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7일 부활 2주간 토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주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계신 듯 그렇게 지내고 있는 데 세월은 빨리도 흘러 팔년이나 되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허전함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동안 쉬고 있던 매일 묵상을 다시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고통이 심하게 나를 괴롭히거나, 마음이 심하게 허전하거나, 외로움을 느끼면 그 것을 이겨내려고 무엇인가를 쓰거나 골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4월 15일이 되면 묵상을 다시 시작한지 만 8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묵상은 버릇처럼 그렇게 시작합니다. 12-13년 전에 쓴 것을 읽어보고 그 묵상을 다시 묵상하기도 하고, 갑자기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이 있으면 그 것을 따라서 묵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날의 복음을 읽고, 읽은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몇 시간씩 묵상하다보면 그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매달립니다. 그렇게 묵상은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합니다. 뭍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거리이니 대략 5km 정도 떨어진 거리를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였을까요? 다른 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본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령이다”(마태오 14, 26) 그리고 예수님이심을 알아 본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고 물위를 걷다가 빠지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마태오 14, 28-32) 또한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두려워하여 소리를 질렀다.’(마르 6, 49)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두려워하였다.’라고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가 두려워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머물게 됩니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벌어진 일이니 유령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령은 초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금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느님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초자연적이시며 완전하시고 유일하신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초월적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존재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유령이란 ‘죽은 사람의 혼령’이거나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환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령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말하는 대로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유령만이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 많은 기적과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빵으로 많은 사람을 먹게 하신 분이라는 그 기적을 방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령이라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유령이 아니면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알고 있는 제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는 다른 측면에서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정말 두려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두려움을 경외(敬畏 : 공경하면서 두려워함)함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총을 받으면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은총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을 섬기면서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느님을 흠숭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유령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와 태도는 마땅한 것입니다. 유령으로 알아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알아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느님이시지만 초월적으로 사람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이 신비를 성령을 받은 다음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순교 선열들은 ‘서양귀신’을 믿은 죄목으로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을 ‘서양귀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일종의 유령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분은 자연적인 존재를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그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유령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환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다는 것은 그것도 5km나 걸어서 호수를 횡단하신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경외(敬畏)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다만 유령으로 알고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흠숭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경외하는 것입니다. 아주 친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연인을 대할 때 조심하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축일 4월 17일 : 성 로베르토 (Robert)
신분 : 설립자, 수도원장
활동 지역 : 세즈 디외(Chaise-Dieu)
활동 연도 : +1067년
같은 이름 :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세즈 디외 수도원의 초대 원장인 성 로베르투스 드 튀랑드(Robertus de Turlande, 또는 로베르토)는 사제가 된 후부터 병자들에 대한 뛰어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공적 예배를 정성껏 봉헌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그는 클뤼니(Cluny)로 가서 수도자가 될 생각을 가졌지만, 성소를 확인하기 위하여 로마(Roma)에 있는 사도들의 무덤을 순례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스테파누스(Stephanus)라는 기사를 만나 회개시켰고, 그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떠나도록 권유하는데 성공하여 두 사람은 오베르뉴 인근 브리우드(Brioude)에 은둔소를 세웠다. 그들은 기도생활에 전념하면서 손수 노동하여 얻는 수확물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사용하였다. 그 후 제자들이 몰려들어 큰 수도원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즈 디외('하느님의 집' 또는 '하느님의 의자'라는 뜻) 수도원이다. 그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수도 규칙을 채택했는데 3백여 명의 수도자들이 있었다. 그는 성 아델렐무스(Adelelmus, 1월 30일) 영적 교사였으며 1095년에 시성되었다.
축일 4월 17일 : 성 이시도로 (Isidore)
신분 : 수도승, 순교자
활동 지역 : 코르도바(Cordoba)
활동 연도 : +856년
같은 이름 : 이시도루스, 이시도루스, 이시도르, 이시도르, 이시돌, 이시돌
포루투갈의 베자(Beja)에서 태어나 에스파냐 남부 코르도바에서 사제가 된 성 엘리야(Elias)는 노년에 그로부터 영성지도를 받던 두 젊은 수도승인 성 바오로(Paulus)와 성 이시도루스(Isidorus, 또는 이시도로)와 함께 무어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목격증인이었던 성 에울로기우스(Eulogius, 3월 11일)가 그들의 순교 사실을 기록하였다. 정교회에서는 그들의 축일을 4월 30일에 기념하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는 로베르토, 이시도로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