
그 말에 나는 너무나 어릴 적 상처랄까? 고양이 앞에 쥐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이런 사실들을 말씀드린 다음날부터 믿음과는 거리가 멀어져간 집, 나는 시간만 나면 조당을 풀려고 명동과 지방 성당 등을 그에 관한 신부님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에 대한 천주교회의 전례가 없다고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사정을 들었다. 아직도 조당에 관해서 아쉬움이랄까? 세상의 변화로 맹담자가 늘어나니 이스라엘, 프랑스, 이탈리아 예를 들어 주셨다. 유럽에서도 항의가 있었으나 교황청으로부터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조당에 대한 시일을 두고 푸는 조건으로 달이 차고 해가 차고 있었으나 신부님의 말씀으로 나는 희망을 얻었으며 주일만 되면 기도실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한동안 고백성사와 영성체를 못 드린 결과이기에 의미도 없었다. 쑤신 몸뚱어리 치유를 위해서 성수를 마시고 방구석에서 나 홀로 9일 기도 하면서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르며 살았다. 담 너머로 이웃들까지 소리를 들었던가. 나의 행동들이 이상하다. 아는 사람마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것들을 또한 개의치 않았으며 령과의 싸움을 마음 속 깊이 묻어 두면서 꼭 답을 찾아 행복하게 삶을 향나무 천주교회 요셉 관에서 교리 선생님으로부터 경진 교리를 배웠다. 누구도 모르게 성사를 받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임했다.
2008년 9월 어느 가을 햇살 빛으로 오신 태극무늬 초등학교 운동장 바닥에서 교황과 최00 신부님으로부터 하늘나라 아들인 야고보는,
“그리스도 몸.”
“아멘.”
그 순간에 15년 동안 사탄으로부터 고통을 받은 나의 몸에서 거짓말처럼 영적인 치유가 되었다. 그 후로 가끔씩 야고보는 ‘엑소시스트’를 상영할 때마다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예수님께서 나약한 인간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잘 살아가라고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그걸 잊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이 아닐까? 예수님께서 가톨릭의 길이 없었더라면 야고보는 영원히 눈으로 볼 수 없는 귀신한테 다하는 날까지 끌려 다니면서 마감했을 텐데 헛된 믿음이 화를 가져왔고 하나님께서 오늘 동행하는 걸 뒤늦게 알았던 나는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예수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늘나라 성모어머니를 모시고 영, 영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이 없기를 체험 소설을 통해서 글을 쓰라고 높으신 그리스도 아들인 야고보를 선택해 주신데 대해 하늘을 우러러 감사하며 일반소설보다 영적인 소설 쓰기란 몇 배나 힘이 들었다. 마의 심술인 것 같으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다. 조상신으로부터 오는 령, 살아 있을 때는 자손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이승 떠난 후, 뒤바뀐 삶이랄까? 외가 쪽 아니면 친가 쪽으로―. 나약한 자 몸 속에 귀신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살아가니 별종 같다. 하지만 우리 둥지 없는 애가 태어났다. 그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야고보의 마음은 구슬프다. 간헐적으로 아픔이 찾아오는 날 어혈이러니 생각하지만 돌팔이 철학관들은 타인 앞날 행보를 때로는 그린다. 그것도 발전하는 역술에 빠져들어 가면 통증으로 날이 밥이 되는가 하면 사는 것도 일하는 것도 모두 싫어진다. 나에게 기적을 야고보를 통해서 이 땅에 악령을 후려친다. 펜으로 나약한 심성,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사탄이란 그 힘을 단편소설을 통해 이야기함으로 귀신도 7가지 성사 앞에 맹물이다. 그리고 사실을 현실화한 글이며 십자가 그늘에서 당당한 야고보 아멘과 동행하는 날이기에 찬송한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
답글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