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 '學院스트레스' 자살
"학교끝나면 학원 또 학원...어린이인 내가 왜..."
천안 5학년생 "자유롭고 싶다" 日記
"난 죽을것" 친구와 채팅후 목숨끊어
맞벌이 부부의 아들인 초등학교 5학년생이 같은 반 여자친구와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자살을 예고한 뒤, 열흘이 지나 집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발견됐다. 어린이의 일기장에는 “내가 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어른보다 더 공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지난 8일 오전 9시쯤 충남 천안시 모 아파트에 사는 정모(40·회사원)씨의 아들(11·초등학교 5학년)이 자신의 방 베란다에서 보이스카우트용 흰색 끈에 목을 맨 채 숨져 있는 것을 정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아파트는 문이 안으로 잠긴 채 정군 혼자 있었고 정군의 아버지는 철야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정군의 어머니(34)는 전날 오후 10시쯤 퇴근해 문을 두드렸으나 문이 안으로 잠겨 있자 옆집에서 잠을 잤다.
정군의 부모와 학교 담임교사 등은 정군이 평소 성적이 우수했으며 성격도 명랑하고 쾌활했다고 말했다. 정군의 아버지는 “성격이 좋아 친구도 많았다”며 “자살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군이 남긴 일기장과 급우와 나눈 채팅 메시지에는 ‘자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정군은 지난달 29일자 일기장에서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30분 공부하고, 20시간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정군은 또 “숙제가 태산같다. 11장의 주말과제, 14장의 수학숙제, 난 그만 다니고 싶다…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다.
하루 전인 지난달 28일에는 같은 반 여자친구와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나 지금 죽을 수도 있다. 자살도구를 준비해놨다. 바이바이”라며 자살을 예고하기도 했다. 당시 정군은 채팅 아이디(ID)로 ‘불행’을 사용했다.
정군의 담임교사(여·32)는 “정군이 학교를 마치고 속셈학원과 영어학원 등을 거쳐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갔다”며 “평소 일기를 통해 학원 숙제 등에 부담을 느끼는 것을 알았지만 이런 일까지 벌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 나정 박사는 “절제와 통제력을 기르는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초등학생들이 공부에 대한 중압감을 크게 느끼면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다”며 “어린 학생들에게 지나친 학습 부담감을 주는 것이 위험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회 교육위원회 김화중 의원(민주당)이 지난 9월 초중고생 1만970명을 상대로 벌인 ‘초중고생 정신건강조사 보고서’에서도 초등학생의 28%가 자살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어린 생명이 제 목숨을 끊은 엊그제 자살건은 우리 사회에 방치된 가장 비극적인 억압구조를 드러낸다. 이번 경우는 아니지만, 어린애의 눈높이로 봤을 때 쉴틈없는 과외, 성적부진, 따돌림, 학원폭력, 지나친 간섭, 몰이해, 학대, 가정불화…로 둘러싸이면 그것은 숨쉬기 힘든 장벽이 될 것이다.
지난9월 교육부가 낸 국감자료는 초등생의 53.1%가 가출충동을, 27.6%가 자살충동을 느낀 것으로 돼있다. 맞벌이 부부의 아들인 이 초등 5년생도 그중 하나였고, 아이는 마지막까지 세상과 통교하고픈 신호를 보냈다.
여자친구와 채팅에서 “자살도구를 준비해놨다 바이바이”라고 했고, 일기에는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열한살짜리 이 아이는 “죽고 싶을 때가 많다…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고까지 했으나 최후의 호소를 귀담아 들은 어른은 없었다.
이 아이도 줄이은 ‘학원고(苦)’에 시달렸다시피, 초등생의 학원수강은 작년 115만5000명에서 올해 145만6000명으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영·수 선행학습에다, ‘특목고 과외’, ‘대학입시 심층면접 준비’, 그리고 라틴어까지 가르치고 있다. 초등생은 현재 대한상의가 주관하는 워드인증시험 접수자의 33.4%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아이를 온실에서 키울 순 없다. ‘장벽’ 앞에 절망하는 아이는 조정과 단련도 필요하다. 가까운 싱가포르도 입시철 초등생 자살은 많다. 부모들 모두가 ‘어미사자’를 흉내내는 것은 아니겠으나, 아이들도 절벽 밑에서 기어올라 자랑스러운 ‘새끼’가 되고 싶다. 이 아이 역시 그 고통속에도 오히려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도 쾌활했다”는 증언에서 어린 것의 안간힘을 본 것 같아 착잡하다. 사회전반의 ‘과열’도 문제지만, 그에앞서 아이가 마지막으로 내민 손을 잡아줄 창구가 없었던 것이 애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