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영-샐러스 공방과 신데렐라의 탄생
-극적 요소 보여준 위민스 브리티시오픈의 교훈
지난 2~5일 영국 잉글랜드 밀턴킨스의 워번GC에서 열린 LPGA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 AIG 위민스 브리티시오픈은 보기 드문 명품 경기로 기록될 만했다.
노도와 같은 한국 선수들의 진군,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 선수들의 저항, 예기치 않은 복병의 등장, 승자를 예견할 수 없는 반전의 연속 등은 골프 팬들의 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특히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골프는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골프에서 뛰어난 기량은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량이 뛰어나더라도 그 기량을 발현할 줄 아는 지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승리에 큰 도움이 못 될 수도 있다. 기량이 다소 뒤지더라도 모자란 기량을 보완할 수 있는 대비책이 있다면 얼마든지 승부를 겨룰 수 있다.
천재 소리를 듣는 선수들이 맥없이 컷 탈락을 하고 무명의 선수가 깜짝 우승을 하는 것도 기량 외에 마음이라는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 마지막 라운드의 압권은 고진영(24)과 미국의 리제트 살라스(30)의 공방전이었다.
2012년 LPGA투어에 들어온 리제트 살라스는 2년차인 고진영에 비하면 노련한 선배이지만 성적만 놓고 보면 고진영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리제트 살라스의 LPGA투어 전적은 우승 1회(2014년 킹스밀 챔피언십), 이번 대회를 포함해 2위 2회, 공동 2위 1회, 공동 3위 1회에 머물고 있을 정도로 강자 반열에 오르지는 못하고 있다.
반면 KLPGA투어에서 충분한 담금질을 한 고진영은 2015년 비회원으로 참가한 리코 위민스 브리티시오픈 준우승으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린 뒤 2017년 국내에서 열린 LPGA KEB 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우승, LPGA투어 직행티켓을 확보했다.
2018년 ISPS 한다 호주여자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LPGA투어를 시작한 고진영은 그해 신인상을 챙겼다. 2년차인 올해 뱅크 오브 파운더스 컵 우승으로 시동을 걸더니 ANA 인스퍼레이션, 에비앙 챔피언십 등 메이저 2승을 포함해 LPGA투어 통산 5승을 거둔 세계랭킹 1위의 최고 실력자다.
그러나 마지막 라운드 한 조로 묶인 두 선수의 플레이는 이런 객관적 기록과 거리가 멀었다.
10언더파 공동 4위로 시작했지만 살라스가 먼저 버디를 거둬들이며 앞서 나갔다. 전반에 버디 5개, 보기 1개로 전반 후반에 버디 3개를 추가한 고진영을 앞섰다. 살라스는 후반에도 버디 3개를 추가했다.
워번GC에서의 살라스는 결코 B급 선수가 아니었다. 우승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결의와 자신감이 넘쳤다.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라는 자긍심도 읽혔고 신뢰감과 노련미도 돋보였다.
그에게서 4라운드 유일한 미스샷은 18홀 짧은 버디 퍼팅을 놓친 것이었다. 이 퍼팅을 성공했다면 연장전을 거쳐 우승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한편 고진영은 이런 살라스의 약진에 흔들리는 듯했다. 내심 메이저 2주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염두에 둔 탓인지 얼굴은 가벼운 흥분에 들뜬 듯 했다. 살라스의 분전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극을 받아 무서운 저력을 발휘, 전반 버디 3개, 후반에 버디 3개로 선전했으나 남은 홀이 없었다. 결과는 리제트 살라스가 17 언더파로 2위, 고진영은 16언더파로 3위를 차지했다.
비록 후승은 일본의 신인 시부노 히나코(20)에게 돌아갔지만 고진영과 살라스의 경기는 근래 보기 드문 명승부였다.
선두와 3타 차 11언더파 단독 3위로 미국의 모건 프레슬(31)과 함께 4라운드를 시작한 박성현(25)의 플레이는 평소의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갤러리들이 그의 멋진 스윙을 휴대폰카메라에 열심히 담았지만 정작 자신은 멋진 드라이브샷에 값하지 못하는 플레이에 불만이 가득했고 홀을 스치는 퍼팅에 초조함과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망설임과 주저 속에서 나온 대부분의 샷들은 그의 의도를 벗어났고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자 자신에 대한 불만이 넘치는 듯했다.
특히 퍼팅에선 입스에 빠진 듯 제대로 먹히는 게 없었다. 좀처럼 타수를 줄이지 못하다 뒤늦게 잃을 게 없다는 마음에 12번 파4 홀에서 원온을 시도해 버디를 건졌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실망스런 라운드의 뒤끝이어서인지 동반자와의 인사도 무성의했다.
반면 그와 함께 플레이한 모건 프레슬은 올 시즌 들어 가장 치열한 경기를 펼쳤다. 미국을 대표하는 강자들이 맥을 못추고 리제트 살라스와 자신만이 상위권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식한 듯 경기 집중도가 대단했다. 그는 박성현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질척거리는 사이 버디 4개 이글 1개, 보기 1개로 5타를 줄이며 선전, 합계 15언더파로 4위에 올랐다. 박성현은 10언더파 8위에 머물렀다.
8언더파 공동10위로 4라운드를 맞은 이정은6(23)는 ‘나도 우승 경쟁에 돌입하겠다’는 선전포고라도 하듯 전반에만 4개 버디를 건지며 세찬 날개짓을 했으나 후반에 불필요하게 해저드에 볼을 빠뜨리는 실수로 결국 9언더파 279타로 9위에 만족해야 했다.
LPGA투어 신인으로서 US여자오픈 우승 등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며 쾌속항진 중이지만 기량 못지않게 정신을 다잡는 능력을 키우 필요성이 느껴졌다.
시부노 히나코와 함께 초반부터 선두그룹에 오른 남아공의 애슐리 부하이(30)는 역시 큰물에서의 경험 부족으로 강자들과의 대결에서 많은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LET(유러피언투어)에서 활동하며 2007년 카탈로니아 레이디스 마스터스에서 우승한 뒤 LPGA투어로 옮겼으나 아직 우승기록이 없이 컷 통과에 만족하는 정도다.
그러나 나흘간 선두권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의 강자들과 경기를 펼친 것 자체가 그의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기 되었을 것이다.
이번 대회 주인공은 당연히 일본의 시부노 히나코다.
이제 겨우 프로 2년 차 신인의 우승은 골프가 결코 기량과 경험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보여준 매우 특별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작년 프로자격을 얻은 그는 지난 5월 JLPGA투어 메이저 대회인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 파스컵에서는 한국의 배선우(25)와 접전 끝에 프로 데뷔 첫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7월 시세이도 아넷사 레이디스 오픈에서도 이민영(27)과 연장전을 치뤄 시즌 2승을 거두며 일본 여자골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브리티시오픈 마지막 날에도 고진영, 리제트 살라스와 함께 3파전 양상을 보였으나 ‘미소짓는 신데렐라(Smiling Ciderella)’의 마력을 넘지 못했다.
에슐리 부하이에 2타 앞선 14언더파로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한 그는 3번홀(파4)에서 더블보기를 범하며 리제트 살라스와 고진영에게도 밀렸으나 후반 들어 마지막 홀 버디를 포함해 5개의 버디를 쓸어 담으면서 연장전을 기대하던 리제트 살라스의 기대를 꺾고 대망의 우승을 결정지었다.
그의 우승의 동력은 LPGA투어 홈페이지에 올라있듯 ‘미소짓는 신데렐라’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의 얼굴에선 항상 미소가 샘솟았다. 이런 큰 무대에 처음 서는 선수라면 기가 죽거나 긴장해야 마땅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 ‘이만만 해도 대성공’이라고 여기는 듯 갓 스물의 얼굴엔 미소와 함께 설렘과 들뜸, 순수함이 배어나왔다.
홀과 홀 사이를 지날 때도 갤러리들과 손을 부딪쳤다. 주변의 분위기 자체를 즐길 줄 알았다.
이런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큰 무대에서 두려움이나 기죽음 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기량이나 경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 선수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1977년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히구치 히사코 이후 시부노가 42년 만이라고 한다.
조만간 LPGA투어에서 한국선수들과 우승경쟁을 벌일 시부노 히나코는 우리 선수들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