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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熱河)의 땅(地)‘은, ’타안위(朶顏衛)의 땅‘ [1편]
2023년 08월 13일
○ 「열하(熱河)」란 뜻이 뭘까? “따듯한 하천(河川)”이라는 말일까? 그런데 웃기는 것이 “열하(熱河)”땅에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어 ’여진족(女眞族) 청(淸) 황제(皇帝)‘들이 여름[夏節期]이면 이곳으로 몰려가 정무(政務)를 보았다고 말한다.
그럼 열하(熱河)란 곳이 “따뜻한 하천(河川)”이 아니라 “차가운 물이 흐르는 하천(河川)”이라는 뜻인가? 그래서 하절기(夏節期)에 이곳으로 피서(避暑)를 간 것일까? 희극(喜劇) 같은 이야기인데, 말 그대로 “열하(熱河)”란 “열하(熱河)가 흐르는 주변(周邊) 땅”을 지칭(指稱)하는 말일 뿐이다.
➊ 이곳을 가리켜 『21세기(世紀) 하북성(河北省) 북방(北方)에 있다는 난하(灤河) 상류지대(上流地帶)를 말하는 것인데, 이곳에 ’난하(灤河)와 열하(熱河)‘가 있어 노룡현(盧龍縣)을 거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라고 설명(說明)하는데, ‘상도하(上都河)’라고도 한다고 전해진다.
‘열하(熱河)’【역사통설(歷史通說)】는 : 『옛 무열수(武列水)로, 그 발원처가 3개소가 있고, 이 모두는 열하지경(熱河地境)에 있으며, 이 ‘세 개’의 물이 합쳐져 ‘승덕현(承德縣)’으로 와, 이곳의 ‘온천(溫泉)’에 물을 대기 때문에, 처음으로 “열하(熱河)”라는 이름이 생겼는데, 이 물은 남(南)쪽으로 흘러 난하(灤河)로 모인다. : 古武列水.有三源.皆在熱河境.中略.合流入於承德縣.有溫泉注之.始名熱河.南流注於灤河』고 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 열하지대(熱河地帶)는 “청(淸)”나라 황제(皇帝)들의 “피서산장(避暑山莊)”으로 그 이름이 처음 시작(始作)된 것인데, 조선사(朝鮮史)의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➋ 『열하(熱河)는 황제(皇帝)의 행재소【行在所 : 군주(君主)가 임시 머무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雍正)’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乾隆)’이 주(州)를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으니, “곧 연경(燕京)의 동북(東北) 4백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라고 설명(說明)한다.
위의 글 ‘➊+➋’를 보면 : 똑같은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에 있어야 하며, 그곳은 곧 ‘연경(燕京)=북경(北京)의 동북방(東北方) 420리’에 있어야 한다.
◆ … …이러한 설명(說明)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라면 : 즉(卽) 〈이곳에 정말, 진실(眞實)로 ‘청(淸) 황제(皇帝)’들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어 북경(北京)에 있었다는 청(淸) 황제(皇帝)들이 하절기(夏節期)에 이곳으로 몰려가 피서(避暑)를 했다〉고 하면
〈“대륙조선(大陸朝鮮)”이라는 말은 허구(虛構)로 만들어진 논리(論理)도 아닌 논리(論理)로 밝혀져 설 자리조차 없어지게 될 일이다〉
『정말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북방(東北方) 420리에 “열하(熱河)의 땅”이 있었을까? 이곳에 청(淸) 황제(皇帝)들을 위한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었을까?』
◆ 결론(結論)부터 말하면 김빠지는 소리지만 :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다”
이런 엉터리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반도(半島) 땅의 일개(一介) 제후국(諸侯國)으로 만들기 위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일만(一萬) 리(里) 서(西)쪽 땅에 있었던 ‘열하(熱河) 땅’을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북방(東北方) 420리 땅으로 이동(移動)시킨 것이다.』라고 자신(自信) 있게 말할 수 있으며,
이 “열하(熱河) 땅”의 “동(東)쪽으로는 삼한(三韓)이 있었다”고 주장(主張)하며, 그 논거(論據)를 제시(提示)하고, 설명(說明)하고자 하는 것이다.
➨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은 : 어떤 지도자(指導者)처럼, 누구(?)처럼 『자신(自身)의 터진 입으로 스스로 뱉어 놓은 말을, “기억(記憶)에 없다거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거나, 삼자(三者)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했다”는 식(式)의 오리발【“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라는 속담(俗談)에서 나온 말로, 닭을 잡아먹고, 추궁(追窮)당하자, “내가 잡아먹은 건 닭이 아니라 오리요”라면서 얼굴 두껍게, 뻔뻔하게 시치미를 떼며, “이거 봐라, 오리발이다”라면서 오리의 발을 내미는 행위(行爲)를 빗댄 말로, 철면피(鐵面皮) 같은 자(者)를 일컫는 말이다.】을 내밀며 구성원(構成員)들을 속이는 파렴치(破廉恥)한 행위(行爲)와 ’비열(鄙劣)=비열(卑劣)‘하고 ’야비(野鄙)=야비(野鄙)‘한 짓보다 더더욱 나쁜 놈들이다.
○ 『열하(熱河)의 땅』에 대한 사서(史書) 및 문집(文集) 속의 기록(記錄)을 찾아보자.
(1) 연행록(燕行錄) 계산기정(薊山紀程) 5권 / 附錄 胡藩 : 《皇帝每盛夏駐熱河。稱曰避暑山莊。其實自爲防守也 : 황제(皇帝)가 한여름이면 열하(熱河)에 머물면서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일컬으나, 그 실은 스스로 방수(防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2)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박지원(朴趾源) 熱河日記 燕巖 朴趾源(1737~1805)】:《열하지(熱河志)를 상고해 보면, : 『한(漢)때에 요양(要陽)·백단(白檀)의 두 현(縣)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밀운(密雲)·안락(安樂) 두 군(郡)의 변계(邊界)로 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해족(奚族)의 땅이 되었으며, 요(遼)는 흥화군(興化軍)이라고 하여 중경(中京)에 소속시켰고, 금(金)은 영삭군(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北京)에 소속시켰으며, 원(元)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都路)에 속하였다가 명(明)에 이르러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이 되었다.』》고 자세(仔細)하게, 아주 친절(親切)하게 설명(說明)해주고 있다.
그 외(外) 많은 옛 기록(記錄)을 보아도 〈“열하(熱河)의 땅”은 명(明) 초(初)의 “타안위(朶顏衛)의 땅”에 있었다〉고 하였다.
➤ 위의 글에서 중요(重要)한 것은 〈“열하(熱河)의 땅은, 고황제(高皇帝) 때 타안위(朶顏衛)의 땅에 속했다.”〉는 것이다. 「타안위(朶顏衛)」는 뭔가? 고황제(高皇帝)에 의해 “열하(熱河) 땅”은, “타안위(朶顏衛)”에 속(屬)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卽),
명사(明史)에 의하면 :「타안위(朵顏衛)는, 명(明) 초(初), 올량합(兀良哈) 땅에 설치(設置)한 삼위(三衛) 중의 하나인데, 홍무(洪武) 22년【AD 1,389】에 설치(設置)하였다」【明朝兀良哈三衛之一 : 洪武二十二年置[AD 1,389年]】고 하였는데, 즉(卽), 삼위(三衛)란, “올량합(兀良哈) 땅에 세 개의 위(衛)를 두었다”는 뜻이다. 명사(明史)에서는 왈(曰) :
(3) 明史 列傳 : 《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 : “타안(朶顏)·복여(福餘)·태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가 세운 삼위(三衛)이다. ➊ 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 : 그 땅에는 올량합(兀良哈)이 있었는데 “흑룡강(黑龍江)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에 있는데, 한(漢)때 선비(鮮卑) 땅이었고, ➋ 唐吐谷渾, 宋契丹, 皆其地也.元為大寧路北境 : 당(唐) 때의 토곡혼(吐谷渾), 송(宋) 땡의 글란(契丹), 모두의 그 땅이다. 원(元)의 대녕로(大寧路) 북(北)쪽 지경(地境)이다. 已,數為韃靼所抄.洪武二十二年置泰寧,朵顏,福余三衛指揮使司,俾其頭目各自領其眾,以為聲援 : 달단(韃靼)이 수차례에 걸쳐 노략질하니 홍무(洪武) 22년에 ‘태녕(泰寧)·타안(朶顏)·복여(福餘)’ 삼위(三衛) 지휘사사(指揮使司)를 설치하였다. 自大寧前抵喜峰口,近宣府,曰朵顏.自錦,義歷廣寧至遼河,曰泰寧自黃泥窪逾瀋陽,鐵嶺至開原,曰福余. : 대녕(大寧) 전(前)에서부터 희봉구(喜峰口), 선부(宣府) 가까이까지가 ‘타안(朶顏)’이라고 하고, 금주(錦州), 의주(義州)를 지나 광녕(廣寧)에서 요하(遼河)까지가 태녕(泰寧)이라 하고, 황니와(黃泥窪)를 건너 심양(瀋陽), 철령(鐵嶺)에 도달하여 개원(開元)까지 이르기를 복여(福餘)라 하였다.》고 하였다.
➊ 고황제(高皇帝)가 홍무(洪武) 22년【AD 1,389】에, 그 땅을 달단(韃靼)이 수차례에 걸쳐 노략질을 하니, 이곳 땅에 삼위(三衛)를 설치(設置)하였는데, 즉(卽) “올량합(兀良哈) 땅에 두었다”는 것이고, 올량합(兀良哈)은 곧 ‘오량해(烏梁海)’를 말하는 것이다. 즉(卽)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이다.
그런데 ‘오량해(烏梁海)=올량합(兀良哈)’은 그 부족(部族)들을 지칭(指稱)하여 “산림(山林) 가운데에 사는 백성(百姓)”이라는 호칭(呼稱)으로 불렸다고 하였다. 【兀良哈三衛,與韃靼,瓦剌併列當時蒙古族的三大部落之一 : 烏梁海,蒙古對於林中百姓,族群的稱呼 : 올량합(兀良哈) 삼위(三衛)는, 달단(韃靼)과 와랄(瓦剌)과 함께 아울러 둔 것인데, 당시(當時)에 몽고족(蒙古族)의 삼대(三大) 부락(部落) 중의 하나이다. 오량해(烏梁海)는, 몽고(蒙古)에서는 “산림(山林) 가운데에 사는 백성(百姓)”이라고 호칭(呼稱)하였다】
즉(卽) 이들은 사막지대(沙漠地帶)나 평야(平野)에서 살던 부족(部族)이 아니라 산림지대(山林地帶)에서 살던 부족(部族)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올량합(兀良哈)’은 어디에 있었을까?
➊- 1)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는, 「임중백성(林中百姓)」이라고 호칭(呼稱)되었고, ‘서백리아(西伯利亞) 돌궐(突厥)’족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올량합(兀良哈)은 자칭(自稱) ‘산림부락(山林部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대(古代)에는 ‘초원백성(草原百姓)’으로 불렸다고 하였다.
➨ 즉(卽) 오늘날의 〈‘서백리아(西伯利亞)=서(西)시베리아 분지(盆地)’와 ‘아이태산(阿爾泰山)과 준갈이분지(準喝爾盆地)’, ‘아이태공화국(阿爾泰共和國) 등지(等地)’ 및 ‘당노산맥(唐努山脈)과 그 북(北)쪽 땅의 산림지대(山林地帶)에서 살던 부족(部族)’〉이라고 설명(說明)한다.
➊- 2) 여기서 또 “와랄(瓦剌)과 타안(朶顏)”은 「草原百姓=林中百姓」등으로 불렸는데, 와랄(瓦剌) 또한 “와랄(瓦剌)”이라는 본래(本來)의 뜻은, “산림지민(森林之民)이란 뜻이자, 그 가까운 곳에 사는 자(者)들을 의미(意味)한다”고 하였다.
곧 “와랄(瓦剌)이나 타안(朶顏)이나 그 부락(部落)이 그 부락(部落)이라는 뜻이다. 같은 부족(部族)”이라는 뜻이다.
이들 ‘타안(朶顏)·태녕(泰寧)·복여(福餘)’의 삼위(三衛)는, 와랄(瓦剌)과 함께 달단(韃靼)의 동(東)쪽에 있었다고 하였다. 아래의 원문(原文)은 참고자료(參考資料)이다. [出處 :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烏梁海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烏梁海(蒙古語:胡ᠤᠷᠢᠶᠠᠩᠬᠠᠢ 托ᡇᠷᠠᡃᡊᡍᠠᡅ,中蒙胡都木文轉寫:Uriyangxai,中蒙托忒文轉寫:Uraːngxai;阿爾泰語:Ураҥкай,羅馬化:Uraŋk̂ay;圖瓦語:Урааңкай/Урянхай,羅馬化:Uraaŋk̂ay/Urʸanxay;Russia Buriat:Уряанхай,羅馬化:Urʸaaŋxai;雅庫特語:Урааҥхайдар,羅馬化:Uraaŋk̂aydar),舊稱斡朗改、兀良哈,學者普遍認為《遼史》中出現的「嗢娘罕」就是「烏梁海」。[1]其概念源於《蒙古秘史》傳說中一個居於森林的北方部族布里亞特,之後蒙古人使用了此名稱概括所有被其視為「林中百姓」(蒙古語:ойн иргэн,轉寫:hoi-yin irgen)的族群,大致相當於今天的圖瓦人、雅庫特人和布里亞特人等「西伯利亞突厥」(但不是西伯利亞汗國的突厥),或唐代的木馬突厥。
據伊兒汗國宰相拉施德丁所述,十三世紀時西伯利亞(再精確而言為圖瓦共和國與阿爾泰共和國一帶)有一封閉部落,以滑雪板行走雪原並以樺皮木屋為居,且以狩獵及養鹿為生,與一般居於蒙古包、於草原上游牧為生的蒙古部落大異其趣。
此名稱源於蒙古人早年黃金家族的孛端察兒曾征服一支以兀良哈自稱的森林部落。亦被蒙古人列入迭列斤族裔之一。此外,明朝時期分立於韃靼及瓦剌之外、位於韃靼東部的蒙古部落兀良哈亦與其同名,起名自最初的主要起源之一,然而除此之外並沒有直接關聯。
其中唐努烏梁海一帶的講突厥語的烏梁海人在中國明代時先是西蒙古(瓦剌)的一部,後被東蒙古(韃靼)方面的達延汗征服,成為喀爾喀部北部的一部分。1757年清朝打敗準噶爾後,把他們分為三部:唐努烏梁海、阿爾泰烏梁海、阿爾泰諾爾烏梁海。
※ 瓦剌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瓦剌(蒙古語:ᠣᠢᠷᠠᠳ,漢語拼音字母:Ôird (Ô̈ô̈rd),東部標準音:[œːrd],衛拉特(新疆)方言:[øːrd],中蒙通用轉寫:Oirad;衛拉特蒙古語:ᡆᡅᠷᠠᡑ Oirad,現代音Өөрд Öörd;衛拉特突厥語:ОйротOyrot)是位於蒙古高原西部的部族,元代稱斡亦剌惕、明朝稱瓦剌(Wǎlà/Wǎlā)、清代稱衛拉特或「厄魯特」等,意即居住於大漠(戈壁沙漠)以西的部族。其實瓦剌是oira衛拉的漢語俗稱,t特是複數詞。
歷史上蒙古高原的民族由兩個基本部分組成,在古代兩分為「草原百姓」(以傳統游牧的蒙古族為主)和「林中百姓」(包括斡亦剌惕、不里牙惕等森林部族),到後來主要為東部蒙古(中央蒙古)和西部地區(以瓦剌為主)。「瓦剌」的意思是「森林之民」或「鄰近者」.
瓦剌人通常自稱衛拉特人而非蒙古人,由於與週鄰突厥系諸部長期影響讓西部蒙古的瓦剌也有突厥化的跡象,讓瓦剌跟東部蒙古諸部更加不同。在1640年9月蒙古喀爾喀部和衛拉特的領導們制定的《喀爾喀—衛拉特法典》條款就稱雙方為「蒙古和衛拉特」。
起源 : 瓦剌先世為「斡亦剌惕」。原居住於葉尼塞河上游八河地區。過著以狩獵為主、輔以漁牧的生活,為「林中百姓」的一部分。人數眾多分成許多分支,各有其名。屬獨立系族之一,但由於與週鄰突厥系諸部長期交錯雜居,在語言等方面又具有突厥系的某些特點。瓦剌有四大部或四萬戶,其中包括許多古老的蒙古語部落和突厥語部落。
成吉思汗立國時,斡亦剌惕的首領忽都合別乞領有四千戶。與成吉思汗的黃金家族有世婚關係,在蒙古國中一直享有「親視諸王」的特殊地位。14世紀時,以元朝皇室衰微,遂乘機擴大實力,積極參予各派系紛爭。[인용(引用) / 끝]
【필자(筆者) 주(註) : 斡亦剌惕(알역랄척) : 是位於蒙古高原西部的部族이라 하였으며, 元代稱斡亦剌惕、明朝稱瓦剌[Wǎlà/Wǎlā]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였다. 곧 몽고고원(蒙古高原)[오늘날의 몽고고원(蒙古高原)을 말하는 것이 아닌 본래(本來)의 것을 말한다]의 서(西)쪽 부족(部族)으로 원대(元代)에는 알억랄적(斡亦剌惕)으로 불렸고, 명(明) 때는 와랄(瓦剌)이라 칭했다.】
➤ 그렇다면 고황제(高皇帝)가 설치(設置)한 본래(本來)의 “타안위(朶顏衛)”는 『오늘날의 열하지대(熱河地帶)【북경(北京) 동북방(東北方) 420리】에서 서(西)쪽으로 3,200-3,500km 이상(以上) 이동(移動)하여 키르기스스탄[Kyrgyzstan]의 동(東)쪽 지대(地帶)로【이식쿨호수[Issyk Kul, 湖水…熱海…亦吉里寬…溫暖한 호수(湖水)가 있다.】 옮겨져야 마땅한 것이다.』
즉 ’삼위(三衛)의 땅‘은 :『신강(新疆) 서부(西部) 접경지대(接境地帶)로부터 키르기스스탄[Kyrgyzstan]과 카자흐스탄[Kazakhstan] 발하슈호【Balkhash, 湖=파이객십호(巴爾喀什湖)】 남부(南部)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포함(包含)하는 땅이다.
➤➤➤ 『그중에서 “타안위(朶顏衛)”의 땅은 이식쿨호수[Issyk Kul, 湖水= 熱海= 亦吉里寬= 溫暖한 호수(湖水)]가 있는 땅으로, 북(北)으로는 알마티[Almaty]가 있고, 서(西)쪽으로는 비슈케크[Bishkek], 타슈켄트[ Tashkent]가 있으며, 서남(西南)쪽으로 페르가나[Fergana], 사마르칸트[Samarkand], 두샨베[Dushanbe]가 있다.
※ 사진(지도) 출처 : 위키백과
➋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의 땅은, 당(唐)나라 때의 토곡혼(吐谷渾)의 땅이었다』하였다.
『토곡혼(吐谷渾)』에 대한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의 설명에 따르면 : 「서진(西晉)으로부터 당(唐) 때에까지 기련산맥(祁連山脈)과 황하(黃河) 상류(上流) 청해(靑海) 일대(一帶)에 있었던 고대국가(古代國家)』라고 하였는데, 강(羌) 및 장족(藏族)과 통혼(通婚)하여, 세력(勢力)을 넓히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열하(熱河) 땅‘이 “토곡혼(吐谷渾)의 땅”이었다고 한다면 : “열하(熱河)는 기련산맥(祁連山脈)과 청해(靑海) 또는 신강(新彊) 땅에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명사(明史)”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토곡혼(吐谷渾)의 땅은 한(漢)때의 선비(鮮卑) 땅”이라고 하였다. 『선비(鮮卑)는 고구려(高駒驪)의 북(北)쪽과 서(西)쪽에 있었던 부족(部族)들이므로 이들이 오늘날의 “기련산맥(祁連山脈)과 황하(黃河) 상류(上流) 청해(靑海) 일대(一帶)”에 있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큰 오류(誤謬)요,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의 기련산맥(祁連山脈)·황하(黃河) 상류(上流)·청해(靑海) 일대(一帶)의 동(東)쪽과 남(南)쪽에 고구려(高駒驪)가 있어야 한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올바른 것이 된다. 또
『토곡혼(吐谷渾)의 땅』은, 『흑룡강(黑龍江)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 땅이며, 한(漢) 시대(時代)의 선비(鮮卑) 땅이고, 송(宋) 대(代)의 글란(契丹)의 땅이었으며, 원(元) 대(代)의 대녕로(大寧路) 북(北)쪽 지경(地境)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고황제(高皇帝)의 삼위(三衛) 땅으로 이동(移動)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또 토곡혼(吐谷渾)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원래(原來)의 곳으로 돌려놓아도 역시(亦是) 고구려(高駒驪)와는 접경(接境)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선비(鮮卑)‘ 부족(部族)이기 때문이다.
토곡혼(吐谷渾)에 대한 사실(史實)은, 재정리(再整理)가 필수(必須)적으로 선행(先行)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 吐谷渾 : 吐谷ˋ渾(中古漢語擬音:tʰuoX jɨok ɦuən),也稱退渾,是西晉至唐朝時期位於祁連山脈和黃河上游谷地(今青海)的一個民族與古代國家。其先祖是鮮卑慕容部,語言為古代蒙古語中的一個鮮卑語支系,移居至青海後,與羌族、藏族及漢族通婚。因其統治地區位於黃河以南,統治者又被封為「河南王」,因此被南朝稱為河南國或河南,後不復見[1]。公元663年被吐蕃征服,但其世襲王室汗族仍保留,與唐朝作戰中成為吐蕃軍隊的重要來源,一部分東遷到唐朝,原部或者一直到公元9世紀才在今青海省境內消失。
➨➨➨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의 땅에 삼위(三衛)를 두었고, 삼위(三衛) 중의 하나가 “타안(朶顏)”이라고 했을 때, 이곳 땅이 『당(唐) 때의 토곡혼(吐谷渾) 땅이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토곡혼(吐谷渾) 설명(說明)‘은, 수천(數千) 리 동남(東南)쪽으로 이동(移動)시킨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把握)할 수 있게 된다. 즉(卽),
21세기(世紀)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본래(本來)의 토곡혼(吐谷渾) 땅은, 곧 〈러시아(Russia) 우랄산맥(Ural, 山脈) 동남(東南), 신강(新疆) 서(西), 카자흐스탄[Kazakhstan]의 발하슈호[Balkhash, 湖=파이객십호(巴爾喀什湖)] 남(南)쪽으로부터 ∼ 동남(東南)쪽으로 ’3 천리(千里)‘ 정도(程度)를 이동(移動)시켰다.〉라는 것을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토곡혼(吐谷渾) 북방(北方)의 ’청해(靑海)‘라는 말은 곧 발하슈호[Balkhash, 湖=파이객십호(巴爾喀什湖)]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 “타안위(朶顏衛)”의 땅으로 알아보면 : “열하(熱河) 땅”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일만(一萬) 리 서(西)쪽 땅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몽고(蒙古)가 쇠퇴(衰退)한 뒤로 산재(散在)해 남(南)쪽으로, 동남(東南)쪽으로 흩어져 살았다고 한 것을 보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新彊) 사이의 땅에서 살았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여기서 당시의 고황제(高皇帝)가 홍무(洪武) 22년[서력(西曆) 1,389년]에 두었다는 삼위(三衛)의 땅은, 〈러시아(Russia) 우랄산맥(ural, 山脈) 동남(東南),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新疆)의 경계(境界) 땅과 당노산맥(唐努山脈) 주변일대(周邊一帶)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중에서도 『“복여(福餘)”는 “옛 부여(夫餘)의 땅이었다”』고 하였으니, 본래(本來)의 부여(夫餘)는 : 『우랄산맥(ural, 山脈) 남부(南部)+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北方)』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타안위(朶顏衛)·태녕위(泰寧衛)·복여위(福餘衛)” 등은, 역시(亦是) 이 지방(地方)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고,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북방(北方)이나 동북방(東北方) 땅에 없었다는 것을 확인(確認)할 수 있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 『열하(熱河)의 땅』은, “4가지” 핵심조건(核心條件)을 충족(充足)시켜야 한다. 즉(卽)『열하(熱河)의 땅』은 : 〈➀ 설해(雪海)【피서산장(避暑山莊) : 고산지대(高山地帶)의 적설(積雪)이 녹아 흐르는 땅】가 있어야 하고, ➁ 열해(熱海)【온천(溫泉) : 기온(氣溫)이 온화(溫和)한 땅과 지열(地熱)이 흐르는 땅】가 있어야 하며, 이곳은 ➂ 명(明) 때의 “타안위(朶顏衛)의 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➃『’북경(北京)=연경(燕京) 동북(東北) 420리에 열하(熱河)의 땅이 있다‘고 하였으니, ’서남(西南) 420리에 북경(北京)=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또 여기서 북경(北京)은, 〈청(淸)의 도성(都城)이었고, 전(前) 왕조(王朝) “명(明)”의 북경(北京)이어야 맞는 말이자. 요(遼)와 금(金)의 도성(都城)이자 옛 고대국가(古代國家)였던 연(燕)의 도성(都城) “연경(燕京)”이어야 한다.〉
➤➤➤ 위에서 언급(言及)한 몇 가지 조건(條件)들을 무시(無視)한 “북경(北京)” 설(說)은,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이야기로 근거(根據) 없는 이야기로 치부(置簿)될 수밖에 없다.
○ 『타안위(朶顏衛)를 포함(包含)한 삼위(三衛)의 땅【고황제(高皇帝)가 홍무(洪武) 22년[서력(西曆) 1,389년]에 두었다는 삼위(三衛)의 땅】은,
〈러시아(Russia) 우랄산맥(ural, 山脈) 동남(東南)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新疆) 접경지대(接境地帶), 당노산맥(唐努山脈) 주변일대(周邊一帶)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 이런 곳에 ’열하(熱河)의 땅‘이 있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북방(東北方) 420리(里)에 있다는 열하(熱河)의 땅은 짝퉁이며, 조작(造作)된 땅이름(地名)일 뿐이다.〉
그곳엔 “열해(熱海)도 없고, 설해(雪海)”도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연(燕)나라니, 한(漢)이니, 요(遼)니, 금(金)이니, 원(元)이니, 명(明)이니, 청(淸)이니 하는 나라니 하는 왕조(王朝)들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에 없었다.』는 것이자. 그 증거(證據)인 셈이다.
이러한 몇 가지 조건(條件)들을 참고(參考)하면서, ’열하(熱河) 땅‘을 찾아보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왜 “대륙조선(大陸朝鮮)”이라고 하는지를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1편 /끝]
2023년 08월 13일 [글쓴이 : 문무(文武)