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영접하심, 14장에선 진리의 성령으로
육신의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심, 15장에서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아버지와 관계, 그리고 16장은 진리의 성령이 임하신 후의 상황
곧 해산의 수고를 하게 됨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가시는 예수님과 오신 성령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야만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요16:17) 그 날에는(요16:23)
또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16:26) 하는 이 날을 알게 됩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나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완전히 임무교대가 끝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알쏭달쏭한 퀴즈게임처럼 들리면 안 됩니다. 이튿날(요1:29) 이튿날(요1:35)
이튿날(요1:43)을 지나 사흘 째 가나의 혼인 잔치(요2:1)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하신 이 비밀의 경로를 해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로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시므로 하늘 문을 여시고 성경의 인을 떼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회개로 건너가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진리를 따라 열린 하늘 문을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는 주의 동선을 파악해야지요.
바로 이 모든 날 마지막 날, 구원의 날, 오늘이라고 하는 성령의 날입니다.
인간의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으므로 성령에 잠기는
성령세례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고 한 영이 되어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하나가 되고 십자가로 화목하게 되어
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되어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므로
들은 말씀이 화합이 되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맞추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비밀입니다(엡5:32)
요16:29-30절의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변화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말씀하시지 않고 바로 직설적으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노라 하는 말씀을 이해를 합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하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고백을 하는 제자들이 바로 그와 하나가 되어 주를 따라
갈 것이라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1-33)
이 말씀은 일단 제자들이 흩어진 후에 다시 모아 성령을 보내심으로 주님의
말씀이 실제화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말씀을 듣고 깨달았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체화되려면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육성 설교를 듣고 온갖 표적을 보았어도 어떠한
프레미엄도 그들에게 주어진 사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공평한 게임을 하십니다.
육신의 예수님을 보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아니면 그 이상의 사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혼자 수많은 군중의 모독과 야유와 저주를 한 몸으로 받아내셨습니다.
육신의 예수에게 동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 떠나서 제 갈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임하신 이후에는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운명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음을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한 몸입니다.
비록 예수가 홀로 남으셨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시므로 그 거칠고 모질고 비참한 골고다의 십자가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리하시고 모든 만물 가운데 뛰어난 이름으로 지금 만물을 호령하며 다스리십니다.
이와 같은 비밀을 먼저 말씀하시므로 진리의 성령이 임하신 후에 주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성령 안에서 주님과 멍에를 함께 메고 이기게 됩니다.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이김을 성공하셨고 오순절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그 이김을 우리에게 참고서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성령과 함께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만 증거해도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위시한 교회서신을 통해 예수가 기름부음이신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
가운데 임하시므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그 구원으로 세상을 이기는 법을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천주교 국가에서나 있을 일이 세계 도처에서 성탄절이라는 이름으로
장삿속에 밝은 사람들의 수작에 아기 예수를 연상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보좌에 앉으신 만왕의 왕이신 어린 양이십니다. 왜 아기 예수입니까?
어찌 베들레헴의 구유에 난 아기 예수에게 경배를 드려야 하는 거죠. 왜 나사렛
예수를 추억하고 갈릴리 해변이나 갈보리 언덕으로 가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나요?
왜 예루살렘이 성지가 되어야 하고 거기에 세워질 유대 성전에 관심이 지대한가요?
주님에게 기름을 부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몸에 붙은 지체인 우리들에게도
제사장의 머리에 부은 그 기름이 온 몸에 흘러내리듯 우리도 성령의 샛강이 되어
우리의 영 안에 흘러들어와 우리는 지금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하여 영원한 생명을 맛보고 은혜의 보좌를 향해 나아가 그 영광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에 대하여 못 박히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못 박혀 서로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내 육신의 살만 뜯을 뿐입니다.
외모 곧 껍데기의 목숨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야 늘 마귀의 밥이 되겠지만 성령으로
주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은 이미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세상을 이기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주님의 말씀을 세상과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진리의 성령과 자신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담의 타락한 본성인 죄성과 상당한 갈등과 대립이 되고 구분이 되지만,
주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따라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또 받는 영의 교제를 꾸준히 하다보면 진리의 성령이 부담이 되지 않고 속사람 곧
참자아가 강해집니다. 이 자아가 바로 우리의 진정한 자아이며 영원한 자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